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우리 개신교 신자들은 타종교인들에 비해서 경전(성경) 공부에 상당히 부지런합니다. 예컨대 불교신자들은 자신의 마음 안에 들어있는 불성을 깨우쳐 나가는 것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절기에 따라서 예불에 참여한다거나, 가끔 문제가 생기면 스님을 찾아가서 교훈을 듣는 것으로 만족스러워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금강경을 스스로 읽거나 그런 공부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불교신자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와 가까운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대개 종교의식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말 그대로 미사를 보는 것에서 매우 신비하고 종교적인 체험을 하기 때문에 성서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떨어집니다. 반면에 우리 개신교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거의 성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선 예배 자체가 말씀 중심적이고, 교회마다 여러 성서공부 프로그램이 설치 운영되고 있고, 개인들도 여러 방식으로 성서말씀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오직 말씀"(Sola Scriptura)만이 기독교인의 삶과 신앙을 규정해주는 기준이라고 말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의 후예로서 우리 개신교 신자들이 성서에 밀착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은 자랑할만한 일이며, 동시에 계속되어야 할 신앙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 신앙의 자부심이라 할 이 사실에서 가끔 모순과 한계가 발견됩니다. 성서를 많이 알고 있지만 실제 삶에서는 이 성서 말씀으로부터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현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아는 만큼 절실하고, 평화롭고, 정의롭고, 또한 그런 정도로 사랑하며 살지를 않습니다.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의 실제적인 삶이 이원론적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답은 성서가 우리 삶에서, 혹은 우리의 신앙에서 단지 정보 구실만 하고 끝나 버린다는 데에 있습니다. 흡사 외면적으로 풍요로운 오늘의 정보사회가 고대의 농경사회보다 조금도 더 영적이지도, 그래서 본질적인 면에서 전혀 풍요롭지도, 행복하지도 못하다는 사실과 맥을 같이 합니다.

성서를 일종의 정보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려면 그 내용과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성서를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성서의 영적인 의미와 가치를 파악해낸다는 말과 같은 의미인데, 이를 위해서 필요한 훈련을 저는 두 가지만 제안하려고 합니다.



하나는 인문학적인 소양입니다. 성서말씀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게 아니라 인간의 장구한 역사를 통해 전승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인류가 수 천년 동안 추구해 왔던 평화, 자유, 기쁨, 정의, 혹은 시간, 역사, 존재 같은 개념들은 성서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 구원, 종말, 믿음, 영생 같은 개념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회개하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이르렀오(마태복음 3:2)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려면 우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인식론적 틀에서 이해될 수 있는지 설명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런 설명이 가능하려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런 설명 없이 무조건 믿으라고 한다면 성서의 깊이를 천박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요? 믿음은 그것이 믿을 만 하게 생각될 때에 올바른 믿음이 되는 것이지, 무조건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광신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인 직관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에 갇혀서 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활동을 인식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따라 잡을 수 있는 어떤 자세나 능력이 필요한데, 그것이 곧 영적인 직관력입니다. 조금 더 실질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당장 돈벌이와 자식 교육에만 마음을 둔다면 성서의 내용이 다가올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적인 일들 속에 감추어져 있는 생명의 활동에 마음을 열어두지 않고서는 성서의 내용은 우리의 실제적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저 세상의 이야기로 떨어지고 맙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영적인 직관은 반드시 앞서 제시한 인문학적 기초에 근거해서 이루어져야지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소위 "영해"라는, 매우 주관적인 성서해석에 빠져버려서 결국 방향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의 많은 기독교 계통의 사이비 종파가 범한 우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재림한 감람나무가 되거나 초자연적 능력자가 되거나, 존재와 생명의 신비를 유치한 인간의 욕망으로 변질시켜버리고 맙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질문하고 싶으실 겁니다. 인문학적 소양과 영적인 직관이라는 것은 뭔가 인간적인 방법론 같은데, 그것보다는 성령의 역사가 훨씬 중요한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 말은 천번 만번 옳습니다. 성령의 활동에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성서를 올바로 이해하는 첩경일 뿐만 아니라 사실은 모든 신앙생활의 근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어떤 주술적이고 경건한 힘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인 성령은 우리가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고 믿음을 갖기 위해서 기울이는 모든 인식론적인 노력과 함께 하시는 생명과 진리의 영이십니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적 소양과 영적인 직관으로 성서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분명히 성령의 활동입니다.



