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43강입니다. 지난주부터 저희들이 성령에 관한 항목을 공부하고 있어요. 판넨베르크의 책으로는 제11장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할때 성령에 대한 부분은 별로 생각을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사실 그게 성령만 그렇겠습니까? 사도신경 자체만 그냥 기계적으로 신앙고백할 뿐이지 그 내용을 일일이 새김질 하면서 하지는 않는것 같아요. 우리 예배와 신앙이 습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인데, 고치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치는 것이 쉽지는 않지요.

이 사도신경이 포함된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개 종교의 습관에 머물러 있어요. 거기에 집중하기가 쉽지는 않는겁니다. 그냥 지나가는 거예요. 그런 것들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게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니까 대신 다른 걸로 채우려고 합니다. 볼거리나 들을 거리를 통해 예배를 이벤트화 하는 겁니다. 찬송을 다이나믹하게 한다거나 설교를 개그처럼 한다거나요. 예배를 시청각적인 자료를 통해서 청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그러한 것들을 찾는 거죠. 흔히 말을 하는 열린예배가 그렇습니다. 꼭 열린예배라고 하는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대의 예배가 그런쪽으로 많이 흘러가고 있지요? 우리 개신교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개신교에서도 루터교회나 구세군이라든 성공회까지 포함해서 예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러한 교회는 아니죠. 그 외에 다른 교회들이 다 그렇게 가고 있거든요. 특히 우리나라가 그렇습니다. 성공회, 루터교, 구세군을 이야기했습니다만 그런 교회들은 비교적 예배에서 자기들의 전통을 잘 지켜 나가려고 합니다. 그 이외의 교파에 속한 교회들은 자기들의 전통이 거의 없다고 봐야죠. 장로교회가 장로교 전통을 갖고 있을까요? 감리교, 순복음이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성회, 침례교회도 마찬가지요. 한국에 있는 모든 교파들은 하나의 색갈로 단순화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제도는 주로 교권이 작동하는 당회 중심이구요. 예배는 열린 예배라는 특징인데 꼭 그렇게 말하기는 힘든 거라서요. 적절한 용어가 빨리 나오지 않는군요. 예배방향에서는 전통적인 예전을 다 없애고 그 현대적 감각의 복음성가와 목사들의 예배 훈련이 일단 없어서 그렇구요. 신학적인 어떤 마인드, 이런 것들이 부족하구요. 두루두루 여러가지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사도신경인데요. 사도신경을 암송하면서도 우리는 그 내용들을 별로 생각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그것을 함께 암송하는 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특히 내용중에서도 성령에 대한 내용은 짧게 되어 있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영적으로 와 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도신경의 3번째 항목인 성령에 대해서 판넨베르크의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지난번 공부의 마지막 단락에 이은 역주가 있어요. 고 거를 잠간 설명하고 그 다음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그 역주로 달아놓은 것은 성령이라고 하는 독일어 단어예요.

