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단상

조회 수 3704 추천 수 1 2008.09.15 23:26:35
설교 단상
-선포인가, 해명인가?-

일반적으로 설교는 선포로 규정된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지 단순히 해명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예레미야, 이사야, 호세아 등,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직접 말씀을 주셨고, 자신들은 그 하나님을 대신해서 백성들에게 선포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방식의 예언서를 읽다보면 예언자들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큰 착각이다. 인간은 그가 아무리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없다.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
그런데 왜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말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주장한 것일까? 그건 일종의 문학적 장치, 혹은 장르라고 볼 수 있다. 에세이와 소설이라는 장르가 있듯이 예언자들의 글쓰기 장르가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흡사 야훼 하나님이 자기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했다.
오늘도 많은 설교자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처럼 주장한다. 거의 확신에 찬 어조로 어떤 것을 주장한다. 십일조를 떼어먹지 말라고 선포하고, 주일성수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선포한다. 설교자가 영적인 권위를 확보한다는 것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자칫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것처럼 착각하면 곤란하다.
이런 방식의 설교에 물들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절대화하게 된다. 자기 절대화는 곧 진리에 대해서 닫히는 사태이다. 진리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종말을 향해 열려진 존재론적 능력이기 때문에 결코 시공간 안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다.
어제(12월10일) 서울 시청 앞(?)에서 북한 인권 문제를 주제로 집회가 열렸다고 한다. 주로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이 집회는 북한의 인권을 해결하기 위해서 한국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고, 온 세계가 나서야 할 것처럼 주장했다. 자기 절대화는 이런 방식으로 나타난다. 인권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인권이 천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인이 어디 있는가? 북한에 인권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역사적 정황 안에서 돌아간다. 지금 이렇게 떠드는 방식으로 북한 인권이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좋게 말해서 순진한 발상이고, 나쁘게 말해서 정략적인 발상이다. 북한의 인권 해결을 위해서 가장 바람직한 길을 서로 의논하고 기도하고, 중지를 모아나가야 하는데, 이들은 대중집회를 통해서 정부에 압력을 넣으려고 했다. 원래 30만 명을 목표로 했는데, 1만 명쯤 모인 것 같다. 이 집회에 연사와 기도자로 나선 분들은 대개가 대형교회 목사들이었다. 그분들은 설교를 선포로 생각한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설교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는 자기암시에 빠진 게 아닐까 생각한다.
설교가 선포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설교는 해명, 변증인가? 아직 나는 이에 적합한 단어를 생각하지 못해서 위 부제에서 어쩔 수 없이 해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뿐이다. 설교는 신학대학교 강의가 아니며 신학세미나도 아니다. 더구나 신학 에세이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설교는 하나님과 청중 사이에 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게 아니라 청중과 더불어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이다. 설교자는 청중을 향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청중 옆에서 함께 하나님을 향해 흡사 친구에게 무엇을 말하듯이 전달하는 사람이다.
그 이유는 여럿인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상으로 삼아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체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이외에 누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설교자가 하나님의 뜻을 알까? 이것만큼 큰 착각도 없다. 목사들이 과연 하나님을 알기나 할까? 내가 보기에 목사들은 하나님에 대해 관심도 없다. 청중을 닦달하는 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을 전하고 있는 형국이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결국 하나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대신 사람들에 관해서만 말한다. 사람들의 간증, 예화가 설교 현장에 과잉생산 되고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선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을 아는가?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종말에 가서야 온전하게 자기를 나타내는 분이기 때문에 아무리 날고 기는 영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아무도 설교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설교자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다. 그 한 가지 사실만이 청중들과 설교자 사이에 놓인 차이이다. 흡사 산모만이 자기 아이 울음소리에 민감하듯이설교자는 하나님의 ‘말걸음’에 민감한 사람이다. 그 말걸음에 민감하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모두 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런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을 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그 소리와 청중 사이에 버티고 서지 않는다.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라고 결코 선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로서는 말할 게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청중은 이런 말걸음을 견디지 못하고 앞에서 선동, 선포해주기를 바란다. 청중들은 스스로 귀를 기울일 생각이 전혀 없다. 귀를 기울이려면 다른 것들을 접어야 하는데, 청중들을 그런 게 귀찮기도 하고, 다른 것들이 훨씬 재미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 한쪽에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큰소리치는 설교자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원초적 생명의 소리인 하나님의 말걸음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청중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흡사 모세가 하나님의 산,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외롭고 심심하고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던 이스라엘 민중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즐거워했듯이 말이다.
아무리 상황이 이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걸음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눈치 챈 설교자라고 한다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 말씀에만 집중할 수 있으리라. 생명의 원초적 소리에 말이다. 이것이 곧 대림절 영성이 아닐까?


profile

[레벨:7]희망봉

2008.09.16 20:01:22

아멘~.
하나님의 말걸음에 민감하게 귀 기울이는 영성.
그래서 그 소리를 또 들어 보라고 전하고,.....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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