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죽음을 들뢰즈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해 보았습니다.
들뢰즈의 철학이 탈주하여 새로운 고원을 발견하는 곳으로 열려있기에 통속적 정의로부터 벗어나 있는 예수의 죽음과 접속선을 그려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들뢰즈의 개념들은 선뜻 우리들에게 곁을 내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사고가 철학적 주류를 이루던 많은 사조들에 의하여 알게 모르게 침식당하거나 지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 가 봅니다.
들뢰즈의 철학은 철학자들 사이에도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어쩌면 기존 철학적 사조와 개념에 익숙해 있기에 더욱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들뢰즈 자신은 자신의 철학에 대하여 음악을 듣듯이 하라고 합니다.
물론 자꾸 듣다보면 익숙해지는 것도 있겠지만 리듬을 타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나이 든 이들에게 힙팝이, 트롯에 감응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헤비메탈이 익숙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구태여 <메탈 머신 뮤직>같은 실험적 음악을 예로 들 필요도 없겠지요.
하지만 그런 음악도 자주 듣다 보면 그 리듬에 어깨를 들썩이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를 통하여 자유로운 사유의 문을 열어보기를 바랍니다.
성서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가장 명확히 드러내는 사건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죽음이란 인간의 생체적 의미에서 마지막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영적 세계를 표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체에게는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릴 적의 유치한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예수께서 죽음을 물리치고 왜 메시아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같은 생각의 지점을 지나왔다고 보아집니다.
이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곳에서 내려오라'던 유대 대중의 기대와 비아냥거림과도 같은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은 소년기의 유치한 생각만이 아니라 믿음의 모든 공시적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물어오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성서는 이 의문을 초월적 사건인 부활을 통하여 극복시켜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 사건 이전에 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죄인의 몸으로 죽음을 당하셨든가 그러한 상황을 죽음의 육체적 고통과 대중들의 배신에 대한 심적 외로움을 감내하면서 까지 견디어 냈던가 하는 지점에 의미를 고민해 봅니다.
그것은 성서의 모든 것이 초월적 사건과 경험을 통하여서 마무리되어지고 이것을 신앙이라는 형태로 극복하게 된다면 과연 물질적 시공간 속의 역사적 사건은 현실에서 무의미한 것인가 하는 의문의 의미를 사유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예수의 죽음의 시공간에서 당연한 규범과 정의와 도덕을 통하여 재구성해보자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간 예수는 하나님의 힘을 통하여 유대정치권력과 종교세력, 로마의 지배를 타파하고 메시아로서 능력을 나타내어 유대인의 왕이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유대도 그런 예수님의 힘을 보고 복종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되었다는 스토리로 가던지 아니면 능력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세력을 벌하여 유대인들로 하여금 죄에 대한 용서를 빌게하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시는 구성이 우리들이 가질 수 있는 정의이자 규범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능력과 세계는 우리들이 이해하는 척 하거나 또는 그 의미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궁극적으로는 도달 할 수 없는 초월적영역입니다.
마치 ‘해님과 달님이 된 오누이’의 이야기에 대한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이해입니다.
부활을 사고하는 방식도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부활이전에 예수의 죽음이 곧 구원이자 해방이라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의 죽음은 우리들이 규정하는 사건의 운동에 종속되지 않는 시공간에 있습니다.
그것은 전체 시공간에 타당한 행동이며 예수의 죽음은 이 시공간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이자 해방입니다.
다시말해보자면 예수의 죽음은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파시즘의 승리를 가져왔던 히틀러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던 대중들의 모습이며 한국 사회에서도 유신의 지배와 군사독재를 가능하게 했던 대중들의 양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여기에서는 호랑이에게 잡혀 먹힌 오누이만 있을 뿐이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동아줄은 없는, 할머니에게 떡을 가져다주는 길에 늑대를 만난 아이가 살아남지 못하는 세계이며 늑대의 배를 갈라 할머니와 아이를 꺼내는 사냥꾼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들뢰즈는 이를 '차가운 진실'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철학자 라이히가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던졌던 세계이기도 합니다.
대중의 욕망을 포섭한 로마권력과 종교세력에게, 억압에 길든 욕망을 가지고 있는 대중에게 예수는 죽음을 통하여 그 해결의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의 대중은 욕망-메시아-구원의 배치를 보이고 있지만 욕망-죽음-구원이라는 배치를 보여주고 있는 예수의 삶은 심판과 처벌의 윤리를 넘어서는 사랑의 윤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윤리는 유대의 대중을 그들이 갇혀 있는 또 다른 권력의 욕망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욕망으로 안내하는 해방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누구를 측은하게 여겨 동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측은하게 여기는 이해가 아닙니다. 그것은 완전한 타자를 인정하는 것이고 이는 '나'의 언어가 아닌 '너'의 언어로 이야기 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누군가의 처지를 나의 언어로 기술하고 난 다음 "난 널 이해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이해도 아니고 여기에서 나오는 마음과 행동은 사실상 사랑이 아닙니다. 완전한 소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 문제를 죽음이라는 소통의 방식을 통하여 구원의 문을 엽니다.