*성령으로 번역되는 독일어 'der 데어 정관사구요. Heilige 하일리게 거룩한 Geist' 가이스트 정신입니다. 영이라구도 하구요. 데어 하일리게 가이스트에서 Geist라는 단어는 여러가지 뜻이 있습니다. 가장 흔한 것으로는생명, 생명력, 활력, 정신, 마음, 영혼 등 여러 가지 뜻을 갖고 있다. 가이스트를 영어로는 spirit, mind, soul 등으로 번역이 됩니다. 특별히 영, 마음, 혼으로 되잖아요. 이 몇가지를 독일어로는 가이스트로 통일하고 있어요. 독일어에 비슷한 뜻의 Seele 젤레라는 단어가 있긴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육체와 반대되는 개념인 영혼을 뜻한다고 한다면 Geist는 인격적이고 창조적으로 활동하는 능력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확실하게 구별된다. 그러니까 차이가 있는거죠. 가이스트가 훨씬 더 역동적이라고 할까. 그렇게 쓰임새가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성령이라고 할 때 der Heilige Geist라고 해야지. die Heilige Seele는 안된다. 이거는 성령은 아닙니다. 이 단어라고 하는 것이 하루 이틀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 민족이 걸어온 역사의 흔적을 통해서 생성되는 어떤 사건이기 때문에 이렇게 그 민족이 쓰고 있는 단어를 다른 민족의 언어로 번역해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이스트라는 단어를 우리말로 번역하기는 어려운 거죠. 히브리어로 루아흐, 헬라어로 프뉴마라고 하는 단어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용어를 국어사전이나 신학사전이라도 좋구요. 그런데 나온 몇가지 설명만으로 다 안다고 말하기 힘든거죠. 거기에는 어떠한 세계가 있어서 세계안으로 들어가서 그러한 내용들을 충분하게 이해하는 그러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 성령이라고 하는 단어도 그렇고 사실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단어도 그렇구요. 모든 성서와 신학에서 나온 단어들 용어들이 다 그렇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한국말을 쓰는 우리가 외국 언어로 나온 성서와 그 신앙과 신학을 따라간다는 게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닙니다. 판넨베르크는 이 장에서 성령을 기독교적인 경건주의나 인간론적 실존 차원이 아니라 정통적인 삼위일체론에 근거해서 창조와 사랑의 영으로 설명하고 있다.

네 오늘은 판넨베르크 책으로는 167쪽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항목에서는 성령론의 교회사적인 근거들이 설명되어 있어요.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이러한 교리사적인 배경을 공부하는 게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데 중요한 것들이죠. 왜냐하면 바로 앞서 제가 어떤 신학적 용어가 역사적 배경에서 나왔다고 말씀을 드렸듯이 교리사와 교리사에 나타났던 신학적 논쟁을 우리가 따라가면 그 논쟁이 말하려고 하는 어떤 근본을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거죠. 접근할 수 있죠. 그런점에서 교리사, 교리사 공부는 중요합니다. 물론 이 항목이 본격적인 교리사가 아니라 성령의 관계된 간략한 내용이니까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복잡한 것도 아니구요. 필요한 것만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신조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제한적으로 언급되었던 성령에 관한 항목에다가 일련의 해석적인 진술을 첨가했다. 여기 두가지 공의회가 나오죠. 하나는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 공의회와 하나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입니다. 이 두 공의회가 기독교 신앙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4세기죠. 하나는 4세기 초, 하나는 4세기 말입니다. 참고적으로 이 공의회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종교회의인데요. 전체 기독교를 대변하는 사람들이 모인 회의죠. 그런데 이 회의를 그 당시에는 세속 군주인 로마황제가 소집했다고 하는거예요. 참 재미있죠. 왜 그렇게 했는지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거예요. 지금은 다 교황이 소집하지 않습니까? 그때도 당연히 교황이 있었을텐데요. 교황이라고 불리웠는지 아니면 로마의 주교로 불렸는지 제가 정확하게 말씀드릴 입장이 아닙니다. 교황제도가 정확하게 자리잡게 된게 제가 세계 교회사에 대해 충분하게 지금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딱 끊어서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교황제도가 처음부터 확고하게 자리잡았던 것이 아니거든요. 그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어느때 이르러서 로마교황의 권위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사실은 이게 교권의 역학관계가 자리하고 있어요. 교황은 로마의 대주교가 맡았잖아요. 그전에는 이 기독교가 로마 중심은 아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도 있었고요. 콘스탄티노플, 동로마에도 있었고 곳곳에 강력한 기독교 체제가 있었던 거예요. 이것이 계속 알력관계이기도 하고 협력관계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서로 그러는 과정에서 결국 세속 정치와 맞물려서 로마 대주교가 전체 기독교를 대표하는 자리를 획득하게 된 겁니다. 거기에 연관된 복잡한 문제가 있겠지요. 대주교들끼리의 대립들이 많이 있었겠잖겠어요. 특별히 서로마의 대주교와 동로마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인 성소피아성당이라고 하는데요. 둘이 계속 대립했습니다. 결국은 11세기에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네 325년 니케아공의회를 주관한 사람은 그 유명한 콘스탄티누스죠. 황제입니다. 콘스탄틴 대제죠. 그 사람이 세운 도시가 콘스탄티노플이구요. 325년에 세속군주가 종교회의를 열어서 중요한 신학적 논쟁들을 결정했습니다. 381년에는 테오드르 대제인가요. 세속군주가 소집을 한거구요. 이 두 회의가 중요한데 판넨베르크 설명에 따르면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결국 325년에 열렸던 니케아공의회의 성령에 관한 항목을 더 설명했다고 하는겁니다. 세가지라고 하네요.

