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얼마의 시간이 허락되어 들어 와 글을 읽어 봅니다.
분명히 기독교 공간인데도 당최 믿음 가운데로 진입하지 않고
주위에서 빙빙거리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왜 이런가? 하고 의구심이 생깁니다.
제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이 생각은 비판이나 비난이 아니고 비평도 아닙니다.
의견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잠꼬대라고 여기셔도 좋겠습니다.
제 머리가 가벼워서 그렇겠지만 모르는 단어도 많고....... 해서 어림잡아 추리 해 보건데 이성으로 합리를 추구하는 기운이 강한 것 같군요.
믿음이나 하나님 등 절대성에 초점을 두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듣지도 못한 희안한 말이겠지만,
그렇더라도 긴장하지 마시고
마음을 풀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러면서도 진지하게 경청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 자리에서는 “정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경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책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해당 되는 정답이라는 것입니다.
즉 해명도 필요 없고 이성으로 분해할 필요도 없고 무슨 합리적인 것도 필요하지 않고
오직 믿음만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해답이기 때문에 믿음만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이성이란 대단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대단히 부끄러울 정도로 초라한 것입니다.
원래 사람이란 완전한 지식 위에서 풍요를 누렸습니다.
예를 들면
갓 태어난 새끼를 보십시오. 어미의 젖을 빨아 먹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젖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지식을 누가 가르쳐 주었습니까?
그 젖꼭지에서 젖이 흘러나온다는 지식도 뱃속에서 배운 후에 태어났는가요?
아무 것도 모르는 쥐새끼나 파리 한 마리도 온전한 지식 위에서 풍요를 누리는 것을 보십시오.
그러나 사람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대단한 것인 줄 알고 의존하지만
사실은 한 가지도 모른다고 보아야합니다.
그 지식의 원동력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름”이라고 하던데 과연 그렇습니다. (지식은 절대자만이 알고 있습니다)
사람과 창조물의 관계를 생각 해 보겠습니다.
사람은 원래 정직하게 지음 받았지만 꾀를 내어(전7:29) 하나님을 떠나 것은
창조물을 지휘할 수 있는 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즉 완벽하고 온전한 지식으로 창조된 창조물 위에서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박탈된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원래 지식이 필요 없었습니다.
지식으로 만들어 주신 창조물은 완벽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지식을 보태야 하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한 지식으로 만들어진 세상 속에서 누리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부도를 내자, 세상은 애를 먹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말라지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아담의 지혜는 (후손 아래로)세월이 흐름에 따라 잃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대가는 지식의 결핍이었습니다. 세상을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면 잃어버릴수록 지식의 필요는 더해 갔습니다.
저는 과학을 부정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몽땅 원수에게 넘겨 버렸으니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며 살아야 하니까요.
사기꾼에게 전 재산을 다 털렸으면 그 앞에서라도 구걸해서 살아야지요?
세상 통솔력은 다 깨져 갔으나..... 꾀는 살아 있으니, 이 꾀를 사용해서라도 물질을 사용 해 먹어야 하는 것이 과학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믿음으로 들어간 말이라서 기가 막힌 말인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일찌감치 말하기를 잠꼬대로 여기시라니까요.
이것이 바로 믿음과 이성(꾀)의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이 궁궐이라면
사람의 과학은 부셔버린 궁궐 부스러기로 만드는 하꼬방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꼬라지가 참 기막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지금 과학을 부정 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것의 절대성에 대한 허구(虛構)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과학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구슬픈 신세이긴 하지만
과학만능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새롭게 주신 성경에 대해서도 또 한번의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되겠습니다.
성경은 분해하고 따질 대상이 아니라 믿어야할 뿐입니다. 정답이기 때문이죠.
성경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세상 보다 크신 분입니다. 세상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이란... 최소한 세상을 창조하시는 그 솜씨 이상의 작업능력이 기록된 책입니다. 최소한의 단어를 이적이라고 합시다.
이적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그냥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추가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군요.
여러분들이 좋아하시는 이 세상..... 합리적으로 타당할 것 같으면 좋을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은 허상이며 상징(象徵)이며 비유(比喩)일 뿐입니다.
실상(實像)은 성경이며 비유는 인생입니다.
실상은 상상이나 공허의 세상이 아니라
그 세계에 해당하는 공간(空間)이 있습니다.
영원히 거(居)할 공간이 있습니다.
