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3)

조회 수 10123 추천 수 122 2006.12.04 18:59:59
방언(3)

앞서 필자는 두 번에 걸쳐서 방언을 설명했다. 이 설명은 기본적으로 방언이라는 현상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보도하고 있는 성서기자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성서기자의 의도를 세밀하게 살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성서기자는 어떤 객관적인 사실을 실증적으로 전하는 게 아니라 그 진술 너머의 영적인 현실을 가리킨다.(指) 따라서 오늘 독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영적인 현실을 포착하는 능력이다. 둘째, 성서기자들은 시대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2천년 내지 3천 년 전의 우주관과 인간론 안에서 살았던 그들이 제시하고 있는 어떤 현상들은 그 시대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천동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성서의 표면적인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성서에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출애굽에서 홍해가 갈라진 사건은 그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한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다. 이 사건의 핵심은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여자들과 함께 소고를 치며 부른 노랫말에 담겨 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21) 만약 홍해 사건을 실증으로 강조한다면 지금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신약성서의 진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마가복음 16:17,18절은 다음과 같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니라.” 무슨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성서의 진술을 오늘 실증으로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 열거된 다른 현상인 방언, 뱀, 병자치유도 역시 이와 비슷한 차원의 사건들이다. 출애굽기 기자와 마가복음 기자가 그런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이유는 그 당시에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언도 역시 이와 같다. 방언이 초기 그리스도교 안에서 비록 부분적인 현상이었지만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했다는 단서로 제시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방언현상에 대한 성서의 진술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는가? 방언 자체가 아니라 성령의 임재라는 사건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방언은 2천 년 전 사람들이 성령을 경험하는 방식이었다면 오늘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성령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왜 그렇게 시대적인 구별을 해야만 하는가, 2천 년 전에 방언으로 성령을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똑같이 하시지 않겠는가 하는 반문이 가능하다. 이게 어려운 문제이다. 성서의 사건들 중에서 어떤 것이 오늘에도 그대로 전승되어야 하고, 어떤 것이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게 말이다. 어쨌든지 분명한 것은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구절을 오늘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듯이 성서가 표현하고 있는 모든 사건을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방언도 역시 이런 범주에 속한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길은 성서가 진술하고 있는 방언이라는 현상, 또는 그 사건을 최선으로 바르게 해석하는 작업이다. 여기에는 성서의 역사비평과 종교현상학적인 검증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이 말하려는 근본적인 의미를 오늘의 언어와 경험으로 새롭게 살려내는 일이다. 여기에는 현대인들이 생명의 영(성령)을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대한 인문학적 통찰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묻자. 성서가 말하는 방언의 실질 안으로 우리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린도전서의 방언과 사도행전의 방언으로 나누어 두 가지로 제시하겠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어느 정도 암시되었을 것이다.
첫째, 고린도전서의 방언에 근거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말하고 있는 생명의 비밀을 배우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언어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비밀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왜 우리의 언어가 비밀인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기본적으로 비밀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들을 향해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막 3:12) 오늘도 역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숨겨있는 비밀이다. 이와 달리 오늘 우리는 그런 구원과 생명의 비밀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자랑거리에 휩싸여 있는 셈이다. 설교의 예를 든다면, 대개의 설교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이 비밀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청중들의 기분을 좋게 하는 일이나 아니면 표면적인 축복에만 매달려 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이 담지하고 있는 고유한 생명의 언어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바로 오늘의 방언이다.
둘째, 사도행전의 방언 현상에 근거해서 우리는 모든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의 세계를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교리(dogma)가 세상의 언어와 보편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 길은 무엇인가?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와 세상의 언어를 하나 되게 할 수 있을까? 교회의 언어에 생명의 현실(reality of life)을 담는 게 최선이다. 즉 독선적이고 패권적인 언어로부터 생명 지향적인 언어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첫 번째 요소는 신앙 언어의 독자성이며, 둘째 요소는 보편성이다. 이 양자는 모순이 아니라 긴장이며 균형이다. 독자성은 보편성의 뿌리이며, 보편성은 독자성의 열매이다. 그리스도 신앙 언어의 비밀로부터 생명 언어의 보편적 세계가 열리며, 그런 보편적 생명 언어에 의해서 신앙의 고유한 언어가 세상으로 전달될 수 있다. 비밀인 생명의 언어를 살려내는 작업이 곧 오늘의 방언 신앙이다.

[레벨:0]somang

2006.12.05 01:59:44


사랑하고 존경하는 목사님
오늘 전 처음 이곳을 방문하고
목사님 방언에 관련된 글과
당신,구원받았어 라는 글을 읽고 답답한 마음에
이 늦은 시간에 이글을 적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22절 말씀처럼 성령의 열매로 증거됨을 믿습니다.
목사님, 관상기도의 깊은 곳에 가 보싶시요.
참 주님을 만나실것입니다.
그러면 모든것이 이해 될것입니다.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맛보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맛없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모르는 것에 다다르려면,
모르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가지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가지지 않는 데를 거쳐서 가라.
........................................................

온전하신 그 분을 얻으려 할 때에
아무 것도 얻을 맘이 없어야 하니
모든 것의 무엇을 가지려 하면
주님 안의 네 보배를 지니지 못함이다.



- St. John of the Cross-

목사님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레벨:4]봄볕/ 정대진

2006.12.05 18:26:55

유익한 글 감사드립니다.
이미 한 차례 앞선 글에 대해 메일을 보내드렸고
목사님의 요청을 따라 이번 글로 다비아를 통해
방언에 대한 제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성령충만' '성령 운동'을 강조하는 '장로교회'에서 어릴때부터 자랐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매 예배시간 마다 통성 기도를 하며
'불, 은사, 능력'을 강조하면서도 기복주의와 신비주의를 철저히 거부하는
교회에서 자랐다는 뜻입니다. 대학교 와서야 쉽게 기복주의와 신비주의로
빠질수 있는 분위기에서 철저히 정도를 걸으려 애쓰신 목사님의
노력이 얼마나 귀한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교회에서 성장하다보니 당연히 방언의 은사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었고, 초등학교 6학년 겨울 방학 부흥회에서
기도가운데 방언의 은사를 받았고 지금까지 이 은사를 소중히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렇기에 목사님께서 방언에 대해 쓰신 글들에 '할 말'이 있는 거죠.