빌립보서는 4장에 불과한 아주 짧은 성서 말씀입니다. 이사야서나 요한계시록, 아니면 고린도서에 비교해 볼 때 아주 짧기 때문에 한 호흡으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전체를 독파하는데 20분도 채 걸리지 않지만, 그 내용과 의미는 이런 시간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평생토록 숙고하고 가슴에 새겨야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추호도 손색이 없습니다. 모쪼록 빌립보서가 성서와 친숙하게 지내려는 모든 이들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겨졌으면 합니다.

저는 이 빌립보서를 2000년10월27일-29일, 2박3일 동안 독일 베를린 근교의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횔째르너 제> 수양관에서 백림 성결교회 성도들과 함께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2001년 10월부터 2002년 3월까지 6개월동안 대구 YMCA에서 매주 한 차례씩 모여 몇몇 분들과 함께 이 빌립보서를 다시 깊이 들여야 보았습니다. 이제 이곳 홈페이지에 이 내용을 약간씩 손질해서 올려놓으려고 합니다.



2003년1월20일                        하양에서

                                              정용섭 목사

  



서론

1장(1-30)

1 은총과 평화는 사실 언어인가?(1,2)  

2. 교회는 복음 공동체다(3-11)    

3. 복음 전파의 비밀(12-18)      

4. 허무주의와 삶의 욕망을 넘어서(19-26)

5. 복음과 투쟁(27-30)    

2장(1-30)

6. 코이노니아의 원리(1-4)

7.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 찬양(5-11)    

8. 구원의 깊이(12,13)    

9. 기쁨의 심연(14-18)    

10. 믿음의 아들 디모데(19-24)  

11. 믿음의 형제 에바브로디도(25-30)      

3장(1-21)

12. 율법과 복음(1-9)      

13. 부활, 하나님 안에 은폐된 미래의 생명 (10,11)  

14. 완전과 불완전 사이에서 (12-16)  

15. 낮은 몸, 영광의 몸(17-21)

4장(1-23)

16. 분열과 일치(1-3)    

17. 파루시아(4-7)    

18. 보편적 가치(8,9)    

19. 삶의 기술(10-20)    

20. 성도의 길(21,22)      

21. 영적인 삶을 향하여(23)







서론



빌립보서의 주제는 일반적으로 기쁨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바울이 감옥 안에서 쓴 편지인데도 불구하고 기쁨을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히 신앙적인 감화를 많이 주는 서신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기쁨이 자신의 성취감에 근거하거나 아니면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했다기 보다는 훨씬 근원적이고 구체적인 그 어떤 것에 놓여 있다고 생각해서 "땅과 하늘"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사실은 인간이 살고 죽는 것이 모두가 이 땅과 하늘의 문제이니까 유독 빌립보서만의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하늘의 시민권(빌3:20)이라는 표현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이 땅을 초월하는 기독교 신앙이 이 빌립보서에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땅과 하늘이라는 주제와 연관해서 공부할 만 하다고 봅니다. 바울은 여기서 땅의 일을 하늘의 일과 대립적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땅에서 성취하는 일만 생각하지만, 기독교인은 그것을 뛰어넘는 하늘의 영광과 부활의 세계를 바라보고 산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넓은 차원에서 생각하면 이 땅의 문제도 역시 하늘(우주)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 두 차원이 늘 대립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바울의 생각도 근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우선 지난 2천년이라는 세월을 견뎌온 기독교 신앙이 하늘을 어떻게 표상했는지, 또한 그것으로 인해서 기독교를 향한 비판이 어떻게 가해졌는지 그 주변적 상황을 어느 정도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하늘에 대한 관심이 아주 컸습니다. 예수님도 직접 하늘에 대한 어떤 사실적인 설명은 하지 않았으나 간접적인, 혹은 비유적인 언급을 적지 않게 하셨습니다. 우선 주기도문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요한복음6:41)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이 부활 후 40일만에 구름을 타고 승천했으며,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는 그 모양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기독교 예배가 드려질 때마다 암송되는 사도신경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이 땅에 미련을 두지 말고 죽은 다음에 가게 될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라는 가르침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토대로 삼았습니다. 이런 초월적이고 탈(脫)역사적인 신앙에 근거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현실적인 시련이나 고통을 인내할 수 있었고, 그런 힘에 근거해서 유럽의 역사를 견인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이런 하늘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이 땅의 삶에 대해서는 매우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하늘을 향한 초월적인 신앙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속적인 세력과의 결탁을 통해서 최소한 18세기까지는 이 땅에서도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해왔습니다.

