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영성에 이르는 길

조회 수 4546 추천 수 77 2005.05.05 23:29:02
설교의 영성에 이르는 길

급성장하는 교회의 특징은 보기에 따라서 여러 모양이겠지만, 그중에서도 목사의 설교가 가장 결정적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요즘 그런 교회의 목사들은 매우 짧은 시간에 설교 명망가로 자리를 잡았으며, 젊은 설교자들의 우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의 설교 카리스마가 성장 침체기에 빠진 한국교회에 영적인 에너지를 공급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긴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국교회에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신자들이 한쪽 교회로 쏠리는 현상이 기본적으로 수평이동이라거나, 그런 교회 운동이 지나치게 성장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비평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은 심각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인 건 아니다. 오히려 그들 설교 명망가들의 설교 자체가 안고 있는 ‘말씀의 침묵’ 현상이야말로 겉으로는 설교 르네상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독교 신앙과 설교의 위기를 불어올 수 있는 단초일지 모른다.

신앙은 정보인가, 영성인가
청중들에게 어떤 신앙적 자극을 끼침으로써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들인 설교 명망가들에게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또한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문제는 그들이 성서 텍스트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 정보, 혹은 그런 상식에 의존하는 설교에 치우쳐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그들의 관심이 ‘텍스트의 지평’이 아니라 청중에게 기울어져있다는 뜻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설교를 들어야 할 청중의 변화가 바로 설교의 목적이니까 당연히 청중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건 큰 착각이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서 텍스트는 자체적으로 구원의 ‘존재론적 능력’을 담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가 청중의 변화를 의도하든 않든 상관없이 텍스트의 지평에 천착하기만 한다면 구원론적 변화는 일어나게 되어있다. 물론 그 변화라는 게 목회자가 원하는 방향인지 아니면 성령이 원하는 방향인지, 좀더 진지하게 판단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신앙의 정보 수준에 머물러 있는 설교의 예를 들어보자. 빌립보서 4:4-9을 본문으로 “하나님이 지키시는 사람”이라는 제목을 정한 다음, 다음과 같이 설교할 수 있다. 첫째 기뻐하는 사람, 둘째 너그러운 사람, 셋째 걱정하지 않는 사람, 넷째 감사하는 사람. 혹은 다른 본문으로 “성공하는 길”이라는 제목을 잡은 다음에, 첫째 기도해야 한다, 둘째 봉사해야한다, 셋째 변화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설교를 끌어갈 수 있다. 목회의 연륜이 쌓인 설교자라고 한다면, 그의 머릿속에는 설교를 구성할 수 있는 수백 개의 설교 아이템이 매우 빠르게 회전하고 있을 것이다. 흡사 문제은행에서 문제를 찾아 시험문제를 내는 교사들처럼 그는 필요에 따라서 그런 신앙 항목들을 꺼내 쓰기만 하면 된다. 이런 설교는 ‘큐티’ 공부를 어느 정도 수행할 줄 아는 평신도들이라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신앙적 정보나 요령을 안내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성서해석과 설교의 전문가인 설교자는 성서 텍스트를 통해서 심층의 영적인 생명운동과 연관되어 있는 영적인 실체(spiritual reality)를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경험과 인식이 충분하지 못한 설교자는 어쩔 수 없이 영성의 빈혈증세를 일으키게 될 것이며, 이런 증세를 위장하거나 모면하기 위해서 감동적인 예화에 치중하는 설교를 하거나, 이벤트 중심의 목회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설교자의 영적인 위기가 아니고 무엇일까?

설교의 영성
그렇다면 영적인 지평에서 설교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예컨대 ‘기도’라는 주제의 설교를 한다고 하자. 성서 본문에 따라서 약간씩 달라지겠지만 대개는 기도해야할 우리의 태도라든지, 기도의 효과 같은 내용을 다룸으로써 신자들을 기도 열광주의로 끌어들일 것이다. 이런 상태에 이르는 것을 설교의 목표로 생각한다면 그는 아직 성서의 영성으로, 또는 기도의 영성으로 들어가지 못한 설교자이다. 영적인 설교자는 그런 상투적인 교훈에 머물지 않고 기도드려야 할 대상과 기도하는 사람의 실존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하나님과 사람의 영적인 연관성을 질문하게 될 것이다. 기도 없이도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기도에 파묻혀 살아도 연속적인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 현실의 어두움을 들여다보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훨씬 심층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에 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소위 기도생활을 잘하도록 끌어가는 게 바로 설교가 아닌가, 하고 반문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기도만이 아니다. 신자들을 교회봉사 잘하게 하고, 세상에서 모범적으로 살게 하고, 천국을 향한 희망을 품고 살게 하는 게 곧 설교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답도 아니다. 설교의 목표는 신자로서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인격이나 품성이나 태도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기보다는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운행하시는 성령에게 자신의 미래를 맡길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신자들이 그런 영적인 실체를 경험하게 된다면 자기 스스로 역사적 책임의식을 갖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결국 설교자는 신자들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려는 인간적 의도를 접고, 대신 영의 활동에 맡겨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곧 설교의 영성이다.

신학적 영성
우리는 설교자로서 어떻게 이런 영적인 실체를 인식하고 경험함으로써 설교의 영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여기에 왕도는 없다. 우리는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찾아오기를 기다릴 뿐이며, 혹은 이미 문을 두드리고 있는 영적 계시 사건을 인식할 수 있도록 준비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그 기다림과 준비가 철저하게 신학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성령을 경험하는 우리의 영성은 기본적으로 기도, 말씀읽기, 명상, 예배 같은 종교적 실천과 관계된 것이지 신학과는 좀 거리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대한 오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심에 놓여 있는 주제는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에 관한 가장 정확한 해명은 곧 삼위일체이다.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신비에서 신학적으로 이해하는 일 없이 우리의 영성이 풍요로워진다는 말은 바둑에서 정석을 배우지 않고 프로 기사가 되겠다는 말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대충 동네바둑이나 두면서 시간을 때울 사람이 아니라면 정석공부를 깊이 해야 하듯이, 평신도가 아니라 설교 전문가가 되려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철저한 신학공부를 거쳐야 한다. 왜냐하면 신학은 단순히 기독교의 체계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영에 관한 가장 정확한 인식론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비록 좁은 길이겠지만 ‘신학적 영성’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설교의 영성에 이르는 가장 바람직한 길이다. (영신 학보,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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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9.01 17:30:29

설교의 영성에 이르는 길?
올 하계 전교인 수련회를 갔다 왔습니다.
아침과 저녁에 부흥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첫날부터 엉덩이가 좀 쑤셨습니다.
안절부절 못하는 어린 아이를 핑계삼아,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냥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수련회가 끝날때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저의 행동이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의 개념을 잃어버린 설교에 아이들을 채근하듯이 잔소리가 많고, 설교자가 스스로 감흥에 젖어 목청껏 부르는 찬송가 등 왠지모르게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끝까지 듣다가는 스스로에게 화가 더 날것 같았습니다.

물론 이런것들을 알면서 인내하고 들으시는 교우분들을 보면, 진심으로 존경어린 시선이 갑니다.
그렇지만 이런식의 부흥회가 있다면 참석을 하고 싶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지금껏 수많은 부흥회를 참석했지만, 내 가슴에 영성을 흔드는 부흥회는 없었습니다.
정말 우리를 하나님께 향하는 영성으로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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