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들어 기독교인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다는 통계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원인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교회를 책임지고 계시는 목회자들은 이로 부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존 교단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명확한 분석이나 극복할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작금의 현실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얼마 전 부터 급속이 셀목회와 알파코스가 결합된 방법들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신자들을 직할 관리할 수 있는 셀목회 방식이 보다 효율적이고 목회에서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하는 당회를 무력화 시키는 방법이라 이를 선호하고 채택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단순히 교회의 위기에 유일하게 제시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인지지는 모르겠습니다.
셀목회의 정당성 여부를 생각할 때 교회의 역사에서 카톨릭과 교황의 아집과 독재로 부터 그리고 신과의 관계에서 중간자인 신부와의 관계를 해방시킨 종교개혁의 의미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회는 교황과 신부의 권력을 교회의 다수의 대표들에게 분산시킨 조직입니다. 물론 민주적인 조직과는 제법 거리가 멀지만 당회와 사무총회는 그나마 교회의 의사를 결정하는 유일한 조직입니다.
셀목회가 혹시 당회에 집중되어 있는 권력을 일반교인 전체로 전이시키는 민주적인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가져보았지만 그것은 다시금 목회자에게로 집중되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다시금 신의 대리인으로의 위치를 탐내는 것 같습니다.
알파코스 또한 여러가지 문제들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성령을 강제로 이입시키는 듯한 진행이든지 그리고 이과정에서 방언을 억지로 행하게 하는 방식들은 신앙이 강제적으로 생겨날 수 있다는 문제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을 신과 나와의 실존적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는 저로서는 이러한 프로그램은 헛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알파컨퍼런스에서 이빨이 금이빨로 변하는 사건이 발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유치함이 극에 달해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본래의 이가 금니보다는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현상을 가지고 전도를 하겠다면 아마도 유치원생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할 것입니다.-하지만 기독교인 중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것을 나쁘게 변화시키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그리고 이러한 프로그램을 받아들이고 적용하고 있는 성직자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고민되는 상황입니다.
물론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 이러한 현상이 최근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멀리는 박태선의 전도관이 각광받던 시절 그 곳의 집회에 가서 열광하며 은혜받았다고 생각했던 기독교인들이 부지기수이며 할렐루야기도원을 다녀오고 신유의 체험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을 보았다고 뿌듯해 하던 목회자와 교회의 직분을 맡은 분들이 그 또한 그 얼마였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물론 저 개인은 이단의 구분을 조금은 달리합니다만 너그럽게 적용하는 저의 기준에도 충분히 기준치를 넘어서는 이러한 집단들이 이제는 이단으로 규정되어버린지 오래됩니다.
제가 아시는 친한 목회자분들 중에도 셀목회와 알파코스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금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려운 목회에서 제법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알파코스가 매력적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를 보다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말씀을 받아들임이 성령의 임재라고 믿는다면 아마도 이러한 적그리스도적 행태는 충분히 구분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심하게 적그리스도적이라고 해서 오히려 충격을 받으실 수 있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이성을 잃게하고 광적인 상태로 몰아간다면 충분히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알파코스의 문제점은 그들이 공개적으로 이야기 하는 ALPHA의 알파벳이 의미하는 다섯가지 방식에 대한 문제라기 보다는
그러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11주과정과 특히 주말수양회 같은 것에서 초신자를 전도하기위한 능력전도 등의 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액스터시(ecstasy)는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샤머니즘에서 더욱 발달하여 있으며 이 상태에서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가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이슬람의 수피즘에도 이러한 경향은 존재합니다.
유명한 부두교에도 당연히 존재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통무속에도 신내림 같은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또한 방언도 기독교만의 전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알파코스의 성령의 이입도 이러한 액스터시에 이르는 샤머니즘적 방법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반복된 동작, 춤과 노래 그리고 고행 등은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하는 방법입니다.