우선 방언(2)에서 "신앙고백과 그 진술은 근본적으로 방언이다."라고 하신 말씀으로
방언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글 전반적으로 방언에 대한 이해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내가 보기에 인간의 내면세계에서 우러나오는 열정과 그걸 소리로 만들어내야 할 구강기능이
그걸 따라가지 못할 경우에 이상한 소리가 나온다. 그런 게 가장 일반적인 방언 현상이다. "

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방언의 은사는 부흥회식의 열정적인 분위기와 통성기도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결코 아닙니다! 방언 기도는 '기도 가운데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령님의 도움으로
나타나는 신비한 언어' 입니다. 통성기도나 조용히 묵상하며 기도할 때나
동일하게 나오는 것이죠. 이는 놀라운 하나님의 신비 입니다.

바울이 예언의 은사를 방언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분명 고린도 전서 14장 1절에 "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했습니다. 분명 방언이 '신령한 것'이라고 밝힌거죠

그리고 이어지는 2절 말씀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라고 바울은 증언합니다.

방언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깊이 있는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신령한 은사' 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가지신 분들은 공감하신 것입니다.
기도가운데 의지와 상관없이 (이상한 '소리'가 아닌) 이해할수 없는 '언어'가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존재를 누가 부인할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2절 말씀이 밝히듯 자신의 기도가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하는 '보호막' 역할을 합니다.
이 순간에 누리는 나와 하나님사이의 영적실존은 형언할수 없는 깊이로 다가옵니다.
저 개인적으로 신앙의 회의를 느낄때마다 저를 붙잡은 것도
방언 은사에 나타난 저의 이해영역을 넘은 신비 때문입니다.

따라서 방언은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통역의 은사가 없으면 하면 안 되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은
골방에서 혼자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고린도 전서 14장에서 바울이 방언 현상을 억제 시키고
교회의 덕을 심하게 훼손시킬 개연성이 높다고 말한 부분에 촛점을 맞추셨는데
이는 14장 전체의 큰 틀안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앞서 드린 말씀과 같이 바울은 14장 서두에 분명 방언이
'신령한 것'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6절 이후 '질서 없는 예배'에 대해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방언의 은사가 업급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방언의 은사 그 자체에 대해 문제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방언에 대해 말한것이 아니겠습니까?

방언의 은사는 다른 은사들에 비해 '눈에 잘 띄는 은사' 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많은 이들이 호기심을 갖고 동경하는 것일 테고요
그러나 분명 방언의 은사가 '우월한 것'은 아닐테지요

그런데 마치 '모든' 신자들이 '당연히' 방언의 은사를 가져야하는 것처럼 말하고
마치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으로 '배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저역시 혐오하고 분노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혐오심과 거부감으로 방언의 은사 자체를 흐릿하게
파악하고 '격하' 시키는 것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를 넘어
미국 남침례교처럼 방언의 은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방언의 은사에 지나치게 열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성령님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이 쓰다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목사님께서 그렇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다비아'에서 읽은 목사님의 글들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교회력과 절기'의 중요성도 새삼 실감했고 무엇보다.
'해석학적 성서 읽기'의 필요성 역시 깊이 공감하는 바입니다.

허나 바울의 동성애 진술에 대한 목사님의 견해에서 나타나듯 (이에 대해 덧글 달았습니다)
성경의 모든 텍스트를 '해석'의 영역으로 만 몰아가는 것역시 문제가 아닐까요?

돋보기로 사물을 관찰할 때 분명 그 대상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렌즈를 바짝 붙여서는 사물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할수 없죠.
그렇다해서 너무 거리를 벌리는 것역시 사물을 왜곡하게 되지 않을까요?

이번 방언(3)에서 언급하신 홍해사건과 막 16장의 진술이
"그 당시에는 그런 방식으로" 설명된 하나님의 구원행위 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사건이 '오늘 날'에 던져주는 실증성역시 저는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지난번 최영기 목사님께서 반론으로 올리신 내용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인데
성경 본문이 '해석의 틀'로 접근해야 함은 분명하지만
'보통 사람의 눈'으로 이해할수 있는 영역임에도 분명합니다.

성경이 기록된 그시대와 오늘의 삶의 자리가 확연히 다른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과 우리과 '같은' 사람이고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에
세월의 흐름에도 변하지 않는 일관성이 성경전체에서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죠.

홍해사건과 막16장의 진술이 실증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그 실증성을 희석시키는 것도 문제가 아닐가요? 마찬가지로
목사님께서 방언의 은사를 오늘날의 인문학적 통찰로
두가지로 '해석'을 제시했습니다.

그 '해석'이 전해주는 가치와 필요성은 충분히 유익하지만
자칫 그 해석으로 인해 정작 해석의 대상이 갖는 실재가
왜곡될여지가 있다는 것을 이번 방언에 대한 단상을 읽으며 특별히 깨달았습니다.

쓰다보니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배운것도 별로 없는 어린 신학생의 경솔한 잡설을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좀 어려울것 같긴하지만 서울 정모때 어떻게든
가보려 노력하겠습니다. 싸늘한 겨울 날씨 가운데
몸과 마음, 더욱 강건히 지키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레벨:1]박상열

2006.12.06 00:18:34

방언에 대한 글들을 접하면서, 제가 했었던(체험했던) 방언이 참된 성령의
임재였는가 하는 의문(의혹)이 듭니다.
고등학교시절에 선교단 선생님의 인도와 기도로 처음 방언이라는 것을 접하였는데,
그때의 기억에 그 방언이라는 것은,
"인간의 내면세계에서 우러나오는 열정과 그걸 소리로 만들어내야 할 구강기능이
그걸 따라가지 못할 경우에 이상한 소리가 나온다. " 라고 말씀하신 정목사님의 말씀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 합니다.(질문 : 그런데 제가 경험한 방언이 이런것이라면 방언이 아닌가요?)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고 그것을 좀 더 절박하게 아뢸때,
평소대로 기도하던 기도는 저 조차도 알아들을수 없는 (그러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표현 되어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가 온전한 성령님의 인도였다는 자신은 없습니다.
다른이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었고, 또한 내 자신의 순수한 열정을 기반으로 한 기도였지만,
결국 그 기도 속에는 내가 이해하고 있는 왜곡된 하나님상에 대한 요청만이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성령님의 인도로 제가 생각지 못한 부분들까지 전달되었을거라 믿지만요.