요6장에, 영원히 살게 해 주는 떡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부르게 먹은 이 세상의 떡은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것을 한 순간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아니 의심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이 십년 전에 결혼을 했는데 “나에게도 아내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한 순간이라도 한 적이 있습니까?
십 년 전에 집을 구입 했는데 “내가 집이 있는가?”라고 의심 해 본 적이 있습니까?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의심을 한다면 완전히 맛이 간 사람이죠.
여러분들이 그러한 의심을 단 1초도 할 수 없었던 그 수준으로
저도 영생에 대한 의심을 1초도 할 수 없었고 의심이 되지도 않았습니다.(30년 간)
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이성과 믿음의 차이입니다.
물론 이성으로 진리를 찾을 수는 있습니다. 왜요? 방가와요? 그러나 그 지식의 수준이 하나님 수준만큼이나 되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니 아예 백기 드시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솜씨를 마음껏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21 02:17)
분명히 기독교 공간인데도 당최 믿음 가운데로 진입하지 않고
주위에서 빙빙거리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왜 이런가? 하고 의구심이 생깁니다.
제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이 생각은 비판이나 비난이 아니고 비평도 아닙니다.
의견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잠꼬대라고 여기셔도 좋겠습니다.
제 머리가 가벼워서 그렇겠지만 모르는 단어도 많고....... 해서 어림잡아 추리 해 보건데 이성으로 합리를 추구하는 기운이 강한 것 같군요.
믿음이나 하나님 등 절대성에 초점을 두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듣지도 못한 희안한 말이겠지만,
그렇더라도 긴장하지 마시고
마음을 풀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러면서도 진지하게 경청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 자리에서는 “정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경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책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해당 되는 정답이라는 것입니다.
즉 해명도 필요 없고 이성으로 분해할 필요도 없고 무슨 합리적인 것도 필요하지 않고
오직 믿음만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해답이기 때문에 믿음만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이성이란 대단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대단히 부끄러울 정도로 초라한 것입니다.
원래 사람이란 완전한 지식 위에서 풍요를 누렸습니다.
예를 들면
갓 태어난 새끼를 보십시오. 어미의 젖을 빨아 먹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젖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지식을 누가 가르쳐 주었습니까?
그 젖꼭지에서 젖이 흘러나온다는 지식도 뱃속에서 배운 후에 태어났는가요?
아무 것도 모르는 쥐새끼나 파리 한 마리도 온전한 지식 위에서 풍요를 누리는 것을 보십시오.
그러나 사람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대단한 것인 줄 알고 의존하지만
사실은 한 가지도 모른다고 보아야합니다.
그 지식의 원동력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름”이라고 하던데 과연 그렇습니다. (지식은 절대자만이 알고 있습니다)
사람과 창조물의 관계를 생각 해 보겠습니다.
사람은 원래 정직하게 지음 받았지만 꾀를 내어(전7:29) 하나님을 떠나 것은
창조물을 지휘할 수 있는 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즉 완벽하고 온전한 지식으로 창조된 창조물 위에서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박탈된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원래 지식이 필요 없었습니다.
지식으로 만들어 주신 창조물은 완벽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지식을 보태야 하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한 지식으로 만들어진 세상 속에서 누리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부도를 내자, 세상은 애를 먹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말라지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아담의 지혜는 (후손 아래로)세월이 흐름에 따라 잃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대가는 지식의 결핍이었습니다. 세상을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면 잃어버릴수록 지식의 필요는 더해 갔습니다.
저는 과학을 부정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몽땅 원수에게 넘겨 버렸으니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며 살아야 하니까요.
사기꾼에게 전 재산을 다 털렸으면 그 앞에서라도 구걸해서 살아야지요?
세상 통솔력은 다 깨져 갔으나..... 꾀는 살아 있으니, 이 꾀를 사용해서라도 물질을 사용 해 먹어야 하는 것이 과학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믿음으로 들어간 말이라서 기가 막힌 말인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일찌감치 말하기를 잠꼬대로 여기시라니까요.
이것이 바로 믿음과 이성(꾀)의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이 궁궐이라면
사람의 과학은 부셔버린 궁궐 부스러기로 만드는 하꼬방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꼬라지가 참 기막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지금 과학을 부정 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것의 절대성에 대한 허구(虛構)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과학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구슬픈 신세이긴 하지만
과학만능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새롭게 주신 성경에 대해서도 또 한번의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되겠습니다.