알파코스에서는 아마도 우리말이 아닌 어떤 말이라도 하게 하는데 이러한 의미모를 말을 반복하다보면 방언을 하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상태가 바로 액스터시적 상황으로 몰고가는 것입니다.
마치 이성을 잃고 광적인 상태로 치닫는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교회의 성장과 위기
신자가 감소하고 있는 기독교와 개 교회의 상태에서 위기를 느끼는 목회자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겠으나 이를 비기독교적으로나 발전하는 사회를 직시하지 못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더욱 커다란 문제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긍정적 방법론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방법론을 찾는데 매우 게으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발전해 있는 현대사회와 발전할 미래의 사회에 대하여 방법을 만들어 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왜 한국기독교가 전래초기부터 급격한 성장을 이룩했는지를 사회적 관계속에서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리되었다고만 생각하지 성력의 역사사 사회속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가를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문물의 전래입니다.
조선시대 아직 봉건사회와 농업경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사회에 카톨릭을 포함한 기독교의 문화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화는 기독교의 교리를 전래하는 것과 더불어 봉건사회로 부터 벗어난 서국의 자본주의 문화를 전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평등한 인적관계와 서구로 부터 전해진 문물들은 새로운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제 봉건사회의 한계로 부터 변화를 모색하던 조선사회에 무섭게 파고들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화가 정약용 같은 실학자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진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와 서구의 문물은 한국이 전쟁을 겪고 이를 극복하며 이후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여전히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아마도 80년대 까지는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 시대까지 기독교의 대표권은 KNCC로 나타나던 진보적인 세력들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한국사회가 이제 선진문물을 더이상 부러워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로 접어들면서 그리고 어느정도의 형식적 민주주의가 확보되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지나면서 한국 기독교의 보수성이 급격히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기독교의 표면적 대표성도 이제는 한기총으로 대표되는 세력에게 넘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의 기득권이 되어버린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이들이 교회의 보수적 권력을 형성해버린 것입니다.
이들은 사회의 발전에 오히려 위기를 느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개신교의 침체와 카톨릭의 성장세가 함께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은 이 문제에서 헌금문제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헌금에 대한 부담이 신자들을 개신교를 떠나 카톨릭으로 이동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부분적으로 타당하다고 보입니다만 문제의 본질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개신교회가 교인들에게 헌금문제에 부담을 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오래전 부터 지속해왔던 문제이며 결코 최근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히려 교회에 헌금을 하는 의미와 이유를 상실한 것으로 부터 오는 것으로 부터 발생하고 있다고 봅니다.
즉 더 이상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발전에 어떠한 의미있는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데서 새로운 층들의 유입이 중단된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세에 대한 문제를 떠나서 더 이상 한국교회가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위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발전하고 있는 사회와 미래 그리고 기독교
새롭게 태어나는 세대는 기본적으로 진취적입니다.
아마 이러하기에 역사가 발전을 해나온 것일 것입니다.
어느 역사학자가 이야기하기를 세상의 발전은 지금의 우리가 변화하여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커나오는 세대들이 지금의 우리가 되어 변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듯이 새로운 세대는 지금의 우리보다는 항상 발전적이고 진취적인 것 같습니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총체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이고 진부한 젊은이들도 많이 보입니다.
가슴아픈 일입니다만 흔하게는 지금 한국교회들의 청년회에서 많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미래의 트랜드를 포용해주지 못하는 이상 미래사회를 담보할 젊은이들은 한국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한국사회가 미래사회의 매가트랜드를 읽지 못한 것과 대형화한 교회가 엄청난 경제력으로 미자립교회와 해외의 선교사들에게 자금을 뿌려대면서 개신교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모양새로 기독교의 판이 형성되면서 급격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중소교회들 또한 이러한 행진에 정신없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발전하는 사회와 함께하지 못하는 이상 더 이상 교회의 발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사회의 발전을 앞장서서 끌고가지는 못하더라도 발전의 발목을 잡는 역할을 한다면 아마도 제2의 종교개혁은 새로운 사회로 넘어가는 고비에서 분명히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유럽사회의 근대적 사회발전을 가로막던 중세적 기독교가 종교개혁에 의하여 변혁된 사례를 우리모두 염두해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있었던 카톨릭의 반성은 아마도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현대의 카톨릭은 발전하는 사회의 트랜드를 파악하고 있으며 이와 잘 융화되고 있습니다.
