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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 스님 사태 앞에서!
지율의 문제제기
나이는 얼마나 되셨는지 모르지만 체격도 별로이신 비구니께서 100일 이상 물과 소금으로만 견디셨다는 이 끔찍한 사태 앞에서 나는 할 말이 없다. 사실 무슨 말이 가능하며, 필요하겠는가? 그냥 그런 일이 바로 내 눈 앞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지 그것에 대한 무슨 분석이나 격려나 분발을 촉구하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아무리 말의 범주를 넘을만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말을 통해서 피안과 차안의 경계선을 끊임없이 넘나들어야 한다는 당위 때문에 궁색한 입장에서라도 무언가 말을 하긴 해야 할 것 같다. 말의 유희가 아니라 말의 힘에 사로잡히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서 지율 스님이 죽음을 불사하고 단식을 결행한 저간의 형편에 대해서 세세하게 언급할 생각은 없다. 대충 알만한 사람들은 알 것이고, 어쩌면 그런 것은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에 주파한다는 꿈의 고속철이 경남 어느 지역인가에 있는 천성산을 관통한다고 한다. 천성산 어느 비구니 사찰에서 수행하고 있는 지율 스님은 현재 진행 중인 천성산 터널 공사를 중지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이런 문제는 어제 오늘 불거진 건 아니었다. 서울에서 대구까지의 고속철 공사가 마무리되었지만 대구에서 부산까지의 공사가 지지부진한 이유는 그동안 불교계와 환경단체가 중심이 되어 천성산 터널 공사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소위 도롱뇽 고발 사건’으로 불리는 재판도 열렸고,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단체 안에서도 논란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몇 번의 공사 중단 끝에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터널 공사가 재개되면서 지율 스님의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환경 문제에 신경을 쓴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환경을 다칠 수밖에 없는 고속철에 대한 논의는 좀 복잡하다. 이미 기술 문명의 세례를 받은 현대인들은 끝없이 편리하고 풍요롭고 쾌적한 생활환경을 요구하기 때문에 고속철 도입을 막을 도리는 없다. 어쩌면 앞으로 부산에서 신의주를 거쳐 북경과 모스크바, 더 나아가 베를린과 로마까지 이르는 대륙간 고속철의 단초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와 일본에 해저 터널을 뚫는 날도 올 것이다. 그렇게 멀리 내다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고속철을 통해서 서울과 부산의 물류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있다면, 그리고 지방과 서울의 공간적 거리가 대폭적으로 축소된다면 이 나라의 전반적인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고속철 시대가 그렇게 장밋빛으로만 전개된다는 보장은 아직 분명하지 않다. 막대한 비용도 비용이지만 기존의 철로 외에 또 다른 철로를 놓기 위해서 훼손되어야 할 자연환경의 가치는 돈으로 계산해낼 수 없다. 더구나 고속철에서 나오는 훨씬 높은 소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불편한 것은 물론이고 야생동물들에게 끼치는 나쁜 영향은 두말할 것 없이 심각하다. 더 근본적으로는 고속철에 들어갈 비용을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투자한다면 고속철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가치보다 훨씬 높은 가치가 생산될 가능성도 있다. 이런 문제들은 끝이 없는 논쟁의 대상이 될 뿐이지, 그래서 우리가 상황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 수학적인 계산으로 답이 나올 대상이 아니다.
지율 스님과 환경단체들도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내심으로는 고속철 자체를 반대하겠지만 이런 국가적 차원의 이해관계가 달려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 다만 그들의 주장은 환경영향 평가를 보다 신중하게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정부에서는 그런 과정을 거쳤다고 하지만 객관적으로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권위가 보장되는 민관 합동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율 스님이 단식을 시작할 때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문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환경영향 평가를 다시 하겠다는 안을 정부가 내놓았고 지율 스님 쪽에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다. 다행인지 미봉책인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환경영향평가에 목숨을 건 이유
그런데 사실 ‘환경영향 평가’도 우리가 결정적으로 신뢰할만한 시스템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그 자연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 그 자연의 미래를 예측하겠다는 건 근본적으로 언어도단이다. 이건 긍정적인 쪽이든지 부정적인 쪽이든지 우리의 예측이라는 게 너무 한정적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자연 환경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시화호가 저렇게 썩어버릴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는가. 반면에 서울의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난지도가 쓰레기 반입 중단 몇 년 후에 저렇게 생태적으로 복원되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자연에까지 갈 것도 없이 인간이 설계하고 있는 ‘교통영향 평가’도 역시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환경영향 평가’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 이외에 우리가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조치라도 붙들고 있어야 하겠지만 모든 대형공사를 단지 학술적인 ‘환경영향 평가’로 결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약간 현학적이거나 이상주의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환경과 생태 문제는 우리가 범주화하거나 도구화하거나 재단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이런 문제를 풀어가는 게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저러나 지율 스님은 무슨 이유로 이런 일에 생명을 거셨는가? 아타(我他)의 구별이 없는 유기론적 만유일체론에 의해서 세계와 생명을 바라보는 스님의 눈에, 그것도 생명을 직접 자기 몸에서 키우는 여성의 눈에 고속철로 인해서 벌어질 반생명적 현상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다가왔기 때문인가. 이런 본질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환경 문제를 다루는 관료들의 무신경이 한 비구니의 자학적인 투쟁을 불러온 것인가. 만약 환경영향 평가를 다시 받을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받아들일 일이지 죽음 일보 직전에 가서야 들어줄 건 무언가? 정부는 이번에 명분도 잃고 실리도 잃은 셈이다.
