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來世) (3)

조회 수 5588 추천 수 78 2008.01.05 21:40:36
내세(來世) (3)

내세에 대한 생각이 구약성서에는 별로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구약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고대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어둡고 칙칙한 스올에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그들에게 모든 생명이 끝나는 절망적인 사건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서 내세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며, 희미하게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하늘과 지상과 지하라는 삼층의 우주관이 지배하던 고대 유대인들이 죽은 자를 땅에 묻으면서 내세를 불쾌한 그 어떤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에 반해 신약성서에는 내세 개념이 아주 또렷하다. 복음서와 서신과 요한계시록, 그리고 초기 기독교의 거의 모든 문서가 내세 개념을 확고하게 지키고 있다.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를 그대로 받아들인 신약공동체가 내세에 관해서 구약성서와 차이를 보이는 이유를 자세하게 다루려면 신학석사 논문을 써야 하니, 여기서는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고 두 가지 관점만 간략하게 짚겠다.
첫째, 내세 개념이 구약성서에서는 희미한 반면에 신약성서에서는 명확한 이유는 성서의 사상이 역사와 더불어서 변화,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내세 개념만이 아니라 하나님 개념도 발전되었다. 발전되었다기보다는 변화했다는 말이 더 타당하기는 하다.
둘째,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내세관을 이어주는 신학개념은 묵시사상이다. 이 세상이 완전히 해체되고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된다는 묵시사상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비로소 중요한 신학개념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 묵시사상은 신약의 중심사상인 종말론의 뿌리라 할 수 있다. 이제 신약성서 기자들은 묵시사상이 말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발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생명인 내세에 들어간다고 믿게 되었다. 이런 신앙에 근거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으며, 순교도 불사할 수 있었다.
신약성서의 부활 신앙에 의해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된 내세관에서 핵심 개념은 영원한 생명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이 세상의 삶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데, 그 삶은 영원하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 11:25,26) 이 진술은 우리의 현실과 충돌한다. 우리는 이 현실에서 예수님을 믿지만 죽는다. 그런데도 본문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이 말씀의 실체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삶(생명)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해야 한다. 새롭다기보다는 사유의 심층적 지평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생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생물학적인 차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단백질로 구성된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은 시간과 더불어 죽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무상한 우리의 육체를 요한복음 기자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라고 말한 건 아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고대 플라토니즘이 말하는 이데아와 같은 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죽지만 영혼은 영원하다. 그들의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 교부들이 영혼불멸설을 주장하게 되었지만, 엄격하게 말해서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 영혼은 헬라철학이 말하는 불멸의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영혼이 사멸한다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직 그것의 비밀을 다 풀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불멸이냐 사멸이냐를 단정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세에 경험하게 될 생명이 영원하지 않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우리가 이런 질문에 대답하려면 ‘영원’ 개념을 먼저 정리해야 하는데, 그게 인간의 인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데에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 도대체 영원하다는 게 무슨 뜻인가? 현재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시간의 차원에서 영원하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영원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영원은 유한을 전제할 때가 가능한 개념이다. 모든 것이 영원한 세상이라고 한다면 영생 개념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우리는 내세에서 얻게 될 영생을 오늘의 시간개념으로 접근할 수 없다. 유한한 이 세상의 생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생명을 가리켜 영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영생은 예수의 부활에서 선취된 하나님의 종말론적 생명 사건이다. 우리는 이 생명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날을 기다리며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다.

[레벨:0]소원

2008.01.09 04:25:52

목사님 안녕하세요.

멀리 아르헨티나에서 부터 방문을 하는 한 무명의 서리집사입니다.
제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세계를 좀 더 체계적으로 알고자 , 또는 이견되는 부분이 어떤 것인가
궁금해서 가끔 "눈팅"을 했습니다.
33년의 이민생활을 해온 교포이어서인지 아니면, 신학적인 면의 무지 탓인지
활자로 복사를 했으면 합니다.
신출내기에게 등업 부탁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1.09 10:28:29

예, 안녕하세요, 소원 님,
한국과 정 반대 쪽에서 사시는군요.
승급했습니다.
드래그해서 프린트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레벨:1]김창용

2008.01.11 01:14:38

해외거주자는 어떻게 회원가입을 해야 하는지요?

[레벨:0]소원

2008.01.11 01:36:58

승급 감사합니다.
저는 한국 주민증이 없어서 남편의 양해를 구하고
그 이름으로 가입했습니다.
지붕을 뚫는 심정으로 편법을 썼습니다.
물론 가입란에 해명을 했지요...
profile

[레벨:23]김영진

2008.01.13 13:34:40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신학교 다닐 때 김명혁 교수님 조직신학 시간에 이런 주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던 생각이 납니다.

내세에 관한 이야기...
저는 주로 질적으로 다른 생명의 연속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장례를 많이 치르는 입장(?)에서 목사님 말씀 참 감사합니다.

[레벨:1]돌멩이

2008.05.27 21:52:03

드래그가 안되는 이유?
아하!!!!
부탁드립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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