첫째로 성령은 '살리는 자'라고 일컬어지며, 다음으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라는 점이 다층적 관점에서 설명되고, 마지막으로 성령이 예언자들과의 연관에서 언급된다. 성령에 대한 이러한 첫 규정은 사실상 기본적인 것이다. 즉 성령은 생명의 근원이며, 따라서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라고 말이다. 4세기에 열렸던 중요한 공의회에서 성령을 이렇게 광범위한 보편적인 생명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설명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예요. 살리는 영, 살리는 근원, 생명의 근원, 이렇게 성령을 이해한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성령이라는 것이얼마나 포괄적입니까? 네. 초기 기독교 교부들과 교부이후들과 4,5세기 신학은 지금보다 훨씬 더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런 전통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구요. 여기서 보편적이라고 하는것은 기독교가 진리의 논쟁에 깊숙이 끼어 들어갔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두려워서 우리끼리만 아는 그러한 비밀이야 요식으로 자기자신을 축소시키지 않았다고 하는 거죠. 세계전체에서 벌어지는 생명, 진리의 차원에서 기독교를 해명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요소에요.

그런 것들이 현대에 넘어 오면서 없어지고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요. 굉장히 협의로만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개인주의화 되어 버렸다고 하는 거예요. 쉴라이에르마허가 종교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인데,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것들이 개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을 강조하는 거죠. 쉴라이에르마허가 이유도 없이 그렇게 말하지 않는겁니다. 그 방식으로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될 어떤 배경이 있었던 거죠. 더 이상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보편적 진리논쟁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는 그 상황을 앞에 놓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굉장히 복잡하게 벌어졌던 근대주의 이후로의 기독교의 자기 축소의 결과입니다. 어쨌든 기독교의 출발은 개인의 신앙에만 머물지 않고 훨씬더 보편적인 차원에서 자기를 해명해나갔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게 바로 변증신학인거죠. Apoligetic 이라고 합니다. 참고적으로 한 말씀만 드린다고 한다면 21세기에는 다시 4세기의 이러한 신학적 전통이 회복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언어로 이야기를 하는 종교라고 한다면 21세기에는 용납되지 않는거죠. 용납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소종파로 나가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도 될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 전체를 구원의 대상으로 여기고 그 구원의 타당성을 해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렇게 자기들끼리만의 종교적 희열로 끝나는 자폐적 소종파로 떨어질 수 없는 거죠. 적극적으로 보편적 진리의 차원에서 자신을 변증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하겠지요. 21세기에는 과학이 새롭게 더 적극적으로 인간과 세계를 규정하는 힘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 우리가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소종파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영에 대해서 성서가 가장 기본적으로 피력하고 있는 사상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낯설어 보인다. 생명의 영이라고 하는 이러한 사상이 낯설어 보인다는 것이죠.

