설교와 하나님 나라

조회 수 4994 추천 수 83 2004.07.12 00:23:46
신학단상(25)      

설교와 하나님의 나라  

요즘 각광받고 있는 설교 유형인 강해설교는 군더더기를 최대한 제거하고 순전히 성서 말씀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일단 바람직한 설교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기존의 설교가 지나치게 교회 성장에 치우친 설교였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부담을 주었지만 강해설교는 비교적 그런 부분들을 축소시키고 청중들을 성서 말씀과 직접 만나게 하는데 중심 무게를 두었기 때문에 청중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런 강해설교의 초점은 구원론에 있다. 물론 모든 설교가 인간의 구원을 지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비교적 약간 느슨한 상태인 반면에 강해설교는 그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강해설교의 구원론적 토대가 기존의 설교에서 볼 수 있는 교회 중심성을 어느 정도 극복하기는 했지만 설교가 지향해야 할 근본적인 방향을 확보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설교의 무늬는 권위적인 데서 탈권위로, 율법적인 데서 은총의 구조로 바뀐 것 같지만 그 설교의 실질은 여전히 어떤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모든 설교가 지향해야 할, 그리고 모든 설교의 실질(實質)이어야 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일반적으로 강해 설교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한 바른 해석이 거의 없거나 결정적으로 부족하다. 물론 이 하나님 나라 문제는 강해설교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모든 설교의 중심이다.
작년에 '높은뜻 숭의교회'의 김동호 목사가 15회에 걸쳐서 '천국의 열쇠'라는 연속설교를 한 적이 있다. 그가 수백 번이나 '천국'이라는 단어를 언급했지만 그 천국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단지 우리는 믿음으로 천국을 가며, 믿음으로 천국의 열쇠를 받고, 그 열쇠로 살아있는 동안에 천국의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는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하나는 청중들이 천국을 이미 알고있을 것으로 전제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거꾸로 김 목사 자신이 천국을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분은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아직 우리에게 결정론적으로 인식되는 게 아니라 여전히 계시의 과정에 있듯이 우리의 삶과 세계 안에서 변증되어야 할 하나님의 존재론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확보된 어떤 형태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설교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다룰 때 결정적인 요소는 두 가지인데,우선 성서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증언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하는 작업이다. 하나님 나라라는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고 있는 예수님의 비유가 그렇게 다양하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성서 자체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결정적인 대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예수님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적인 아버지의 사랑으로, 불의한 재판관을 조르고 있는 과부의 애끓는 하소연으로, 이 세상의 경제원칙을 허무는 포도원 주인으로,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구약의 예언자들에 의하면 사회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 양과 사자가 함께 뒹구는 세계로 표현된다. 과연 이런 다양한 성서의 진술이 말하려는 하나님 나라의 실질은 무엇일까? 성서가 담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리얼리티를 이해하려는 가열찬 노력 없이 막연하게 추정하고 설교하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또 하나의 다른 요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늘 우리의 해석이다. 이는 곧 성서 시대의 개념과 언어로 진술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를 단순히 규범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해석학적으로 접근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성서 시대의 사람들에 비해서 이 세계와 역사에 대해서 약간이라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진리 경험의 지평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성서 기자들보다 근원적인 면에서 영적으로 더 성숙 하다거나 진리에 훨씬 가깝게 접근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들에 비해서 오늘 우리가 생명에 대한 정보를 좀더 알고 있다는, 또는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현대인들에게는 일종의 방언처럼 들릴 수밖에 없는 성서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오늘 우리의 언어로 통역해주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일반적으로 오늘의 설교자들은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놓치고 대신 지엽적인 문제에 빠져든다. 기존의 설교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교회와 거의 동일시하는 반면에 강해 설교자들은 개인의 영적인 감수성 안에 축소시키고 말았다. 하나님의 나라가 곧 하나님의 통치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개인의 경건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한, 즉 개인적 신앙생활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삶 전반에서 작동하는 생명의 힘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이 인간의 삶에는 개인의 사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국제관계를 비롯해서 역사 전반이 해당된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역사 전반에 하나님이 어떻게 통치하시는지 성서와 오늘의 인문학적 토대에 근거해서 설명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잘 믿고 구원받고, 축복 받고, 기쁘게 사는 것만 교리문답 식으로 전하고 만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 나라의 우주적 지평을 놓침으로써 기독교 신자들을 신앙 이기주의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빚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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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8.12 17:57:36

설교와 하나님 나라?
감춰진 하나님 나라를 은밀히 맛볼수 있는 기쁨을 누려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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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08.12 18:01:39

새하늘 님은
오늘 하루 종일 다비아 구석구석을 누비고 계시는군요.
졸고를 그렇게 읽어주시다니, 감사드립니다.
이제 다비아에 새하늘이 열리려나 봅니다.
편안한 주일 오후!

[레벨:18]은나라

2016.06.27 11:52:35

목사님의 인문학적 토대를 따라가다보면..

하나님나라의 신비, 사랑, 은혜를 충만하게 경험하게 될까요?

지금은 아주 조금씩이지만, 언젠가는 흘러넘치는 경험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래서 그 넘치는 은혜를 또 나누어주고요.. 제게도 그런날이 올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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