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절

조회 수 4687 추천 수 69 2004.12.06 13:52:03
대강절

교회력의 시작인 대강절 첫 주일이 금년에는 11월28일에 시작되었다. 예수님이 오셨던 성탄절 직전 주일로부터 거꾸로 계산해서 네 주일 전이 바로 대강절 첫 주일이다. 이런 계산법으로 볼 때 교회의 절기는 이 세상의 절기에 비해서 대략 한 달가량 앞서 나가는 셈이다. 초림(初臨)한 예수님을 기억하고, 재림(再臨)할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인 대강절의 실질적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은 삶의 의미를 성찰하지 않은 채 오직 삶의 외형만을 확장하는 데 마음을 쏟고 있는 이 시대의 현상과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대강절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부활, 영생 등, 기독교의 도그마는 오랜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다층적 내용과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것들을 충분하게 해석하지 않는다면 기독교 교리는 형해화하고 말 것이다.
오늘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자. 물론 이 성육신 사건에 대해서도 우리가 생각할 거리가 많기는 하지만 대강절이 궁극적으로는 재림에 관계된 것이니까 이것에 집중하도록 하자. 우리가 예수의 재림에 관한 신앙고백을 설명하려면 우선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에 대해서 질문해야 할 것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그리고 사도신경의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삶을 끝내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한다. ‘승천’ 사건에서 그 하늘은 우주 공간의 한 장소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대인들은 우주를 하늘과 땅과 지하라는 세층의 구조로 생각했기 때문에 승천 사건이 곧 공간적인 의미에서 하늘로의 자리 옮김이라고 보았을지 모르지만 현대 물리학을 인정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초기 기독교의 신앙적 진술은 우주물리학적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서 발생한 오류라는 말인가? 물론 아무리 성서와 신조의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 역사적인 한계를 노출시킬 수밖에 없지만 성서와 신조가 근본적으로 그런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것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야만 할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 전승에 참여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들이 아직 파악할 수 없는 훨씬 근원적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세계를 곧 ‘하늘’이라는 그 당시의 용어로 설명하고자 했다. 그 하늘은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로서 인간의 인식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이다. 이런 점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고백된 예수님의 승천은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하늘이라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은폐되어 있는 궁극적 생명의 세계에 대한 일종의 ‘신화적’ 표현 방식이다.
이 진술에서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표현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대개 고대의 왕국에서 왕의 오른편은 서열 2위인 자에게 돌아가는 자리였다. 이런 표상이 일반화되어 있던 그 당시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있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예수님이 앉아계시다고 표현한 것은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벽하게 하나를 이루신 분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제 그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있던 예수님이 다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오신다고 믿는다. 그런데 원래 초기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하긴 했겠지만 이것은 이 재림 신앙이 심층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역사적 재림이 지연되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여러 방식으로 해석하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교회의 출현이 곧 그의 재림이라거나, 또는 성만찬에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식의 해석이 그것이다. 이런 재림신앙이 극단적으로 왜곡되는 경우에는 전도관이나 통일교처럼 자신들의 교주를 재림한 메시아로 부각시키거나, 또는 1992년 한국교회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다미선교회’처럼 시한부 종말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강절 신앙의 리얼리티는 무엇일까?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부활하신 역사적 예수가 우리에게 다시 오신다는 약속의 핵심은 부활 사건으로 선취된 생명의 완성이 역사를 뚫고 (초월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에 있다. 유전자 공학이나 복지 향상을 통한 인간 삶은 그것이 아무리 극단적으로 전개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인 생명을 생산해낼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사도신경 전승에 참여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역사를 단절시키고 개입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 생명의 완성은 재림할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을 전제한다. 역사적 예수가 바로 이 세계를 판단하는 궁극적 준거가 된다는 말이다.
첨단의 과학과 기술이 지배하는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지성인들은 이런 대강절 신앙을 단지 기독교의 비현실적 종교 심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거꾸로 교회 안의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헌신에 대한 보상의 수단으로 대강절 신앙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대강절 신앙에 대한 우리의 선포가 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본적으로는 예수의 재림에 관한 그분의 약속을 성서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해명해야 하며, 더 나아가서 역사의 종말과 생명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긴밀하게 소통될 수 있도록 기독교의 해석학적 작업을 보편적 진리의 지평에서 꾸준하게 밀고 나가야 할 것이다. 신학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많은 과업을 안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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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8.14 02:03:45

대강절(待降節 )?
종말론적 신앙관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림이라고 정리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 교회에서는 교회절기를 지켜지지 않는것 같다.
여하간에 정목사님의 말씀대로 개인적인 신앙체험보다는 교회의 절기가 더 우선시 해야 된다는 것에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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