우리는 이 낯설음을 한두 번 불안하게 느낀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오랫동안, 그리고 여러 차원에서 성령을 매우 좁은 의미로 해석해왔다. 즉 성령이 무엇보다도 초자연적인 것의 원리로서, 무엇보다도 초자연적인 신앙의 인식으로서 다루어졌다는 말이다. 어려운 말이 아니니까 그냥 나가겠습니다. 기독교 전승이 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불가해한 것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전혀 자기를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신앙적 진리는 이성을 통해서는 결코 밝혀질 수 없고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으로 인해서 성령은 점점 더 무언가 완전히 비밀스러운 능력으로 간주되었다. 이 능력을 통해서 전적으로 불가해한 것이, 즉 모순적인 것이 합리화되어야만 했다. 네... 이러한 흐름들이 우리 기독교 안에 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는 거죠. 성령을 좁은 의미로만 이해하는 거죠. 초자연적인 원리로만 말이죠. 기독교 신앙은 이성적으로 옳고 그르다고 하는 그러한 판단은 완전히 배제해버리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다된다는 이런 식입니다. 이게 바로 한국 교회 신앙의 정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무조건 믿으면 된다고 하는거니까요. 성령 충만함 받으면 된다는 것이니까요. 성령도 생명의 근원 이런 차원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이해되는 거죠. 어떤 집회같은 데서는 성령을 받아라 이러한 이야기도 하구요. 믿습니다 아멘 이런 방식으로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구요. 이건 정말 불신앙적인 것인데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 더욱 고착되었다. 고대나 중세 교회 때는 기독교의 신앙진술이 나름대로 그 내용을 논증해나갔다. 보편적 언어로 해명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현대에 들어와서 오히려 수세적 입장으로 빠져들었을 때 자신이 논증할 수 없는 그것을 성령에 대한 암시에 근거해서 신앙적 우월성을 주장함으로써 이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다. 이런 이야기예요. 뭐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낫겠군요. 진화론같은 것들이 막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에 대해서 교회가 논리적으로 자기를 방어할 수 없게 된거예요.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거죠. 그러니까 점점 수세에 몰리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논리는 아무 논리의 논쟁속으로 들어갈 생각은 않고 성령을 받으면 된다. 성령은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진리를 깨우치게 된다. 아까 앞에서 예를 든 쉴라이에르마허의 ‘절대의존의 감정’같은 개념들이 나오게 되는 거죠. 종교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진화론이라든지 천동설이라든지 지동설의 관계들 이러한 과학적 근거와는 상관없이 절대의존의 감정일 뿐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면 진화론적인 세계관앞에서 자기들이 허물어지지는 않고 자기들을 보존할 수 있는거죠. 그러나 수세적인 거죠. 점점 점점 계속 줄어들어서 이제는 세계 문제에 대해서는 발언할 거리가 하나도 없이 그냥 개인의 종교적인 위안감만 주게 되는 거죠. 결국은 이러한 방식으로 민중의 아편처럼 떨어지게 되고요. 집단적 노이로제 현상같은 것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태도는 기독교 사신이 감당해야할 진리론적 질문 앞에서 사뿐히 벗어나려한 일종의 도피로는 아니었을까? 판넨베르크의 비판적인 질문이예요. 이런 태도, 앞에서 주욱 이야기한 이러한 태도는 기독교 사신, 복음선포가 감당해야 할 진리론적 질문에서, 진리론적 질문요.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진리론적 질문은 논리성이 필요한 거겠죠. 이성적인 판단이 있어야 이러한 진리론적이 질문과 맞설 수 있겠죠. 이러한 것에 대해서 도피하고 싶다고 하는 생각이 거기에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의 비판 사상이 제시하는 질문에 맞서 기독교 전승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기독교의 성령론을 무화과 잎사귀로 사용함으로써 성령론이 불필요하게 되고 그것의 가치가 떨어지게 된 것은 아닌가? 재미있는 표현이죠. 성령론을 무화과 잎새요. 아담과 이브가 수풀에 숨어서 벌거벗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무화과 나무 잎새를 가렸잖아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옷을 입혔다고 하셨잖아요. 부끄러움을 가리는 그러한 장치죠. 그러나 이거는 무화가 잎새에 불과해서 시간이 지나면 다 시들어 버리고 수치가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일들은 부지기수로 일어나죠. 특별히 한국 교회는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한국교회가 특별히 병들었다고 한국 교회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너무 빨리 부흥했기 때문에 거기서 벌어지는 부산물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에서 압축 성장 이런 것으로 인해서 경제구조가 굉장히 불건강하지 않습니까? 부에 대한 개념을 인식하기도 전에, 그리고 자본이 몰고올 악에 대한 충분한 반성이 있기도 전에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에 경제적으로 풍요로와져서 결국 졸부들이 그 돈을 어떻게 써야할 지 모르는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입장인거죠. 기독교 신앙도 비슷합니다. 한국 사회에 대한 분석에서 그런 것이 이미 많이 연구되었을 겁니다. 군사 독재 시절과 그리고 성장일원론적인 경제 수출 정책 급속한 경제발전과 기독교의 양적 성장이 맞물려 있습니다. 군사독재,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 비정상적인 정도의 발전, 기독교의 비정상적인 성장, 이런 것들이죠. 우리는 이러한 한국 교회의 그러한 약점이라고 할수 있어요. 충분하게 신앙이 성숙되지 않는 상태에서 덩치만 커졌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툭하면 성령을 그런 방식으로 이용하는 거죠. 이런 방식으로는 기독교가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시키기 힘들 겁니다.

