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Articles 7,958
관련링크 : | http:// |
---|
어제 대구오프에서는 판넨베르크의 '믿음의 기쁨' 중에서
'고난 위로 임하는 빛', 'Dominus Flevit' 이 두편의 설교를 공부했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한 편은 번역된 설교이고, 한 편은 원문으로 보았습니다.
ㅋㅋ...뻥입니다....
먼저 '고난 위로 임하는 빛(사 52:7-10)' 중에서 제게 포인트가 된 것들입니다.
1. 예수님에게서 발생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구원이며,
그것이 곧 그리스도가 신뢰한 새로운 현실성 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사실에 기독교의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부활의 새벽에 예수님에게 현실성이 되어버린 새로운 생명....
----> 육신의 예수께서 약속되어진 현실성을 향하여
신뢰하며 걸어간 그 길 끝에 완성된 그 부활의 현실에
주체이신 '예수님의 내면'을 상상하게끔 합니다.
그 내면을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우리가 종말의 현실성을 맞이하였을 때
지향되는 동일한 내면이리라 생각합니다.
'주님의 미래가, 주님의 현실이 이것이었군요...
제 믿음과 신뢰보다 더한 것이었군요...'
2. 제2 이사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스라엘의 국가적 해방으로 생각했습니다.
.....제2 이사야는 이 사실을 예감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구원을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로 기대하지는않았습니다.
----> 먼저는 고난과 어둠가운데 있는 동족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하는 영성(정목사님 설교)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시대의 뛰어난 영성의 예언자이지만 그 한계가 있었슴을,
오늘날 이 점에 있어서 우리도 예외가 아닐 것임을,
그러하기에 종말의 현실성에 끊임없이 열려있어야 함을....
3. 우리는 예수님의 새로운 생명에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연결될 수는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부활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성만찬을 통해서도 일어납니다.
성만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며,
또한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의 피와 연합됩니다.
----> 이제는 우리와 신분이 다른 예수 그리스도와의 접점을
성만찬을 통하여 이어갈 수 있습니다.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현실을 통과한 그리스도의 상징을
우리가 영육으로 취하며 그와의 연합됨을 기억합니다.
그 분의 부활로 인하여 고난의 이유가 통찰되듯이
죽음 전에 행해진 성만찬도 부활로 인하여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통치......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미래 를 기다린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은 감각이 마비되어 있습니다.
----> '시인의 영성'을 언급하셨습니다.
일상에서 생명, 궁극적인 것을 바라보는 자세를 말씀하신 듯..
어떻게 이런 자세를 견지할까요? 고민입니다.
누가복음의 인물들을 떠올려봅니다.
율법시대의 제사장 사가랴,
그는 메시아의 계시에 열려있는 당대의 종교적인 제도권의 우위자였습니다.
예루살렘의 평신도 시므온,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나이든 여선지자 안나,
성전에서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그 깨어있는 영성으로 아기를 증거하였습니다.
별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던 이들이 아주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5. 우리 심부름꾼들은 하나님의 승리를 알리고,
또한 승리자의 비밀스러운 지하운동을 전 세계에 확장시켜야합니다.
----> 비밀스러운...
이 의미는 노출되었으나 사람과 때에 따라서 보여지지않는 은폐입니다.
저에게는 운동의 방식이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내용자체가 그러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힘이 딸려서 이 한 설교만 돌아보야겠네요....에효..
더 중요한 부분들이 있으나 제 위주로 적어보았습니다.
한 주의 반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활기찬 하프 코스를 향하여....
아..그리고 오늘 아침에 눈을 뜨니 생각나는 찬송이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였습니다.
그 뒤는 가사에 약한 저로서는 생각이 안나구요,
오늘 '순례의 길'이라는 이 대목이 처음으로 와닿는 것 같습니다.
'고난 위로 임하는 빛', 'Dominus Flevit' 이 두편의 설교를 공부했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한 편은 번역된 설교이고, 한 편은 원문으로 보았습니다.
ㅋㅋ...뻥입니다....
먼저 '고난 위로 임하는 빛(사 52:7-10)' 중에서 제게 포인트가 된 것들입니다.
1. 예수님에게서 발생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구원이며,
그것이 곧 그리스도가 신뢰한 새로운 현실성 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사실에 기독교의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부활의 새벽에 예수님에게 현실성이 되어버린 새로운 생명....
----> 육신의 예수께서 약속되어진 현실성을 향하여
신뢰하며 걸어간 그 길 끝에 완성된 그 부활의 현실에
주체이신 '예수님의 내면'을 상상하게끔 합니다.
