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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의 흐름6
오늘은 "계몽주의의 충격과 현대신학에 던진 과제들" 에서 '진리개념의 다원화',
'판단의 기준으로서 이성', '자연과학과 새로운 우주', '역사의식과 종말론적 신앙'
중 마지막 부분 '역사의식과 종말론적 신앙에 대해서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판단의 기준으로서 이성', '자연과학과 새로운 우주', '역사의식과 종말론적 신앙'
중 마지막 부분 '역사의식과 종말론적 신앙에 대해서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연재했던 부분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부분은 특히나 관심이 가는 부분입니다.
현대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종말론적 성격이 거의 사라졌거나
희미해졌다는 지적입니다. 기독교 신자나 비신자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말로는 역자 내적인 것에 제한 당하고 있는군요. 그러면서 "왜?"라는 질문을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종말론적 성격이 거의 사라졌거나
희미해졌다는 지적입니다. 기독교 신자나 비신자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말로는 역자 내적인 것에 제한 당하고 있는군요. 그러면서 "왜?"라는 질문을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오늘날 기독교인들 가운데 참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진정한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기독교는 종말에 대한 소망과 현재의 삶 속을
관통하는 초월적이고 종말론적인 요소를 상실했다.]
다가오는 세상에 진정한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기독교는 종말에 대한 소망과 현재의 삶 속을
관통하는 초월적이고 종말론적인 요소를 상실했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과 기독교의 종말론적 성격이 약해지면서 교회와
신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기독교 역사를 간략하게 훑어 내려가며
살펴보겠습니다.
신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기독교 역사를 간략하게 훑어 내려가며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리스-로마 문명권에서
교회가 체계를 갖추고 신학도 정비된다. 기독교는 이 과정에서 헬레니즘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19세기 대표적 신학자 '하르낙'의 지적) 물론 기독교가
헬라화 됨으로 신학의 용어가 풍부해진 것이나 세계화의 기틀을 마련한
것과 같은 긍정적 요소도 있다. 하지만 기독교가 헬라화 되면서 많은 고유의
독특성을 잃은 것도 사실이다.]
교회가 체계를 갖추고 신학도 정비된다. 기독교는 이 과정에서 헬레니즘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19세기 대표적 신학자 '하르낙'의 지적) 물론 기독교가
헬라화 됨으로 신학의 용어가 풍부해진 것이나 세계화의 기틀을 마련한
것과 같은 긍정적 요소도 있다. 하지만 기독교가 헬라화 되면서 많은 고유의
독특성을 잃은 것도 사실이다.]
그 핵심 중의 하나가 그리스-로마 당시의 이원론적 사고의 틀입니다.
신플라톤주의, 영지주의, 페르시아 종교 등으로부터 입니다. 이것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영과 육, 성과 속,
초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분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각 부분의
전자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후자에 낮은 가치를 부여하며 기독교가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계몽주의 이후 가치변화에 따른 충격을
기독교가 고스란히 받게 됩니다.
신플라톤주의, 영지주의, 페르시아 종교 등으로부터 입니다. 이것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영과 육, 성과 속,
초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분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각 부분의
전자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후자에 낮은 가치를 부여하며 기독교가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계몽주의 이후 가치변화에 따른 충격을
기독교가 고스란히 받게 됩니다.
[계몽주의 이후 이성의 영역이 확대되고 여러 학문들은 자체적인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독립된 분야를 확보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이 세계
내적인 것에 가치가 부여된다. 인간의 모든 관심은 물질적인 것에 집중된다
.....이렇게 된 것은 참으로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교회는 영적인 것을
강조했지만 사실은 물질적인 것에 사로잡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준을 가지고 독립된 분야를 확보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이 세계
내적인 것에 가치가 부여된다. 인간의 모든 관심은 물질적인 것에 집중된다
.....이렇게 된 것은 참으로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교회는 영적인 것을
강조했지만 사실은 물질적인 것에 사로잡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마디로 자충수를 둔 것이죠. 세계도 하나이고 인간도 하나인데, 교회가
이것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영적인 것, 초월적인 것, 저 세상을
강조했는데 문제가 생긴 겁니다.
이것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영적인 것, 초월적인 것, 저 세상을
강조했는데 문제가 생긴 겁니다.
[결국 교회가 실제적으로 영과 육의 통전적인 조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은 채 공허하게 '영'에 대한 강조만 반복하는 동안 이 세상에 '실재성'을
빼앗겨 버렸다. 교회가 영을 강조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기독교의 중요한
'영적' 측면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물론 교회에서는 여전히 영원한 삶과
저 세상을 말하지만, 우리들에게 실제적으로는 이런 것들이 단지 추상적이고
공허한 개념에 그친다.]
