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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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한 또 다른 해석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누가복음 16장1-13)
이 비유에서 청지기가 자신의 미래 삶을 준비하기 위해 이모저모의 여러 궁리를 하는 것은 인간이 시험의 때를 당하여 그 시험을 오히려 영적 성장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지혜를 자아내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지혜는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지옥의 세력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여 새 힘을 회복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부자는 우리에게 부어지는 온갖 선과 진리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뜻하고 청지기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잘 돌보아야하는 임무를 맡은 주님의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을 뜻합니다. 청지기가 재물의 낭비로 인하여 부자에게 셈을 당하게된 상황은 주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는 삶을 산 결과 영혼은 자기 안에 쌓인 악과 거짓으로 절망의 상태에 접어든 것을 뜻하는데 이 자체가 벌써 영혼에 심판이 임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는 부자의 추상같은 명령은 사실 주님께서 그렇게 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 스스로가 양심에 그러한 느낌을 받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깊은 시험을 당할 때 그 당사자 자신은 이제 주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끝장나고 말리라는 절망 속에 빠지게 되는데 이런 비참의 상태를 겪게 되는 것은 죄가 불러들인 지옥의 세력에 의해 그 양심이 정죄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라는 청지기의 하소연은 그동안의 황폐된 삶으로 인해 스스로 무력해진 영적 상태를 나타내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라는 청지기의 고백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때 주님께 잘한 것이 없으니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빌어보기에는 양심이 허락지 않는 상태를 나타내는데 이때 악한 영들은 그를 송사하여 그 마음을 자포자기 쪽으로 끌어갑니다.
주님으로부터 셈을 하라는 명을 받을 때 청지기는 속으로 자신의 미래를 위해 궁리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청지기가 주인을 속이는 부정한 방법을 쓰고 있는 것으로 비치지만 그 비유의 속뜻으로는 그와 정 반대로 인간이 시험을 당할 때 그의 양심이 각성하여 주님께 대한 자세를 가다듬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입니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설명되어 집니다. 성경 말씀에는 이와 같이 문자적인 의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참뜻이 말씀 속에 내재해 있기에 성경 말씀은 여느 책과 달리 거룩하고 신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라는 청지기의 깨우침은 시험을 당하는 자가 그를 돕는 주님에 의해 한 줄기 빛을 발견하는 상태에 인도되는 것을 뜻하고 이어 그가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들이는 것은 자기 내면을 통회하며 자신의 악을 철저히 시인하는 것을 뜻합니다. 불려온 빚진 자는 둘인데 그중 기름을 빚진 자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에 사랑의 선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를 뜻하고 밀을 빚진 자는 인간이 그의 이해성에 지혜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를 뜻합니다. 즉 그 기름과 밀 그 둘은 사람의 두 기능 곧 의지와 이해성에 담겨야할 주님의 선(사랑)과 진리(믿음)가 잃어진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그들의 빚을 부분적으로 감하여 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빚을 인정하고 곧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여 돌이키고자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주님께 진 빚을 완전히 다 갚을 수는 없다는 그 인간적 한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지기의 마음은 그나마 이제라도 미래를 위해 악을 끊고 선한 삶을 살겠다는 각성을 하는 상태인 것이지요. 이것이 자신으로서는 그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주님의 자비는 이런 그의 마음을 부족하지만 충분한 것으로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 칭찬을 들은 그의 슬기로움의 정체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라는 말씀은 영혼이 강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직 영적인 마음이 세상적인 마음보다 더 우위에 있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여기 이 세대의 아들들은 세상적인 마음을 뜻하고 빛의 아들들은 영적인 마음을 뜻하는데 이 마음들은 언제나 우리 마음 속에는 갈등을 일으켜 서로를 지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세상적인 것을 지향하는 마음이 영적인 마음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주님은 그 세상적인 것을 처리하는 방법을 일러주시는데 그 말씀이 바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라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만큼은 우리는 결코 이 세상적인 것들과 결별하여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적인 것들을 오히려 선을 위하여 선용하는 것이 지혜 있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인간이 세상적인 것을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 마음으로 사용할 때 그것 역시 인간을 해치는 부정한 것이 되고 반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선용으로 사용하면 그것은 인간에게 아주 유용한 것이 되기 마련이지요. 세상적인 것이 무서워 그것을 피해 홀로 사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 역시 그것들을 지배하며 살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주님의 진정한 가르침입니다. 이러할 때 그것들은 우리의 영적 진전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친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끝으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라는 주님의 말씀은 앞서와 같이 지고한 영적인 삶은 그 아래 세상적인 것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상태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옆의 이웃을 사랑치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사람이 하늘의 부모를 공경할 수 없으며 세상적인 삶을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이 영적인 삶을 잘 살 수 없는 등... 이런 예는 우리 주변에 무척 많을 것입니다.