그 내면을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우리가 종말의 현실성을 맞이하였을 때
지향되는 동일한 내면이리라 생각합니다.
'주님의 미래가, 주님의 현실이 이것이었군요...
제 믿음과 신뢰보다 더한 것이었군요...'
2. 제2 이사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스라엘의 국가적 해방으로 생각했습니다.
.....제2 이사야는 이 사실을 예감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구원을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로 기대하지는않았습니다.
----> 먼저는 고난과 어둠가운데 있는 동족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하는 영성(정목사님 설교)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시대의 뛰어난 영성의 예언자이지만 그 한계가 있었슴을,
오늘날 이 점에 있어서 우리도 예외가 아닐 것임을,
그러하기에 종말의 현실성에 끊임없이 열려있어야 함을....
3. 우리는 예수님의 새로운 생명에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연결될 수는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부활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성만찬을 통해서도 일어납니다.
성만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며,
또한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의 피와 연합됩니다.
----> 이제는 우리와 신분이 다른 예수 그리스도와의 접점을
성만찬을 통하여 이어갈 수 있습니다.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현실을 통과한 그리스도의 상징을
우리가 영육으로 취하며 그와의 연합됨을 기억합니다.
그 분의 부활로 인하여 고난의 이유가 통찰되듯이
죽음 전에 행해진 성만찬도 부활로 인하여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통치......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미래 를 기다린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은 감각이 마비되어 있습니다.
----> '시인의 영성'을 언급하셨습니다.
일상에서 생명, 궁극적인 것을 바라보는 자세를 말씀하신 듯..
어떻게 이런 자세를 견지할까요? 고민입니다.
누가복음의 인물들을 떠올려봅니다.
율법시대의 제사장 사가랴,
그는 메시아의 계시에 열려있는 당대의 종교적인 제도권의 우위자였습니다.
예루살렘의 평신도 시므온,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나이든 여선지자 안나,
성전에서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그 깨어있는 영성으로 아기를 증거하였습니다.
별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던 이들이 아주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5. 우리 심부름꾼들은 하나님의 승리를 알리고,
또한 승리자의 비밀스러운 지하운동을 전 세계에 확장시켜야합니다.
----> 비밀스러운...
이 의미는 노출되었으나 사람과 때에 따라서 보여지지않는 은폐입니다.
저에게는 운동의 방식이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내용자체가 그러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힘이 딸려서 이 한 설교만 돌아보야겠네요....에효..
더 중요한 부분들이 있으나 제 위주로 적어보았습니다.
한 주의 반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활기찬 하프 코스를 향하여....
아..그리고 오늘 아침에 눈을 뜨니 생각나는 찬송이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였습니다.
그 뒤는 가사에 약한 저로서는 생각이 안나구요,
오늘 '순례의 길'이라는 이 대목이 처음으로 와닿는 것 같습니다.
정리의 달인 유니스님 감사합니다.
늘 일용할 간식을 제공 하심도 감사합니다
요즘 자동차 경기가 워낙 안좋다보니 걱정이 많답니다
그럼에도 목사님의 설교와 강의는 그어느때보다 힘이됩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고난이 저에게 빛으로 다가옴을 머리로 아는것 넘어 가슴으로 다가옴을 느낍니다
하지만 현실앞에 나약해집니다
고난위로 임하는 빛을 인식하고 가슴으로 느끼는 가운데 다가오는 현실적 두려움이 내속에 생긴다는 것
내속에 생기는 그 자체가 두렵습니다.
기도가 부족한가 봅니다.
하지만 고난이 없었다면 이 놀라운 진리가 절실히 와 닿지 않았을겁니다
아마 자발적 고난이 요구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군요
늘 일용할 간식을 제공 하심도 감사합니다
요즘 자동차 경기가 워낙 안좋다보니 걱정이 많답니다
그럼에도 목사님의 설교와 강의는 그어느때보다 힘이됩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고난이 저에게 빛으로 다가옴을 머리로 아는것 넘어 가슴으로 다가옴을 느낍니다
하지만 현실앞에 나약해집니다
고난위로 임하는 빛을 인식하고 가슴으로 느끼는 가운데 다가오는 현실적 두려움이 내속에 생긴다는 것
내속에 생기는 그 자체가 두렵습니다.
기도가 부족한가 봅니다.
하지만 고난이 없었다면 이 놀라운 진리가 절실히 와 닿지 않았을겁니다
아마 자발적 고난이 요구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군요
동그라미님~
솔직한 심정을 말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저도 오프 후에 집으로 가는 길에
마음이 묘한 건지 착찹한 건지..