다시 묻는다. 지율 스님은 무슨 이유로 이런 일에 생명을 거셨는가? 나는 이렇게 질문만 할 뿐이지 설명할 자신이 없다. 그분의 마음을 내가 모두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기껏해야 이런 정도 이상으로 더 나갈 수 없다. 지율 스님에게는 천성산과 자기가 일체라는 깨달음이 너무나 확고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렇게 말해 놓고도 좀 부끄럽다. 생명을 건 한 인간의 투쟁을 이렇게 단순한 논리나 분석으로 사유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게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만약 이번에 민관 공동의 환경영향평가에서 공사 불가로 나온다면 괜찮겠지만 공사 가능으로 나온다면 지율 스님의 이런 과격한 행동은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할까? 이번 사태는 내가 이런 데까지 꼬치꼬치 캐고 묻고 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궁금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어서 대신 질문한 것뿐이다. 그러나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공사 가능으로 결과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지율 스님의 행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녀는 ‘신의 아그네스’처럼 평범한 우리가 가까이 가지 못할 어떤 신적인 세계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것에 순종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소리만을 따랐다고나 해야 할는지. 더구나 결과에 상관없이 그녀의 생명을 담보한 투쟁은 이익집단의 이전투구로 물든 이 시대에 종교인들의 투쟁 방식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바르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할일을 다 한 것이다.
지율 앞에 있는 기독교
기독교인들은 지율 사태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는 집회나 반북 친미 기도회에 앞장서고, 약간 격을 달리하지만 여전히 패권적 형태를 보여준 영락교회나 광성교회 문제나 노출시키고, 급기야 공영 티브이 방송국에서 한국교회의 부조리를 방영하는 상태에 까지 왔다. 강남 지역의 교회들이 이기적인 신앙 형태인 ‘특별새벽기도회’에 열중하고, 교인들의 헌금을 과도한 교회당 건축에 사용하는 것에만 마음을 쓰고 있는 한국교회가 지율 스님의 사태 앞에서 눈이라도 껌벅하겠는가? 아마 어떤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가 속으로는 불교보다 좋은 일을 더 많이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노숙자들에게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고, 무의촌에 의료 선교도 가고, 고아원과 양로원도 자주 방문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행위들은 부수적이고 비본질적이라는 점이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신학적 인식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교회가 교회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한 아무리 남에게 선한 일을 많이 베푼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위선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설교자들은 위선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근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나오는 발언이다. 위선은 우리를 점점 자기만족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운동에 참여할만한 동력을 제공하지 못한다. 차라리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게 바로 예수님 당시의 상황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지율은 자기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정확하게 깨달은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거야 사실 지율만이 아니라 불교의 기본 철학이기도 하고 우리 기독교도 역시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을 단지 이론으로만, 교리로만 달달 외운 사람이 있는 반면에 자기 몸, 자기 삶과 하나로 깨달은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깨달음이 곧 큰 깨우침인 ‘돈오’이며,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메타노이아’, 즉 ‘회개’, 또는 ‘인카나치오’, 즉 ‘성육신’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이런 깨우침과 메타노이아에 이르는 길을 다르게 찾았다는 점이다. 불교는 깊은 사유를 통해서 자기 내부에서 절대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그리스도에게서 발생한 사건을 믿음으로써 절대의 세계가 외부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말이 약간 다른 데로 흘렀다. 지난날 매스컴에 비친 불교는 교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부활극에서나 볼 수 있던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은 반면에 기독교는 민주화 투쟁을 위해서 자주 감옥에 드나드는 모습으로 비쳤다. 그런데 이제 양쪽의 그림이 완전히 바뀐 것 같다. 우리 기독교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간주되는 반면에 불교는 폭력적인 현대의 문명에 작은 몸을 던져 맞서 싸운 지율을 통해서 평화 지향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종교로 각인되고 있다. 이렇게 뒤바뀐 운명 앞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불평할 게 하나도 없지 않을까? (2005.2.4.)
지율의 문제제기
나이는 얼마나 되셨는지 모르지만 체격도 별로이신 비구니께서 100일 이상 물과 소금으로만 견디셨다는 이 끔찍한 사태 앞에서 나는 할 말이 없다. 사실 무슨 말이 가능하며, 필요하겠는가? 그냥 그런 일이 바로 내 눈 앞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지 그것에 대한 무슨 분석이나 격려나 분발을 촉구하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아무리 말의 범주를 넘을만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말을 통해서 피안과 차안의 경계선을 끊임없이 넘나들어야 한다는 당위 때문에 궁색한 입장에서라도 무언가 말을 하긴 해야 할 것 같다. 말의 유희가 아니라 말의 힘에 사로잡히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서 지율 스님이 죽음을 불사하고 단식을 결행한 저간의 형편에 대해서 세세하게 언급할 생각은 없다. 대충 알만한 사람들은 알 것이고, 어쩌면 그런 것은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에 주파한다는 꿈의 고속철이 경남 어느 지역인가에 있는 천성산을 관통한다고 한다. 천성산 어느 비구니 사찰에서 수행하고 있는 지율 스님은 현재 진행 중인 천성산 터널 공사를 중지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이런 문제는 어제 오늘 불거진 건 아니었다. 서울에서 대구까지의 고속철 공사가 마무리되었지만 대구에서 부산까지의 공사가 지지부진한 이유는 그동안 불교계와 환경단체가 중심이 되어 천성산 터널 공사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소위 도롱뇽 고발 사건’으로 불리는 재판도 열렸고,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단체 안에서도 논란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몇 번의 공사 중단 끝에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터널 공사가 재개되면서 지율 스님의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환경 문제에 신경을 쓴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환경을 다칠 수밖에 없는 고속철에 대한 논의는 좀 복잡하다. 이미 기술 문명의 세례를 받은 현대인들은 끝없이 편리하고 풍요롭고 쾌적한 생활환경을 요구하기 때문에 고속철 도입을 막을 도리는 없다. 어쩌면 앞으로 부산에서 신의주를 거쳐 북경과 모스크바, 더 나아가 베를린과 로마까지 이르는 대륙간 고속철의 단초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와 일본에 해저 터널을 뚫는 날도 올 것이다. 그렇게 멀리 내다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고속철을 통해서 서울과 부산의 물류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있다면, 그리고 지방과 서울의 공간적 거리가 대폭적으로 축소된다면 이 나라의 전반적인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고속철 시대가 그렇게 장밋빛으로만 전개된다는 보장은 아직 분명하지 않다. 막대한 비용도 비용이지만 기존의 철로 외에 또 다른 철로를 놓기 위해서 훼손되어야 할 자연환경의 가치는 돈으로 계산해낼 수 없다. 더구나 고속철에서 나오는 훨씬 높은 소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불편한 것은 물론이고 야생동물들에게 끼치는 나쁜 영향은 두말할 것 없이 심각하다. 더 근본적으로는 고속철에 들어갈 비용을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투자한다면 고속철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가치보다 훨씬 높은 가치가 생산될 가능성도 있다. 이런 문제들은 끝이 없는 논쟁의 대상이 될 뿐이지, 그래서 우리가 상황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 수학적인 계산으로 답이 나올 대상이 아니다.
