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파

조회 수 3981 추천 수 1 2008.08.23 23:37:44
구원파

20년도 훨씬 지난 일인지, 또는 십 수 년 전의 일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소위 ‘구원파’라는 극단주의자들이 한국교회에서 크게 위세를 떨친 적이 있었다. 그들의 특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구원받은 순간을 정확하게 기억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성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언제 구원받으셨습니까?”하고 따지고 들었다. 구원받았는가 하는 질문도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데 하물며 정확하게 ‘언제냐?’라니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성서의 몇 대목을 끌어들여서 구원의 일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주입시켰다. 이런 식으로 성서를 적용하기 시작하면 사실 끝이 없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툭 하면 성서를 펼치고 자기들의 구미에 맞는 성구를 끌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다. 기독교 계통의 모든 사이비 종파들은 대게 이런 식이다. 심지어는 몰몬교도 그렇고, 통일교도 그렇다. 모르긴 해도 JMS의 정명식도 그렇지 않았을까? 신구약 66권을 이런 식으로 적용시키기 시작하면 거의 모든 가설이 가능하다. 충분하게 해석되지 않은 채 성구를 끌어다 자기주장의 토대를 삼는 태도는 성서 계시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 단지 성서를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성서 도구화는 우리 정통 교회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예컨대 거실이나 사업장에 자주 내걸려 있는“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성구는 욥의 친구가 욥을 책망하기 위해 내뱉은 말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구절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말이 흡사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아니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 한 말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성서 텍스트를 대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이런 현상은 대중 설교자들에게서, 특히 설교를 잘 한다고 이름이 난 사람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것인데, 성서 66권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많은 성구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성서의 정보에 약한 평신도들은 설교자가 성경구절을 인용하니까 옳은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설교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 이들은 무슨 본문으로 설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결론은 대개 정해져 있다. 자신의 신앙체험을 절대화한 다음에 그것을 강화하기 위해서 성서를 인용할 뿐이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설교를 하면서 많은 성구를 끌어들인다. 요한복음을 설교하면서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 다윗 이야기, 로마서 등등을 인용하면서 자기의 신앙을 변증한다. 이런 설교의 위험성은 성서 텍스트를 나열한 뿐이지 깊이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왜 그럴까? 이미 그들에게는 기독교 신앙이 결정된 그 무엇일 뿐이다. 텍스트의 깊이로 들어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이미 완료한 어떤 사건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럴듯하게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들에게 설교는 해석학이 아니라 일종의 수사학으로 떨어져 버린다. 감동스러운 간증, 예화, 도덕성 등으로 무장된 수사학이 한국교회의 설교에 범람하고 있다는 것은 성서 텍스트가 해석되지 않고 세뇌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정통 기독교도 역시 구원파나 여호와의 증인들이 채택하고 있는 방법론에 안주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말은 곧 정통 교회도 역시 늘 사이비 이단 종파로 빠질 가능성에 노출되었다는 뜻이다.
구원파의 또 하나의 다른 특징은 죄론의 관념화다. 그들이 주장하는 구원의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죄의 실체는 훨씬 빠르게 사라진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구원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무슨 죄를 지었어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한다.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죄라고 한다면 그 죄의 실체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구원을 결정론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뿐이다. 이들에게 문제는 구원의 본질에 대한 해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지 구원을 받았다는 사건에만 모든 것을 쏟았다는 데에 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행위인 구원보다는 그것을 받아야 할 인간에게만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이런 문제는 정통 교회에도 없지 않다. 다만 구원파처럼 극단적으로 나가지 않았을 뿐이지 인간의 종교적 반응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사람의 심리적이고 종교적인 반응에 중심을 두게 되면 성서 텍스트는 끊임없이 우리의 종교적 만족을 위해서 이용당할 뿐이다. 성서가 교회에서 소비되고 있을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왕에 구원파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으니까 한 마디만 더 하자. 교회에서 ‘구원’에 대한 논의가 많기는 하지만 과연 구원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물론 대개는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알고 있다는 생각 자체가 사실은 모르고 있다는 의미이다. 알고 있는 사람은 결코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더구나 그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구원은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에, 이 세계 안에 던져진 존재인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인식할 수 없는 그 무엇이기 때문에 아무도 구원의 실체에 대해서 실증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교회 안에서 구원을 알고 있는 것을 전제하고 말들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아예 언급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럴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구원을 말하기는 하되 너무 자신감 넘치게 하지는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우리는 단지 성서에서 부분적인 구원의 사건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성서가 말하는 그 부분에 대해서만 조심스럽게 말하는 게 좋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대중 설교자들일수록 구원 문제에서 지나치게 앞서 나간다. 본인들이 이미 구원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자신 있게 외친다. 불안한 청중들은 그렇게 넘치는 자신감을 전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어 있다. 일종의 선동에 빨려 들어가는 ‘대중심리’ 현상이다. 교회도 다분히 대중심리에 의해서 작동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교회는 구원이라는 절대적인 사건과 직면해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런 선동이 잘 먹히게 되어있다.
우리가 구원을 적극적으로가 아니라 소극적으로 말해야 하는 이유는 성서 자체가 구원을 매우 다르게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국제 정치적인 사건이 구원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불치병이 치료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도덕적으로 변화하는 사건일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우주론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더구나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이 임하기도 하지만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구원이 무조건적으로 임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다양한 구원 사건 안에서 공통되는 부분은 하나님과 예수,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곧 구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른다는 데에 있다.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이만 줄여야겠다. 하나님을 잘 모른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성서와 기독교를 아는 사람이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역사와 시간이 무엇인지, “리얼리티 이즈 어 프로세스”라는 과정철학의 명제가 무슨 의미인지,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 안에 환상과 현실이 겹치는지, 루돌프 오토의 책 <거룩>에 나오는 ‘누멘’ 경험이 무엇인지, 존재의 신비에 대해서 약간이라도 생각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만약 기독교의 구원을 이미 완료된 그 어떤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적당하게 포장해서 전달하는 것만으로 모든 신학과 설교와 선교의 목표를 삼는다면, 그래서 청중들의 열광적 반응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것은 결국 사이비 소종파의 행태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레벨:4]danha

2008.08.24 02:13:43

구원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혼자 어깨를 들석이며 운적이 있습니다.하나님께 물었죠
하나님 이게 하나님께서 진짜 원하시는 겁니까?
이글을 읽으니 이제야 답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8.25 23:21:09

구원파로부터 자유로워 졌다니,
축하드립니다.
구원 실증중의는 구원의 세계를
인간의 상상력 안에 가두는 불신앙이거든요.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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