정대진 님의 귀한 덧글 잘 읽었습니다.
덧글을 읽는 동안 떠오른 생각인데,, 방언이란 신령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경험으로
이끄는 통로 혹은 신비 그 자체라는 말씀에는 동의 합니다만, 그것이 함께 있는 성도들에게
'거치는(거슬리는)'것이 된다면 골방에서 혹은 다른 한적한곳에서 방언을 통해 기도 하는것이
더 유익하지 안을까요? 하나님과의 나 사이의 신비적인 체험과
공동체의 필요는 쉽게 우열을 정하기가 힘든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에서 정대진님께서 언급하신것 처럼,
바울사도는 방언의 은사 자체가 문제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한 배려의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한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정목사님께서도 그런 뜻으로 방언에 대해서 글을 쓰신것 같구요.

다른이의 방언으로 인해 함께 기도 하고픈 마음이 사라지거나,
같은 공간안에서 이질적이라 느껴지는 경험을 자주 했었기에
이견(?)을 달게 되었으니, 사랑으로 이해해 주시고.
앞으로도 좋은 나눔 부탁드립니다.^^

[레벨:7]늘오늘

2006.12.06 05:26:25

정대진 님, 박상열 님, ...
체험과 성찰을 겸비한 멋진 글에 감동합니다.
품위 있는 글 앞에선, 설령 내가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가만히 기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정목사님, 혹시 긴장되지 않으세요? ㅋㅋ ^^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2.06 08:00:47

소망, 봄볕, 박상열 님들의 방언 경험은
아주 소중한 것들입니다.
앞으로 자신들의 영성 심화에 귀한 도구로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부분에서는 내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뭘 잘 모르는 거죠.
그래서 사실 좀 그런 경험에 대해서 배우고 싶다는 게
솔직한 표현입니다.
방언을 배운다는 게 아니라
그런 경험의 영적인 깊이를 배우고 싶다는 거죠.
종교적인 경험은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에크하르트 같은 신비주의자들처럼
자기의 영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게 필요합니다.
방언의 신비를 누가 한번 잘 설명할 수 없습니까?

[레벨:7]

2006.12.06 10:08:39

저도 방언을 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방언을 받았는데요.
부흥회 때인데 통성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혀가 꼬이면서 알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오더군요.
그게 정말 신기했습니다.
분명 나는 그런 말을 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런 식으로 말이 나오리라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냥 흘러 나오더라는 거지요.
제 동생도 그 때 저랑 같이 있었는데 제가 방언 기도를 하자
왜 자기는 그게 안되냐고 울더군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학교에 가려면 시골길을 30분 정도 걸어서 갔어야 했는데,
방언을 받고 난 후 이상하게도 등하교 길에 매일 바라보던 세상이 다르게 보이더군요.
한 일주일 정도쯤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고, 새롭고, 그냥 기뻤습니다.
그 체험이 너무 색다르고 독특해서 잊을 수가 없었는데,
똑 같은 경험을 나중에 한번 더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을 때였습니다.
사랑을 고백하고 고백 받았을 때 그 기쁨,
세상이 새롭고 아름답게 보이던 그 체험이
어렸을 적 제가 방언을 받고 난 후 체험했던 그 현상과 너무 똑같더군요.

지금도 저는 방언 기도를 하는데요.
저는 성격이 조용해서 통성기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혼자 조용히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럴 때 가끔 방언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방언의 은사를 받게 되었고
방언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나 사람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적도 없고..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신비함 속에서,
지금도 가끔씩 방언으로 기도합니다.

[레벨:7]

2006.12.06 11:46:47

정 목사님,

그런데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보편적인 언어"란 어떤 언어를 말하는 건가요?
주관성이 배제된 논리적, 수학적 언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레벨:1]고등어

2006.12.09 01:49:40

묵상방언은 자신조차 알아들을수 없는 신비한 언어로 사유하는 것이지 봄볕님이 방언이 정말궁굼합니다
봄볕님의 방언 경험을 보변적언어로 표현 해보시는건 어떠신지 신비현상이니 영원히 불가한건 가요?

[레벨:4]봄볕/ 정대진

2006.12.10 22:14:17

고등어님, 답글이 늦어 죄송합니다.

앞서 올린글은 나름대로 '보편적 이해'를 바탕으로 쓴건데
제 문장력이 많이 부족했나 봅니다.

'묵상방언'이라고 하신 부분은 방언의 내용을 구분하신게 아니라
'묵상할때 나오는 방언'으로 이해해도 되겠죠?

일단... 방언은 '사유'가 아니라 '기도'입니다.
사유가 기도일수는 있어도 기도가 사유가 아닌,
그 상관관계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미 인용한 고린도 전서 말씀을 다시 옮기자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14:2

라고. 사도 바울이 기록한 바와 같이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기도 입니다. 이는 기도를 하나님과 '사귐'으로 이해할때
(이것에 대해서는 김영봉목사님의 명저 '사귐의 기도'를 적극 추천합니다)
보다 선명하게 파악하실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님과 누군가 친밀한 대화를 하는데 그 대화가 누군가에게 '들린' 다면
그 사귐에는 어려움이 있겠죠. 반대로 단 두분만 대화할 수록
보다더 깊은 친밀함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그리고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아도, 비록 '알아들을수 없는 언어' 일지라도
그 무언가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깊이 확인하는 것이
진정한 사귐의 깊이겠지요.

'방언'은 이와 같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하나님과의
교제를 확인하게 하는 '신령한 은사' 입니다.
허나 이 은사는 교회 자체의 유익보다는 개인적 성격 보다더 강한 탓에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예언의 은사
(이것은 단순히 미래를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설교'역시 이에 포함됩니다.)를
바울은 보다더 높게 평가한 것이죠.

