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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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존재론(ontology)이 헤겔 및 현대 철학자들 이후로 “Being” 의 관점에서 이제는 “Becoming” 으로 관점이 바뀌었다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존재라고 하는 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일단 이 세상의 삼라만상이 고정된 것은 없고 한 없이 변화하고, 또한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들의 생각조차도 그냥 가만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언가 기준을 세운다는 것은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마치 배를 타고 가다가 칼을 흐르는 물 위에다가 떨어뜨렸는데, 배 위에다가 그 칼을 떨어뜨린 지점을 표시했다는 “각주구검” 이나 다를 바가 없는 거죠.
또한 이런 인간의 유한성, 무상성에 대한 투사 와 보상 심리에 의해서, 무한한 것과 항상성, 궁극적인 것에 대해 인간이 욕구한 결과가 “신”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 신은 그냥 허상이고, 투사물일 뿐입니다. 일반적인 유신론의 치명적인 약점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설하고...
하나님, 궁극이란 것이 결국은 어떤 전제로서 이야기 되는 것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볼까 합니다. 하나님, 즉 궁극에 다다른 상태가 어떤 극점에 도착한 고정된 상태라고 할 수 있을까요?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 하면,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가, 궁극이라는 말 자체가 가능한 것이냐 하는 것이죠.
불완전한 것에 대한 완전한 것, 유한한 것에 대한 무한한 것, 영속적이지 못한 것에 대한 영속적인 것 등등은 없다는, 종합해서 말해보면 이 세상의 유한성에 대비되는 무한성이라는 가치는 없다는 것, 그 것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인 것 같습니다. 그 점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완전히 가는 길을 달리 합니다.
불교적 관점(perspective)은 현실에 대한 직시라는 점에서 동의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솔직히 말하면 나의 오감과 생각의 영역에서 어떠한 신적 무한자와의 조우를 한 번도 경험해본 적도 없어요... 그리고 끊임없이 변해가면서 지금은 예전과는 또 다른 나임을 느끼구요... 늙어서 죽는 어떤 순간에 궁극의 이끌림을 받아서 뭔가 고상한 어떤 존재로 변해 있을까 하는 것도 사실 너무나 불확실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그 마지막 순간에 또 다른 현실의 “나” 일 뿐이겠죠. 그렇게 죽어가겠죠.
그런 면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신이나 절대자, 궁극을 추구했다기보다는 “실상을 제대로 봄, 앎” 을 추구했던 것으로 볼 수 있어요, 正覺이죠...
그런데 말이죠... 부처님의 그러한 깨달음을 향한 과정도 어떤 전제를 깔고 시작하지는 않지만 무언지 모르지만 “목적성”이 있는 거 같아요... 전제가 없다는 것은 전제에 의해서 실상이 흐려지지 않게 더 정확히 보고 들어가겠다는 것이거든요...
위대한 음악가든 화가든, 자신들에게 다가온 “상”(image)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오랫동안 갈고 닦아온 그들의 테크닉은 제쳐두고라도, 오랜 수련을 통해서 그들에게는 이미 무의식 속에 있던 어떤 전제라는 덮개를 걷어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 일반인들에게도 어떤 상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처럼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겠죠... 인간은 자기가 듣고 싶은대로 듣고, 보고싶은 대로 본다는 것이 그 것을 말하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전제가 너무 강합니다... 하나님이라는 전제, 예수라는 전제... 그 전제를 기독교는 “계시” 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 전제가 어쩌면 정말 “궁극” 이 있다 하더라도 그 궁극을 보는 눈을 틀어막는 장애물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종교적 전제는 고상한 관념이 되고, 또한 그 관념이 고착화되면 우상이 되는 거 같아요...
그러나 그 반면에 실상을 제대로 본다는 것이 “空”이라는 것이 구체화 되면서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공허하며, 덧없는 것이 되어버리면서 삶의 의미를 잃고 자살을 결심하게 하는 우울로 가는 것이라면 그 것도 넌센스죠.
(실제로 소승불교 쪽에서 수련하신다는 한 분과 이야기 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하나님, 궁극이라는 개념 자체가 너무 작위적이고, 그리고 대중불교의 “공” 조차도 그런 의미에서 인정할 수 없다는 분입니다: “부처님은 신이나 절대자, 궁극을 추구한다기 보다는 “실상을 제대로 봄, 앎” 을 추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죠.
