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

조회 수 4924 추천 수 116 2005.02.02 23:36:57

하나님의 은혜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자주 쓰는 단어는 아마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에서부터 일상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대목에 이르기 까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이 ‘은혜’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는 순간은 거의 없다. 특히 마틴 루터에 의해서 ‘올라 그라티아’(오직 은혜)가 우리 구원의 기초라는 사실이 확인된 이후에 개신교 신자들의 입에는 이 말이 붙어 다닐 정도이다. 그런데 이 은혜라는 말이 우리에게 오용되는 경우는 없을까? 물론 하나님이 값없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을 모를 사람은 없겠지만 그 깊이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탓에 이 단어가 오용되고 왜곡될 위험성은 적지 않다.
많은 경우에 ‘은혜’라는 말이 신자들의 이성적이고 합리적 판단을 무력화하는 데 오용된다. 교회 안에서 주도권을 가진 사람들이 무리한 일을 추진하다가 반대에 직면하면 은혜로 풀자면서 그런 반대 의견을 억압한다. 예컨대 교회당 건축에 관한 회의가 열렸다고 하자. 한편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당장 교회당을 건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현재도 예배드리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다는 이유로 건축을 반대했다. 이런 경우에는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그 타당성을 충분하게 개진하고 서로 토의하는 과정을 통해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합리적으로 통일된 의견을 모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교권이 강한 쪽에서 무조건 은혜라는 말로 이런 일을 밀고 나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만약 은혜로 문제를 풀자는 말이 사람들의 합리성을 무력화함으로써 오히려 교권의 전횡을 가능하게 하자는 뜻이라면 이건 은혜라는 말에 대한 오용일 뿐만 아니라 모독이기까지 하다.
은혜의 오용은 예배와 설교 현장에서 자주 일어난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또는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습니다.” 하고 말할 때가 있다. 물론 좋은 말이다. 이 세상의 걱정거리로 울적했던 마음이 예배를 드리고 밝아졌다는 뜻이기도 하고, 불안한 상태에 있다가 평안을 얻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에게 이런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예배와 설교는 우리의 삶에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조심스럽게 생각을 가다듬어야 할 긴장이 있다. 사람들이 은혜를 단순히 자기의 감정과 심리 상태 안에서 벌어지는 어떤 느낌으로 여긴다는 것은 기독교적인 신앙에서 좀 위험하다.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칠지 모르겠으나 상당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들은 다음에 자기 기분이 좋아진 것과 참되게 은혜 받은 것을 동일시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세계가 인간의 실존 안으로 축소되고, 더 나아가서 도구화한다는 말이다.
은혜가 인간의 심리적 안정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면 기독교 복음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을 즐겁게 하려는 이 세상의 여러 문화 현상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현대인들은 술, 스포츠, 여행, 각종 취미활동으로부터 시작해서 정치, 대중가요와 티브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마음의 위로를 얻고 평안을 얻는다. 불행한 사태이지만, 우리가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요즘 교회에서 얻는 즐거움과 이런 문화활동을 통해서 얻는 즐거움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터인가 교회는 이 세상의 문화와 경쟁하기 시작했다. 예배를 ‘열린 음악회’보다도 더 감동적으로 꾸미고, 설교를 ‘개그 콘서트’보다도 더 재미있게 하며, 교회의 일들을 ‘한일 월드컵’보다 더 열정적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을 세상에 빼앗기지 않겠다는 생각이 우리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온누리 교회의 예배나 장경동 목사의 설교는 이렇게 보여주고 웃기고 감동시키려는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추세를 노골화한 것뿐이다. 아마 앞으로도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을 훨씬 유치하고 적나라한 자기감정의 포로가 되게 하는 문화현상이 그 속도를 줄이지 않을 것이며, 교회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사람의 감정 차원에서 확대 재생산하려는 추세가 계속될 것이다.
교회의 미래와 신앙의 본질을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이런 사태를 풀어가야 한다. 은혜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이 작용하는 방식에 치우쳐 있는 우리의 사태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받고 기쁘고 행복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좋은 현상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은혜에 접한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인간학적 반응에 불과한 것이다. 은혜의 내용은 우리가 규정하거나 우리가 생산해낼 수 있는, 우리가 마음대로 처리하거나 조작해낼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그 어떤 것이다. 그런 은혜를 깊이 경험한 사람에게는 다양한 반응이 나타날 것인데, 여기서 그런 반응까지 획일화한다면 결국 은혜는 그 역동성을 상실하고 만다.
결국 우리가 관심을 기울어야 할 부분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건에 대한 깊은 인식이지 인간의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반응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차이가 별 대수롭지 않거나, 또는 더 나아가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생명의 근거이신 하나님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그 하나님에게 의존적인 인간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 물론 두 가지 관심이 모두 필요하지만 말이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결정적인 문제는 겉으로만 하나님이지 실제로는 오직 인간에게만 관심을 쏟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가 신학(神學)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바로 이에 대한 반증이다.

profile

[레벨:41]새하늘

2007.08.17 14:13:50

하나님의 은혜(恩惠)?
하나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과연 은혜스럽다고 이야기를 할 수있는가?
인간의 감성적인 부분들만 자극하고, 눈과 귀 그리고 입을 막는 것이 은혜일까?
교회 안에서 수시로 은혜받았다고 이야기를 하는 분들을 보면, 내가 은혜가 없는 것일까?

신학단상에서 은혜에 대한 고민의 실마리를 잡아가 본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40 설교의 영성에 이르는 길 [1] 2005-05-05 4561
39 성서는 하나님을 직접 진술하고 있을까? [1] 2005-04-15 5050
38 삼겹살과 십일조! [4] 2005-04-06 7067
37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1] 2005-03-30 6400
36 역사와 계시 [1] 2005-03-28 4715
35 예수는 왜 그리스도인가? [6] 2005-03-25 6169
34 패션 모델과 설교자 [4] 2005-03-22 4711
33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까? [4] 2005-03-01 5024
32 죄?! [2] 2005-02-25 5572
» 하나님의 은혜 [1] 2005-02-02 4924
30 대강절 [1] 2004-12-06 4688
29 신학과 철학 [5] 2004-11-10 5021
28 외계인과 종말론 [2] 2004-10-13 5353
27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가? [4] 2004-09-15 6168
26 정치신학 [5] 2004-08-08 5147
25 설교와 하나님 나라 [3] 2004-07-12 4994
24 소극적으로 성서읽기 [4] 2004-07-01 5180
23 하나님 경험은 어둠이다. [2] 2004-07-01 5975
22 죽음 [2] 2004-07-01 5005
21 기독교 윤리의 이중성 [5] 2004-07-01 5640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