같은 종의 꽃씨라도 그것이 심겨진 토질과 기후에 따라
저마다 다른 향기와 빛깔의 꽃을 피워내듯
하나님의 은사도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열매 맺고
또 하나님께서 이를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때문에 타인의 은사에 대해 함부로 얘기할수 없는 것이고요.

앞서 설명드린 방언은 순전히 '정대진' 이라는 한 사람의 영혼에서
피워낸 은사에 불과합니다. 이를 통해 다른 '꽃'들과 유사점을 찾아낼수는 있어도
섵부른 일반화는 곤란하다는 점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렇게 또 분명 하나님께서 님에게 맞는 귀한 은사를 주셨을테고요.

오늘 교회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급하게 쓴탓에
흡족한 설명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훌륭한 문장가일수록 짧은 표현에 깊은 이해를 담아내는 법인데
이처럼 말이 긴것 보면 전 아직도 많이 부족한가 봅니다.

늘 평안하시고 뜻깊은 대림절과 성탄절 보내시길 바랍니다.

[레벨:0]Drizzle

2006.12.23 21:04:39

샬롬! 주님의 평안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제 소개를 조금만 하자면, 모태신앙의 축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다가, 말씀을 경험한지는 얼마 되지 않은 젊은 평신도로, 현재는 아이들을 섬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밝히자면 장로교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어를 잘 쓰지 않는 환경에서 오래 살다보니, 쉬운 단어를 선택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성경을 연구하다 의문점이 생겨서, 인터넷을 살펴보는 중에,
저는 오늘 목사님의 글들을 처음 보았습니다.
방언에 대한 말씀들과, 성령에 관한 글들, 평신도 목회나,
다른 목사님들의 비평글들을 읽어 봤는데요,
우선 제 개인적으로는 좀 무시무시한 글들이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방언이라는 것에 대해서, 위에서 말씀들을 잘 해주셔서,
저는 방언 통역에 대해서 지식이 아닌 경험만으로만 조금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목사님께서도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 때문에 잘 아시겠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이 가늠하기란,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방언이라는 것은, 남에게 득이 되는게 아니라, 나와 하나님 관계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신령한 은사임에는 정말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방언통역하는 것도, 사람이 설명하기는 참 힘이 듭니다.

아마 방언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스스로의 방언을 통역할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의 말중에, 영으로만 기도하면 혼은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혼)도 함께 기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통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방언을 할 적에, 마음으로 하는 기도가 바로 내 입을 통해 나오는 방언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본인들은 알수가 있습니다.
혹은 반대로 되는 경우가 있는데, 방언이 혼자 먼저 터지고 그것이 통역이 되는 경우입니다.
그것은 예언이 되는 경우도 있고, 응답의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이의 방언을 통역하는 것은, 특별한 때에만 허락하시는 것 같습니다.
신령한 언어,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기도일때가 있는가하면,
어떤 특별한 때에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의 방언을 내 마음에 통역으로 넣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바울은 적절히 사용하도록 권유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은사는, 그야말로 신령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것도 소홀히 여기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인것 같습니다.

모두들 알고 계시듯 성령이 임하시면,
은사는 선물로, 증거로, 누구나에게 오는 것입니다.
나는 가지되,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것을 자랑할수도 없는 것이고,
다른이는 가지되, 나는 갖지 못한 것을 시샘하는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모든 사람은, 모든 은사를 가질수 있고,
또한 모든 사람은 모든 은사를 가질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치유의 은사가 없는 사람을 통하여 치유를 하시고,
예언의 은사가 없는 사람에게 앞일을 말씀하여 주시고,
기적을 행한적 없는 사람에게 기적을 일으켜 주신다는 것을 저는 경험으로 조금 알수 있게 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사람들의 생각으로 한정을 짓는 것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시진 않으실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질서대로 사용된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에게, 아이들에게,
이 모든 성령의 역사보다 더 앙망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다가가는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질서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보니, 앞에서 말씀하신 글에 대해 한가지만 더 제 생각을 말씀 드리고 싶어요.
평신도 설교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 또한 질서가 성립이 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은 (-), 말씀은 (+) 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평신도라고 해서, 앉아서 설교를 듣기만 해서는 안되고,
목회자라고 해서, 성령의 능력만 행사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0 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평신도라고 해서 그저 목사님의 설교만 잠깐 앉아 듣고 가는 것보다,
새신자 한명이라도 같이 앉아서 말씀을 나누는 것이 수십, 수백배의 은혜가 임하는 것 아니겠어요?

성령은 내게로부터 흘러 나가고, 말씀은 내게 충만함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흘러 나가는 것이 없이 충만함만 쌓이면 병이 되고,
흘러 나감만 있고 충만함이 채워지지 않으면 또 병이 됩니다.

목사님도, 평신도도, 모두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에 의해,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Somebody 이고,
또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Nobody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적절한 답이 있잖아요?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는 각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설교자라고 해서, 모두 같은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고,
평신도도 때로는 설교자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또, 그러한 이유로 목사님들마다, 각각의 고유한 색을 지니신게 아닐까요?
한가지에 뛰어나시면 다른 한 가지에는 취약하실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나 목사님 할것없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말씀을 나누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죄송합니다.

가정에, 늘 주님의 평화와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성령이 충만하여 흘러 넘치시기를,
성탄의 기쁨이 넘치시기를 소망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2.23 23:46:04

Drizzle 님,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쓰신 글이군요.
생명의 영이신 성령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시는 것 같습니다.
늘 영과 동행하시는 삶, 은혜가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성탄!

[레벨:1]진리,자유

2007.01.06 22:41:20

예전에 이런 cf가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론 '에ㅇ콜 핸드폰 광고'였는데, 다수의 사람이 사용하는 에ㅇ콜 핸드폰을 자기는 전혀 부럽지 않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등장하고 이어서 그 사람의 속마음을 보여주는데 '사실 너무 갖고 싶다' 라는 것이 그 사람의 진짜 생각이라는 재미있는 광고였습니다.
저는 방언에 대해 방언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자문해 볼것을 종종 얘기합니다.
어쩌면 위 광고속 주인공 처럼 스스로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컴플렉스는 아닐지. 어쩌면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기에 비판하는 것은 아닐지, 어쩌면... 어쩌면... 하고 말입니다.