환경과 인권 등에 대한 적극적 참여가 그것입니다.
카톨릭 전체가 친환경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각각의 성당 등에서 행해지고 있는 녹생운동과 정의구현 사제단 등의 사회참여와 인권운동에 대해 한국카톨릭은 묵과해 주거나 보호막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미래사회 트랜드의 일부라는 점에서 시사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화나 IT에 의한 네트워크 사회의 구성, 환경, 인권, 통합된 학문 등 미래사회의 매가트랜드는 성서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는 좀더 연구해보야 할 것입니다만 적어도 창조된 세상이 아담과 이브 이후로 지금까지 변화 발전해온 것을 인정한다면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앞으로의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또한 해볼 문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신학교에 미래학문이나 학문간 통섭교육의 필요성은 고민해볼 문제일 것입니다.
어찌되었던 카톨릭의 환경참여 등은 많은 이들을 참여시키면서 성장의 동력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는 카톨릭이 세계화 되어 있기에 먼저 본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인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현실적으로 의미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환경캠페인에 대한 참여 뿐만 아니라 농촌에서의 친환경 작물의 재배와 이를 도시의 교인들에게 공급하는 시스템 등이 구축되어 있어 상호간의 경제적 이익과 생태적 이익의 도모가 가능하도록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는 한국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읽어내야 합니다.
이러한 안목속에서 지역사회의 역할에 대해 천착해야 할 것입니다.
그 속에서 교회가 가야할 길과 모양새를 갖춘다면 양적인 면에서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의미있는 교회로서의 역할은 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한 교회의 예를 들고자 합니다.
제가 다니고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교회 목사님도 셀목회를 추구하고 계십니다.
물론 당회에서는 이를 하지 못하도록 결의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몇몇 신도들이 목사님의 셀목회 방식에 동조하다가 다른 교인들의 사늘한 시선에 교회를 떠나버리고 마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는 봉산문화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주위에 주상복합건물이 몇몇 들어서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지역에 거주민이 적은 대구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최근들어 대예배의 교인수가 조금씩 줄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많은 숫자의 교인이 고령화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교회는 주변 주상복합아파트 지역에서 노방전도를 한다든지 하는 방식과 알파코스의 새신자영접방식 등을 방법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성과는 매우 미미할 뿐입니다.
저는 여기서 교회가 지역에서 문화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가 하는 답답함을 느낍니다.
여기서 바로 제가 위에서 언급한 지역사회의 역할을 찾고 형식을 갖춘다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즉 교회가 문화선교센타가 되는 것입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프로듀싱하고 이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봉산문화거리와 지척에 있어 이는 매우 유용한 방식이 될 것입니다.
갤러리도 만들고 콘서트홀도 운영하며 다양한 문화컨텐츠를 제공하는 그런 교회가 된다면 아마도 이러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도의 대상이 될 것이며 실제 교회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지역사회에서 교회의 위상을 제고시키는 역할도 할 것입니다.
지탄받는 기독교에서 귀감이 되는 종교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일을 전담하는 교역자들과 사무인력이 문화선교의 마인드를 지녀야 할 것이며 실제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물론 개 교회가 처한 위치와 역량에 따라 각가 다른 방식들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만 기본적으로는 선도적 문화를 전파하고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교회가 바로 그 모습일 것입니다.
아직 까지는 몇몇의 상상입니다만 이러한 상상이 현실이되는 날을 기대해 봅니다.
