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철학

조회 수 5021 추천 수 67 2004.11.10 23:49:55
신학과 철학

신학과 철학 중에서 어떤 쪽이 기독교 전통에 가까울까? 대개의 사람들은 ‘두 말하면 잔소리’라는 식으로 신학이 기독교의 전통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생각은 반쯤만 옳다. 원래 신학(神學)이라는 용어는 플라톤에 의해서 최초로 사용되었는데, 그 당시에 이 신학은 ‘신화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신학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철학(哲學)에 기울어져 있었다. 철학은 신화처럼 허황한 이야기를 진리론적인 차원에서 검증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기독교를 진리로 생각했던 교부들은 기독교야말로 가장 참된 철학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는 신학이라는 용어를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해서 받아들임으로써, 이제 신학은 철학에 의해서 그 토대가 검증받아야 할 신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철학 중에서 가장 확실한 철학으로서의 자리를 다지게 되었다.
오늘의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철학을 기독교 신학과 대립되는 학문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서 인용되는 대표적인 교부가 터툴리안인데, 그는 “아테네는 예루살렘과 함께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 아카데미는 교회와 함께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루터 역시 철학적인 이성을 창녀라는 극단적인 말로 표현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터툴리안도 스토아 철학을 받아들였으며, 자신을 가리켜 오캄주의자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 루터 역시 로마 가톨릭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비난했을 뿐이다. 우리는 교부들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독교 신학이 철학과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보았다는 증거를 찾기 힘들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플라톤의 철학 안에 삼위일체론이 내재되어 있다고까지 언급한 어거스틴에게서 볼 수 있듯이 신학은 철학과 도반(道伴)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학과 철학 사이에 역사적으로 전개된 이런 깊은 연관성은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 하나님의 역사가 곧 사랑의 세계라고 본 헤겔 이후에 위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에 의해서 새롭게 전개된 인간 중심적 세계관, 그리고 다윈과 파블로 같은 이들에 의해서 발전된 생물학적 인간론은 신학으로 하여금 더 이상 이 세상의 학문과 길동무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현상은 교회 외부의 인간학적 착상에도 그 원인이 있겠지만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기독교 내부의 원인이 훨씬 크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제기한 지동설을 학문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종교적 권위로 억압하던 교회가 그 이후의 모든 학문을 향해서도 똑같은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불신 당하게 된 것이다. 이런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 쉴라이에르마허 같은 학자는 기독교 신앙을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규정했으며, 리츨은 칸트의 영향을 받아 ‘윤리적 요청’에서 하나님의 존재 가능성을 확보해보려고 했지만 그런 정도로는 신학과 철학의 관계가 복원되기 어려웠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남보다 못한 관계로 발전했다.
오늘 기독교 신학이 처한 형편은 어떤가? 1921년 ‘로마서 주석’ 2판을 펴낸 칼 바르트는 기독교 교부 시대에 있었던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복원하는 것보다는 성서와 기독교 2천년 역사적 전통에 집중함으로써 기독교 신학의 내적 정당성을 마련해보려고 했다. 바르트와 쌍벽을 이루는 루돌프 불트만은 실존철학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신앙적 실존을 기독교 신학의 토대로 삼아보려고 했다. 바르트 신학을 말씀 객관주의라고 한다면 불트만 신학은 말씀 주관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들에 의해서 20세기 전반부 개신교 신학이 지배당했다.  
이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의 기독교 운동과 신학은 양극단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한쪽은 이 역사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해방신학이며, 다른 한쪽은 여전히 개인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구원에만 천착하는 근본주의신학이다. 물론 이 양 극단 사이의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그 여러 갈래를 여기서 모두 설명하기 힘들지만 거칠게 윤관만 잡아서 본다면 다음과 같이 두 경향으로 구획 정리할 수 있다. 전자는 사회, 역사, 혁명이, 후자는 개인, 도덕성, 개량이 그 중심축으로 작용하다. 이들이 사회와 교회, 역사와 실존이라는 양 극단으로 구별되어 있지만 철학과의 대화에 성실하지 못하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물론 넓게 보면 해방신학은 마르크시즘에, 근본주의는 케인즈와 막스 베버의 경제철학과 선을 대고 있지만 교회 현장에서, 특히 설교 현장에서 그런 철학적 치열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여기서 해방신학적 전통과 근본주의적 전통을 싸잡아 철학의 부재라고 비판하는 것은 물론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다. 해방신학적 전통은 경우에 따라 기계적이고 낙관주의적인 역사관에 빠지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사의 신비를 향한 영성이 탄탄하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와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부들과 지난 2천년간의 기독교 신학자들이 철학과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그리고 오늘 우리도 여전히 그런 전통을 유지해야만 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도그마가 보편적 진리로서 손색이 없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런 보편적 진리의 지평을 확보하기 위해서 가장 적절한 도구가 바로 철학이라는 사실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은 단지 역사에 등장했던 구체적인 사조로서의 철학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과 역사의 리얼리티를 해명하려는 모든 인문학적이고 자연과학적인 담론을 일컫는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이 세계를 창조하고 예수 사건을 야기했으며, 종말을 완성하실 하나님, 그리고 이 세상을 끌어가는 생명의 영인 성령을 훨씬 적절하게 변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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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2007.03.16 20:04:45

오캄주의가 뭐에여? 다음 네이버 검색해도 간접적으론 나오는데 딱히 뭐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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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03.16 23:35:12

오캄주의의 속내는 나도 잘 몰라요.
철학사전에서 <오캄>을 찾아볼래요?

[레벨:1]아직초짜

2007.03.17 00:17:43

유명론을 찾아서 읽어보면 이해가 될거예요.
이들은 실재론의 반대편에 선 철학유파들인데요
우선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 전이해가 도움이 될거예요.
보편이 실재하는가 이름뿐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철학자들간의 논쟁을 한 적이 있어요.
예를 들면, 정용섭, 이신건, 신완식은 하나의 실존하는 인물로서 개체라는 건 다 아는데
이들을 뭉뚱그려 <사람>이라고 부르지요.
이때 <사람>은 실재하는가 아니면 정신안에 관념인가 하는 문제예요.
여기서 <사람>이 실재한다고 보는 입장이 실재론자들이고,
<사람>은 정신안에 관념적인 이름으로만 존재할 뿐이라고 보는 입장이
유명론자들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당시에 유명론자의 주장을 따르면
인간의 인식으로 포착할 수 없고 감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성서의 초월적 하나님이나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두 부정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배척을 받았답니다.
옥캄은 유명론자예요. 쉽게 말하면
실재론자들은 관념의 세계나 이데아의 세계를 인정하는 쪽이고
유명론자들은 그런 것들은 다 이름뿐이고 실체가 없다고 보는 쪽이예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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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2007.03.17 13:38:06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정목사님의 솔직한 답변도 감사하구요 ㅎㅎ......
오타인듯 합니다
밑에서 두번째 문단 세째줄 "윤관만"
바로 밑줄 "작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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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8.13 21:15:39

신학과 철학?
서로 상반된 관계로 가는 듯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도움이 된다고 본다.
철학으로 객관화된 이성으로만 신을 본다고 하면 회의론에 빠지기 쉽지 않을까?
신을 이해하기 위해 철학적인 면으로 다가간다면 좀더 규명 짓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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