지율 스님과 환경단체들도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내심으로는 고속철 자체를 반대하겠지만 이런 국가적 차원의 이해관계가 달려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 다만 그들의 주장은 환경영향 평가를 보다 신중하게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정부에서는 그런 과정을 거쳤다고 하지만 객관적으로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권위가 보장되는 민관 합동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율 스님이 단식을 시작할 때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문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환경영향 평가를 다시 하겠다는 안을 정부가 내놓았고 지율 스님 쪽에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다. 다행인지 미봉책인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환경영향평가에 목숨을 건 이유
그런데 사실 ‘환경영향 평가’도 우리가 결정적으로 신뢰할만한 시스템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그 자연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 그 자연의 미래를 예측하겠다는 건 근본적으로 언어도단이다. 이건 긍정적인 쪽이든지 부정적인 쪽이든지 우리의 예측이라는 게 너무 한정적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자연 환경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시화호가 저렇게 썩어버릴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는가. 반면에 서울의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난지도가 쓰레기 반입 중단 몇 년 후에 저렇게 생태적으로 복원되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자연에까지 갈 것도 없이 인간이 설계하고 있는 ‘교통영향 평가’도 역시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환경영향 평가’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 이외에 우리가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조치라도 붙들고 있어야 하겠지만 모든 대형공사를 단지 학술적인 ‘환경영향 평가’로 결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약간 현학적이거나 이상주의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환경과 생태 문제는 우리가 범주화하거나 도구화하거나 재단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이런 문제를 풀어가는 게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저러나 지율 스님은 무슨 이유로 이런 일에 생명을 거셨는가? 아타(我他)의 구별이 없는 유기론적 만유일체론에 의해서 세계와 생명을 바라보는 스님의 눈에, 그것도 생명을 직접 자기 몸에서 키우는 여성의 눈에 고속철로 인해서 벌어질 반생명적 현상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다가왔기 때문인가. 이런 본질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환경 문제를 다루는 관료들의 무신경이 한 비구니의 자학적인 투쟁을 불러온 것인가. 만약 환경영향 평가를 다시 받을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받아들일 일이지 죽음 일보 직전에 가서야 들어줄 건 무언가? 정부는 이번에 명분도 잃고 실리도 잃은 셈이다.
다시 묻는다. 지율 스님은 무슨 이유로 이런 일에 생명을 거셨는가? 나는 이렇게 질문만 할 뿐이지 설명할 자신이 없다. 그분의 마음을 내가 모두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기껏해야 이런 정도 이상으로 더 나갈 수 없다. 지율 스님에게는 천성산과 자기가 일체라는 깨달음이 너무나 확고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렇게 말해 놓고도 좀 부끄럽다. 생명을 건 한 인간의 투쟁을 이렇게 단순한 논리나 분석으로 사유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게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만약 이번에 민관 공동의 환경영향평가에서 공사 불가로 나온다면 괜찮겠지만 공사 가능으로 나온다면 지율 스님의 이런 과격한 행동은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할까? 이번 사태는 내가 이런 데까지 꼬치꼬치 캐고 묻고 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궁금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어서 대신 질문한 것뿐이다. 그러나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공사 가능으로 결과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지율 스님의 행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녀는 ‘신의 아그네스’처럼 평범한 우리가 가까이 가지 못할 어떤 신적인 세계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것에 순종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소리만을 따랐다고나 해야 할는지. 더구나 결과에 상관없이 그녀의 생명을 담보한 투쟁은 이익집단의 이전투구로 물든 이 시대에 종교인들의 투쟁 방식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바르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할일을 다 한 것이다.