그런데 말이죠... 부처님의 그러한 깨달음을 향한 과정도 어떤 전제를 깔고 시작하지는 않지만 무언지 모르지만 “방향성”이 있는 거 같아요... “정각”이죠... 전제가 없다는 것은 전제에 의해서 실상이 흐려지지 않게 더 정확히 보고 들어간다는 것이지 그냥 헤매고 있겠다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실상을 제대로 보았는데, 그 본 것이 그냥 너무나 무시무시한 허무 그 자체일 뿐이라면... 너무 의미 없지 않나요? 아니, 의미조차도 사실 존재할 수가 없는 건가요? 좀 말도 안 되는 소릴 한다면, 이 세상의 깊은 공허와 허무를 절실히 느끼면서 자살을 결심하는 우울증 환자야말로 가장 큰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일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그런 수련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 아닌 그런 수련을 할 필요가 있냐는 말이죠.” <물론 제 이야기도 그 분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아닌, 그냥 그 분 이야기 제대로 듣고 싶어서 과장 섞어서 한 번 찔러본 이야기죠.> )
질문을 하나 던져 놓고 글을 맺습니다... 아주 무책임하게...
우리가 예수와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지점은 어떤 지점일까요?
아담은 하나님과(아니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존재) 같이 살았어요.
실제로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런 아담에게 하나님을 자신의 인식세계에 담으려는 욕망은
현재의 우리처럼 강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하나님을 우리의 소유권에 넣으려 한다는게
이런 의미죠? 요즘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 체험 같은....)
문제는, 아담 또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고, 자신을 창조한 걸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자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는거죠. 아담이 태어날 때(눈을 떳을 때)에는
이미 세상은 모두 완성되어 있었으니, 그것이 과연 저 하나님이 창조한건지(원인자)
아니면 원래부터 그대로 있는건데, 하나님이란 자가 뻥을 치는건지, 늘 마음에
걸렸겠죠.
그것을 알아보고 싶었던게 아닐까요?(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서...)
저 개인적인 견지에서는,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살고, 눈으로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을 듯 해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린왕자가 여우랑 이야기 하고, 뱀이랑 이야기 하고 하는 그 것을 어린 왕자의 주된 스토리로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요...
단지 그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죄가 되어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하는 액면 그대로의 사실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현실의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어떤 멧세지를 던져주느냐가 중요한 것 아닐까요? 어차피 창세기에 보이는 하나님의 의도가 "아담의 사실적 연대기" 는 아닌 거 같아서요...
저는 "아담의 선악과" 는 현실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유효하다고 봅니다...
선악을 안다는 거... 선악을 알고 싶다는 거... 그 건 스스로가 신의 반열에, 아니면 신을 나의 한계 속에다가 끌어넣고 싶은 욕망이란 거죠...
그런데 그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기는 커녕 스스로가 벌거벗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는 거...
내가 신을 나의 한계 속에다가 끌어와서 소유하는 순간... 그런 믿음을 가지는 순간... 내가 믿는 그 신은 신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나를 어떤 고정된 틀로 몰아가면서 실제적으로는 나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거...
우라나라의 많은 개신교목사와 신학자들이 그에게 던진 질문을 들으니..
우리나라 남북 통일 해결의열쇠를 그독일 신학자가 모두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는한
어떻게 저런 질문을 던질수 있나...싶어 찹찹했던 적이 있습니다
첫날처럼님이 얘기하는 다 알고 있다는 전제적 결론에 빠져있는 신앙의 문제가 아닐까란 생각이 드네요
거기엔 사대주의적인 기독교 신앙의 뿌리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뿌리에서 어떤 한국의 기독교인도 자유할수 없을 겁니다 저또한..
그냥 전 단순히 생각합니다.
부처님도 자신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셨을 것이라고..
그래서 결국은 "무"의 결론에 이르셨다고.
절대자, 우리의 표현으로는 하나님을 부처님도 생각하였을 것이라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 어떤 인간도 감히 하나님에 대해 "이거다"라고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릴 창조하셨고 우릴 사랑하시며 우릴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기에(논지에서 상당히 벗어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지만 그냥 쓰렵니다.^^ 제가 철학에는 엄청 약하거든요)
하나님이라는 전제, 예수님이라는 전제가 강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이 듭니다.