알파코스에 참여하는 몇몇 교역자들이 이단시비에 휘말려 있습니다.
그리고 몇몇 교단에서는 참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프로그램이 힘을 얻게된다면 슬며시 이단시비는 없어질 것입니다.
오래전 순복음교회가 예장통합측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었다가 힘으로 정규교단에 편입되었듯이 말입니다.
이단시비는 매우 편협한 기성교단의 이기주의적 산물이기도 합니다만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긍정적 측면에 주목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보수우익의 집회에 교인들을 동원하는 제2의 순복음과 한기총의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기독교인에 대한 극진한 영접과 이들의 신비적 체험을 통하여 기독교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방식은 이미 이단으로 지목받았던 많은 교단에 의하여 행하여 졌던 일입니다.
그리고 알파코스가 부흥의 길을 잃어버린 한국기독교에 초교파적으로 번지고 있음은 이러한 방식이 이단을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초교파적으로 이단으로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고민해 봅니다.
발전의 길은 신비로운 무엇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대한 고민으로 부터 찾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문화선교는 교회의 역할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함으로 인하여 단순히 교인의 숫자가 늘어날 수 있다는 얄팍한 방식이야 말로 실패할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그러한 방식을 통하여 교인이 늘어나지 않는다면 실패라고 생각하는 관점에 더욱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건강하고 진취적인 문화를 교회가 앞서서 전파하는데 교회의 문화선교적 의미는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최근 노숙자 등이 많아지면서 교회에서 행하는 무료급식 등에 오시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는 이들을 교인화 하려는 노력을 무척이나 기울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해 타산이 들어있는 구제사업은 그 의도가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문화선교사업도 마찬가지라 보아집니다.
이러한 사업을 통해서 어떠한 결과물을 계산하고 진행하기 보다는 지역에 좋은 문화를 전파하는 공간으로 의미를 다한다면 그 진정성이 사람들에게 다가가 자연적으로 교회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게 될 것입니다.
저도 말씀이 선포라는 점에는 동의 합니다.
말씀은 선포이고 그것 만으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포의 의미 또한 협소하게 이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말씀이 현대사회에서 문화로서 어떻게 풍부해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이건 현대사회에서의 성서에 대한 해석이 될 것입니다.
고대사회에 쓰여진 성서가 단초는 줄 수 있을 지언정 현대사회의 모든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다 담고 있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윌로우 크릭 교회가 무엇을 가지고 실패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선교란 방식이 아니라 바로 '미션'입니다.
임무이자 과업입니다.
문화선교란 문화적 전도방식이나 방법이 아니라 세상에 전파해야 할 문화화 된 말씀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앙상한 현대사회의 기독교 문화가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담보해 나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회적 무관심과 정치적 보수성이 이 땅에 하나님 왕국을 세우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말씀을 성경의 문구나 글귀를 전해서 믿는자를 만드는 것으로 협소하게 이해한다면 좀더 풍부하게 고민해 보기를 권합니다.
말씀이 선포라는 의미를 교인의 숫자에 연연해 하지 않고 아름답고 풍부하고 건강한 문화를 전파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확대한다고 해서 무리한 것은 아니라고 보아집니다. 아니 오히려 확대된 현대사회에서 오히려 의미있는 말씀의 선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양해지고 복잡해진 사회관계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정치, 다양해지는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는 부분이 기독교가 실패하는 지점이 될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이미 실패의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인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비젼을 더 이상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입니다.
실패의 관점을 전환하기를 바랍니다.
선지자들이 말씀을 선포하면서 단순히 하나님나라가 올 것이라는 것만을 이야기 하지는 않았으며 그 사회의 정치적 문화적 상황에 연관되어 선교가 진행되어졌음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ps. 아, 알파같은 경우는 성결교단에서는 합법(;)처리 됬습니다. 대충 '너무 씨게~하지 말라'정도 경고 사항 붙구요. 뭐 더 코맨트 하고 싶지도 않네요, 쯧...