이 경우에 성령의 역할을 교회의 제도적 관심이나 개인주의적 경건성에 대한 관심에 둘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사실상 부수적인 의미다. 전승된 교리에 대한 비판적 질문에 직면해서 일종의 모험적인 자세로 구체적인 논쟁을 벌여나가는 대신에 성령을 바로 이러한 일에 한정시킴으로써 현대의 비판정신으로부터 교묘히 빠져나가는 면역만 키워나갈 수 있었다. 그렇죠. 한국교회의 무비판주의, 병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시죠. 그런 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미명으로 호도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적 경건에 대한 경험은 그 경건의 내용을 인간학적으로 명백하게 세워나가는 일과 상관없이 점점 더 그 기초를 상실해가는 초인간적 확신으로 빠져들었다. 네 그렇죠. 경건과 인간학의 관계문제이거든요. 경건의 어떤 모양에만 치우쳐 있는 그러한 것을 말하는 거죠. 아무래도 이거는 보충설명을 해야 하겠네요. 기독교의 경건이라고 하는 이것은 기도, 예배, 찬송, 친교 등등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적인 경건이 그 분명한 인간학적 토대에서 해명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 없이 초인간적인 확신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요. 보세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푯말을 들고 걸어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예수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신앙적인 이름으로 합리화된단 말이예요. 이거는 인간학적인 토대가 전혀 없는거죠. 동네 사람들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힘으로 밀어부쳐서 거기에 교회당을 어떻게 짓는다거나 하는 것이 모두 믿음으로 합리화된다 말입니다. 초인간적 확신이죠. 현실감이 없는거죠. 여기서 인간학이 무조건 기독교 구원론에 절대적인 기준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도 오늘 현대에서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삶의 기준들, 이런 것들을 몽땅 다 해체시켜 버리고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방식의 기독교의 경건성이라고 한다면 이거는 정말 우스운 모양인거죠. 점점 더 그런 초인간적 확신으로 빠져드는 겁니다.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이해인거죠.