전 기본적으로 정용섭 목사님의 말에 상당히 공감합니다. 그런데 전 방언을 하고 또 방언이 주님 주신 은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의 위험성과 폐해를 또한 잘 알기에 공감한다는 것 입니다.

자신이 경험해 보고 오랜시간 생각하고 기도끝에 결단한 주장과, 경험이 없이 여러가지 이론적인 연구와 생각끝에 내린 주장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정목사님에게만 얘기하는 것이 아닌 방언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 및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제 글의 요지는 방언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논할때는 이러한 사항에 대해 충분히 자문하며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이자면 정대진님의 말에서도 간접적으로 언급되지만 정용섭 목사님이 성경의 문자주의자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표현하면서 언급하는 성경구절(예:“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니라.”) 등은 그 예를 드는 시기가 부적절하고 극단적이라 맞지 않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홍해기적 이야기와 막16:17-18을 하나로 묶어서 얘기하신 것은 맞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홍해의 갈리짐을 사실로 받아들이냐 아니냐는 차치하고) 이 부분에서 마가복음 16:17,18을 언급하는건 전혀 연관성도 없었고 정목사님이 우려하는 데로 막16:17-18절을 그런식으로 오해하고 문자화 하는 사람은 정말 없을 테니까요. 이건 반대로 홍해의 기적사건을 믿는 기존 신앙이 막16장 17-18을 문자화 해서 믿는 멍청한 신앙과 동격이 라는 말처럼 들릴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홍해사건을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신앙이 독을 마시고 뱀에 물려도 상관없어 하는 그런 멍청한 신앙과 동격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또한 성서에서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지금도 동일하게 일어나지 않는다고 성서의 기적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일수 없다는 것도 억지라 생각합니다. 저는 지구 전체의 역사속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초자연적인 기적행위를 항상 동일하게 행하시는 것이 아닌(물론 동일하게 하실수 있지만) 어느 특정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하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 시기와 엘리야/엘리사 시대, 신약에선 예수님이 시대와 초기 교회 시대 말입니다. 그후에 국지적, 제한적으로 부흥과 개혁이 있는 곳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즉 성서시대에 기록된 기적이 지금 재현되지 않는 사실만으로 성서의 기적까지 믿지 않는 것은 위험한 이론이라 생각합니다.(정목사님이 그러신다는 것이 아니라 간혹 지금은 일어나지 않는 다는 이유만으로 성서의 기적까지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노파심에^^)

*잠이 오지 않아 새벽에 글을 읽고 몇자 적으려던 것이 길어져 이제 졸음과 싸우며 글을 적고 있습니다.^^ 글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아 오해될 수 있는데 삐딱한 시각으로 쓴 글은 아닙니다. ^ㅇ^

[레벨:0]gido119

2007.01.06 20:50:57

윗 분들의 글들 재미있고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 경우에는 기도할 때 방언을 하는 이유가 좀 특이합니다.
(이하에 제 자랑을 좀 많이 할텐데 미리 너그러운 용서를 바랍니다.)

저는 통성기도시간(예를 들어, 새벽기도, 철야기도 등)에 다른 사람들의 기도소리가 상당히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통성기도를 하더라도 저는 아주 작은 소리로 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방언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즉,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하기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방언기도를 하는 것도 역시 상당히 다른 분들에게 죄송하고 부담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중간중간에 회개기도를 아주 큰 소리로 합니다. 이 때는 똑똑하게 우리말로 합니다.
(물론 저는 방언기도를 하기 전에 실제로 회개기도를 상당히 오래 합니다.
적어도 20-30분 정도를 똑똑한 우리말로 열심히 회개기도를 합니다.
물론 회개기도를 해야 그 방언이 나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눈꼽만큰의 양심은 있어서, 적어도, 기도하는 동안이라도 거룩한 상태가 되고자 하는 바램에서죠.
본 기도를 위한 준비기도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다른 분들은 제가 방언으로도 계속 회개기도를 하는 줄로 알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즐겁습니다.
나쁘게 보면 다른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수단이지만,
좋게 보면 다른 사람들의 기도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죠.

그리고 실제로 저는 소위 이런 방언으로 하나님을 더 감미롭게 찬양하고
제 미세한 감정, 격정적인 감정, 웅장한 감정, 항의 하는 감정까지 (어떤 때는 하나님과 씨름하듯이) 잘 표현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도 내용은 제가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고, 소위 방언으로 나오는 말들이
웬만한 실제 언어만큼 음절이 뚜렷하고, 다수의 표현들은 이미 제가 암기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제가 듣기에 제 방언에는 중동지방의 말들(히브리어, 아랍어 등)과 중국어의 톤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어와 영어톤이 아주 약간 섞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 느낌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음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반적인 어조(인토네이션)입니다.
이 어조가 매우 부드럽고 감미로우면서도 웅장하고 힘이 넘칩니다. (자랑이 좀 심하죠^^)

좌우지간, 우리말로 한다면 과연 내가 이렇게 열정적인 기도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옆에 계신 분들 신경 쓸 필요 없이 정말로 마음껏 기도할 수 있죠.
기도 시간이 보통 1-2시간 정도인데 거의 중보기도입니다.
저 자신을 위한 기도는 사실상 없습니다. 거의 결벽증일 정도입니다.
물론 우리말로 회개기도를 할 때는 '이 죄인을 불쌍히 보소서'라고 열심히 큰 소리로 합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는 중보기도 할 때가 더 힘이 넘치고 듣기에도 감미롭고 눈물 콧물이 많이 나지요.
손수건 하나 가지고는 부족하고... (ㅎㅎㅎ^^)
작은 수건 정도가 되어야 감당이 될 정도로, 특히 콧물을 많이 흘립니다.
제가 기도하러 갈 때 집에서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은 작은 수건(최소한 새 손수건 한 개) 입니다.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은 기도하러 교회에는 왔는데 콧물을 처리할 수단을 안 가지고 왔을 때입니다.(^^)
눈물이야 대충 손으로 휙휙 처리하면 되지만...