저 역시도 지금의 교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할 것인가에 주목했을 뿐이지 새로운 프래임의 그 무엇은 아마도 새로운 종교개혁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조차도 어느날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맹아적 형태들이 발현되고 그것이 자라나 동력이 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 시점에서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생각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형성된 공간의 교회도 괞찬을 듯 합니다.
IT의 발전을 통한 네트워크적 인각관계가 미래사회의 주요한 사회적 형태로 자리잡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래학자들도 이러한 생각들을 하고있는 것 같습니다.
미래사회의 기독교사회나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 아닐 까 생각해 봅니다.
기술의 발전은 세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약한 인간관계가 사회에는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제가 청년시설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말을 전해야 하는데 무엇을 매체로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크게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신문이어야 할 지 아니면 방송이어야 할 지에 대해서 엄청난 토론을 했었습니다만 결론은 내지도 못했습니다.
얼마 멀지 않은 미래사회에 IT로 엮이는 사회의 모습을 예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 대하여 예측했다면 아마도 그 토론의 결론은 너무도 쉬웠을 것입니다.
인터넷이 사람을 묶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네트워크를 통하여 세상을 향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행동하고 있습니다.
매우 완고한 아날로그적 정치의 벽에 부딛히기는 했지만 아고라 등을 통하여 형성된 사람들의 의사표현과 촛불집회를 통한 통일된 행동은 다가올 사회의 주된 얼개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의 악플 등에 대한 아날로그세력의 공세가 만만치 않지만 직접적 참여의 전체적 모습은 건강함을 기본적으로 담보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독교사회나 세계도 이 속에서 찾아보는 것도 괞찬을 것 같습니다.
다비아가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교회로 모습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기대도 해봅니다.
어쩌면 벌써 그러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곳에 가압한지 이제 며칠이 지났지만 이 글은 지금 막 읽어봤습니다.
(댓글들은 아직 못 읽어봤고 우선 맨 앞의 본문만 읽어보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우선 "셀 목회"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깊숙히 침투하는 일종의 "작전"인 듯합니다.(마치 북한의 5호 상호 감시조직처럼)
그리고 "알파코스"라는 것은 한마디로 비유하기는 어렵지만 쓰신 글의 내용으로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즉, 예전(6.70년대)에 한국 개신교계 부흥 초기에 유행하던 소위 "은사 부흥회"의 시대적 부활 시도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참으로 애석하게도, 아마도 (집단)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개신교계가 이전의 그 시절을 향수하고 있던가 아니면 새로운 몸부림(그게 유효하던 아니면 소용이 없는 일이든 간에)을 치고 있는 현상들이 아닌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의 개신교계에 초래된 위기현상은, 우선은 우리 모두의 공동 책임이라고 사고해야 맞을 것이고, 다만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책임도 많이 져야 한다는 일반론적인 견지에서 볼 때는 개신교단의 리더인 교회 담임자들에게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바라볼 때 로마 교회가 제도화되고 그에 따라 인적 물적으로 부유해지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처럼, 지금의 한국의 개신교단도 이제는 온 힘을 다해서 앞으로 달려 나아가는 그러한 생명력 넘치는 동작을 멈추고, 지금 "웰빙"에 빠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싶습니다. 일종의 신체적 정신적 노화현상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마치 사람이 먹기 좋고 기름진 음식을 계속 탐닉하더니 결국은 몸에 이상이 오고 성인병 증세가 생기게 됐고 그래서 이제는 웰빙을 생각하게 돼서 땀흘리고 일함으로서 자연스레 몸의 균형이 유지되는 게 아니고, 그 때부터는 뭔가 좀 더 좋은 음식, 몸에 좋은 억지 운동, 목욕, 요가, 참선 등 이러한 모든 새로운 것들, 즉 이전에 시간이 없어 전혀 신경쓰지 않던 희한한 것들만을 계속해서 찾아 헤매고 거기에 몰두하고 그에 도취되고, 나아가 거기에 목숨을 걸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하의 샘이 물이 고이는 즉시 쉴새없이 자꾸 퍼내져서 우물 밖의 생명들을 살리고 키우는데 이타적으로 쓰이지 않고 그냥 그자리 고여서 맹돌게 되면 이내 물이 썩게되고 마는 그러한 현상을 지금의 한국 개신교단의 위기 현상에 비유할 수 있을 듯도 합니다.