성경은 분해하고 따질 대상이 아니라 믿어야할 뿐입니다. 정답이기 때문이죠.
성경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세상 보다 크신 분입니다. 세상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이란... 최소한 세상을 창조하시는 그 솜씨 이상의 작업능력이 기록된 책입니다. 최소한의 단어를 이적이라고 합시다.
이적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그냥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추가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군요.
여러분들이 좋아하시는 이 세상..... 합리적으로 타당할 것 같으면 좋을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은 허상이며 상징(象徵)이며 비유(比喩)일 뿐입니다.
실상(實像)은 성경이며 비유는 인생입니다.
실상은 상상이나 공허의 세상이 아니라
그 세계에 해당하는 공간(空間)이 있습니다.
영원히 거(居)할 공간이 있습니다.
요6장에, 영원히 살게 해 주는 떡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부르게 먹은 이 세상의 떡은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것을 한 순간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아니 의심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이 십년 전에 결혼을 했는데 “나에게도 아내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한 순간이라도 한 적이 있습니까?
십 년 전에 집을 구입 했는데 “내가 집이 있는가?”라고 의심 해 본 적이 있습니까?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의심을 한다면 완전히 맛이 간 사람이죠.
여러분들이 그러한 의심을 단 1초도 할 수 없었던 그 수준으로
저도 영생에 대한 의심을 1초도 할 수 없었고 의심이 되지도 않았습니다.(30년 간)
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이성과 믿음의 차이입니다.
물론 이성으로 진리를 찾을 수는 있습니다. 왜요? 방가와요? 그러나 그 지식의 수준이 하나님 수준만큼이나 되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니 아예 백기 드시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솜씨를 마음껏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21 02:17)
2007.05.21 23:00:13
장장 두 시간에 걸쳐서 적었던 글이 획 날아가 버렸네요.
너무나 아쉽고 어이없군요.
정말 열심히 적는다고 적었는데 영감을 놓고, 글을 넣을 때 어디로 숨었는지 사라졌는지........ 다시 적으려고 해도 아쉬운 마음에 도무지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
못 적는 글이지만 내용만이라도 유산으로 남기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데..... 기분이 함 빠지니까 잘 안적어지네요.
제 글은 몇 년 만에 읽어도 참 좋습니다.
비록 혼자 좋아 하는 수준의 글이지만 넘넘 좋습니다. 은혜스러워요.
몇 년 만에 읽어도 틀린 말이 아니니까 더 감격스럽죠.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는 내용이 아닐 겁니다. 성경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이 정도니 얼마나 조심스럽고 심혈을 기울인 글이겠습니까!!
그런데 날아가 버렸으니 참 힘 빠지는 일입니다.
지금은 한글에 적어서 복사로 넣겠습니다.
간단히 적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성은 아무 것도 아니랍니다. 그것을 개털이라고 하던가요? ㅎㅎㅎ
개털은 아무데도 쓸데없기 때문에 그런 말이 옛날에 유행 했는가 봅니다.
아버지를 따라 가는 아이를 보고
“얘, 그 사람을 따라 가는 이유가 뭐니? 너는 맹목적인 일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이는 “우리 아버지롱!”하겠죠.
“그건 속는 거야 따라 가지마!”라고 말해도
“나는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도 나를 알아요. 그래서 따라 가는 거예요.”라고 말하면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맹신이라고 하는 골짜기는 사실 사랑으로 메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24절부터 30절을 권하고 싶네요.
성경은 정답(완성)이라는 의미를 가볍게 버렸군요.
사람의 이성은 필요 없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지요.
정답에는 이성이나 합리적이거나 과학이 무색해집니다.
그러므로 따지지 않고 오로지 믿으면 하나님의 지식(생명)을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속지 않기 위하여, 맹신하지 않으려고 다 배운 다음에 믿겠다는 것은 함정입니다.
더 깊은 곳으로 빠지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지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이성이 없는 믿음은 맹신이요. 맹물입니다. 맹탕입니다.
반면에 믿음이 있는 자는 사람의 생각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있다면 과거에 가졌던 생각도 바로 고쳐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구원이라는 장벽을 생각 하면 스트레스 받기 십상입니다.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시인 하십시오.
이성으로 따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는 오직 감탄과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믿음을 얻으면 놀라운 이성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아쉽고 어이없군요.
