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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영원과 생명

조회 수 330 추천 수 0 2020.11.23 06: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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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영원과 생명


인생은 요람에서 무덤까지이니 인생은 시간의 문제이다. 시간이 무엇일까? 지금으로부터 약 1,600년 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대체 시간이 무엇입니까?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아는 듯 하다가도 막상 묻는 이에게 설명을 하려 들자면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 시간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고백이 생각난다. 모두에게 익숙하나 정작 본질은 알지 못하는 무엇, 그렇게 시간은 일상의 신비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시간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할까? 시간이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이 가장 많이 말하는 단어는 아마도 영원일 것이다. 영원이란 무엇일까? 성경에서 영원을 나타내는 헬라어는 ‘아이오니오스(aionios)’이고 히브리어는 ‘올람(olam)’인데, 이 두 단어는 끝을 제한할 수 없는 긴 시간을 의미(duration either undefined but not endless)하는 것이지 헬라 형이상학의 절대적 의미에서의 영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까닭에 이 단어들은 복수형 아이오네스(aiones)와 올라민(olamin)이 존재하고 있다.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기간을 나타내는 영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끝을 제한할 수 없는 긴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지 절대적 의미에서의 영원은 아니다.

그러므로 영원은 끝없이 계속되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초월이다. 따라서 영원을 생명과 연결시킨 영생(永生) 역시 시간 속에서 끝없이 지속되는 삶이나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미래까지도 죽음이라는 단절 없이 지속되는 삶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을 초월한 삶을 의미할 것이다.

이 영생을 가장 신학적인 의미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사용한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 적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요 5:24). 헬라어 원문은 이 문장을 분명한 현재형으로 기록하고 있다. 영생은 미래에 얻어질 무엇이 아니라 지금 현재 지니고 있는 무엇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영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영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초월하여 관계한다. 마치 우리가 내재적 삶에서 문득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처럼, 우리는 일상의 시간 속에서 문득 신비롭게도 시간의 초월, 즉 영원을 경험하게 된다.

시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잠시 시간의 신비와 초월을 향해 나아갔던 생각의 흐름이 다시 흘러가는 이 현실의 시간으로 돌아온다. 성경에서의 시간은 “지금이 곧 과거이자 미래”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물리학적으로 보면 우리가 사는 우주(宇宙)는 시간(1차원)과 공간(3차원)의 우주이다. 우주(宇宙)의 한문 우(宇: 공간)와 주(宙: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4차원의 우주 밖의 우주는 11차원의 우주이다. 이 우주에서는 시간이 없다.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없다. 그렇다고 헬라 형이상학의 절대적 의미에서의 영원한 우주는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우주는 몇 차원일까? 우리가 사는 우주는 4차원, 우리 밖 우주는 11차원 거기까지는 아마 빅뱅으로 창조된 우주이나,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않은(히 9:11) 우주는 몇 차원일까? 12차원이 아닐까?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은 모두 12라는 숫자로 되어 있는 것 아닐까? 우리가 사는 우주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우주의 그림자나 모조품이 아닐까(히 8:27). 물리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우주는 우리 밖 우주인 11차원의 표면이고, 우리 밖 우주인 11차원의 우주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12차원의 우주의 표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장자는 “꿈 속에 꿈을 꾸니 깬 꿈도 꿈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꿈을 꾸는 나, 꿈 속의 나, 꿈 속에 꿈을 꾸는 나, 이렇게 세 가지 우주가 있다.

시간이 있는 우리가 사는 4차원의 우주, 시간을 초월(aiones, olamin)하는 우리가 사는 우주 밖 11차원의 우주, 하나님이 거하시는 12차원의 영원한 우주, 이렇게 세 우주가 성경이 말하는 우주가 아닐까? 성경이 말하는 생명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시간에 거하는 생명인 육체적인 생명(bios), 시간을 초월하는 혼 생명(psuche: 정신적인 생명), 시간이 없는 하나님의 생명인 영원한 생명인 영 생명(zoe)의 세 가지 생명이 있으니 말이다. 시간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모를 때는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 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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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2020.11.23 17:12:46
*.137.91.228

예, 깊이 사색하게 하는 좋은 글을 잘 읽었습니다.