궁극이기도 하지 않겠나라는 생각도 들구요. 그래서 여기서 더 나아갈 필요 없지 않겠나 생각되는 거죠.(이 또한 제 생각이고 솔직히 하나님에 대해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고 그럴 필요성도 못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그냥 이 지점에서, 그리고 앞으로도 또 그 지점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말하렵니다.
너무 깊이가 없지요?^^(에구 이 짧은 지식이여~~)
저는 지금 기독교든 불교든 다 한 번 딴지를 걸어보고 있는 중입니다... 파괴해서 없애버려보자는게 아니라 무언가 있다면 정말 제대로 한 번 보고 싶어서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그냥 "實相"의 허무함에 대한 뼈저린 자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면... 그건 너무 공포스럽고... 또한 그런 깨달음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 반면에 기독교는 그 계시라는 "전제"가 너무 강하면, 어떤 "리얼리티" 속으로 들어가는 문 자체를 닫아버리고 아예 보지도 못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는 무엇보다도 막연하긴 하지만 온 우주적 "희망" 을 믿습니다... 하나님, 예수, 성령은 그 지점에서 말해져야 한다고 보구요...
그리고 그 신앙이란 것은 그 희망을 선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구요...
암튼 제가 말이 많습니다...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그냥 진심만 받아주시길!!!
나름의 답을 찾으려 하다보니...^^
계시와 리얼리티가 만나는 지점
계시와 리얼리티의 팽팽한 긴장감이 존재하는 지점
계시와 리얼리티의 정반합의 지점
말로 하니 참 쉽죠잉~?
말씀과 현실은 항상 정,반의 관계 같습니다
거기서 합을 도출해야만하는 인간존재 가까이에 계시는 것을 가끔 느낍니다
뛰어난 예술가 철학가 선인들을 살펴보면..
항상 저런 정반의 현실에서 많이 고뇌하거나 초월하려 했던 것을 보게 되구요
그러나 말로는 아무것도 안되고 책을 읽는 것만으로 아무것도 알수 없는 것이 신앙같습니다
체화되지 않는 지식은 그저 한낱 암호 덩어리에 불과 할뿐...
사람이 나이를 들면 세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고, 나는 이러한 감을 잡았습니다.
즉 석가모니라는 사람은 원래 좀 걸출한 인생철학자일 뿐이고 그와 동시에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하나의
철학일뿐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라고 볼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그렇게 규정하는 이유는 석가모니는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처럼 神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모든 인간들이 애초부터 타고나는
그러한 어떤 종교심이 후대에 와서 그를 우상화시키고, 동시에 절간에다가 부처니 뭐니 부르면서 각종
우상을 만들어 모셔놓고 그에 경배하는 것이지요.
석가모니가 그렇게 하는 게 필요하다고, 그러니 그렇게 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은 백번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 아니겠습니까.(그렇게 하면서 그걸 직업화하는 절간에 사는 사람들도 인류사상
자연스레 생기게 마련이고요. 그게 바로 세상이니까요.)
만약 기독교가 "종교" 그것이라면 그 때는 석가모니 가르침은 종교가 아니며, 반대로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종교에 해당된다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닌 것이지요. 이건 실로 그 둘이 상호간 무한대의 차이를 갖는 개념입니다.
기독교가 독선적이니 뭐니 누가 제아무리 떠들더라도 이걸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에 관한 타협이나, 양보나, 혹은 절충은 있을 수조차 없는 일이지요.
실은 석가모니 사상은 절간이 아니라 아카데미의 철학과정에서 다루면 제격일 것입니다.
물론 석가모니라는 사람이 큰 도인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세상만사 복잡한 것은 절대로 "답"일 수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고도의 직관력으로 이치와 사리를 단번에 꿰뚤어보고는 "빛은 휜다"라고 확신적이고도
단언적으로 말했던 것처럼(검증절차 없이 말입니다), 짧게 한마디로 정의해야 그게 바로 절대적이고도
유용한, 그래서 권위를 부여할만한 어떤 "답"이 되는 것이지요.