과연 성서와 기독교 신학과 목회 현장에서 일컬어지는 하늘은 무엇입니까? 초보적인 우주 물리학을 알고 있기만 하더라도 하늘은 빈 공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태양과 가장 가까운 별은 4광년 거리에 놓여 있는데 그 사이에는 거의 아무 것도 없고, 기껏해야 빅뱅 당시 생긴 흑암과 별빛뿐입니다. 지금 인류의 우주 물리학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이 우주가 팽창하고 있는지 축소되고 있는지,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그 시작과 끝이 있는지 없는지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곳에는 생명이 없다는 사실만이 확실합니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서는 지구와 다른 종류의 생명체의 가능성을 점치고 있기는 합니다만, 태양처럼 행성을 갖고 있는 항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과 지구에서의 생명 현상이 우연과 우연이 겹쳐짐으로써 발생했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우주 공간에 생명체가 있을 개연성은 극히 미미합니다. 생명 현상이 없는 그런 곳을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연결시킬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우주 공간을 성서가 말하는 하늘, 혹은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성서의 하늘이 우주 공간이 아니라면 인간의 마음 속을 가리키는 걸까요? 언젠가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하늘 나라는 바로 그들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긴 합니다. 만약 하늘 나라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면 우리는 신학보다는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이 훨씬 하늘 나라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제공한다고 인정해야만 합니다. 일단 이쯤해서 이에 대한 답변을 미루어 둡시다. 아마 이 빌립보서를 공부해 나가면서 그것에 대한 답변이 어느 정도 주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늘에 대해 아주 강력하게 도발한 주장이 몇몇 사상가들에 의해서 제기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신은 죽었다는 유명한 명제로 그 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니체(F. Nietzsche, 1844-1900)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하늘에 대한 희망을 말하는 성직자들의 말을 듣지 말고 땅에 충실하라고 외쳤습니다. 또한 "도덕 계보학"에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죄의식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무신론을 주창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니체는 기독교의 하늘이 아니라 철저하게 땅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생명을 강조함으로써 반 기독교적 운동에 선봉에 섰습니다. 그 이외에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기독교의 하늘이 인간의 삶을 왜곡시킨다는 사실에 대해서 가혹한 비판과 독설을 던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포이에르바흐, 프로이트, 마르크스 등이 그렇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비록 기독교를 부분적으로만 해석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우리의 신앙에 현상하고 있는 비실질적 흔적을 적나라하게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진지하게 숙고해 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늘이 매우 불확실하다면, 니체 같은 이들이 말하는 땅은 확실합니까? 인간이 이 땅에서 초인적 힘을 발휘해서 달성한 결과는 구체적이며 영원한 가치가 있습니까? 하늘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땅을 경작해서 참된 자유와 평화를 얻었습니까? 인간의 계몽과 진보는, 특히 현대의 생산성은 외면상 풍요로운 생명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그 이전의 시대에 비해서 털끝만큼도 나아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해방된 인간은 인간이 만든 피조물에 노예가 되어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것이 정치 이념이었든, 자본주의였든, 세계 혁명이었든 상관없이 인간이 만든 것은 결국 인간은 노예로 삼습니다. 기독교의 하늘이 공허하다면, 인간의 땅도 역시 황폐합니다.