지율 앞에 있는 기독교
기독교인들은 지율 사태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는 집회나 반북 친미 기도회에 앞장서고, 약간 격을 달리하지만 여전히 패권적 형태를 보여준 영락교회나 광성교회 문제나 노출시키고, 급기야 공영 티브이 방송국에서 한국교회의 부조리를 방영하는 상태에 까지 왔다. 강남 지역의 교회들이 이기적인 신앙 형태인 ‘특별새벽기도회’에 열중하고, 교인들의 헌금을 과도한 교회당 건축에 사용하는 것에만 마음을 쓰고 있는 한국교회가 지율 스님의 사태 앞에서 눈이라도 껌벅하겠는가? 아마 어떤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가 속으로는 불교보다 좋은 일을 더 많이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노숙자들에게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고, 무의촌에 의료 선교도 가고, 고아원과 양로원도 자주 방문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행위들은 부수적이고 비본질적이라는 점이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신학적 인식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교회가 교회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한 아무리 남에게 선한 일을 많이 베푼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위선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설교자들은 위선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근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나오는 발언이다. 위선은 우리를 점점 자기만족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운동에 참여할만한 동력을 제공하지 못한다. 차라리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게 바로 예수님 당시의 상황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지율은 자기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정확하게 깨달은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거야 사실 지율만이 아니라 불교의 기본 철학이기도 하고 우리 기독교도 역시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을 단지 이론으로만, 교리로만 달달 외운 사람이 있는 반면에 자기 몸, 자기 삶과 하나로 깨달은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깨달음이 곧 큰 깨우침인 ‘돈오’이며,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메타노이아’, 즉 ‘회개’, 또는 ‘인카나치오’, 즉 ‘성육신’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이런 깨우침과 메타노이아에 이르는 길을 다르게 찾았다는 점이다. 불교는 깊은 사유를 통해서 자기 내부에서 절대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그리스도에게서 발생한 사건을 믿음으로써 절대의 세계가 외부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말이 약간 다른 데로 흘렀다. 지난날 매스컴에 비친 불교는 교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부활극에서나 볼 수 있던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은 반면에 기독교는 민주화 투쟁을 위해서 자주 감옥에 드나드는 모습으로 비쳤다. 그런데 이제 양쪽의 그림이 완전히 바뀐 것 같다. 우리 기독교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간주되는 반면에 불교는 폭력적인 현대의 문명에 작은 몸을 던져 맞서 싸운 지율을 통해서 평화 지향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종교로 각인되고 있다. 이렇게 뒤바뀐 운명 앞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불평할 게 하나도 없지 않을까? (2005.2.4.)
2005.02.05 03:25:07
그리고 이 참에 한국의 소박 환경주의자들도 보다 더 진지한 공부를 통하여 환경이 보다 구체적인 담론으로서 시민들에게 소개되었음 좋겠습니다.
환경=도덕적 우위=항상 선하다=당위
등으로 이어지는 유림주의적 구호보다는 생활 속에서 실감할 수 있는 환경운동으로의 재탄생이 이루어졌음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덕적 당위성 만이 아닌.. 공부를 좀 해야 합니다. 정말 환경에 대해서..
환경=도덕적 우위=항상 선하다=당위
등으로 이어지는 유림주의적 구호보다는 생활 속에서 실감할 수 있는 환경운동으로의 재탄생이 이루어졌음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덕적 당위성 만이 아닌.. 공부를 좀 해야 합니다. 정말 환경에 대해서..
2005.02.05 13:27:46
그리고 불교는 자연친화적인 종교로 각인되지 못할 겁니다. 현실이 그렇지요. 명승유적지 고산들마다 그나마 안정적이었던 기존 사찰의 규모를 넘어서는 시멘트 덩어리들을 양산하는 곳을 자연친화적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겠죠. 그리고 산길 구석구석마다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보기좋았던 산길을 흉물스럽게 만드는 것 역시 자연친화적이라고 볼 수는 없겠죠.
솔직히 그런 종교계의 이중적인 모습이 더 구토스럽습니다.
이번 지율의 단식에 정작 부각되어야 할 천성산은 간 곳없고.. 단식의 숫자만 남은 이 아이러니는 제 기억 속에서도 두고두고 남겨질 것 같습니다.
솔직히 그런 종교계의 이중적인 모습이 더 구토스럽습니다.
이번 지율의 단식에 정작 부각되어야 할 천성산은 간 곳없고.. 단식의 숫자만 남은 이 아이러니는 제 기억 속에서도 두고두고 남겨질 것 같습니다.
2005.02.05 14:25:20
물론 그런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율의 자학적 방식의 싸움을 어느 누구도
가치론적으로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소.
종교적 차원에서의 싸움은 합리성 너머에 있으니까 말이오.
예컨대 정확한 비교의 대상은 아니지만
예수도 좀더 장기적인 싸움으로,
좀더 합리적인 싸움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그냥 자기의 길을 간것 아니겠오?
만약 지율이 가학적인 방식으로 싸웠다면,
많은 테러리스트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정당성을 상실했을 거요.
지율 사태에 접근하는 저널리즘의 속성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오.
그것은 이 시대가 선정적이라는 근본 문제때문이지
지율의 책임은 아닐 것이오.
불교 사찰과 무슨무슨 여래상에 연결된
비생태적, 반생명적 현상도 역시 불문가지요.
그렇다고 불교의 본질까지 '이중적'이라는 말로 재단하는 것은
조금 과한 게 아닐까 생각하오.
늘 모든 종교에는 본질을 훼손하는 어떤 악한 힘들이 작동하는 법이니까.
바록 합리성 밖에서, 또는 위에서, 또는 옆에서 일어난 행위라고 하더라도
바르트 식으로 '더큰 긍정' 안에서 일단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오.
특히 지율 사태는 몇년 전에 있었던 삼보일배와 마찬가지로
어떤 점에서 우리같이 분석만 일삼는 학자들이 볼 때 좀 거칠다고 하더라도
그런 변증법적 과정이 있어야만 역사가 그나마 제 길을 찾지 않을까 하오.
나는 이런 한 가닥 작은 희망으로 여전히 지율 편이오.
지율의 자학적 방식의 싸움을 어느 누구도
가치론적으로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소.
