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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모델과 설교자
요즘 설교자의 강한 호소력은 크게 드러나는 반면에
말씀이 침묵하고 있는 설교 현상에 관해서
약간 염려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패션 모델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다.
패션 쇼에 등장하는 모델들의 워킹은 매우 세련되어 있지만
표정은 그야말로 마네킹보다 더 심하게 무표정하다.
순간적으로 약간의 표정이 연출되기도 하지만 거의 무의미할 정도이다.
그들은 왜 표정을 억제할까?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자랑스럽다면
마음껏 미소를 짓거가 만족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련만
흡사 데드 마스크같은 표정으로 쇼를 끌어간다.
답은 분명하다.
모델이 죽어야 옷이 산다.
그 아름다운 모델은 옷만을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
청중들의 시선을 자기 얼굴로 끌어들이면 그는 훌륭한 모델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옷을 위해서 자기의 감정과 표정까지 완전히 죽이는 그런 모델과 설교자는 비슷하다.
설교는 청중을 선동하는 웅변이 아니다.
설교는 청중의 기분을 풀어주는 시트콤도 아니다.
더욱이 설교자는 청중들에게 소유욕을 부추기는 홈쇼핑의 안내자들도 아니다.
설교자는 어떤 절대적인 세계를 사람들에게 암시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자기도 아직 완전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어떤 힘을 감지하고 그것을 넌즈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람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있는 일은 단지 '가리킴' 뿐이지 설득도 아니고 선동도 아니다.
그런 사람이 취해야 할 가장 바른 자세는,
또는 유일한 태도는 패션 모델의 무표정에 담겨 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기를....
설교자에게 복음에 관한 열정이 없어도 된다거나,
청중을 향한 패토스가 없어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자신이 전해야 할 진리와 복음이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오직 그것만이 전면에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자기를 거의 죽은 사람처럼 다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 설교자는 죽지만 말씀은 살아난다.
이게 곧 성령론적 설교행위라 할 수 있다.
설교만이 아니라 문학, 예술도 역시 흥분하지 않고 자기를 죽일 때만
진정한 의미에서 설득과 감동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청중들이 설교를 들은 다음에 설교자의 음성, 제스처, 의도가 기억에 남는다면
그건 설교가 아니라 세뇌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설교자들이 말씀보다는 자기 자신을,
조금 나은 경우라 하더라도 자신의 신앙경험을 청중들에게 강요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카리스마가 강한 설교자들은 소위 명망가로 이름을 날린다.
청중들도 말씀이 살아움직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닦달당하는 것을 은혜로 착각하고 있다는 데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패션 모델의 무표정에서 설교자가 나가야 할 길을 발견해보는 건 어떨는지.
요즘 설교자의 강한 호소력은 크게 드러나는 반면에
말씀이 침묵하고 있는 설교 현상에 관해서
약간 염려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패션 모델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다.
패션 쇼에 등장하는 모델들의 워킹은 매우 세련되어 있지만
표정은 그야말로 마네킹보다 더 심하게 무표정하다.
순간적으로 약간의 표정이 연출되기도 하지만 거의 무의미할 정도이다.
그들은 왜 표정을 억제할까?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자랑스럽다면
마음껏 미소를 짓거가 만족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련만
흡사 데드 마스크같은 표정으로 쇼를 끌어간다.
답은 분명하다.
모델이 죽어야 옷이 산다.
그 아름다운 모델은 옷만을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
청중들의 시선을 자기 얼굴로 끌어들이면 그는 훌륭한 모델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옷을 위해서 자기의 감정과 표정까지 완전히 죽이는 그런 모델과 설교자는 비슷하다.
설교는 청중을 선동하는 웅변이 아니다.
설교는 청중의 기분을 풀어주는 시트콤도 아니다.
더욱이 설교자는 청중들에게 소유욕을 부추기는 홈쇼핑의 안내자들도 아니다.
설교자는 어떤 절대적인 세계를 사람들에게 암시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자기도 아직 완전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어떤 힘을 감지하고 그것을 넌즈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람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있는 일은 단지 '가리킴' 뿐이지 설득도 아니고 선동도 아니다.
그런 사람이 취해야 할 가장 바른 자세는,
또는 유일한 태도는 패션 모델의 무표정에 담겨 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기를....
설교자에게 복음에 관한 열정이 없어도 된다거나,
청중을 향한 패토스가 없어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자신이 전해야 할 진리와 복음이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오직 그것만이 전면에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자기를 거의 죽은 사람처럼 다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 설교자는 죽지만 말씀은 살아난다.
이게 곧 성령론적 설교행위라 할 수 있다.
설교만이 아니라 문학, 예술도 역시 흥분하지 않고 자기를 죽일 때만
진정한 의미에서 설득과 감동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청중들이 설교를 들은 다음에 설교자의 음성, 제스처, 의도가 기억에 남는다면
그건 설교가 아니라 세뇌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설교자들이 말씀보다는 자기 자신을,
조금 나은 경우라 하더라도 자신의 신앙경험을 청중들에게 강요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카리스마가 강한 설교자들은 소위 명망가로 이름을 날린다.
청중들도 말씀이 살아움직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닦달당하는 것을 은혜로 착각하고 있다는 데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패션 모델의 무표정에서 설교자가 나가야 할 길을 발견해보는 건 어떨는지.
"는 단지 소리일뿐이다....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우리는 단지 소리로서...참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며...그가 드러나고
우리는 감추어져야 한다는 목사님의 말씀..깊은 공감을 가집니다...
저또한 그러한 설교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