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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강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명제에 대한
계속되는 설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본질적 초자연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사명과 그에 의해서 선포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오늘의 현실성 이해에 어긋난다고 해서
그것을 다른 단어로 대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어떤 해석학적 역사를 취했는지를 알고 있기만 한다면,
즉 예수님의 운명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눈여겨보았던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바르게 이해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현실에서 그 명제를 얼마든지 변증할 수 있습니다.
이번 25강은 이해하기가 유난히 어렵습니다.
그걸 감안하고 쓴약을 먹는다는 생각으로 들어보십시오.
감사.
계속되는 설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본질적 초자연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사명과 그에 의해서 선포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오늘의 현실성 이해에 어긋난다고 해서
그것을 다른 단어로 대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어떤 해석학적 역사를 취했는지를 알고 있기만 한다면,
즉 예수님의 운명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눈여겨보았던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바르게 이해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현실에서 그 명제를 얼마든지 변증할 수 있습니다.
이번 25강은 이해하기가 유난히 어렵습니다.
그걸 감안하고 쓴약을 먹는다는 생각으로 들어보십시오.
감사.
2009.03.09 23:16:08
이것 참,
늦게 배운 도박,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지금 라라 님의 모양이 바로 그것이네요.
지금 삶으로 신학을 하고 있군요.
신학의 오체투지네요.
아마 신학생들도, 아니 목사님들도,
더 나아가서 웬만한 신학자들도
지금 라라 님의 그런 신학적 영성에 이르지 못했답니다.
그건 틀림 없는 이야기에요.
좀 젊어서 이렇게 신학 공부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요?
후회할 것 없어요.
늦은 것도 아니에요.
아무리 일찍 서둘러도 별 차이가 없어요.
뭔가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은
정말 찰라거든요.
나는 그게 안 된 사람이에요.
다른 영성가들의 그런 모습을 그냥 구경을 하는 정도죠.
그런 구경만이라도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몰라요.
웬만해서는 그런 게 잘 눈에 들어오지 않거든요.
좋은 밤.
늦게 배운 도박,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지금 라라 님의 모양이 바로 그것이네요.
지금 삶으로 신학을 하고 있군요.
신학의 오체투지네요.
아마 신학생들도, 아니 목사님들도,
더 나아가서 웬만한 신학자들도
지금 라라 님의 그런 신학적 영성에 이르지 못했답니다.
그건 틀림 없는 이야기에요.
좀 젊어서 이렇게 신학 공부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요?
후회할 것 없어요.
늦은 것도 아니에요.
아무리 일찍 서둘러도 별 차이가 없어요.
뭔가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은
정말 찰라거든요.
나는 그게 안 된 사람이에요.
다른 영성가들의 그런 모습을 그냥 구경을 하는 정도죠.
그런 구경만이라도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몰라요.
웬만해서는 그런 게 잘 눈에 들어오지 않거든요.
좋은 밤.
죽음이 임박해서야 그 사람의 신앙의 진가를 볼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네요.
그런데, 급박한 사고나 오랫동안 식물인간으로 있다가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을
생각하니 모든 사람에게는 다 적용되는건 아니겠다 싶어서요.
하나님은 또 다른 방법으로 임재를 나타내시겠지요.
임종의 자리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임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목사님,
어제 즉문시간에 언급해 주셨던, 우리는 지금 알수 없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옳다고 믿고 베팅하는 거다.
라고 하셨는데요.
한가지 첨가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목사님께서도 늘 하시던 말씀이어요.
우리는 목숨걸만한 가치.. 그런 근거를 갖고 있다는 거요.
우리는 지금 복음서를 읽으면서 '생명의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이미 선재한 부활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아닐까요?
그리고 우리는 희미하고 미약하지만, 이미 생명의 역사를 이루며 살고 있지 않나요?
우리 삶이 거칠고 시시하다 해서 그 생명이 없어진 것이 아닌 것 처럼요.
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셨듯이 가장 극한의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을 감지할수 있다고 말씀하시니 말이어요.
예수님이 왜 하나님의 아들이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였는지
그 이유와 근거가 우리와는 불가분의 관계였는데,
우리는 그저 교리로만 달달 외웠군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끌어낸 초대 교회의
전통이 과연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을까요?
우리는 초자연적 기적, 능력에 촛점을 맞춰 하나님의 아들을 인식해 오고 있었던 거네요.
그러니, 왜곡 될 수밖에요.
심지어 그 분의 삶을 본받아야 된다라고 하고요.
본 받을것은 "생명의 역사' 전통을 잇는 것인데요.
목사님, 이번강의 댑따 어렵다 하셨는데..
너무너무 좋던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