종교적 차원에서의 싸움은 합리성 너머에 있으니까 말이오.
예컨대 정확한 비교의 대상은 아니지만
예수도 좀더 장기적인 싸움으로,
좀더 합리적인 싸움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그냥 자기의 길을 간것 아니겠오?
만약 지율이 가학적인 방식으로 싸웠다면,
많은 테러리스트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정당성을 상실했을 거요.
지율 사태에 접근하는 저널리즘의 속성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오.
그것은 이 시대가 선정적이라는 근본 문제때문이지
지율의 책임은 아닐 것이오.
불교 사찰과 무슨무슨 여래상에 연결된
비생태적, 반생명적 현상도 역시 불문가지요.
그렇다고 불교의 본질까지 '이중적'이라는 말로 재단하는 것은
조금 과한 게 아닐까 생각하오.
늘 모든 종교에는 본질을 훼손하는 어떤 악한 힘들이 작동하는 법이니까.
바록 합리성 밖에서, 또는 위에서, 또는 옆에서 일어난 행위라고 하더라도
바르트 식으로 '더큰 긍정' 안에서 일단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오.
특히 지율 사태는 몇년 전에 있었던 삼보일배와 마찬가지로
어떤 점에서 우리같이 분석만 일삼는 학자들이 볼 때 좀 거칠다고 하더라도
그런 변증법적 과정이 있어야만 역사가 그나마 제 길을 찾지 않을까 하오.
나는 이런 한 가닥 작은 희망으로 여전히 지율 편이오.
2005.02.05 14:49:32
저는 바로 그 지율이 싸웠다고 하는 것이 정말 종교적 차원에서의 투쟁이었나에 회의적인 생각이 듭니다.
물론 지금이야 서늘한 합리주의자의 눈으로 사태를 읽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나온 과정의 저간의 모습들이 그의 투쟁을 순수하게만 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이중적'이라고 하는 단어는 불교의 교리나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종교계 일반을 지칭해서 사용했습니다.
오히려 그 본질과 주장이 일치하지 않는, 겉과 속이 다른 그들의 실천현상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모든 종교인들과 종교조직의 이기적 이중성은 지적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이야 서늘한 합리주의자의 눈으로 사태를 읽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나온 과정의 저간의 모습들이 그의 투쟁을 순수하게만 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이중적'이라고 하는 단어는 불교의 교리나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종교계 일반을 지칭해서 사용했습니다.
오히려 그 본질과 주장이 일치하지 않는, 겉과 속이 다른 그들의 실천현상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모든 종교인들과 종교조직의 이기적 이중성은 지적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2005.02.05 15:52:14
그리고 보다 서늘하게 평가해보자면
이번 지율의 단식으로 지율이 얻은 것이라고는
다음 번 단식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아님 정말 막다른 곳으로 가야만 하는 벼랑뿐입니다.
솔직히 영악한 정부가 오히려 명분과 실리 모두 가져가는 형국이었고
여전히 환경담론은 미로 속에서 방향을 잃고 신화만 되어가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환경은 과학이었거늘..
그것을 원리주의적으로 해결하려 한 지율의 성급한 판단이
오히려 모든 것을 관료주의의 집합체인 정부에게
유리한 형국을 제공해주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사이 몇몇 정치꾼들은 이번 사건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잇슈로 만들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겠지요.
결국 지율의 자발적 단식에서
굶기는 지율이 굶었지만
실속과 명분은 다른 쪽에서 빼어가는 아이러니한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율이 택한 벼랑끝 전술은
여하튼 간에 지혜롭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나라 관료와 정치인들의 영악함과
수 읽는 능력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100일...
그렇게 상징을 만들지 말았어야하는데..
종교적 차원에서의 투쟁은 골인지점은 없지 않나요?
자신의 전 존재를 건 무한대와의 동행아닌가요?
이미 한계와 기한을 정해놓은
이번 단식은..
정부와 건설업체의 타이밍 기다리기에
놀아날 수 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리고 순간 환경론은 의미있는 담론으로 연속적인 파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단식의 여파로 불어온 정치적 편가름과 잇슈싸움으로 인해 파묻히는 형국입니다.
아마도 다시 천성산 사태의 참된 주제여야 할 환경의 문제가
정상적인 수준에서 논의되기 위해서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요.
다행히 새만금 사업에 대한 수익성이 없다는 법원의 판정이 나왔네요.
환경단체의 지혜로운 대처로
단식에 파묻힌 환경의 모습이 시민들에게 제댈 전달되었음 하는 마음 큽니다.
이번 지율의 단식으로 지율이 얻은 것이라고는
다음 번 단식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아님 정말 막다른 곳으로 가야만 하는 벼랑뿐입니다.
솔직히 영악한 정부가 오히려 명분과 실리 모두 가져가는 형국이었고
여전히 환경담론은 미로 속에서 방향을 잃고 신화만 되어가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환경은 과학이었거늘..
그것을 원리주의적으로 해결하려 한 지율의 성급한 판단이
오히려 모든 것을 관료주의의 집합체인 정부에게
유리한 형국을 제공해주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사이 몇몇 정치꾼들은 이번 사건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잇슈로 만들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겠지요.
결국 지율의 자발적 단식에서
굶기는 지율이 굶었지만
실속과 명분은 다른 쪽에서 빼어가는 아이러니한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율이 택한 벼랑끝 전술은
여하튼 간에 지혜롭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나라 관료와 정치인들의 영악함과
수 읽는 능력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100일...
그렇게 상징을 만들지 말았어야하는데..
종교적 차원에서의 투쟁은 골인지점은 없지 않나요?
자신의 전 존재를 건 무한대와의 동행아닌가요?