제게 있어서 이런 소위 방언은 은사라기 보다는 다른 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그리고 주님께 더 감미롭고 더 미세하고 더 웅장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
스스로 개발해낸 하나의 도구인 것 같습니다.

이런 도구를 개발해 내도록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드립니다.
다른 분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주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도구라도 만들어 내어 사용할 마음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소위 방언은 주님께 기도할 때, 그리고 통성 기도처 외에는 절대 사용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런 소위 방언기도를 할 때, 늘 가지고 있는 비장의 결의가 하나 있습니다.
'내 기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리 형편없이 들려도 상관하지 않는다.
내 방언기도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만 있다면.'
즉, '사랑을 위한 방언이 아니라, 방언을 위한 방언은 결코 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죠.(자기 자랑의 극치^^)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싸이먼

2007.01.20 15:37:23

방언에 대해 관심들이 많군요.. 댓글이 많은 걸 보니.. 얼마전 우리교회에 좀 황당한 일이 있어서요..
성결교회 출신 이신웅 목사가 방언 은사 집회를 하는데.. 방언하고 싶은 사람들 앞으로 나와라..하고서는
할렐루야 할렐루야.. 10번 복창.. 이런 식으로 계속하더라고요.. 민망해서 혼났습니다..
저 위에 봄볕/정대진 님의 글은 정목사님의 주장에 균형을 잡게해 주는 귀한 주장이라고 생각됩니다..
저 역시 정목사님의 많은 글들에 깊이 공감하며 은혜받고 있지만.. 방언에 대한 글에서는 정대진님의 글도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토론 부탁드립니다..

[레벨:1]전상규

2007.01.30 18:17:27

정대진님에게 고린도전서 2절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인용하신 부분에 대해서 일단은 동의합니다. 다만, 이해가 서로 다른 부분이 있어서 의견을 말하고자 합니다.
방언을 말하는데 어찌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는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니 내 마음속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다 들을 수 있는 분이시기에 내가 마음속으로 품은 생각까지도 당연히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이 하신 말씀은 '너가 방언으로 하는 말은 하나님이나 알아들을 수 있지 사람들은 통 알아들을 수 없으니 정 방언으로 말을 하려면 통역을 세우고, 통역 없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이나 알아들을 수 있는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고(14:9) 또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내 마음에 아무런 열매가 없음(14:14)'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을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방언기도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은데 정대진님이 말씀하신 '방언은 사유가 아니라 기도'라고 하신 부분은 성서 어디에도 '방언은 기도'라는 것을 찾을 수 없기에 근거 없는 이야기 인 것 같군요. 성서는 방언에 대해서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서만 언급하고 있으며 그것도 정대진님이 말하는 방언기도가 아니라 다른언어(Tongue)를 말하는군요. 왜 지금 우리 시대는 사도행전의 방언은 사라지고 고린도전서식 방언만 남았을까요?
잡지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
미국에서 목회 하시는 한인교회 목사 사모님이 미국 백인들과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깊이 하면 할수록 영어가 딸려... 복음의 진수를 전달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 사모님이 절규한 기도가 그 기사의 제목인데요, 그 하소연은 이러합니다.
"하나님! 제게 천 마디 방언보다 미국인의 심금을 울리는 한마디 영어를 주세요."

[레벨:4]봄볕/ 정대진

2007.01.30 19:46:58

전상규 님 친절한 답글 감사합니다.

우선 저역시 정용섭 목사님과 같이 방언이 성도의 생활에 근본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개개인에 적합하게 허락하신 선물로 이해하기 때문에
솔직히 긴논의가 좀 버겁긴 하지만 서로 다른부분에 대해
정리해야할 필요성은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마음으로 품은 생각까지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방언 기도의 경우 '소리를 내서' 기도할경우 개인적으로
아주 유용한 은사입니다. 그리고 이때 방언은 결코 광분할때만 가능한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주권가운데 소리의 크기에 상관없이 흘러나오는 기도이고요

님께서 인용하신 고린도 전서의 말씀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
'예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방언에 대해 적용되는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저역시 청소년 시절 그런 부끄러운 일을 아무 꺼리낌없이 했기 때문에
늘 거기에 대한 조심 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방언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방언이 '사유인지 기도인지'에 대해서는...
글쎄요... 분명 '기도'할때 흘러나오는 은사이고
이는 저뿐만이 아니라 꼭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할지라도
'기도'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고린도전서식 방언이 오늘날 교회의 일반적인 방언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닐 가능성에서도 충분히 긍정합니다.

다만 분명한것은 저와 제 어머니가 경험하고
주변 사랑하는 이들이 경험하는 방언의 은사가
하나님으로 부터 오지 않은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고

앞서 올린글과 같이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하다고도 결코 생각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식 방언에 대해서도 저역시 여러 일화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궁금한 부분이기도 하고요...
저의 독해력이 부족한 탓에 님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마터면 못읽고 지나칠 뻔했는데 따스히 답글 주셔서 정말 고맙고

성령님의 충만한 코이노니아가 님에게 넘치시길 바랍니다!!

[레벨:23]브니엘남

2007.02.14 00:32:37

방언에 대해 알려고 하면 반드시 사고행전 2장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정 2장의 성령충일(pletho)은 외적 충일입니다( 'in'이 아니라 'upon'입니다.) 우리의 위에 임하는 외적인 성령은 주로 말하기 위한 것임을 우리는 4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4절의 방언(tongues)은 5~8절에 의하면 지방의 방언들(dialects)을 의미합니다. 11절에 따르면 "우리가 그들이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말하는 것을 듣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방언이란 말은 헬라어로 "glossa"입니다. "glossa"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3절의 혀(말하는 기관)와 4절의 방언(tongues)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증거는 방언하는 것이 단지 "말하는 기관인 혀로 발성해 낸 목소리나 소리"라고 말할 수 있는 여지를 조금도 남겨 놓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보다 방언하는 것은 "어떤 지방어"임에 틀림없습니다. 위의 gido119님이 "제가 듣기에 제 방언에는 중동지방의 말들(히브리어, 아랍어 등)과 중국어"라고 말씀하시는 그 의미와 같습니다.
제 경험으로 "랄랄랄라"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방언이 아닙니다. 방언은 알아 들을 수 있는 어떤 다른 나라의 언어여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귀신들린 자도 방언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신약은 성령 충만(in, full)이 성령 충일(upon, be filled with)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성령충일(upon, be filled with) 밖에 없었지만 신약에서는 요한복음과 모든 서신서가 성령 충만(in, full)을 말하고 잇고 유독 사도행전만 성령충일(upon, be filled with)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충일(upon, be filled with) 은 사역의 영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지만 성령 충만(in, full)은 반드시 받아야 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대천득 신부님이 지으신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 받았는가"란 책을 꼭 사서 보십시오. 목회자들이 꼭 한 번은 보아야 할 책이라고 평신도가 과감히 권합니다.

