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조회 수 5566 추천 수 56 2005.02.25 15:05:17
죄?!

많은 기독교인들이 죄로부터 구원받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들이 말하는 죄는 무엇이며, 죄인은 어떤 사람일까?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탕자’를 가장 대표적인 죄인의 모습이라고 보는지 모르겠다.
소위 ‘탕자’는 유산을 당겨 쓴 사람이다.
독립적으로 살아보려는 생각이 많은 탓인지,
아니면 자기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결국 유산을 탕진하고 빈손으로 돌아온다.
그는 무슨 죄를 범한 것일까?
우리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이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가능하겠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말씀하려는 게 아니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을 말씀하시려는 것이었다.
비록 우리가 탕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는 여전히 그에게 희망을 걸어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런 사람들만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팔복의 가르침에서도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은
곧 가난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근본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성서의 근본은 하나님, 그의 사랑, 그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기다림과 희망이다.
이런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성서는 죄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지
죄 자체는 성서의 구성요소가 아니다.
그 이유는 성서의 본질적이고 깊은 뜻을 찾기 전에 이미 인문학적으로 분명하다.
혹은 성서의 가르침과 비교해서도 역시 분명하다.
우리는 아직 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다.
물론 신학적 개념과 경험적인 현장에서 무언가를 말할 수는 있다.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는 것,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곧 죄다.
교부들의 말을 빌리면 교만, 자기 사랑이 죄다.
그런데 이런 신학적 개념을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확인하기는 그의 불가능하다.
예컨대 십계명에서는 이웃에게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했다.
물론 이런 계명은 유대인들의 생활 풍습과 연관된 것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웃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말라는,
없었던 일을 있었던 것처럼, 혹은 그 반대의 증언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역감정이라든지
경제학자들의 잘못된 경제이론은 모두가 이런 죄에 해당된다.
탈북자들이 지금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
북한에 대해서 적개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 그런 정치인, 교수, 종교인들은
넓은 의미에서 거짓 증거 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내가 말하려는 것은 한국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이데올로기의 왜곡이 아니다.
성서의 죄 개념이 우리의 현실에서는 그렇게 한 두 마다로 결정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충분하게 배경에 두지 않으면서 죄를 말하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할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구를 욕하는 것이 이미 살인이나 진배없다고 했다..
이 말은 곧 어느 누구도 이웃과의 관계에서 완벽하게 선을 행할 수 없다는,
혹은 끊임없이 악을 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조금 더 근본적인 차원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아무런 말을 할 게 없다.
현재와 같은 생태 파괴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이,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소위 ‘글로벌’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이 죄를 구분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물론 거짓말이라든지 파렴치한 행동이라든지, 강력범죄를 죄라고 볼 수 있다.
이 문제도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 강력 범죄만 보자.
가정과 사회를 파괴하는 조폭들의 행위를 우리가 옹호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만
그런 행위들이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인간이라는 종이 이 지구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거쳐 왔던 삶의 한 패턴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문제는 한 개인의 잘잘못보다는 인류학이나 종족학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오해할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좀 조심스럽기는 하다.
성서의 죄론을 인류학으로 대치시킨다고 말이다.
성서가 말하는 죄의 문제와 인류학이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게 아니니까
혹은 전혀 다른 게 아니니까 우리는 가능한대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데서부터
논의의 물꼬를 터나가야지 어떤 도그마에서 출발하면 곁길로 빠지기 쉽다.
조폭들의 행동이 인류학적인 배경에서 전개된다는 사실은
그들과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부시 정부가 거의 비슷한 범죄 심리학적 구조대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확인될 수 있다.
이런 문제는 범죄 심리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언급해야 할 부분이긴 하지만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눈에 보인다.
부시도 이라크 전쟁이 합법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의 전쟁을 합리화했을 뿐이다.
민족주의, 또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조폭들도 역시 자신들의 집단적 이익을 위해서 폭력을 행사할 뿐이다.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피해를 보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간혹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고 설교하는 분들을 본다.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고 세상이 기독교를 판단한다고 주장한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성서도 그런 뜻으로 진술된 부분이 적지 않다.
예언자들의 설교나 바울의 서신들도 역시 불의한 삶에 대한 경고를,
그리고 의롭고 바른 삶을 채근한다.
그러나 그런 진술들은 그들 시대에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노력이었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해명은 아니었다.
성서가 줄기차게 포착하려는 것은 죄라는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계시, 그의 구원행위였다.
하나님은 죄인까지 구원하신다는 게 복음의 핵심이다.
좀더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왜 죄를 짓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피상적으로는 알지만 근본적으로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창세기는 선악과와 카인이라는 설화를 통해서 그 기원을 말할 뿐이지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성서의 기본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죄를 뛰어넘어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흡사 전쟁의 신처럼 묘사된 부분이 적지 않다.
아이 성을 칠 때 민간인까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하나님이 내리신다.
이게 말이 될까?
성서는 인간이 얼마나 정직하고 윤리적으로 사는가에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
무의미한 이 삶에서, 그렇기 때문에 폭력적으로 자기를 성취해나가는 이 삶에서
방향을 돌려 영원한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에게 궁극적인 관심을 둔다.
바로 이 대목에서 죄는 우리가 도저히 해명해낼 수 없는 숙명적인 요소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극복될 수밖에 없는 현실들라는 게 바로 성서의 기본적 죄 이해이다.
우리 스스로 극복한다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극복된다.
그 사실을 내다본 사람은 그것이 극복된 상태의 삶을 향해서 최선으로 살아갈 뿐이다.
더 나아가서 선을 위해서 최선으로 살아갈 뿐이다.
물론 이 선이라는 것도 아직 우리가 잘 알지는 못한다.
다만 우리가 선이라고 생각할 뿐이지 그것이 궁극적으로 옳은지 아닌지 모른다.
우리의 교만일 수도 있고, 우리의 착각일 수도 있다.
우리가 치열하게 선을 추구하면 살아간다고 해서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그 죄를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죽어야 죄에서 벗어난다.
그때까지는 루터가 말했듯이 죄인이면서 의인이고, 의인이면서 죄인이다.
의인인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인정받았다는 데 있다.
실제로 의인이 아니라 단지 법적으로 그렇다.
실제로는 여전히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죽지 않는 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서 내가 어떤 죄의 숙명주의를 말하려는 건 아니다.
우리가 성자의 경지에 올라갔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말과 행동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악하게 작동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우리의 숙명이다.