이미 한계와 기한을 정해놓은
이번 단식은..
정부와 건설업체의 타이밍 기다리기에
놀아날 수 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리고 순간 환경론은 의미있는 담론으로 연속적인 파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단식의 여파로 불어온 정치적 편가름과 잇슈싸움으로 인해 파묻히는 형국입니다.
아마도 다시 천성산 사태의 참된 주제여야 할 환경의 문제가
정상적인 수준에서 논의되기 위해서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요.
다행히 새만금 사업에 대한 수익성이 없다는 법원의 판정이 나왔네요.
환경단체의 지혜로운 대처로
단식에 파묻힌 환경의 모습이 시민들에게 제댈 전달되었음 하는 마음 큽니다.
2005.02.05 15:57:14
이번 합의의 실체입니다..
<`천성산 환경영향조사' 어떻게 진행되나>
[연합뉴스 2005-02-04 00:27]
천성산 공사는 지금도..
`환경영향평가' 아닌 `법외절차'..조사결과 수용여부 `관건'
(서울=연합뉴스) 이충원 기자= 정부와 지율스님측이 3일 합의한 환경영향 공동조사는 법적 절차인 환경영향평가와는 다른 `법외(法外)' 절차다.
법에 따른 환경영향평가는 사업자인 한국철도시설공단측이 지난 94년 전문가에게 의뢰해 실시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2003년에 정밀조사까지 한 만큼 다시 할 수는 없다는 게 정부 입장이다.
그동안 환경영향평가 재조사를 요구해온 지율 스님이 법외 절차이기 하지만 환경영향 공동조사에 합의한 것은 일단 정부 입장을 받아들인 셈이다. 정부로서도 최근까지 "공동조사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한 분위기였으나 단식 상황의 심각성을 감안, 이번에 한 발짝 물러선 것이며, `합법적 재평가'를 요구해 온 지율 스님도 결과적으로는 어느 정도 양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날 합의에 따라 사업자와 환경단체, 정부가 전문가를 내세워 '환영영향 공동조사단'을 구성해야 하지만 큰 이견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조사결과의 수용 여부다.
그동안 양측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터널 공사가 무제치늪과 원효늪, 밀밭늪 등 천성산 고산습지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환경단체 측은 터널을 뚫어 지하 수맥을 건드리면 지하 수위가 낮아져 습지가 마르고 이곳에 사는 도롱뇽의 서식이 불가능해지는 등 생태계 파괴가 불을 보듯 뻔하다고 주장해왔고, 정부나 한국철도시설공단측 전문가들은 "천성산 습지는 빗물이 고여서 이뤄진 것인 만큼 터널을 뚫어도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양측의 쟁점을 해소하려면 시추조사를 해야 하지만 지금까지는 이를 한 적이 없다.
이번 공동조사에서 시추조사가 이뤄질 경우 가장 정확한 조사결과가 나오는 셈이지만 그 결과를 양측이 수용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조사결과가 습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올 경우라도 환경단체는 "3개월로는 부족하다"며 전면 재조사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거꾸로 습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결론이 나오더라도 사업자는 부분적인 보완책을 취하고 말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정부가 이번에 지율스님이 요구해온 `3개월간 터널 발파공사 중단'을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공동조사단의 요청에 따라 조사에 필요한 범위에서 부분적인 공사 중단은 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chungwon@yna.co.kr (끝)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천성산 환경영향조사' 어떻게 진행되나>
[연합뉴스 2005-02-04 00:27]
천성산 공사는 지금도..
`환경영향평가' 아닌 `법외절차'..조사결과 수용여부 `관건'
(서울=연합뉴스) 이충원 기자= 정부와 지율스님측이 3일 합의한 환경영향 공동조사는 법적 절차인 환경영향평가와는 다른 `법외(法外)' 절차다.
법에 따른 환경영향평가는 사업자인 한국철도시설공단측이 지난 94년 전문가에게 의뢰해 실시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2003년에 정밀조사까지 한 만큼 다시 할 수는 없다는 게 정부 입장이다.
그동안 환경영향평가 재조사를 요구해온 지율 스님이 법외 절차이기 하지만 환경영향 공동조사에 합의한 것은 일단 정부 입장을 받아들인 셈이다. 정부로서도 최근까지 "공동조사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한 분위기였으나 단식 상황의 심각성을 감안, 이번에 한 발짝 물러선 것이며, `합법적 재평가'를 요구해 온 지율 스님도 결과적으로는 어느 정도 양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날 합의에 따라 사업자와 환경단체, 정부가 전문가를 내세워 '환영영향 공동조사단'을 구성해야 하지만 큰 이견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조사결과의 수용 여부다.
그동안 양측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터널 공사가 무제치늪과 원효늪, 밀밭늪 등 천성산 고산습지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환경단체 측은 터널을 뚫어 지하 수맥을 건드리면 지하 수위가 낮아져 습지가 마르고 이곳에 사는 도롱뇽의 서식이 불가능해지는 등 생태계 파괴가 불을 보듯 뻔하다고 주장해왔고, 정부나 한국철도시설공단측 전문가들은 "천성산 습지는 빗물이 고여서 이뤄진 것인 만큼 터널을 뚫어도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양측의 쟁점을 해소하려면 시추조사를 해야 하지만 지금까지는 이를 한 적이 없다.