정말 열심히 적는다고 적었는데 영감을 놓고, 글을 넣을 때 어디로 숨었는지 사라졌는지........ 다시 적으려고 해도 아쉬운 마음에 도무지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
못 적는 글이지만 내용만이라도 유산으로 남기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데..... 기분이 함 빠지니까 잘 안적어지네요.
제 글은 몇 년 만에 읽어도 참 좋습니다.
비록 혼자 좋아 하는 수준의 글이지만 넘넘 좋습니다. 은혜스러워요.
몇 년 만에 읽어도 틀린 말이 아니니까 더 감격스럽죠.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는 내용이 아닐 겁니다. 성경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이 정도니 얼마나 조심스럽고 심혈을 기울인 글이겠습니까!!
그런데 날아가 버렸으니 참 힘 빠지는 일입니다.
지금은 한글에 적어서 복사로 넣겠습니다.
간단히 적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성은 아무 것도 아니랍니다. 그것을 개털이라고 하던가요? ㅎㅎㅎ
개털은 아무데도 쓸데없기 때문에 그런 말이 옛날에 유행 했는가 봅니다.
아버지를 따라 가는 아이를 보고
“얘, 그 사람을 따라 가는 이유가 뭐니? 너는 맹목적인 일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이는 “우리 아버지롱!”하겠죠.
“그건 속는 거야 따라 가지마!”라고 말해도
“나는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도 나를 알아요. 그래서 따라 가는 거예요.”라고 말하면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맹신이라고 하는 골짜기는 사실 사랑으로 메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24절부터 30절을 권하고 싶네요.
성경은 정답(완성)이라는 의미를 가볍게 버렸군요.
사람의 이성은 필요 없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지요.
정답에는 이성이나 합리적이거나 과학이 무색해집니다.
그러므로 따지지 않고 오로지 믿으면 하나님의 지식(생명)을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속지 않기 위하여, 맹신하지 않으려고 다 배운 다음에 믿겠다는 것은 함정입니다.
더 깊은 곳으로 빠지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지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이성이 없는 믿음은 맹신이요. 맹물입니다. 맹탕입니다.
반면에 믿음이 있는 자는 사람의 생각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있다면 과거에 가졌던 생각도 바로 고쳐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구원이라는 장벽을 생각 하면 스트레스 받기 십상입니다.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시인 하십시오.
이성으로 따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는 오직 감탄과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믿음을 얻으면 놀라운 이성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2007.05.22 00:41:47
이성의 능력도 하나님 주신 것이니 쓰지 말라거나 개털로 본다면,
그건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생각과 일을 한다는 사람들치고 제대로 된 사람들 못봤습니다..
그건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생각과 일을 한다는 사람들치고 제대로 된 사람들 못봤습니다..
2007.05.25 10:43:56
네 당근 그렇지요.. 그런데 말씀하신 그 "이성의 제 위치"라는 게 무언지요?
저로선 애초에 인생해답님께선 이성은 필요치 않다는 논조로서 말하셨기에 드린 얘기였죠..
혹시 또 자신의 모순이 뭔지 모르시겠다면 님께서 이미 뱉어내신 글이 있으니 일일히 지적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저로선 애초에 인생해답님께선 이성은 필요치 않다는 논조로서 말하셨기에 드린 얘기였죠..
혹시 또 자신의 모순이 뭔지 모르시겠다면 님께서 이미 뱉어내신 글이 있으니 일일히 지적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2007.05.27 14:27:18
이성이 필요없다는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이성을 개입 시키는 것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답이기 때문에 "예" 밖에 없는 것인데, 이리저리 이성으로 의심한다는 것 자체가 교만이요 어긋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미선이님은 괜실리 시비를 거는 자세로 보입니다. 그리고 제발 좀 틀린 사상이 보이면 지적 좀 해 주십사 합니다. 잘못이 확인 된다면 고칠 수 있으니 이 또한 복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2007.05.27 14:32:35
사람이 만든 모든 말이나 행위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진리 밑에서만 맴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입니다. 생명의 떡입니다. 그러기에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수 있고 부활할 수 있고 영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육체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정답이기에 그냥 "예"하면 됩니다. 말씀은 정답이라는 의미를 전혀 이해 못하셨군요.
2007.05.27 14:51:21
하느님의 말씀은 정답 맞지요.
하지만, 정답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면, 그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닐 테지요.