연약한 믿음 탈출하기 http://cafe.daum.net/talchulhagi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누가복음 16장1-13)
이 비유에서 청지기가 자신의 미래 삶을 준비하기 위해 이모저모의 여러 궁리를 하는 것은 인간이 시험의 때를 당하여 그 시험을 오히려 영적 성장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지혜를 자아내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지혜는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지옥의 세력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여 새 힘을 회복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부자는 우리에게 부어지는 온갖 선과 진리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뜻하고 청지기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잘 돌보아야하는 임무를 맡은 주님의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을 뜻합니다. 청지기가 재물의 낭비로 인하여 부자에게 셈을 당하게된 상황은 주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는 삶을 산 결과 영혼은 자기 안에 쌓인 악과 거짓으로 절망의 상태에 접어든 것을 뜻하는데 이 자체가 벌써 영혼에 심판이 임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는 부자의 추상같은 명령은 사실 주님께서 그렇게 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 스스로가 양심에 그러한 느낌을 받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깊은 시험을 당할 때 그 당사자 자신은 이제 주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끝장나고 말리라는 절망 속에 빠지게 되는데 이런 비참의 상태를 겪게 되는 것은 죄가 불러들인 지옥의 세력에 의해 그 양심이 정죄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라는 청지기의 하소연은 그동안의 황폐된 삶으로 인해 스스로 무력해진 영적 상태를 나타내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라는 청지기의 고백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때 주님께 잘한 것이 없으니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빌어보기에는 양심이 허락지 않는 상태를 나타내는데 이때 악한 영들은 그를 송사하여 그 마음을 자포자기 쪽으로 끌어갑니다.
주님으로부터 셈을 하라는 명을 받을 때 청지기는 속으로 자신의 미래를 위해 궁리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청지기가 주인을 속이는 부정한 방법을 쓰고 있는 것으로 비치지만 그 비유의 속뜻으로는 그와 정 반대로 인간이 시험을 당할 때 그의 양심이 각성하여 주님께 대한 자세를 가다듬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입니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설명되어 집니다. 성경 말씀에는 이와 같이 문자적인 의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참뜻이 말씀 속에 내재해 있기에 성경 말씀은 여느 책과 달리 거룩하고 신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라는 청지기의 깨우침은 시험을 당하는 자가 그를 돕는 주님에 의해 한 줄기 빛을 발견하는 상태에 인도되는 것을 뜻하고 이어 그가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들이는 것은 자기 내면을 통회하며 자신의 악을 철저히 시인하는 것을 뜻합니다. 불려온 빚진 자는 둘인데 그중 기름을 빚진 자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에 사랑의 선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를 뜻하고 밀을 빚진 자는 인간이 그의 이해성에 지혜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를 뜻합니다. 즉 그 기름과 밀 그 둘은 사람의 두 기능 곧 의지와 이해성에 담겨야할 주님의 선(사랑)과 진리(믿음)가 잃어진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그들의 빚을 부분적으로 감하여 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빚을 인정하고 곧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여 돌이키고자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주님께 진 빚을 완전히 다 갚을 수는 없다는 그 인간적 한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지기의 마음은 그나마 이제라도 미래를 위해 악을 끊고 선한 삶을 살겠다는 각성을 하는 상태인 것이지요. 이것이 자신으로서는 그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주님의 자비는 이런 그의 마음을 부족하지만 충분한 것으로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 칭찬을 들은 그의 슬기로움의 정체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라는 말씀은 영혼이 강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직 영적인 마음이 세상적인 마음보다 더 우위에 있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여기 이 세대의 아들들은 세상적인 마음을 뜻하고 빛의 아들들은 영적인 마음을 뜻하는데 이 마음들은 언제나 우리 마음 속에는 갈등을 일으켜 서로를 지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세상적인 것을 지향하는 마음이 영적인 마음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주님은 그 세상적인 것을 처리하는 방법을 일러주시는데 그 말씀이 바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라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만큼은 우리는 결코 이 세상적인 것들과 결별하여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적인 것들을 오히려 선을 위하여 선용하는 것이 지혜 있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인간이 세상적인 것을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 마음으로 사용할 때 그것 역시 인간을 해치는 부정한 것이 되고 반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선용으로 사용하면 그것은 인간에게 아주 유용한 것이 되기 마련이지요. 세상적인 것이 무서워 그것을 피해 홀로 사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 역시 그것들을 지배하며 살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주님의 진정한 가르침입니다. 이러할 때 그것들은 우리의 영적 진전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친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끝으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라는 주님의 말씀은 앞서와 같이 지고한 영적인 삶은 그 아래 세상적인 것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상태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옆의 이웃을 사랑치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사람이 하늘의 부모를 공경할 수 없으며 세상적인 삶을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이 영적인 삶을 잘 살 수 없는 등... 이런 예는 우리 주변에 무척 많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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