하여튼 표현하기가 힘드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숨을 쉬기도 하고, 제가 있는 좌표를 떠올려보고..
동그라미님의 연유들과 같아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힘내어야겠지요.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힘이 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힘을 내어야 한다는
이중적인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육신으로 삶을 살아내면서 방향을 잃지않고 걸어가야하는 것.
순례자가 별스러운 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고
순례자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별스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왜 이 단어와 매치가 되는건지 원...
괜시리 너무 많은 거 알아가지고 인생 복잡해지는 건 아닌지...
주님...어쩌라구요...제발 불쌍하게 여겨주시라구요...
아! 그리고 간식말인데요.
경주에서 여기까지 오시는 동그라미님 내외분께
3분 거리 유니스는 뭐라도 먹여드리고 싶답니다.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시면 살짝 말씀해주셔요...^^
솔직한 심정을 말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저도 오프 후에 집으로 가는 길에
마음이 묘한 건지 착찹한 건지..
하여튼 표현하기가 힘드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숨을 쉬기도 하고, 제가 있는 좌표를 떠올려보고..
동그라미님의 연유들과 같아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힘내어야겠지요.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힘이 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힘을 내어야 한다는
이중적인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육신으로 삶을 살아내면서 방향을 잃지않고 걸어가야하는 것.
순례자가 별스러운 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고
순례자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별스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왜 이 단어와 매치가 되는건지 원...
괜시리 너무 많은 거 알아가지고 인생 복잡해지는 건 아닌지...
주님...어쩌라구요...제발 불쌍하게 여겨주시라구요...
아! 그리고 간식말인데요.
경주에서 여기까지 오시는 동그라미님 내외분께
3분 거리 유니스는 뭐라도 먹여드리고 싶답니다.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시면 살짝 말씀해주셔요...^^
아, 유니스 누님께서 정말 원문으로 공부하셨단 말인가요?
뻥이라도 믿고 싶네요.. 그 뜨거운 열심에.ㅎㅎ
누님께서 잘 이해하고 적으셨는지 안 그랬는지
며칠뒤 동영상 올라오며 그때 들어보고 확인 합니다.ㅋㅋ
맑은 그늘님이 올려놓은 <봄이오네> 사진을 감상하면서
우리의 연약한 육체도 그 분의 신비한 능력에 의해
그분의 형상으로 우리도 변화되리라는 소망이 더욱 깊어집니다.
하나님의 미래가 이렇게 온 사방에 봄의 소식처럼
드러나지 않은 곳이 없네요.
요즘 작은 누님의 글과 음악적 조예에
기쁨과 즐거움을 만끽하는 달팽이입니다.
봄바람이 부는 저녁
산들산들 좋은 시간 보내세요!!!
뻥이라도 믿고 싶네요.. 그 뜨거운 열심에.ㅎㅎ
누님께서 잘 이해하고 적으셨는지 안 그랬는지
며칠뒤 동영상 올라오며 그때 들어보고 확인 합니다.ㅋㅋ
맑은 그늘님이 올려놓은 <봄이오네> 사진을 감상하면서
우리의 연약한 육체도 그 분의 신비한 능력에 의해
그분의 형상으로 우리도 변화되리라는 소망이 더욱 깊어집니다.
하나님의 미래가 이렇게 온 사방에 봄의 소식처럼
드러나지 않은 곳이 없네요.
요즘 작은 누님의 글과 음악적 조예에
기쁨과 즐거움을 만끽하는 달팽이입니다.
봄바람이 부는 저녁
산들산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우선 판 교수님 설교를 원문으로 공부했다는 첫 문장이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아침에 깨어나는 순간부터 찬송가 구절이 떠올랐다는 사실에 또 깜짝했습니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놀랬다는 것입니다. ㅎㅎ
오늘 저희 교회 새벽기도회 시간 요한복음 12 장을 묵상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신 주님의 고뇌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순종하신 주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활의 아침을 만나시는 주님의 현실이
우리들의 미래임을 일깨워주는 유니스님의 글을 만나
다시한번 오늘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것인가 고민합니다.
저희 집 뒤뜰의 얼었던 땅들이 보슬보슬 해지더니
수선화, 튤립, 히야신스 등 봄꽃들이 머리들을 들고 있네요.
부활을 위해 겪어야 할 십자가의 죽음. 한 알의 밀알.
부활절이 새 봄에 있음 또한 참 감사한 일입니다.
좋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