않은 채 공허하게 '영'에 대한 강조만 반복하는 동안 이 세상에 '실재성'을
빼앗겨 버렸다. 교회가 영을 강조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기독교의 중요한
'영적' 측면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물론 교회에서는 여전히 영원한 삶과
저 세상을 말하지만, 우리들에게 실제적으로는 이런 것들이 단지 추상적이고
공허한 개념에 그친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한국교회의 잘못된 접근을 지적합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유행하는 '영성훈련', '영성회복' 등의 시도가 신비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을 잘못 강조하다가 오히려 이원화를 더욱 고착시킨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영적이고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강조가 약해진 것이
아니라 계몽주의 이후 초월적 존재의 직접적인 역사 개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고의 확대에 있다고 저자는 평가합니다. 역사의식의 변화입니다.
'역사', '역사의식'에 대해 잠깐 살피겠습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유행하는 '영성훈련', '영성회복' 등의 시도가 신비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을 잘못 강조하다가 오히려 이원화를 더욱 고착시킨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영적이고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강조가 약해진 것이
아니라 계몽주의 이후 초월적 존재의 직접적인 역사 개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고의 확대에 있다고 저자는 평가합니다. 역사의식의 변화입니다.
'역사', '역사의식'에 대해 잠깐 살피겠습니다.
['역사', '역사의식'이라는 말은 정의내리기 어려운 용어이다. 좀 쉽게 말해
보면 역사의식이란 역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 사람, 사건을 '존재론적'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사물을
파악할 때 그 자체가 가지는 가치를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곧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시간에 대한 강한 자각과 함께 그 무엇을 인식하려는 의식이다.]
보면 역사의식이란 역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 사람, 사건을 '존재론적'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사물을
파악할 때 그 자체가 가지는 가치를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곧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시간에 대한 강한 자각과 함께 그 무엇을 인식하려는 의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학은 철학과 상당히 대립되는 학문입니다.
[철학은 가변적인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본질을 찾는 작업을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역사의식이란 사물을 존재론적이고 정적인
개념으로 파악하지 않고, 사물의 인식에 시간이라는 요소를 첨가해 사고하려는 의식이다.]
역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역사의식이란 사물을 존재론적이고 정적인
개념으로 파악하지 않고, 사물의 인식에 시간이라는 요소를 첨가해 사고하려는 의식이다.]
복잡한 '역사'의 정의를 길게 이야기하는데요.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이 부분만 언급하겠습니다.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공통된 인식을 위해
트뢸치(E. Troeltsch)의 역사학 정의 세 가지를 기준하겠습니다.
'개연성', '유비', '상호연관'입니다. 이제 이런 역사의식의 고조가 기독교의
전통적인 사고에 어떤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는지 보도록 하죠.
이 부분만 언급하겠습니다.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공통된 인식을 위해
트뢸치(E. Troeltsch)의 역사학 정의 세 가지를 기준하겠습니다.
'개연성', '유비', '상호연관'입니다. 이제 이런 역사의식의 고조가 기독교의
전통적인 사고에 어떤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는지 보도록 하죠.
[역사적 사고의 대중화는 기독교의 초월적 요소와 충돌을 일으켰다.
역사적 사고는 종말론적인 요소나 계시 같은 초월적 개념과 대립된다
.....성서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계시사건인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역사학의 기본 범주에 비추어 보자......
역사적 사고는 종말론적인 요소나 계시 같은 초월적 개념과 대립된다
.....성서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계시사건인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역사학의 기본 범주에 비추어 보자......
(개연성 = 절대적 사건이지 개연성에 좌우되는 상대적인 사건이 아니다.)
(유비 = 이 사건은 역사상의 다른 어떤 사건과도 같은 범주에 들 수 없다.)
(상호연관 = 십자가와 부활은 다른 어떤 사건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이
아닌 신의 자의적인 행위이다.)
아닌 신의 자의적인 행위이다.)
....이상과 같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역사학의 세 가지 범주 중 어떤 것과도 맞지 않는다.]
이런 역사학의 방법론이 성서에 적용되어 "성서 역사비평학'이 폭넓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역사비평학에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성서가 하나의 역사적 산물로 평가되는 것에 대한 반감이겠죠.
결과적으로 계몽시대 역사의식의 확장으로 역사 내의 사건을 이해하는데
초월적인 방법론을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이는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종말에 대한 소망과 초월적 존재의 역사 개입에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군요.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역사비평학에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성서가 하나의 역사적 산물로 평가되는 것에 대한 반감이겠죠.
결과적으로 계몽시대 역사의식의 확장으로 역사 내의 사건을 이해하는데
초월적인 방법론을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이는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종말에 대한 소망과 초월적 존재의 역사 개입에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군요.