11차원을 우리가 일상에서 어떻게 경험하거나 느낄  수 있는지,

직접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비유적으로라도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주 물리학은 아무리 들어도 따라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겠어요.

공간이 휜다는 말까지는 알아듣지만요.


[레벨:19]브니엘남

2020.11.24 05:34:23
*.118.81.222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습니다. 불교에 검은 쥐와 흰쥐라는 화두가 있습니다. 그 의미가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톨스토이도 이 비유에 대해 그대로 말했습니다.

 

어떤 스님이 숲길을 걸으면서 경전에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난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문득 코끝으로 미풍이 스쳐. 그는 고개를 앞에 있는 산길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맹호 한 마리가 눈을 부라리고 곧 달려들 기세로 서 있었다. 스님은 깜짝 놀라서 몸을 돌려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내달렸다. 스님은 너무나 절박한 나머지거의 나는 듯 달렸고 호랑이는 멀찌감치 쫓아왔다. 이런 식이라면 곧 호랑이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 듯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스님이 목숨을 걸고 달려서 도착한 곳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어떻게 눈앞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호랑이는 어느새 바짝 쫓아와서 ‘와락’하고 달려들었다.

스님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스님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자 마침 절벽에 늘어진 등나무넝쿨이 손에 잡혔다. 안도의 숨을 쉬며 절벽에 매달려있는데 저 아래 물속에서 한 무리의 악어 때가 보였다. 거기다 어디서 왔는지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나타나서 느닷없이 붙잡고 있는 등나무 넝쿨을 갈아 먹는 게 아닌가? 쥐들이 몇 번 갈아먹으면 등나무 넝쿨은 끊어지고 스님도 악어의 입 속으로 떨어질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 가운데 스님은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입이 벌어졌는데. 그때 그가 뛰어내릴 때 나무에 있는 벌집이 무너졌는지 꿀이 등나무 넝쿨을 타고 흘러내렸다. 등나무 넝쿨을 타고 흘러내리던 꿀이 사냥꾼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꿀을 먹으며 등나무 넝쿨을 갉아먹는 쥐를 깜빡 했다. 아래의 물 속에서 쳐다보고 있는 악어도 잊어버렸다.

그 순간에 스님은 흰 쥐와 검은 쥐를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깨달았다. “저 쥐들은 낮과 밤을 상징하는구나. 인생의 남은 시간을 끊임없이 갈아먹고 있으니 말이야. 그리고 저 호랑이와 악어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두려움이겠지.” 생이 곧 마감 되려고 하는 순간에 스님은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짧고 약한지를 마침내 깨달았다.

등나무 넝쿨이 가늘어지는 것처럼 시간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그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현재를 사는 것이다. 스님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맛있는 꿀을 먹었듯이. 무한한 과거는 모두 현재로 귀속 된다. 무한한 미래 역시 현재로부터 시작된다. 생의 남은 시간들은 낮과 밤에 의해 끊임없이 먹히고 있다.


이 화두는 과거와 미래를 초월한 시간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호랑이에 쫓기든 미래에 악어에게 먹혀 죽든 그것은 잊어버리고 지금 꿀을 먹고 있는 나. 그것이 11차원의 경험이 아니겠습니까? 적절한 대답인지 모르겠습니다.

현문우답인지 모르겠습니다.  

[레벨:19]브니엘남

2020.11.24 08:29:11
*.118.81.222

심적인 개념과 진리의 깨달음 사이

만유가
하나이다.

지금 하늘의 별을 보고 있다.
가장 멀리 있는 별이 유난히 반짝이고 있다.

발밑에
아주 작은 개미가 기어가고 있다.

멀리서 반짝이는 별과 발밑의 아주 작은 개미가
의식으로부터 똑같이 가깝거나 똑같이 멀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
주님이 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

주님이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심적인 개념과 진리의 깨달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내적으로
일체를 포괄하는 세계 안에 산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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