즉, 정답을 받아들이는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므로,
정답을 내 지력(知力)으로 수납할 수밖에 없고,
이것이 해석학입니다.
물(物) 자체와, 그 물(物)을 인식하는 것은 다릅니다.
인간의 인식 행위와 해석의 문제에 대하여 파고들어가 보시기를 감히 충고드립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란, 컴퓨터의 명령 언어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지요?
주체적 사고 능력, 자유를 가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단순하고 순진한 발상에서 벗어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정답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면, 그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닐 테지요.
즉, 정답을 받아들이는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므로,
정답을 내 지력(知力)으로 수납할 수밖에 없고,
이것이 해석학입니다.
물(物) 자체와, 그 물(物)을 인식하는 것은 다릅니다.
인간의 인식 행위와 해석의 문제에 대하여 파고들어가 보시기를 감히 충고드립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란, 컴퓨터의 명령 언어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지요?
주체적 사고 능력, 자유를 가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단순하고 순진한 발상에서 벗어나시기를 바랍니다.
2007.05.27 15:16:18
해석을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 자체도 지식이니까요. 그런데 해석을 한다는 명분 아래 자연스럽게 수용해야할 말씀도 해석해 버리는 우를 범하는 느낌도 있습니다. 마치 완성된 자동차인데도, 분해한 자동차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정비는 하되 운전을 하지 않는 정비사 같은 느낌..... 중이 자기 머리를 않깍고 목욕탕 주인이 목욕 안하고.....제 생각이 너무 오버했나요? 아니면 해석을 너무 오버하셨나요. 시 한편 적죠. 몰라요 몰라요. 내가 하는 일 나도 몰라요. 알아도 알아도 몰라요. 어두운 길만 보이네?ㅋ 앗 다시! 어두움만 보이네. 떨어질까 모르겠네.박치기 할까 모르겠네. 언젠가는 보이겠지...... 이만 하고 심심한데 좀 있다 술 얘기 함 올리겠습니다.
2007.05.27 16:03:17
해석의 과다는 저 역시 경계하고, 싫어하는 바입니다.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지요. 절대 동감입니다.
그런데, 그게 또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니 문제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주고받는 말마디도, 저같이 언어학과 문학을 조금 공부했고,
신학 또한 맛본 사람이 쓱 훑어보면,
틈과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거든요.
신앙이란, 나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니,
지나치게 지성 일변도로, 분해로만 가서도 안 될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해 작업이 필요한 걸 어떡합니까?
저는 시계를 참 좋아하는데,
여느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냥 톱니 몇 개 물려서 작동하는 시계가,
대단히 심오하고 복잡한 기계거든요.
스위스나 일본의 시계 학교에 입학하면 맨 먼저 하는 것, 맨날 지겹게 하는 것이,
수백 개의 부품으로 된 멀쩡한 시계를 뜯었다 맞추는 것 반복입니다.
언어도 사실 그렇거든요.
인간의 삶이 언어 현상, 다시 말해 해석학적 현상일진대,
그 정점에, 하느님과 나와의 만남 사건이 있다면,
그 만남 가운데서 삶의 참 의미를 찾도록,
목사님, 신부님들, 신학자들은 전문적인 훈련과 연구를 부지런히 해야 되며,
그분들이 내 하느님을 대신 만나주는 것은 아니므로,
나 또한, 비록 전문적 수준에는 못 미칠지라도,
성령 안에서, 신앙 속에서, '온당한 이성'과 '감성', 그리스도교의 전통 가운데,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치우치지 않는 겸손하고 사려깊은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비록 젊습니다만,
예수 믿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인간이란, 늘 자신이 왕좌에 앉아 주인 행세를 하려는 자기지향성을 본능으로 갖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앙과 이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은 신앙에 필수입니다. 단, 성령 안에서, 늘 기도와 말씀 속에서 말입니다.
저도 술 좋아합니다^^
한 잔 하러 가자고 먼저 말 건네는 적은 거의 없지만,
어울려서는 잘 마신답니다.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지요. 절대 동감입니다.
그런데, 그게 또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니 문제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주고받는 말마디도, 저같이 언어학과 문학을 조금 공부했고,
신학 또한 맛본 사람이 쓱 훑어보면,
틈과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거든요.
신앙이란, 나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니,
지나치게 지성 일변도로, 분해로만 가서도 안 될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해 작업이 필요한 걸 어떡합니까?