복음은 죄론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와 사랑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신비와 사랑을 추상적으로만 접근하니까 문제이지
보편적 해석학에 근거해서 접근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복음의 구원을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달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죄 문제가 다루어진다.
그것은 인간을 죄의식에 빠지게 하는 게 아니라
그 죄의 실상, 그 현상을 정확하게 뚫어보면서
그것을 뛰어넘어, 혹은 그것을 관통해서,
흡사 검은 구름 사이로 내리꽂히는 햇살처럼 다가오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비 앞에서 충격을 받고 생명의 충만함을 느끼게 한다.
어떤 사람은 죄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낌으로써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절실하게 받는 거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18,19세기에 기독교의 중심을 이루었던 이런 죄의식에 근거한 신앙은
좋게 보아서 그 시대에 한정적으로 필요했던 가르침인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성서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복음이 늘 시대와 대화해야 한다는 점에서 보더라도
이 시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다.
사람에게는 무의식적으로 죄에 대한 불안감이 있기 때문에
죄의식을 자극하는 방식의 설교가 먹히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명력을 부정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적지 않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 사랑, 은혜가 어떻게 우리의 유한한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
훨씬 보편적 지평에서 사람들에게 제시해야 할 지점에 와있다.
이런 일을 위해서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가 걸어왔던 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오늘 우리의 삶에 작용하고 있는 모든 인문학적 근거들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 없이 한 인간의 실존적 죄책, 도덕심, 사회적 책임감에 초점을 맞춘다면
기독교 신앙은 그 안에 아무리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인간 구원의 보편적 지평을 열어가야 할 소임에서는 벗어난 셈이다.
기독교의 복음과 설교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모음집이 아니다.


profile

[레벨:41]새하늘

2007.08.17 14:35:04

죄(罪)?
인간은 어쩔수 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말씀에 순종하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일까?
죄의 최종은 멸망이라는데, 그러면 결국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감정에만 몰입해 죄 너머에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다니.

[레벨:18]은나라

2016.06.27 11:19:03

복음은 죄론으로부터 시작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와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씀이 옳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인간은 죄인이다' 부터 시작한 복음을 들어왔는데, 하나님의 신비와 사랑으로부터 시작되는 복음을 한번 들어봤으면 좋겠네요. 무엇이 다른지?  혹 하나님의 신비와 사랑이.. 창조이야기를 말하는 것인지요?


하나님의 신비, 사랑, 은혜가 어떻게 우리의 유한한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

목사님의 설교를 매주 대하고 있지만, 어쩔땐 알겠고.. 어쩔땐 전혀 낯설게 느껴져서 잘 모르겠고.. 그래요.

이런걸 알기위해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햇는데.. 책만 들여다 봐서는 잘 모르겠고, 설명을 들었으면 좋겠는데..각자의 관점이 다 다르니, 정확하게 설명해주지도 않는거 같기도 하구요.

목사님의 역사강의는 혹 없는가요?

목사님의 인문학적 성경읽기를 다시 훝어봐야겠습니다.

목사님께로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요즘은 많이 감사드린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도 감사드리구요. 넘치는 은혜를 넘치게 최선을 다해 나누어 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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