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다원고 가을호.jpg


어릴 적 서울 사촌 언니 Y는 방학이면 시골 우리집에 놀러 왔다.

뭐가 그리도 좋았는지 Y언니는 방학마다 내려와서 

옹색한 방에서 우리 형제들과 엉겨 지내곤 했다.

붙임성 있고 따뜻한 데다 창의적이어서 늘 재미난 놀이를 주도하는 Y언니를 우리 자매는 매우 따랐다.

부모님이 집을 비우기라도 하면 집안은 금새 Y언니를 선두로 한 졸개들의 놀이 마당이 펼쳐졌다.

Y언니는 석유곤로 불에 밀가루를 볶아서 미숫가루를 만들었고, 

우리는 그 볶은 밀가루에 사카린을 넣어 목이 메이게 퍼 먹었다. 

그러다 입을 열면 뿌연 밀가루가 연기처럼 뿜어나왔다.

 또 어머니의 한복 치마를 꺼내 무대랍시고 문고리에 묶어 놓고는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희곡을 대본으로 연극을 지휘했다. 말하자면 연출을 했던 거다..

 배역을 정해주고 어머니의 입술연지를 꺼내 분장을 시켜주면 한복 치마를 들추고 나와서 연기를 했다.

 그게 그렇게나 재미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부모님이 돌아오시는 기척이 나면 

황급히 무대를 치우느라 북새통을 떨었다..

 그 때마다 분통이 뒤집어지고 루즈가 나뒹굴고..한복치마가 방바닥에 널부러졌다.

 어머니께서는 난장판이 된 방안을 보시고 왠  두시럭이냐며 야단을 치셨다.

어머니의 지청구를 들으면서도 우리는 마약 같은 언니의 연극놀이에 혼을 빼앗기곤 했다.

사촌 언니는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청아한 목소리로 "콜로라도의 밤"을 부르기도 했다,

옆에서 흥얼흥얼 따라 부르며 나는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콜로라도"라는 그 미지의 땅을 막연히 그려보곤 했다.

TV도 없던 시절 언니가 들려주던 동화도 꿀맛이었다. 

 어느 여름 날 오래된 묘지 앞에 앉아서 

Y언니는 나와 내 친구에게 헨델과 그레텔 이야기를 해주었다.

소꼽친구가 가져 온 막걸리로 발효시킨 강남콩 박힌 빵을 먹으며 그 얘기 속으로 빨려 들었다..

아아..., 숨 죽이며 듣던 먼 나라의 동화, 그리고 그 숲.....! 

나는 아직도 Y언니를 대할 때마다 

헨델과 그레텔 이야기를 듣던 그 늦여름의 엷은 햇살과 수풀 냄새, 

그리고 강낭콩 찐빵의 맛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Y언니는 우리를 매료 시켰을 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의 전달자이기도 했다

논 위에서 스케이트란 걸  타 본 것도

텔레비젼에 토끼 귀 같이 생긴 실내 안테나가 붙어 있다는 것도 , 

 또 구경도 못한 바나나 껍질이 미끄럽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다 언니를 통해서였다,

이토록 사촌언니는  우리 혼을 쏙 빼어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언니가 오면 신바람이 났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방학이 끝나 언니가 떠나면 가슴이 텅 빈 듯 허전했다.

중앙선 기차가 다니는 간이역까지 사촌언니를 배웅하며

언니와 나는 늘 훌쩍거렸고 다음 방학을 기약했다. 

 나의 언니와 한 살 차이인 Y언니는 죽이 짝짝 맞았고

대여섯살 어린 나는 놀이에 끼어주지 않았다.

언니들은 귀찮아 하며 한사코 나를 따돌렸고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꼽사리를 끼고 싶어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사촌언니 Y도, 꼬맹이 나도, 울보 나의 언니도 모두 초로의 여인이 되었다.

사는 게 다 그렇듯 Y 언니는 녹녹찮은 세월을 넘기고

 이제는 도시의 아파트에 살며 비교적 홀가분한 말년을 보내는 중이었다, 

몇년  전, 내가 진안에 자리를 잡고 난 후 Y언니는 우리집에 내려와 하루 이틀씩 묵고 갔다.

난생 처음 고사리도 꺾고, 쑥이랑 감자도 캐고, 오이를 따고 밭에 잡초를 뽑는 등,

점점 시골 맛에 취하는 것 같더니

슬슬 귀촌을 하겠다는 마음을 내비치는 게 아닌가?

그 옛날 시골집을 찾아와 놀던 언니의 끼가 두꺼운 세월의 표층을 뚫고 되살아난 것일까.

갈 수록 닭장 같은 아파트가 답답하다고,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고,

가능하면 다 버리고  가볍고 소박한 삶을 살고 싶다고, 

더 늙기 전에 텃밭도 가꾸고 작은 화단도 꾸미고 싶다고 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사촌언니는 드디어

우리 동네 이장님의 배려로 이 마을에 작은 공간을 마련했고

 약간의  손을 본 후 내년 봄 이사를 할 예정이다. 

아주 좁은 땅에 작고 허름한 조립식 집을 계약하고 Y언니는 꿈에 부풀어 보인다.

"이 쪽은 꽃을 심고, 요기에는 야외 테이블을 두고 차를 마시면 좋겠지?"

이 소꿉장난 같이 작은 땅이 마치 자기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여기는 모양이다.

그런 Y언니에게서 나는 초로의 여인이 아닌 어린 소녀를 본다. 

그 옛날  두시럭을 떨던 감성소녀....!

사촌언니 Y가 이곳으로 내려온다고 하자, 

그녀와 절친인 나의 언니까지 들썩이는 게 아닌가!

 잿빛 도시를 탈출하고 싶다고,

커피 한 잔도  아파트 숲이 아닌, 푸른 하늘을 보며 마시고 싶다고....

이 때다 싶어 살짝 튕겨 본다.

" 언니들, 여기만 시골이 아니니까 좀 더 다녀보고 결정해요."

 언니들 왈," 얘, 그래도 아는 사람이 있는 곳이 낫지 않겠니? 

너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흠흠...

이럴 때 쓰는 걸까? 격세지감이란 말은.

옛날엔 어리다고 끼어주지도 않던 언니들이 이제는 내 주변으로 모이겠단다. 

같이 놀자는 것이다. 

암튼 진안에서 써 내려갈 사촌 언니 Y의 인생 3막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

이 지역 계간지 <잇다> 가을호에 실릴 글을 나눕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