저는 시계를 참 좋아하는데,
여느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냥 톱니 몇 개 물려서 작동하는 시계가,
대단히 심오하고 복잡한 기계거든요.
스위스나 일본의 시계 학교에 입학하면 맨 먼저 하는 것, 맨날 지겹게 하는 것이,
수백 개의 부품으로 된 멀쩡한 시계를 뜯었다 맞추는 것 반복입니다.
언어도 사실 그렇거든요.
인간의 삶이 언어 현상, 다시 말해 해석학적 현상일진대,
그 정점에, 하느님과 나와의 만남 사건이 있다면,
그 만남 가운데서 삶의 참 의미를 찾도록,
목사님, 신부님들, 신학자들은 전문적인 훈련과 연구를 부지런히 해야 되며,
그분들이 내 하느님을 대신 만나주는 것은 아니므로,
나 또한, 비록 전문적 수준에는 못 미칠지라도,
성령 안에서, 신앙 속에서, '온당한 이성'과 '감성', 그리스도교의 전통 가운데,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치우치지 않는 겸손하고 사려깊은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비록 젊습니다만,
예수 믿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인간이란, 늘 자신이 왕좌에 앉아 주인 행세를 하려는 자기지향성을 본능으로 갖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앙과 이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은 신앙에 필수입니다. 단, 성령 안에서, 늘 기도와 말씀 속에서 말입니다.
저도 술 좋아합니다^^
한 잔 하러 가자고 먼저 말 건네는 적은 거의 없지만,
어울려서는 잘 마신답니다.
2007.05.27 17:47:18
인생해답님.
방갑구요. 이야기하다보면 좀 길어질 것 같고, 소질도 없네요.
제가 믿음과 이성에 관한 책 하나 소개해도 될까요?
믿음이 이성과 신뢰 가운데서 균형을 잡는 것으로 보는 책인데...
합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듯해서요..
기독교와 역사: 믿음과 이해 로날드 내쉬 지음
좋은 주일..
방갑구요. 이야기하다보면 좀 길어질 것 같고, 소질도 없네요.
제가 믿음과 이성에 관한 책 하나 소개해도 될까요?
믿음이 이성과 신뢰 가운데서 균형을 잡는 것으로 보는 책인데...
합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듯해서요..
기독교와 역사: 믿음과 이해 로날드 내쉬 지음
좋은 주일..
2007.05.28 01:51:08
감사합니다. 건데 좀 적으시면 좋을텐데 아쉽군요. 사실 전 수없이 배우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서 읽어볼 자신이 없군요.
섬돌님도 또 배울겸 복습하는 기분으로 함 나열하시면 어떨까요? 간단명료하게라도.....
"좀 길어질 것 같다"라고 적은 것은 " 적을까?" 하는 망설임이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이왕 생각이 있었으니 함 적어서 이성과 믿음의 관계에 대하여 그 분의 핵심적인 내용이라도 알려 주시죠. 예!? 좀 부탁합니다.
전 기초가 없는 사람이고 어릴적부터 교회 출석이 전부였거든요. 그 이후로는 내 맛대로 생각하고 해석하고 맘대로 결론을 내리는..... 그래서 걸리는 것도 없이 스스로 신통만통 하여 참 진짜 신출귀몰 한 것 처럼 잘 나가고 있는데, 이거 아무래도 잘못달리고 잇는거 아닙니까? 차라리 갈수록 문제가 더 쌓인다면 정상일수도 있는데 당최 장애 없이 종횡무진이니 확실히 문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은근히 걱정되니 로날드 내쉬님의 브레이크라도 좀 빌렸으면 합니다.
아무렇게나 나열하지 않은 내용, 무개 있는 그러한 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섬돌님의 지혜로운 점은 좋은 것에로 인도 해 준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좋은 점을 계속 계발하시면 참 좋은 은사로 발전할 것입니다.
인생해답에게 책을 소개 하겠다는 좋은 마음씨에 저는 눈치 챘습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틀린 점이 발견된 모양이구나" 라는 섬광이 제대로 도착 되기를 바랍니다.
뭐 그리 중언부언 처럼 떠벌리느냐구요?
그러나 최소한 이 정도의 글 이상은 적어 주실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바램으로 만들어 본 샘플입니다.
샤롬.
섬돌님도 또 배울겸 복습하는 기분으로 함 나열하시면 어떨까요? 간단명료하게라도.....