더군다나 권위적인 방식으로 확신을 주려는 관심과 절대적인 확신을 경건하게 경험하려는 관심이라는 두 동기는 상호작용을 통해 형식적인 권위 신앙으로 빠져들었다. 그러한 관심은 기독교 신앙으로 하여금 인간학적으로 믿을만한 근거를 모색하지도 못하게 했다. 이 권위적 신앙이라는 것은 현대적 상황 하에서 더 이상 교회조직의 객관적 힘을 통해 보호받을 수 없으며, 더 이상 교회가 세계를 지배할때가 지났으니까요. 이제는 오히려 그 기초가 유명무실하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말하자면 권위적 신앙이라는 것은 주관주의적 자유의지이며, 절대적인, 그리고 의심을 단번에 요절내는 확신의 비합리적 요청으로서 절대적인 권위에 따라오는 이런 저런 문제점들을 간과하게 만든다. 믿는 자로 하여금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라는 강요는 권위적 태도와 광신적인 모습의 잠재적 토양이 되었다. 절대적 확신, 이것이 권위적 태도와 광신적 모습의 토양이 되었다고 하네요. 맞는 이야기죠. 그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하게 교환 가능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권위적 태도와 광신적 태도의 모습이 서로 오가면서 어떤 비합리적 신앙을 생산해 내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제는 이러한 확신에 빠져드는 것이 잘못된 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오직 권위적 신앙에 의해서만 객관적 확신에 만족하게하려는 왜곡된 강요와 참된 신앙적 신뢰에 근거한 확신을 구별해야할 시대가 되었다. 네 고 부분은 밑줄을 그어 놓고 생각을 좀하셔야 하겠어요. 참된 신앙이 뭔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권위적 신앙에 의해서만 객관적 확신을 만족하게 하려는 그러한 왜곡된 강요. 네. 아 우리만 구원받는다. 그러한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권위적 신앙에 의해서 만족하는 거죠. 거기서만 만족이 가능한 거죠.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데 자기만 거기서 그것으로 자기가 확신하고 만족한다 이러한 태도입니다. 그런 것을 강요하는 것하고 참된 신앙적 신뢰에 근거한 확신, 구별해야 됩니다.

이 신뢰에 터한 확신은 신뢰할만하게 행동하는 고유한 실존이 개입하는 전체적인 것에 놓여 있으나, 그렇다고 신앙의 내용에 대한 이론적 신뢰성을 절대적인 이론적 확신으로 대체하지는 않는다. 어려운 말이기도 한데요. 그건 또 간단한 말이기도 합니다. 신뢰에 근거한 확신이라고 하는 말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것이 정말 우리의 개개인의 고유한 실존이 전체적인 것과 대립하게 하는 힘이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이론적인 신뢰성, 그런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론적인 신학자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고요. 그것은 타당 근거한 사실을 해명하는 통로라고 할 수 있어요. 결국 그런 이론적인 것만 아는 것으로 기독교 신앙이 끝나는 것은 아닌거죠. 결국은 절대적인 자기 실존의 신뢰, 실존의 전체적인 생명의 근원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어떤 태도가 필요한 거거든요. 그게 참된 신앙인거죠. 저는 이제 세 단계로 넘어와서 이야기한 거예요. 광신적인 자기 확신에서부터 참된 신뢰에 근거한 확신으로 나와야 된다는 겁니다. 나온 거죠. 신뢰에 근거한 확신이요. 여기에는 신학적인 토대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성령이 누구냐? 생명의 영이다. 그러한 초자연적인 힘으로 해서 자기의 주관적인 확신에 빠지는 것이 설명가능한 타당 가능한 보편진리에 근거한 그러한 내용을 우리가 따라감으로서 우리가 얻게 되는 확신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무르면 안되는 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이 참된 신앙의 차원까지 올라가야 되는 겁니다. 중간에 있는 것이 신앙적 계몽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앞에 있었던 것은 미몽이라고 한다면 두번째는 계몽이구요. 계몽자체가 신앙은 아니죠. 여기서 참된 신앙으로 들어가야 되는 거죠.

이처럼 신앙의 내용에 의심의 영역을 허락한다는 것은 아직 완전한 마지막에 도달하지 못한 '순례적' 교회의 실존에 속하는 문제다. 이것은 기독교적 실존의 잠정성에 속한다. 순례적 교회, 잠정성이란 이야기가 나오고 있죠. 그러니까 이론적으로 우리가 몇 가지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되지는 못한다고 하는 거죠. 잠정적인 것인거에요. 그러나 잠정적인 것을 우리가 무조건 믿을 수 없는 거잖습니까? 그 잠정성이 가리키고 있는 그 절대적인 세계에 대한 참된 신앙이 필요한 거죠. 그 사이에 어떤 비약이 분명히 있습니다.