[레벨:23]브니엘남

2007.02.14 23:01:23

somang님 시가 참 좋습니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관상 기도는 주로 카톨릭에서 많이 하는 기도인데요 본인이 주로 하시는 기도법입니까?
성 이나시오의 기도법이지요
그 방법을 간단하게 올려 주십시오

[레벨:0]가루

2007.03.20 17:51:43

70년 서대문 모 교회로(원조) 친구 따라 참석했었습니다 그 당시 인도하시는 분이 룰루랄라 따라 해보라했지만
하나님의 은사를 인위적으로 받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여 거부하였습니다 나를 그곳으로 인도했던 친구는 그 후로 아무 곳에서나 자랑스럽게 방언 기도를 했지만 그 친구는 지금 교회를 떠났습니다 방언의 능력을 받으면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전 온누리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교회 기도실에 자주 가는 편인데
많은 젊은 분들이 열심으로 방언연습하는게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나쁜 마음으로 들으려 하는 게 아니라 방언의 특성이 대부분 불협화음이 많은지라 옆에 있는 제 마음에 갈등이 생기는 원인이 됩니다) 개인 사견으로
무지 위험한 발상으로 여겨지는데 이런 마음이 잘못되엇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불협화음으로 들립니다
정말 성령으로 잉태한 방언이라면 귀에 거슬리면 제가 문제가 있던가 아님 방언을 하는 분에 문제가 있던지
둘 중 하나는 엉터리가 아닌지 감히 묻습니다

(50여 년간의 교회생활 동안 방언 기도는 뭔가 내세우기 좋아하는 분들이 그저 일반 성도들이 조용히 묵상 기도중인데 그들은 큰소리로 방언기도를 합니다 그럴 경우 전 가서 그 분에게 만류하면 대부분 눈이 똥그레져서 어찌할 줄 모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없어서 만류하지 못하였지만요.
정말 영적으로 기도하는데 제가 방해자라면 저를 꾸짖어야하는데 말이죠 방언의 은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인들에게 물어보시면 대부분 그들은 불협화음이라 대답하는 경우가 더 많으리라 사료됩니다 )

[레벨:0]!

2007.03.22 00:42:41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한 채 서 있는 기독교가 과연 기독교입니까, 철학입니까?
부활의 능력을 부인한 채 서 있는 기독교 신앙이 맹신입니까, 신앙입니까?
한국 기독교가 대체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 겁니까?

[레벨:0]섬돌

2007.03.29 20:18:08

엄청난 뒷북이네요....<<<< 오늘 첨 접해서 읽다보니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맨위 somang님 글 보고 잠시 전율을 느꼈습니다... 순전히 제 개인적인 전혀 객관적이지 않고, 때론, 너무 개인적이라고 할 수 도 있지만.... 뭐라 말할 수 없는 영적인 그 깊이에 부럽기도 하고요..
제 경험으로 보면,, 통변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깔리면, 개인이나 교회에서나 적지않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성화의 마라톤에서 작은 지도 조각을 하나들고 가는 기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너무 남 오용된 사례가 많아서,,,, 일부 교회에서는 거부되긴 하지만, 그게 핑계가 되서 성령의 은사 하나를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요..

[레벨:2]소나기

2007.04.12 23:45:23

몇몇의 특정인물들의 신앙행태를 트집잡아 전체를 싸잡을 마음은 없지만.
방언 또한 우리에게 흘러갈 뿐인 은사입니다.
태권도 단증 따듯이 '받았다'라고 말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받았으면 받은 겁니다.
그것이 신앙의 깊이나 증거가 될 순 없습니다.
방언이 불협으로 들리던 하모니로 들리던.
내용을 통역하지 못하는 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든 안하든 그것은 가타부타 할 수 있는 성질이 애초에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방언을 비밀스런 기도를 위한 방법적 차원에서 보는 것은
차치하고..
오늘날 다수의 예수인들에게서 은사 제일 주의 식의
은사타령은 일종의 기복주의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방언을 받는(-_-?)답시고 방언(?)을 녹음한 태잎을 듣고 다니는
성도를 만난적이 있습니다...
신앙의 레벨업이야 말로 내면의 그것이 되어야하고.
옆에 누어자는 마누라도 모를 정도로. 은밀한 하나님과의 작업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

제 생각에는 정말 맞다고 생각하는데..
기도라는 자체가 애초에 하나님과의 대화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이 듣는 것이 문제라면.
골방이나 침묵기도의 방법을 택하는 것이 합당하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셔서 방언을 말씀하게 하시면.
그 방언으로 인해 성도간에 사랑이 싹트고
교회가 세워지는 그런 일이 있어야 하잖나요?

바벨에서 인류를 흩으셨던 주님이.
오순절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러 언어의 족속을 하나같이(사실 하나) 다시 묶어 주셨고.
방언을 통해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이게 하기 위해..
사람이 세우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세운것이 그 모임. 바로교회 입니다.
사람이 세우려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이 흩으시지만.
성령으로 세우는 것은 하나님이 모이게 하시고 나누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십니다.
방언은 그런 역할과 임무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방언으로 기도를 하면 기도가 쉽습니다.
하나님이 해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방언(방언의 현상을 이거다 저거다 말하는 것은 접고)을 할때면.
제가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어서 하나님께 부끄럽던데요.
그래서 사랑한다고나 실컷 기도하곤 합니다.