"좀 길어질 것 같다"라고 적은 것은 " 적을까?" 하는 망설임이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이왕 생각이 있었으니 함 적어서 이성과 믿음의 관계에 대하여 그 분의 핵심적인 내용이라도 알려 주시죠. 예!? 좀 부탁합니다.
전 기초가 없는 사람이고 어릴적부터 교회 출석이 전부였거든요. 그 이후로는 내 맛대로 생각하고 해석하고 맘대로 결론을 내리는..... 그래서 걸리는 것도 없이 스스로 신통만통 하여 참 진짜 신출귀몰 한 것 처럼 잘 나가고 있는데, 이거 아무래도 잘못달리고 잇는거 아닙니까? 차라리 갈수록 문제가 더 쌓인다면 정상일수도 있는데 당최 장애 없이 종횡무진이니 확실히 문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은근히 걱정되니 로날드 내쉬님의 브레이크라도 좀 빌렸으면 합니다.
아무렇게나 나열하지 않은 내용, 무개 있는 그러한 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섬돌님의 지혜로운 점은 좋은 것에로 인도 해 준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좋은 점을 계속 계발하시면 참 좋은 은사로 발전할 것입니다.
인생해답에게 책을 소개 하겠다는 좋은 마음씨에 저는 눈치 챘습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틀린 점이 발견된 모양이구나" 라는 섬광이 제대로 도착 되기를 바랍니다.
뭐 그리 중언부언 처럼 떠벌리느냐구요?
그러나 최소한 이 정도의 글 이상은 적어 주실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바램으로 만들어 본 샘플입니다.
샤롬.
2007.10.25 14:49:04
상당히 지난 글에 댓글을 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분명 신앙은 이성과 동떨어진 것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성을 무시한 신앙 자체도 위험 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뜻은 아닐테지만-
전 신학자도 아니고 인문학자나 철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닌 그냥 펑범하기 그지 없는
보통(?)사람이며 평신도 입니다.
참고로 전 무명제님 말씀에 동의 합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설교시간에 말씀 하시더라고요..
자기 사전에 "성경공부"란 없다.
성경은 공부하는것이 아니고 이해하는것도 아니고 분석하는것도 아니고
단지 느낌으로 갖는 것이다.
교회가 엄청나게 큰데도 불구 하고 그 교회의
어떤 모임에도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은 없더라고요..그냥 기도 하는 모임만 있을 뿐,,,
전 그분 말씀에 엄청난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1. 그럼 신학을 하지 않아도 목회자가 되나? 과연 그래서 자신의 두 아들을 미국으로 신학과정
유학을 보냈나.? 무엇 때문에..? 여기서 열씸히 기도만 시키지?
2. 절대자가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를 우리가 그냥 느낌으로 다 알 수 있나?
3. 의도도 모르면서 무조건 맹신적으로 믿으면 그 믿음이 절대자의 의도에 적합 할 수 있나?
4. 절대자의 의도를 자신만의 느낌이나 감정으로 맹신하는 행위는 과연 진정한 신앙 일 수 있을까?
5. 그렇다면 왜 교회가 필요하고 예배시간이 필요하고 그중 핵심이라는 말씀 선포의 시간,
즉 설교가 왜 존재하면 행하여 져야 하는 것 일까...?
오늘날 수많은 행태의 종파와 교리를 보며..심지어 이단 삼단을 보며
이곳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깊은 공감을 하는 저로서는..신학을 하는 사람이든
어떤 학문을 하는 사람이든..그리스도인 이라면 물론 부족한 인간인 우리의 한계가
있겠지만..이성적으로,,합리적으로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의도를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 하다고 봅니다.
왜냐? 우린 어차피 우리만의 세계에서 살지 않습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와 다른 세계를 품고 사는 사람들과도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그 관계를 통해서 적어도 복음을 전하는 의무를 가졌다면,
최소한의 예의와 비 이성적인 행태를 통한 소통과 관계의 단절을 극복해야 하지 않을까요?
현재 제가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소통 단절 속에 있기에...괴로운 심정을 대변해 봅니다.
분명 신앙은 이성과 동떨어진 것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성을 무시한 신앙 자체도 위험 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뜻은 아닐테지만-
전 신학자도 아니고 인문학자나 철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닌 그냥 펑범하기 그지 없는
보통(?)사람이며 평신도 입니다.
참고로 전 무명제님 말씀에 동의 합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설교시간에 말씀 하시더라고요..