기독교 실존이 견고하게 지켜나가야 할 점은 항상 조건적으로 전승된 것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한 이런 상황을 초자연적이고 절대적인 확신에 빠짐으로써 뛰어넘지 않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믿는 바의 내용을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리는 미래의 경험에 맡겨둔다는 것은 신앙적 실존이다. 지금은 잠정적이고 유한하지만 하나님의 미래에 나를 맡긴다고 하는 것은 신앙적 실존이다. 그것은 결국 결단인거죠. 그게 신앙인거죠.

이것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대화의 능력을 갖게 한다. 기독교인은 자기 나름의 주관적인 증거를 통해서 이런 문제를 성령의 역사라는 절대화 속에 숨겨둘 필요가 없다. 오히려 신앙적인 증거가 잠정적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미래를 향한 개방성이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의식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다. 여기까지 오늘 성령에 대한 이야기만 아닌거예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전체적인 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 대목은 맨 앞의 1장 나는 믿습니다 고거하고 연결이 되네요. 신뢰와 신앙 차이를 기독교 신앙의 광신, 맹신, 미신이 아니라 믿을 만한 근거를 제시하는 그래서 신뢰할 만한 하나님과 관계라고 하는 겁니다. 믿는다고 하는 것이 뭐냐 그것에 대한 설명이었는데 1장의 그것이 오늘 항목과 연관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성령론하고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예요. 왜냐하면 이 성령이 기독교 신앙으로 하여금 광신으로 떨어지게 하는 어떤 도구가 될때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성령론은 우리의 인식의 문제와 직접 연관이 되어 있으니까 이 항목이 신뢰와 믿음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성령과도 직접 연관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신 주관주의*는 정신을 통해서 고유한 경험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정신주관주의가 갑자기 나와서 맥락이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모른텐데요. 성령에 대한 설명에서 필요한 부분입니다. 자기확신에 빠지는 것이 바로 정신주관주의이거든요.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이 절대적 확신은 그 어떤 다른 방식으로는 도저히 도달될 수 없는 바의 그것이다. 이 정신 주관주의는 종교개혁시대의 '광신자'와 경건주의 유산에 뿌리하고 있다. 재미있죠. 두가지 서로 다른 것 같은데 그 유산이 똑같다고 그러네요. 광신자와 경건주의, 광신자라고 하는 번역이 정확하지 않겠네요. 열광주의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극단주의인거죠. 루터와 대립한 또 하나의 개혁자인 뮌쳐같은 사람들이 열광주의자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직접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으니까요. 경건주의도 개인적인, 정신주의에 많이 흘러 있어요. 왜 그런지 아시죠. 경건주의 말 그대로 경건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적인 도덕성을 강조하고 말이죠. 그들에게는 신앙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렇게 경건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참 재미있네요. 판넨베르크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요소들마다 한국교회를 그대로 빼다박은 거 같은 내용이예요. 열광주의와 경건주의가 한국교회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잖습니까? 제가 한국 교회에 신학무용론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하는 말을 했는데 그게 연관되는 문제입니다. 열광주의자와 경건주의자들에게는 역사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 역사는 신학인데요. 신조도 중요하지 않고 지난 2천년동안 어떻게 성령과 하나님을 이해했느냐 그 과정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개인적으로 주관적으로 무언가를 경험하고 경건하게 살면 된다는 거죠. 그리고 성령과 직접소통해서 영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들에게는 신학교도 필요없고 아무것도 필요없습니다. 어쩌면 교회제도도 필요없는 거죠.

*정신 주관주의 (Geistessubjektismus)는 기독교 신앙을 매우 주관적인, 개인적, 경건적인 차원으로 몰아갔다. 인간 삶의 전체, 현실성, 역사, 해석의 지평들은 개인의 실존적인 경험 안에서 무의미해지고 말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영성의 통전적 해석이 필요하다고 판넨베르크는 주장한다.