그러나 그런 윤리적 차원이나 생태적 차원만이 아니라 기독교와 오랜 세월동안 투쟁을 벌임으로써 이제는 거의 일방적으로 승리의 찬가를 부르고 있는 자연과학이 여전히 자연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합니다. 자연과학은 기독교의 전횡에 맞서서 인간 해방을 위해서 상당한 수고와 업적을 남기기는 했습니다만 자신들의 연구 결과만으로 세상을 해명할 수는 없습니다. 판넨베르크는 그의 저서 "자연신학"에서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만일 성서의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자라면 , 그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고 자연 과정들을 완벽하게, 혹은 적절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역으로 만일 자연과정들이 성서의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고도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 그 신은 진정한 하나님이 될 수도 없고 윤리적 가르침의 근원으로 신뢰받을 수도 없다. ... 소위 말하는 근대 과학의 방법론적 무신론은 순수한 사실에 토대한 것이 전혀 아니다. 그와 같은 무신론은 그야말로 상당히 애매 모호한 현상이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무신론의 진정한 가능성은 피조물을 향한 창조자 하나님의 절대적인 신실성에 근거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우리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해봅시다. 과연 하늘은 이 땅에 있는 인간의 삶을 경시하는 종교적 기만이며, 인간의 오디프스 콤플렉스가 반영된 것이며, 인간 욕망의 투사에 불과한 것입니까? 물론 조직체로서의 기독교는 이런 점에서 의심받을만한 일을 적지 않게 해왔습니다. 신앙적으로는 하늘을 기다리라고 하면서 실제적인 삶은 매우 영악하게 땅의 질서만을 따라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모습은 철저하게 초월적이면서 철저하게 세속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양극단의 모습이 기독교 비판자들에게는 위선이며 자기학대로 비쳤을 것입니다. 근본적인 면에서 하늘은 니체나 프로이트, 혹은 포이에르바흐가 비판하듯이 인간 삶을 왜곡시키고 소외시키는 요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추상적인 데 묶어두지 않고 참된 리얼리티와 연결시키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또한 하늘은 이 땅과 대립하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일치합니다. 땅은 현실이고 하늘은 관념이지만 결국은 동일합니다. 땅은 생명의 질료이며, 하늘은 생명의 형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두 세계가 온전한 생명을 이루어냅니다.



우리는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부활과 영광과 하늘에 대해서 매우 강조하고 있는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과연 바울은 어떤 근거에서 하늘과 영광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걸까요? 2천년 전 매우 불확실한, 혹은 유치한 우주론에 근거해서 하늘을 말하고 있는 바울의 주장이 과연 오늘 상당히 많은 우주론적 정보가 알려져 있는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타당합니까? 이런 문제는 많은 신자들이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혹은 거의 무시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우주 물리학적 정보와 성서의 가르침이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거나 무관심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괜찮은 걸까요? 물론 성서는 과학서가 아니라 신앙에 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성서의 내용을 그저 신앙적으로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 기독교는 2천년 전에 시작할 때 그랬던 것처럼 이방인들에게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을 변증할 준비를 늘 해야만 하기 때문에 땅의 생명과 하늘의 생명이 어떻게 신앙적으로 결합되는지 보편적 인식론에 근거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연과학자들과 경쟁을 벌이자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연구를 통해서 기독교 교리의 진리성을 보편 타당하게 설득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빌립보서를 공부하면서 하늘 표상을 이런 차원에서 파악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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