[여기서 잠시 정리해 보자.....역사의식이 강하게 나타난 것은 문제가 없다.
기독교는 매우 역사적인 종교이고 역사성을 상실해서도 안 된다. 문제는
역사의식의 강조와 함께 수반된 종말의식의 상실이다.....그렇다면 종말론적인
요소가 제거된 '역사 지향적 구조'는 문제인가? 그렇다. 기독교 측면에서
볼 때 이 구조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이다.....이 같은 사고 유형에서는,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며 강한 역사적 주체의식을 가진다. 문제의 핵심은
여기서 역사는 자체 완결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이다. 역사의 의미도 목적도
자체 완결적이 된다.]
기독교는 매우 역사적인 종교이고 역사성을 상실해서도 안 된다. 문제는
역사의식의 강조와 함께 수반된 종말의식의 상실이다.....그렇다면 종말론적인
요소가 제거된 '역사 지향적 구조'는 문제인가? 그렇다. 기독교 측면에서
볼 때 이 구조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이다.....이 같은 사고 유형에서는,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며 강한 역사적 주체의식을 가진다. 문제의 핵심은
여기서 역사는 자체 완결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이다. 역사의 의미도 목적도
자체 완결적이 된다.]
이 문제가 핵심이군요.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되는 것.
'공간적 사고유형'(인간으로부터 신으로 올라가는 수직구조)이 역사의 문제를
외면했다면, 역사 지향적 구조는 종말론적인 지향점과 희망을 제거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개인화 내면화 된 신앙에서, 후자는
여러 사관이나 이념, 강한 실천적 목표를 추진하려는 곳에서 흔히 나타납니다.
'공간적 사고유형'(인간으로부터 신으로 올라가는 수직구조)이 역사의 문제를
외면했다면, 역사 지향적 구조는 종말론적인 지향점과 희망을 제거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개인화 내면화 된 신앙에서, 후자는
여러 사관이나 이념, 강한 실천적 목표를 추진하려는 곳에서 흔히 나타납니다.
결론적으로
(1) 역사의식 자체가 기독교의 종말론적 신앙을 훼손한 것은 아니다.
교회가 종말론적인 신앙을 역사의식과 함께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
문제이다.....교회는 자신의 일에만 몰두함으로 스스로 교회주의에
예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인 개인과 교회 공동체는 반드시 간직해야
할 종말론적 소망과 목표를 역사 안으로 옮겨 버린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식으로 초래된 패러다임의 변화 중의 하나이다.
교회가 종말론적인 신앙을 역사의식과 함께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
문제이다.....교회는 자신의 일에만 몰두함으로 스스로 교회주의에
예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인 개인과 교회 공동체는 반드시 간직해야
할 종말론적 소망과 목표를 역사 안으로 옮겨 버린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식으로 초래된 패러다임의 변화 중의 하나이다.
(2) 다른 문제는 역사와 신의 섭리와 관계설정이다. 성서와 신학은 이
역사가 하나님의 특별한 뜻에 의해 진행된다고 믿었고 이를 구속사라
불렀다.....19세기 이후 다양한 사관들이 나타났고 이 사관들에 따라
역사의 목적과 의미를 부여했다......따라서 이제 일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계시'가 구체화되는지를 밝혀야 하는 신학적
과제를 안게 되었다.....현재의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로 볼 수 있는
기독교 사관의 정립이 절실히 필요하다.
역사가 하나님의 특별한 뜻에 의해 진행된다고 믿었고 이를 구속사라
불렀다.....19세기 이후 다양한 사관들이 나타났고 이 사관들에 따라
역사의 목적과 의미를 부여했다......따라서 이제 일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계시'가 구체화되는지를 밝혀야 하는 신학적
과제를 안게 되었다.....현재의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로 볼 수 있는
기독교 사관의 정립이 절실히 필요하다.
(3) 종말론적 지향점의 상실에 대해 현대신학은 해결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필자는 역사의식과 종말론적 지평을 함께 가지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고 또한 성서적이라고 본다. 사실 기독교는
매우 강한 종말론적 신앙과 역사의식을 동시에 가진 종교이다.
설정해야 하는가? 필자는 역사의식과 종말론적 지평을 함께 가지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고 또한 성서적이라고 본다. 사실 기독교는
매우 강한 종말론적 신앙과 역사의식을 동시에 가진 종교이다.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목표 없이 우리의 삶과 교회는
정당한 방향과 목적을 가질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신학의 과제는
각 시대에, 자신의 시대정신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지
열어 보여주고 이를 위해 우리가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당한 방향과 목적을 가질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신학의 과제는
각 시대에, 자신의 시대정신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지
열어 보여주고 이를 위해 우리가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5. 20세기의 문턱에서'를 연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