자기 사전에 "성경공부"란 없다.
성경은 공부하는것이 아니고 이해하는것도 아니고 분석하는것도 아니고
단지 느낌으로 갖는 것이다.
교회가 엄청나게 큰데도 불구 하고 그 교회의
어떤 모임에도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은 없더라고요..그냥 기도 하는 모임만 있을 뿐,,,
전 그분 말씀에 엄청난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1. 그럼 신학을 하지 않아도 목회자가 되나? 과연 그래서 자신의 두 아들을 미국으로 신학과정
유학을 보냈나.? 무엇 때문에..? 여기서 열씸히 기도만 시키지?
2. 절대자가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를 우리가 그냥 느낌으로 다 알 수 있나?
3. 의도도 모르면서 무조건 맹신적으로 믿으면 그 믿음이 절대자의 의도에 적합 할 수 있나?
4. 절대자의 의도를 자신만의 느낌이나 감정으로 맹신하는 행위는 과연 진정한 신앙 일 수 있을까?
5. 그렇다면 왜 교회가 필요하고 예배시간이 필요하고 그중 핵심이라는 말씀 선포의 시간,
즉 설교가 왜 존재하면 행하여 져야 하는 것 일까...?
오늘날 수많은 행태의 종파와 교리를 보며..심지어 이단 삼단을 보며
이곳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깊은 공감을 하는 저로서는..신학을 하는 사람이든
어떤 학문을 하는 사람이든..그리스도인 이라면 물론 부족한 인간인 우리의 한계가
있겠지만..이성적으로,,합리적으로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의도를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 하다고 봅니다.
왜냐? 우린 어차피 우리만의 세계에서 살지 않습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와 다른 세계를 품고 사는 사람들과도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그 관계를 통해서 적어도 복음을 전하는 의무를 가졌다면,
최소한의 예의와 비 이성적인 행태를 통한 소통과 관계의 단절을 극복해야 하지 않을까요?
현재 제가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소통 단절 속에 있기에...괴로운 심정을 대변해 봅니다.
이런 얘긴 어차피 1)전이성-2)이성-3)초이성의 단계만 인지한다면
이성과 믿음의 괴리가 주는 문제에 대해선 별 문제 없을 듯 한데..
결국 진정한 신앙은 이성을 배제하면서 넘어서는 게 아니라
이성의 극한까지도 써 본 뒤에도 여전히 남는 신비의 차원으로 몰입하는 게 아닐는지..
신앙은 이성을 훼손시켜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이성 역시 하나님 주신 것이니 올바르게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요?
문제는 이성에 대한 맹신이 문제일뿐이죠..
인간 이성도 얼마든지 오류가 있을 수 있기에 항상 열어놓아야겠죠.
궁극적으로 합리성은 인간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신에게 속한 것입니다..
인간이 이성에 대해 불신을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근대 합리성>의 차원때문이죠..
근대 계몽주의의 기획은 철저히 실패로 끝났음이 드러났으니까요..
사실상 근대 합리성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것은 실제론 <반합리성>이었던 거죠..
대체로 데카르트-뉴톤의 근대 세계관이 끼쳤던 영향들이었을 뿐..
가장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오늘날 흔히 이성을 불신하는 사람들이나 보수 기독교든 누구든 간에
사실상 대화를 하다보면 누구나 <논리적 합리성>에 기반해서 얘기하고
이를 취할 수 밖에 없음을 또한 인지한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공공의 영역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나마 신뢰할 만한 소통 기능을 해주는 게 바로 <논리적 합리성>의 요소란 사실입니다..
우리가 1+1=3이라고 전제할 경우 우리의 모든 대화들은 거의 소통불능으로 이어지기 십상일테죠..
물론 그렇다고 1+1=2가 절대 진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 여기에선 가능한의 최선으로서 소통되는 합리성이기에 수용하는 거져..
그것이 정말로 절대 진리인지 아닌지는 종말의 성취에 가봐야 알테지만..
결국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가능한의 최선을 요구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해답님이 말씀하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것의 절대성에 대한 허구(虛構)"는
이미 과학진영에서도 말하고 있는 바며, 그런 얘기가 자칫 이성을 쓰지 말라는 얘긴 아닐진대
그런 쪽으로 곡해될 수 있는 우려또한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인들이 흔히 저지르는 오류의 유형들]
http://freeview.org/bbs/tb.php/d002/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