당시에는 외피적 교리의 권위에 맞선 신앙의 내면성이 핵심이었다. 하도 로마교회가 형식을 강조하고 있으니까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또 하나의 극단주의로 이 열광주의와 경건주의가 개신교에서 크게 역할을 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분명히 정신 주관주의에 나름대로 진리적 요소가 들어있었다. 그렇다고 이 주관주의가 그런 요소 때문에 19세기 독일 관념주의 때까지 현대 사상에 깊은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루터의 경우에는 주관주의가 별로 큰 역할을 못했다. 왜냐하면 루터는 영을 말씀에 종속시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신에 대한 외적인 말씀을 통해서만 올바른 영을 받을 수 있으며, 이 영은 이 사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추가하지 않는다. 루터는 말씀 객관주의에 오히려 두었군요. 이런 전통이 바르트에게까지 온거구요. 물론 차이는 있기는 있습니다만 큰 틀에서 볼때 그렇다고 하는 거죠. 루터는 양쪽으로 부터 공격을 받았고 양쪽과 싸웠습니다. 하나는 당연히 로마가톨릭교회구요. 또 하나는 같은 종교개혁자들인 뮌처를 비롯한 열광주의자들이었습니다.

루터에게 성서의 말씀과 선포의 말씀은 항상 모든 이들이 이 진리를 볼 수 있는 게 아닐지라도 영의 진리를 그 안에 담고 있다. 이 말씀에서는 사실상 일종의 조명이 일어나며, 이로써 그리스도의 사신인 말씀의 진리가 개개인에게 주어진다. 말씀이 영, 진리를 그 안에 담고 있는 거죠. 진리는 영을 내적으로 작동시키며 영에 관한 고착된 선입견을 극복한다. 이런 조명은 말씀으로부터 파생되는 영의 기능이다. 성령의 조명이라고 할 수 있네요. 성령의 조명이라고 하는 단어는 칼빈에게서 아주 독특하게 드러났는데 이미 루터에게 그 단초가 있네요. 우리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명 말이예요. 성령의 조명이예요. 이것이 말씀으로부터 파생된다고 하는 겁니다. 영은 말씀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조명해 주신다는 거죠.

그러나 루터에게 문자로서의 말씀이 진리를 자체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루터는 말씀에서 보도되고 있는 것이 무언가 부가적인 것으로서 독자의 입장이 덧붙여져야만 할 중성적 역사가 아니라고 본다. 여기서 이 독자의 입장이라는 것은 원래 사신의 내용에서 아무 것도 근거될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부가적인 원리를 통해서, 즉 성령을 통해서 근거되어야만 했던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견해**는 우선 19세기 어간에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난해한 기독교 사신을 풀어낼 수 있는 초자연적 열쇠가 바로 성령이라는 견해로 인해서 이미 말한 대로 성서와 기독교 전승의 깊이에서 영적인 작용이 담고 있는 근원적 넓이가 소실되었으며, 또한 배경으로 물러났다. 성령을 통해서 난해 구절, 이런 것들을 풀어낼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견해로 인해서 성서와 기독교 신학과 전승의 그러한 깊이에서 성령이 작용하는 어떤 폭, 크기 이런 것들이 다 소실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결국 이 패러그래프에서도 판넨베르크가 강조하려고 한 것은 정신 주관주의로 인해서 말씀과 기독교신앙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깊이, 넓이 이런 것들이 망실되었다. 두가지가 비교된 것을 아시겠죠? 하나는 앞부분에서 언급된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말하는 성령에 대한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이해와 현대로 넘어오면서 그 모든 것들을 놓치고 열광주의 신앙이나 경건주의 신앙으로 빠져들면서 결국 성령의 활동, 성령의 개념, 성령의 깊이들이 없어졌다 그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전통을 놓친 것으로 이제 다시 기독교 전통이 사도신경에서도 이미 이야기하고 있고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가 거듭 거듭 이야기하고 있는 그 성령의 보편적 차원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그 이야기죠. 성령은 생명의 근원이다. 그러한 관점입니다. 고맙습니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성서는 그것이 작성될 때부터 이미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의 독자가 부가적으로, 즉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다. 한국교회에서는 성령을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혹은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주술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성서해석에서도 영해라는 아주 특이하고 독단적인 방법론이 성행하고 있다. 그것을 기독교적인 믿음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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