'냉혹한 현실'이 예수라는 인물에게 안겨주는 것은 사실상 죽음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80년 5월의 죽음과 같은 방향으로 열려있는 문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전시간적으로 내재해 있는 죽음의 내재적 의미는 부활과 민주화라는 시작점으로 생성됩니다.
여기서 시작점이란 의미는 원인과 결과에서 결과로 부활과 민주화를 의미 짓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의 시작점으로 즉,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이라는 계열화된 동일자가 아니라 새로운 고원을 발견하는 타자의 의미로 생성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정치적 메시아로서 동일화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을 부정하는 과정이며 수많은 접속을 형성시키는 부활을 향해 그것을 내재적 흐름으로 만드는 사건입니다.
‘차가운 진실’의 죽음을 외면하는 부활은 권력화 되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것은 애매모호한 초월을 통해 동일자를 생성시키는 것입니다. 부활이 힘없이(?)죽어간 예수의 삶과 그를 추종하는 기독교인에 대한 보상으로 의미화하고 초월적 힘이 현실의 권력으로 변형되는 순간 탈출과 여행의 신앙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 그것은 권력화하고자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탈주하는 것입니다.
부활 또한 이 죽음과 같은 탈주의 선상에 서있을 때 내재적 의미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 [2010/10/05] 탈주의 신학-신학의 탈주 (1509) *6
매우 열심히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해왔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지 이루지 못했기에 그나마 탈주하여 왔음을 통해 위로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벗어나고자 함이 강박으로 다가와 다른 동일자를 이루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이루지 않고 항상 탈주함이 무엇을 이룰 지에 대한 동일자로 환원되는 고민은 나를 당혹하게 합니다.
기독교속에 탈주가 내재적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선지자들, 모세, 베드로, 요나, 바울...
끊임없이 영토화 되고 있지만 기독교적 의미는 탈주하는 지점에서 생성되는 것을 봅니다.
권력화되어 있는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것, n-1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죽음을 탈주의 모습으로 그려보았습니다.
많이 나아가서는 신학에 무지한 제가 욕심낼 엄두가 나지 않기에 신학을 하시는 분들에게 '탈주의 신학'을 공부의 영역으로 삼아보기를 진심으로 권합니다.
해방신학, 민중신학 등 진보적 신학이 벗어나지 못했던 영토를 탈주시켜주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우리들에겐 모든 걸 가볍게 털어버릴
그런 탈주가 오히려 필요한 게 아닌지 스스로 반문해 봅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르침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진정한 해방,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탈주의 생각을 좀 더 진전시켜 봤습니다.
너무 밀어붙인 듯하지만...
들뢰즈의 탈주, 탈영토화는 중심의 해체, 탈중심주의와 관련된다고 봅니다.
스피노자의 ‘내재’나 베르그송의 ‘생성’ 개념이 중요하겠지만
그 이면에는 데리다의 진리에 관한 ‘differance(차연)’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고 봅니다.
차연은 진리의 유희를 상정하죠. 파르메니데스의 절대 진리를 그다지 지지하지 않는 거죠.
그로 볼 때 들뢰즈의 탈주는
단순히 ‘권력화 되어 있는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것’ 이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말씀하신 정도의 진보 신학은 이미 많이 나와는 있죠...
어찌 보면 본 회퍼의 ‘기독교의 비종교화’ 정도로도 파악되죠. 그만큼 많죠.
예로 드신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도 같은 맥락에서 진보적이기는 하나
실상은 기존 신학의 ‘중심’을 내면에 갖고 있는 관계신학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거든요.
막스주의가 진보적이기는 하나
결국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삶을, 삶의 정치를 경제영역으로 국한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거와 같은 맥락이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결국 동일 선상에 있다고 보는 거죠.
진보신학은 중심을 해체하는 탈중심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기독교 신학은 사실 굉장한 중심을 내부에 가지고 있죠.
누구도 異論을 달수 없고 함부로 근접 못하는 지고의 이념.
그것을 깨뜨리지 않고는 기독교의 진정한 탈영토화는 어렵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기독교의 중심을 무너뜨리고 있는 진보적(급진적?) 신학들이 없진 않죠.
화이트헤드에 기반을 둔 과정신학을 한 예로 들고 싶습니다만.
여태 기독교 신학은 스스로 미리 한계를 긋고 경계를 쳐온 게 사실이죠.
어느 신학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떠나
무한히 열려진 논의의 장이 공개적으로 마련돼야 하지 않나 해서 한자 적어 봤습니다.
이 좋은 글을 이제서야 읽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알고보면 본질상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그런 깨달음이 필요할 듯 합니다... 우리의 신앙 행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가짐으로 인해서 신앙 자체가 소멸됨을 느낍니다...