한국의 유명 무명 모든 개신교인들이 이제는 이 땅에 충분히 확보되고 길들여진 <기독교 문화> 그것을 그저 즐기고 향유하며 사는데 크게 만족하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금 막 (15년만에 다시)읽고 있는 왓치만 니 신앙선대의 오래전에 저술된 책에 이런 얘기가 나오고 있군요. "설교자는 많으나 (진정한 의미의)사역자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위기의 이유다" 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설교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도무지 입을 열어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성장을 위해서 셀교회, 알파코스등을 도입해서 운영하는 것에 대해 건전한 비판조차도 저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셀교회가 교회정치를 다 무시하고 셀조직위주로 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기존의 교회 내에서도 구역조직이 있어왔고 구역모임이나 활동이 유명무실해진데서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셀교회 운동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셀교회운동을 어떤 목회성장의 대안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알파코스도 초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데 탁월한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타 이단이 그러하듯 제대로 8-90% 진행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틀어버립니다. 그래서 이제껏 쌓아왔던 진리의 기초를 단번에 허물어 버리는 특징을 볼 수 있는데 알파코스의 성향도 그런것 같습니다.
너무 좋은 프로그램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기독교신앙의 기초를 하나님의 계시된 성경에서 인간의 경험과 체험 그리고 신비주의를 마치 성령의 역사라고 오도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진리의 기초한 신앙이 아닌 이적과 표적 중심의 신앙을 갖게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전도가 안된다고 하는데... 무엇을 위해 전도를 하는것인지 되돌아 보아야 할것같습니다.
아무튼 이 시대가 전도도 안되고 교회가 총체적 위기상황을 맞고 있는데 이럴 수록 더 본질적인 것을 추구해야하지 않을까요?
규모가 작던 크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선포하고 함께 모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고
할 수 있는 일이 크든 작든 간에 서로 사랑하려고 또한 지역사회를 섬기려고 몸부림 친다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감동이 된다면... 조금씩 조금씩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욕심내지 말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주님앞에서 자신을 부인하는 몸부림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도 그냥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할 줄아는게 없어서... 몸으로 떼웁니다. 버티기..인내하기..
>>아마도 이러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도의 대상이 될 것이며 실제 교회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지역사회에서 교회의 위상을 제고시키는 역할도 할 것입니다.
>>지탄받는 기독교에서 귀감이 되는 종교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너무 원론적인지는 몰라도, 저는 위와 같은 방법에 회의를 느낍니다.
요즘 사도행전을 묵상하면서 느끼는거는, 바울이 무식할 정도로 당당하다는 겁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그 당시로는 말도 안되는 메시지를 맨땅에 헤딩하듯이 그냥
선포하고 다닌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로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실존적으로 믿기에,
아무리 말이 안되고 씨도 먹히지 않는 '복음'을 무식하게 선포할 수 있었고, 그럼에도 복음의
능력으로 많은 사람을 믿음으로 이끌어 내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람들의 문화적인 관심과 흥미에 눈높이를 맟추기 보다는, 내 자신이 복음을 더 확실히 믿는 믿음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전도의 방법이라고 느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떡진머리'님의 전도방법을 미국의 윌로우 크릭이나 한국의 온누리 교회 같은데서
이미 시도해 왔으며, 윌로우 크릭 교회 깉은 경우는 자신들의 방법이 실패했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