그래도 예전 어렸을 때는 알수있는 외국어로 방언하시는 분들도 있었고.
해석해주시는 분들도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안타깝네요.ㅋ

방법이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전달만 되면 됐지.ㅋ
다만 할 수만 있으면 서로 양보했으면 좋겠네요.ㅋ
방언없이 기도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ㅋ
다른이가 방언해도 자유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ㅋ
저는 방언도 좋고 예언도 좋고.ㅋ
어디 아무개목사님처럼
'여기있는 사람 방언 다 받을 때 까지 기도 안멈춘다!'
그러시지만 안았으면.ㅋ
은사를 레벨업이나 획득하는 스킬로 생각하시지 않았으면.
그것은 이해의 문제지만.
받는 사람의 도리. 라고도 생각이 드네요.ㅋ

예전에 읽었던 좋지 못한 책의 글귀가 생각납니다.

'그는 한 때 기도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육신을 잊어버리곤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그런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기도의 불꽃에 자기의 몸을 불태우는 것을
신께서 원치 않는 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성을 넘어서려는 초인적인 노력속에 일종의 오만이 자리잡고 있다.
그는 한 인간이었고, 그가 신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은 그의 옆에 있었다.
신의 빛을 본 사람은 그 이야기를 하려 들지 말고,
빛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 만족해야한다.'

자야지.ㅋ
핑안.ㅋ

profile

[레벨:41]새하늘

2007.08.03 23:54:06

제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들을 일목요약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령 받은 증거가 방언이라고 말하는 교우, 방언 기도만이 최고의 기도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교우,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해야 되는 필수코스, 쥐어 짜듯이 내는 방언기도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듭니다.
저도 방언기도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될때만 되지, 제가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때나 되지는 않더라고요.
기도의 영이 열린 경험을 느낍니다.
문제는 제가 어쩌다가 대표기도 할때, 늘 더듬거리고 앞뒤가 안맞는 기도를 의지와 상관없이 즐겨 합니다. ^^!

방언은 신앙의 모습 중 하나이지, 결코 필수 코스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은밀한 대화에 방해가 된다면 차라리 폐하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가장 중요한것은 하나님과의 은밀한 대화속에 감격과 감사함이라고 적어 봅니다.
profile

[레벨:3]다미아니

2008.08.08 01:56:18

다양하고 좋은 의견 잘 보았습니다.

저는 주님의 부르심에 반항하다가 뒤늦게 신학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니는 신대원에서도 방언 문제가 나오면 의견이 반으로 나뉩니다.

어릴 적부터 전국 유명하다는 기도원이나 집회는 무수하게 다녔는데, 나중에 보니 이단이 많더군요.
한얼산 기도원에서 고 이천석 목사님이 방언 못하는 사람들을 짐승 취급하면서, 인위적으로 랄랄랄라 방언 시키는데 강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잠시 그런 방언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방언을 할 줄 모릅니다.
대신 저는 하나님이 다른 수많은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지금 전도사로 사역하는 교회는 여자 목사님이 담임이신데, 수요예배 때 마다 기도회를 하는데, 교인들 대부분이 방언으로 기도합니다.

얼마 전에는 방언기도 하고 싶다는 초등4학년 남자아이가 어른들 수련회를 대한 기도원으로 다녀오더니 방언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하는 말이.
목사님은 기도회 인도하실 때, 방언으로 하시는데, 전도사님은 왜 방언으로 기도 안하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언제 방언 받았냐 등등 많은 질문을 제게 하는데, 그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교만함을 읽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순수하고 예배에 열심이던 아이인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이 교회에 처음 면접 왔을 때, 목사님께 저는 방언을 잘 못합니다라고 얘기한 걸 후회했습니다.
목사님을 비롯해, 여동생인 권사님 등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방언도 못하는...' 그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은사들, 그리고 그런 것으로 인해 교회에서 모두가 기뻐하고 힘을 얻었던 모습들은 잊혀지고, 항상 방언 문제로 인해 저의 믿음 자체가 깎이는 것 같습니다.
제가 성격이 도덕성과 윤리를 중요시하고,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성격인데다가, 무척 외향적이지만, 음악 자체를 발라드류의 노래를 좋아하고 복음성가도 그런 노래를 좋아합니다.
물론 빠른 곡도 좋아는 합니다.
전도사이기 때문에 찬양 인도를 항상 하는데, 피아노의 위치 상, 제가 반주를 하면서 하지 못하고 반주기를 이용하다 보니, 흥을 돋우는 빠른 곡은 잘 안하고 느린 곡 위주로 합니다.
이게 어른들은 불만인 것 같습니다.
찬양을 하는 목적을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저는 늘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분을 Up 시키려고 하는 찬양...
그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느린 곡 위주로 합니다.
빠른 곡들은 아무래도 후렴도 몇 번 반복하고 해야 제 맛인데, 반주기는 그게 불편하니까요.

다시 방언 얘기로 돌아가서...
저도 주변에서 방언 기도 받고 기뻐 날뛰다가 결국 교회를 떠나고 방탕의 길로 돌아간 사람들을 무수히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방언을 받았다는 사람들에 대해서 큰 감흥이 없습니다.
물론 당사자에게는 기쁨이겠죠.
그런데, 진짜 신앙생활은 방언 이후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존 스토트가 말했던 "삶에서 변화가 없다면,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 말처럼, 방언이 한국 교회의 독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방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옥성호 집사님의 "방언, 과연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책도 다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공감했습니다.
목회자라면 그런 책을 쓰기 조차 어려웠을 테니까요.

방언 문제는 한국 교회에서 명확한 답이 내려지기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
어쩌면 위엣 분의 말씀처럼 제가 지금 방언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컴플렉스가 작용하지 않는가도 생각해 봅니다.
저는 방언 보다 다른 은사 주심에 정말 감사드리면서 살고 있는데, 방언 문제를 자꾸 부딪히니까 신경이 쓰이더군요.

방언 안하고, 목회를 해 보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것 또한 저의 교만이겠죠.
한국 교회에서 방언 못하고 목회 한다는 것은 정말 힘들테니까요...

주님이 주시면 받고, 안 주시면 그것 또한 주님의 뜻으로 알고 정진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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