"부활이 힘없이(?)죽어간 예수의 삶과 그를 추종하는 기독교인에 대한 보상으로 의미화하고 초월적 힘이 현실의 권력으로 변형되는 순간 탈출과 여행의 신앙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정말 인상깊은 말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
들뢰즈를 신학에 접속시키다니 ... 몇년전 곁눈질로 훔쳐보다 잊혀졌던 들뢰즈가 이렇게 부활하네요.
들뢰즈, 라캉, 베르그송 등등의 이름을 기독교 사이트에서 보게되다니 ...
다비아가 그냥 놀랍기만 하군요 ..
제가 워낙 보수적인 교회를 다녔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렇게 봐도 되는 건가 할정도로 너무 급진적이라 ...
이에 대해, 누군가 신학적인 견해를 달아주셨으면 좋겠네요.
아무튼, 깊은 고민과 노력에 제가 이렇게 좋은글도 읽을 수 있게되네요.
잘읽었고 감사합니다. ^^
누군가 신학적인 입장에서 댓글 달아주시리라 기대하고 지켜봤는데, 아쉽게도 아무도 안남겨주시네요.
개인적으로는 문득 읽으면서 궁금했던 점이 있어 무지한 질문 드릴게요. ^^
오래전에 들뢰즈 소개하는 책을 읽다가 내려놓은 일이 있었는데,
해당 부분이 '탈인간적 차이' 라는 내용의 부분을 읽다가 내려놓은 거 같아요.
그냥 차이도 아니고, 무려 탈인간적 차이, 전-언어적, 전-구조적,
사유함을 가능하게 하는 힘들을 사유하겠다는 내용에 ... 뭐지? 하고 GG 쳤던 기억이 났는데요.
이게 어떻게 가능하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책에서 본 답은 '확장된 지각' 이었던 것 같고, 그런 지각으로 잠재적인 생명의 역능을 긍정하겠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그런 확장된 지각은 또 어떻게 가능하냐? 가 궁금했지만, 뒤로 갈수록 무언가 현란한 해지는 듯해서 덮었었던 기억이 있는데요.
이런 확장된 지각이라는 표현이 들뢰즈 원전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언어적,
사유를 가능케하고 차이를 생성하는 힘을 긍정하려면,
우선 지각해야 한다는 데에서 위와같은 표현을 썼던 저자의 의도는 짐작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들뢰즈의 수많은 용어 '탈영토화, 탈주선, 즉자적차이 등등' 은 사실 변죽에 불과하고,
차이 생성의 힘을 지각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
이런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물론, 제가 책을 찾아 읽어보면 되지만, 염치없이 질문 드려봅니다.
근데, 써놓고 보니 성경 얘기가 빠졌네요.
위글에서 예수와 기타 성경인물들의 설명은 감은 오는것 같아요.
근데, 이들의 무엇이 탈주에 적용되는지, 어떻게 사는게 예수의 탈주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길인지,
아니 혹은 탈주에 실천이라는 단어가 어울리기나 하는건지 ...
아~ 댓글에서 탈주신학을 말씀하셨었군요.
근데, 탈주를 말하면서 동시에 탈주신학을 말할 수 있는건지 ..
어렵네요.
댓글에서 어떤 분이 말한 라캉처럼 이런 탈주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기애일 뿐이라고,
이해하고 치우고 싶은 생각도 드네요 ㅎㅎ
아무튼, 밤이 늦었습니다.
평안한 밤되세요.
peace ~
오래 전에 썼던 글이라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
저 역시 우연히 제가 썼던 글을 살펴 보다가 님의 댓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 대한 또 다른 내용은 아래 쪽에 있는 저의 글 '탈주의 신학-신학의 탈주'라는 글에 연속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글은 거창한 신학적 입장을 담은 글이 아니라 '아포리즘' 형식의 글 이라고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연결할 수도 있고 이로 부터 새로운 해석의 가능함을 보여주는 글이라고요.
아마도 신학을 하시는 분들이 현대철학자들과는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아서 신학적 입장을 언급하기 어려울 것으로 사려됩니다.
교회가 보수적인 것과 개인이 보수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보수적인 성결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님의 좋은 생각 이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
예수의 제자들을 비롯해 따르던 무리들이 바라던
초월적 그리스도 상을 일종의 코드로 보고
그리스도는 스스로 낮음을 취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심을
들뢰즈의 탈주 개념으로 나타냈네요..
당시의 몇몇 혁명 메시아들의 상을 초월적 동일성이라 보고
낮음으로 취하신 예수의 참 메시아 되심도
들뢰즈의 탈주 개념으로 표현할 수 있겠군요...
들뢰즈의 탈주 개념은
부정의 변증이 아니라 욕망의 긍정 개념이니...
낮고 천함을 택하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 자체로도 그리스도의 승리가 되어야 하겠군요.
부활 후의 그리스도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영광과 존귀만을 한 몸에 받으시는 그런 그리스도로서보다는
이 땅에서 온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와
기쁨과 고통을 함께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승리를 이끌어내는
그런 우리의 주님이 되시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