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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Ⅰ부 현대신학의 배경 / 1장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현대신학을 위한 문제제기 두 번째 "루터와 시대정신"에 대해서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종교개혁의 배경과 종교개혁을 일으킨 정신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이 절에서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역사 안에서 구체화되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해 보는 절이 되겠습니다. 저자는 이 절에서 루터의 신학을 심도 있게 고찰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루터가 시대 안에서 고민한 내용과 한 개인의 고민이 어떻게 역사화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1) 루터의 고민
루터의 이력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고 있으니 특별히 다루지 않겠습니다. 다만 루터는 성격이 강했고 상당히 거친 말투와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루터의 이러한 성품이 교황청과 마찰을 일으키고 개혁가가 됐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영웅의 특별한 점, 특히나 유년시절의 일화라든지 성품 등을 찾아내어 자꾸 신화화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오히려 루터는 카톨릭 사제와 교수로서 매우 모범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루터는 외형적으로만 모범적이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수도원의 모든 계율을 잘 지켰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한 내적인 순례의 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주 고해성사를 했고, 금식기도와 성경 외우기, 자신을 향한 절제와 고행에 철저했다. 하지만 루터는 '하나님의 의' 앞에서 좌절했고, 자신을 짓누른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루터는 자신이 배운 신학으로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지 못했다. ...... 1515년 루터는 로마서를 읽고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는 가운데 '탑의 경험'이라는 깨달음을 가지게 된다.]
'탑의 경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신칭의'입니다. 이 경험 이후 루터는 완전히 새로워집니다. 탑의 경험 이전 루터를 지배하고 있던 사상은 중세적 신학 즉 스콜라신학이었습니다. 성경도 세상도 스콜라신학에 따라 이해했었으나 그것이 루터에게는 아무런 구원이 되지 못했던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어느 시대에나 삶의 근거가 되어야 하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리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루터의 신학적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교회가 생명 있는 말씀을 매개해 주지 못하고 신학이 바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잘못된 현실이 바로 루터의 고민이었다.]
단순히 표면에 드러난 카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나이브한 접근입니다. 그것보다 근본적인 '신학적 고민'이 루터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루터가 교회의 타락과 부패 때문에 개혁을 일으켰다면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았을 것이며, 성공했다 하더라도 얼마 못 가서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을 겁니다. 저자는 루터의 일생에 걸친 개혁에는 일관된 맥(신학)이 있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어떻게 살아 있는 하나님이 매개되느냐?"
2) 하나의 세계
성속 이원론이냐 일원론이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이 있습니다. "세상은 아무리 변해도 기독교가 속한 거룩한 영역은 변하지 않는다." "교회는 세속에 물들지 말고 성스러운 영역에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런 주장의 근거가 무엇이냐고 되묻습니다.
[세계는 하나의 '세계'이다. 세계가 여러 개 있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세계와 거룩한 세계라는 두 세계가 있을 수 없다. 물론 하나의 세계에 대해서 세속적 측면과 종교적 측면을 나누어서 생각할 수는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지, 서로 이원화된 두 영역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세속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은 하나의 세계에 대한 두 측면을 말하는 것이고, 이 두 측면은 원래 분리되지 않는다. 이 하나의 세계, 하나의 시대정신 속에 교회도 있고 세상도 함께 존재한다.]
한국교회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절입니다. 또한 조심스럽기도 하고요. 한국교회는 어떤가요? 세상은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데 신앙은 기복적이고 신화적인 세계 안에 머물러 있거나,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인지 처세술인지 구분할 수 없는 신앙의 모습이 극단적으로 혼재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교회는 이 괴리문제를 신학적 접근법이 아닌 세속적 접근법으로 해결하려다 문제가 더욱 꼬이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이 두 측면(교회와 삶)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실제적으로 삶 속에서 괴리를 느끼거나, 종교적으로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 두 측면의 괴리를 메우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며, 그 방향은 성서를 현대의 사고 방법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사회 - 경제적 행위에 신앙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의 사회 - 경제적 차원이 세속적 영역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것을 신학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3) 복음의 재발견 거룩한 분노
한국교회가 워낙 신화적 신앙에 기울어져 있다 보니 루터의 '탑의 경험'을 마치 간절히 기도하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어떤 것. 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앞서 강조했듯이 그것은 시대정신 속에서의 고민과 철저한 신학적 통찰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루터가 가졌던 좌절과 고민은 바로 이 이원화(삶과 신학)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복음에 대한 각성으로 이원화가 극복되면서 진정 루터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의 각성은 철저히 '신학적'이었고 그의 삶과 신앙은 전혀 유리되지 않는 일치 속에 있었다.]
[그의 개혁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항상 신학적이었다. 물론 그의 개혁의 결과는 큰 사회적 변화로 나타났다. 루터의 개혁의 근본 동인(動因)이 신학적이라는 것과 그 결과가 사회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교회는 당시의 평신도들이 겪는 신앙의 괴리와 이원화를 해결해 주지 못했다. 어떻게 이 시대에 하나님을 매개할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 없이 과거의 신학만 반복하면서 온갖 부패와 타락에 빠져 있던 교회를 향해 루터의 분노가 폭발했다.]
4) 오직 성서 : 새로운 성서해석, 새로운 신학
종교개혁 3대 표어 중 가장 많은 오해를 낳는 구절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어떤 분들은 축자적 영감으로 받아들이고, 조금 나은 분들은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짓밟힌 성서를 원래 위치에 되돌려 놓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와 루터가 교회의 권위와 성서의 권위 중 어느 것이 더 우선이냐고 다투었던 것이 아니다. 로마 카톨릭의 모든 결정과 교리도 그 근거로 성서적 토대를 밝히고 있다. 그러면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황청이 성서 자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성서에는 해석의 문제가 따르므로 해석의 우선성에 교회의 권위를 강조한 것이다. 즉, 다양한 성서해석이 있을 때 어떤 해석을 선택할 것인가의 결정을 교회가 했던 것이다. 교회가 성서해석을 할 '권위'를 가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교황청과 루터의 다툼은 교황청의 공식적 성서해석과 루터의 성서해석 사이의 충돌이었습니다. 성서해석은 결국 신학문제인데요.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는 어떤 신학적 관점에서 성서를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5) 새로운 세계로
이 부분은 간단하게 연재하겠습니다. 저자는 첫째 '준거'의 변화를 이야기 합니다. 중세를 대표하는 준거는 '교회'였습니다. 사회 전반에 기준이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준거가 루터의 새로운 성서해석, 새로운 신학으로 급격히 옮겨졌다고 이야기 합니다. 두 번째로는 신학의 역할입니다. 앞서 말한 성속이원론을 극복하고 교회가 자신의 역할을 바로 한다면, 교회가 속한 시대정신을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고, 이를 통해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음은 개신교 신학의 발전에 대해서 연재하겠습니다.
우선 읽기 전에 한 말씀 올립니다.
문장 사이 사이에 있는 이상한 부호들 좀 제거해 주시고요
또 문장의 길이를 시각적으로 읽기 편하게 짧게 좀 끊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읽기 전에 먼저 한 말씀 올리고..
이제 읽기에 들어가겠습니다. ^^^
기대가 됩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통 모르겠는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 때문에
요새 제 머리가 너무나 지끈 거립니다.
아무래도 그의 사유의 깊이와 폭을 감당 못하는 제 용량의 부족에도 원인이 있겠고
또 번역을 한 분이 전체에 대한 파악을 완전히 끝 낸 후 처음과 끝이 일매지게 이어지도록
창작을 하는 수고를 아낀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