이번 공동조사에서 시추조사가 이뤄질 경우 가장 정확한 조사결과가 나오는 셈이지만 그 결과를 양측이 수용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조사결과가 습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올 경우라도 환경단체는 "3개월로는 부족하다"며 전면 재조사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거꾸로 습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결론이 나오더라도 사업자는 부분적인 보완책을 취하고 말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정부가 이번에 지율스님이 요구해온 `3개월간 터널 발파공사 중단'을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공동조사단의 요청에 따라 조사에 필요한 범위에서 부분적인 공사 중단은 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chungwon@yna.co.kr (끝)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2005.02.06 00:06:20
이길용 박사의 말이 모두 맞소.
다만 나는 지율의 처신은 종교적이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오.
누가 명분과 실리를 얻었는가 하는 점은 또 하나의 다른 아젠다니까
지율의 처신을 평가하는 잣대로는 적당하지 않은 거요.
그녀가 순수하게 종교적으로 처신했는가에 대해서
나는 의심하지 않소.
비록 순박하게 보이기도 하고, 원리주의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교활하거나 어리석지도 않은 사람일거요.
그녀는 어떤 종교적 꼭지점에 서서 행동한 거요.
100일 단식이야 지율이 의도한 게 아니라
주변 상황이 그런 상징을 만들어간 거니까 지율의 책임을 아니지.
다른 한편으로
자동차 타지 않기라든지,
농촌으로 들어가기 같은 운동에 대해서 무조건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런 극단주의자들이 있어야만 또 하나의 극단에 의한 일방주의가
약간이라도 자극을 받는다는 점에서 그들의 행동을 반대하지도 않소.
좌익을 지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반대하지 않는 것과 같은 거요.
지율이 정부와 건설업체에 의해서 놀아났다는 말은
내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설령 그랬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는 아니오.
이 박사는 에콜로지가 이번을 계기로 해서
과학의 영역에서 신화의 영역으로 쫓겨들어갈까 염려하는 것 같은데,
우리 사회가 그럴 정도로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으니까 말이오.
어쩌면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겠지.
그래도 벼랑끝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건
그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거요.
종교는 늘 벼랑끝을 지향하고 있으니까.
생명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 피안과 차안, 초월과 내재...
이런 모든 것들이 벼랑끝 아니겠오?
이번 사태에서 문제는 신문방송이 자신들의 저널리즘의 속성에 따라서
본질보다는 센세이셔날리즘만 확대재생산 했다는 데에 있는 거 같소.
그것 까지 지율에게 책임지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오?
설날 즐겁게 보내시고, 안성에도 잘 다녀오시기를...
다만 나는 지율의 처신은 종교적이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오.
누가 명분과 실리를 얻었는가 하는 점은 또 하나의 다른 아젠다니까
지율의 처신을 평가하는 잣대로는 적당하지 않은 거요.
그녀가 순수하게 종교적으로 처신했는가에 대해서
나는 의심하지 않소.
비록 순박하게 보이기도 하고, 원리주의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교활하거나 어리석지도 않은 사람일거요.
그녀는 어떤 종교적 꼭지점에 서서 행동한 거요.
100일 단식이야 지율이 의도한 게 아니라
주변 상황이 그런 상징을 만들어간 거니까 지율의 책임을 아니지.
다른 한편으로
자동차 타지 않기라든지,
농촌으로 들어가기 같은 운동에 대해서 무조건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런 극단주의자들이 있어야만 또 하나의 극단에 의한 일방주의가
약간이라도 자극을 받는다는 점에서 그들의 행동을 반대하지도 않소.
좌익을 지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반대하지 않는 것과 같은 거요.
지율이 정부와 건설업체에 의해서 놀아났다는 말은
내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설령 그랬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는 아니오.
이 박사는 에콜로지가 이번을 계기로 해서
과학의 영역에서 신화의 영역으로 쫓겨들어갈까 염려하는 것 같은데,
우리 사회가 그럴 정도로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으니까 말이오.
어쩌면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겠지.
그래도 벼랑끝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건
그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거요.
종교는 늘 벼랑끝을 지향하고 있으니까.
생명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 피안과 차안, 초월과 내재...
이런 모든 것들이 벼랑끝 아니겠오?
이번 사태에서 문제는 신문방송이 자신들의 저널리즘의 속성에 따라서
본질보다는 센세이셔날리즘만 확대재생산 했다는 데에 있는 거 같소.
그것 까지 지율에게 책임지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오?
설날 즐겁게 보내시고, 안성에도 잘 다녀오시기를...
물론 거기에는 지율의 죽음을 기다리는 듯한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진 각종 언론들의 황색저널식의 보도 태도가 일정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지율스님 역시 그 단식이 목적하는 바의 의미를 분명하게 시민들에게게 보여주는데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봅니다. 후반부에 갈수록 지율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단식의 주제가 환경에 대한 담론이라기 보다는, 단식만은 막자, 사람만은 살리자로 소극화되었다는 것이 이번 단식이 주는 한계의 단적인 면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단식이 100일까지 이어지고, 그에 마지못한 정부의 합의안 도출(이 부분 정확히 그 과정을 살펴본다면, 정부의 양보가 아니라 지율의 양보라고 봐야합니다)이 보여주는 바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전히 몰상식하고 미개한 공적 소통의 능력 부재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같기도 합니다. 아마 이번 사건은 두고 두고 양쪽의 좋은 타산지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고보니 독일 유학시절 겪은 유사한 사건 하나가 기억납니다. 수년전인데.. 당시 독일은 원자로 운행시 형성된 핵폐기물을 이웃 국가로 옮기는 중이었습니다. 위해한 핵 폐기물을 자국에 묻기가 어려우니까 타국에 돈주고 팔아넘기는 행위를 독일이 하고 있었던거죠. 그러자 독일쪽 환경단체에서 파렴치한 행위라고 주장하며 독일 국경을 넘어서는 철로에 몸을 파묻고 시위를 벌입니다. 때는 겨울이었구요. 정부는 정해진 시일만큼의 시위를 허용하고, 언제 이후에는 강제로 퇴거시킬 것임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시위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추운 땅 속에서 자신들의 의지를 개진합니다. 각종 언론들을 그들 시위대의 환경에 대한 의지와 목적을 자세히 소개해 줍니다. 그리고 그 시위대 속에는 10대 소녀도 몇 포함되어 있습니다. 날씨가 추워지자 독일의 경찰들은 시위대 주변에 난로를 설치합니다. 그리고 정해진 시각.. 어김없이 땅은 파헤쳐지고 시위대는 강제 연행되어갑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독일의 양심과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인간의 연대적 책임을 강조하는 시위대의 구호는 시청자들의 가슴에 웅변이 되어 꽂힙니다.
