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하나님을 직접 진술하고 있을까?

조회 수 5040 추천 수 75 2005.04.15 23:41:30
성서는 하나님을 직접 진술하고 있을까?

설교자들이 성령론적인 성서해석, 혹은 그 과정에 반드시 일어나야 할 심화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성서관과 성령론의 오해에 놓여 있다. 성령을 직접 경험한 것처럼 진술되고 있는 성서 텍스트를 실제적인 것으로 착각함으로써 성서와 성령의 역동적 관계를 놓치게 되고, 결과적으로 성령론적인 설교로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 아브라함의 모리아산 경험이나 모세의 호렙산 경험을 직접적인 하나님 경험으로 생각하면서 자신들에게도 그런 일들이 있어날 것을 기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방식으로 청중들을 호도한다. 그런 성서의 내용을 반복적으로 가르치다보면 설교자와 청중도 어느 사이에 그런 경험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처럼 확신하게 되고 결국 인식론적 혼란으로 인해서 성서와 성령에 관해 크게 착각하게 된다. 물론 우리의 모든 삶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모든 행위는 성령의 이끌림이라고 말할 수 있기는 하지만 엄격하게 보자면 그것마저 실제로는 간접적인 것이지 직접적인 것일 수 없다. 이 문제를 아브라함과 모세 사건을 좀더 구체적으로 검토함으로써 해명해보자.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희생제물로 바치라는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함으로써 소위 ‘믿음의 조상’이 된 인물이다. 이렇게 반문해보자.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라는 이 명령이 과연 야훼 하나님의 음성이었을까? 아브라함의 착각은 아니었을까? 더 나가서 이 음성은 실제로 들렸다기보다는 아브라함의 신앙적 해석이 아니었을까? 유대인들의 오랜 전승 과정을 통해서 이 이야기가 ‘신인동형동성론’의 방식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을까?
모세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양치기로 살았던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붙는 가시떨기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조우한다. 유대민족을 이집트의 파라오로부터 해방시키라는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듣는다. 성서는 그 장면을 흡사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대화하는 것처럼 직접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유대인들의 서술 방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민족애가 남달랐던 모세가 40년 동안 양치기로 살면서 겪었을 정신적 고통을 우리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가 ‘엘모의 불’ 현상 앞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서 기자는 그런 사건을 직접적인 대화 형식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사도바울의 다마스쿠스 도상의 체험도 이와 비슷하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위에서 언급한 사건과는 달리 성령의 직접적인 체험이 아닐까? 나는 그 텍스트의 실체를 완전히 해명할 정도로 영적인 경지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나의 인식론적 범주 안에서 판단한다면 그것도 역시 간접적인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누가가 보도하고 있는 그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 핵심은 바람소리, 불꽃, 방언이다. 아무리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현상 자체를 성령과 동일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성령의 운행을 그런 현상으로 경험했다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바로 성령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성서가 하나님의 현현과 성령의 임재를 매우 직접적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대답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성서시대는 신화적인 세계관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중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침에 태양이 동쪽으로 뜨는 물리학적 현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인간의 운명이 별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고, 자연에 주술적인 힘들이 작동한다고 믿고 있었다. 성서기자들도 그 시대의 세계관과 도덕형식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성령체험을 이런 신화적인 방식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었다. 성서기자들이 그렇게 신화적인 방식으로 묘사한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런 신화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의 설교자들이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성령체험을 주장한다는 것은 여전히 신화적 미숙함에 빠져 있다는 증거이다.
다른 하나는 성서의 진술방식이 신문처럼 사건의 실체적 자실여부를 가리는 데에 충실하다기보다는 우리의 언어로서는 근본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영적인 경험을 문학적으로 전달하는 데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 텍스트는 뉴스가 아니라 ‘시’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다고 하자. “바람이 아프다 하네.” 유치원 학생이 아닌 한 이런 시구를 읽고 실제로 바람이 아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시인의 마음이 아프다는 의미로 새겨들을 것이다. 성령이 직접적으로 인간의 역사에 등장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 성서 텍스트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에 대한 직접적인 진술이라기보다는 성서기자의 영적인 지평에서 내린 신학적 해석이다.
순진한 사람들은 성서를 성서기자의 신학적, 역사적 해석이라는 말을 불안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런 불안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서의 성령 표현을 직접적인 것으로 고집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간접적인 방식으로, 즉 인간의 인식론적 방식을 통로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헤아릴 수 있다면 그런 불안은 사라질 것이며, 우리의 역사적 책임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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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9.01 17:03:56

성서는 하나님을 직접 진술하고 있을까?
"직접적인 진술이라기보다는 성서기자의 영적인 지평에서 내린 신학적 해석이다" 라는 결론에 동감이 갑니다.
그러면 간접적인 성령의 체험을 직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알면 알수록 성경 공부에 더 빠지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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