그러니 이번 단식은? 그러한 환경적 담론을 정상적으로 도출하기 보다는 단식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지는 기형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정부 뿐만 아니라, 지율의 대응 방식과 자세에도 적잖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댓글에서 그것에 대한 긴 이야기를 전개하기는 뭐하고, 다른 이의 의견 하나를 퍼옵니다. 이번 단식 사건이 가지는 대사회적 의미를 천천히 새겨볼 수 있는 이야기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지율스님이 단식을 끝내셨군요.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사람의 목숨은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씁쓸한 뒷맛이 영 개운치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대학 시절(1980년대)에 환경오염문제를 다룬 ‘이 땅은 죽었다(최열 지음)’라는 책이 출판되지 3일만에 서점에서 판금서적으로 회수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책 내용이 요즘에는 일상적으로 신문에 나오는 아주 일반적인 내용이었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그 당시에 환경의 문제와 자본의 문제 그리고 정치의 문제가 분리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의 환경문제는 그 뒤로 민주화 과정이나 시민운동의 영향으로 나날이 개선되어 왔고, 특히 법제도적인 측면에서의 개선도 많이 되어왔다고 봅니다. 물론 아직도 부족한 점도 있구요.
문제는 국토개발과 환경보전이라는 일견 대치되어 보이는 두 가지의 과제를 어떻게 조화시키냐는 것이겠죠... 이번 문제를 기화로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해서 정부나 시민단체나 국민들이 배전의 고민을 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단식을 끝냈다니 그 동안 참았던 몇 마디 의견을 올려볼까 합니다.
그 동안 천성산 문제가 불거지면서 주변의 여러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상당수가 지율스님에게 동.정.적. 이더군요. 그런데 천성산문제의 전개 과정과 터널공법이 그나마 가장 환경친화적이고 최근의 터널시공기술은 매우 우수해서 그 정도 이격거리에는 별다른 환경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저의 일이 토목관련이라서 이것만은 자신합니다), 그리고 이미 천성산 주변이 개발이 많이 되어있었고 오히려 기존 개발에 의해서 환경에 대한 피해가 발생되어왔다는 점 등을 설명하면 다들 새로운 사실에 놀라더군요.
문제는 이러한 사실들을 건전한 상식을 지닌 다수의 국민들이 충분히 인지 못했다는 점에 있겠죠. 정부의 홍보부족도 있을 것이고, 특히 연일 방송과 언론에서 지율스님의 단식일수를 마치 월드컵 남은 일수처럼 99일! 100일!떠들었을 뿐이지 환경영향 평가를 2번이나 했다는 점, 이미 두 번째 평가결과에 대해서 승복하기로 한 것을 지율스님 쪽에서 지키지 않은 점 등의 전개과정은 거의 언급이 안 된 점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번의 지율스님의 단식문제는 정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절차적 정당성과 합법성위에서 추진하는 국책사업을 단식이라는 아주 선정적인 수단으로 중지시킨다는 것은 정말 걱정되는 바입니다. 이미 수많은 국책사업이 동일한 유형의 반대운동에 부딪힐 경우 매우 심각할 것 같군요.
또한 제 생각에 지율스님이 단식을 하려고 했으면 공사중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두 차례나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율스님 측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결론을 가져온 '환경영향평가제도', 즉 시스템을 문제 삼아야했다고 봅니다. 정부의 모든 행위는 철저하게 법적 근거에 의거하여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 근거를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반환경적 결과가 나왔다면 당연히 싸움의 대상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법이나 기준에 대항해야 했다고 봅니다(국보법 폐지를 위한 단식투쟁이 그 좋은 예라고 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율스님측은 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달을 가르키는데 손가락만 보고' 싸우신 것은 아닌지 궁금하군요.
적절한 예일지 모르나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공사가 중단이 이미 1년 이상 계속되었고 다시 앞으로 3개월 중지된다고 할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건설업은 그 속성상 하도의 하도까지 내려가서 공사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피라미드의 맨 밑을 이루는 것은 그야말로 영세한 시공업체나 공급업체입니다. 법이 정한 기준에 의해서 계약을 수행하려고 하는데 기성(공사수행량)에 따라서 수금하는 업체의 경영이 어려워져서 부도가 나고 그 사장이 일가족과 함께 자살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책임지나요? 그 사장이 반환경적이기 때문에 죽는 것인가요? 그 사람은 정해진 규칙 안에서 성실하게 일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제발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얘기하고 논의하는 사회가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정치적 스탠스를 떠나서 정해진 원칙은 그야말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지율이 5%로 떨어져도 밀고 나가야만 장기적으로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 집권여당과 정부는 명심하기 바랍니다.
성숙한 사회란 합의된 규칙을 누구에나 공정하게 적용하는 사회이고 건강한 사회란 그 규칙(시스템)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될 경우 과감하게 고쳐나가는 자정능력을 가진 사회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