짚어주고 넘어갔던 것입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이전 젊은 시절에는 그게 좀 약간 깊이 있게(다른 표현으로 말한다면 영감 넘치게)
표현한 것일 뿐인줄로 그렇게 느끼고 지내왔어요. 그런데 제가 요즘 성경전서 중에서 4복음서
만을 계속해서 읽어온바 있었고 또한 왓치만 니의 저서 <말씀의 사역>을 근래에 재차 읽으면서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라는 의미가 이제는 제 심령에 정확히 짚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묘한 문서라서 괜히 요한 사도가 자신의 개인적인 느낌을 말한 차원이 아니고 마태,
마가, 누가 이 3복음의 이야기 서술적인 내용을 결론을 내는 말씀으로 즉, "예수는 다름아닌 곧
신이다"라고 마지막 복음서에 규정을 하고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요한 사
도에게 그걸 쓰도록 하신 것이지만, 만약에 요한의 뛰어난 영력이 작용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성경 65권은 그 가치가 크게 훼손되고 아울러서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정체성은 참으로 애매
모호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신비한 점을 간과하고 그냥 넘어가면 큰 오류이지요.(그런데 이상하게 설교에서도 이러한
얘기들을 잘 안하지요?) 즉, "예수"는 분명히 신이고, 우리 기독교(즉 예수교)는 그 분을 신으로
써 숭배(예배)하고 그에 따라서 그 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또한 따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곧 예수교)인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근래의 교회 설교들이 점차 "예수의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적인 "축복과 제사의 문제"를 주로 다루는 구약에 열중하고 있어요.
아니면 목사님들의 존경대상인 뛰어난 역사적 교역자 - 사도바울 선교사에게 치중하고 있던지
말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교회에서 "예수" 구경하기가 가뜩이나 어려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교회에서는 (예를 들자면)70%이상을 예수만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국내 신학교에서 수학하고 하버드에서 동양철학 학위를 받은 도올 김용옥씨도
한국의 교회들은 지나치게 사도바울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 같다 라고 말한 내용을 신문 기사로
읽은 적이 있기도 합니다.
또한, 왓치만 니의 견해에 따르면, 성경 전체(곧 신구약의 모든 장들)는 곧 "예수"에 관해서 말하
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경에서 "예수"가 삭제된다면, 그건 읽기 어려운 얘기책 혹은 별로 독보적이라고 말할 수
는 없는 하나의 윤리.도덕 관련 고서라고 봐야 맞을 겁니다.
불교가 무신론이고 기독교가 유신론인 것만 봐도 알수 있겠지요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종교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라 봅니다
그런 인간을 위한 종교이기에 애초의 부처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이
지금처럼 (첫날처럼님이 지적하시는) 변질된 것이라 봅니다
신이 없다는 전제로 출발 하기에 불교가 종교라기보단 철학 아카데미처럼 비춰지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불교가 기독교보다 시작점이 고등하다 여기구요(시작점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기복신앙이나 천당만을 꿈꾸는 기독교보다는 차라리 불교가 낫다 여깁니다
인간의 존재적인 불안요소인 죽음, 질병...이런것들 미끼삼아 팔아먹던 천당과 축복론에서
인문학적, 역사적 신의 진화는 모두 서양철학적 사유의 접목에서 비롯된 것이니
기독교가 불교를 폄하하는 것은 어불성설 같네요
아인슈타인의 빛나는 직관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기적같은..직관이 아닙니다
이전에 학습하고 사유하고 질문했던 시간이 존재하기에 직관할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그런 전제시간이 없는 직관은 무당이나 점쟁이의 말과 다를바 없습니다
미국 기독교 심리학자인 스캇펙이 한 유명한 말중에
기적이 없다는 것 을 믿는 그 자체가 바로 기적 이다
바로 이문구가 적힌 그의 책이 80년대 기독교국가인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된것은 왜일까요?
저도 불교를 비롯한 타 종교를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예수는 인간에 대해서 생사여탈권을 가진 신이고, 석가모니는 한갖 인간이니, 그냥 처세훈이나 철학에나 맞겠다느니 하는 건 그렇게 정당한 평가는 아닌 듯합니다... 지극히 내 틀안에서 짜맞춘 이야기 같다는 말이에요... 그렇다고 석가모니에 대비시킨 이러한 이야기가 예수의 본질에 대해서 또 명확히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말하여진 예수가 아니라 "말하여질 수 없는 예수" 야말로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래 저래 횡설수설이네요... 그냥 몸부림입니다...
위에 진상광 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진리는 가장 단순 명쾌합니다... 그런데 그건 진리의 일면만을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진리가 단지 단순하기만 하다면, 그 진리는 화석화 되어갑니다... 현재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
바르트가 이야기 했나요... 진리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복잡하다고...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렵다고 이야기 한 것 같기도 하고... 저는 이 말이 참 와닿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기독교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뱅뱅 도는 이유가
아직 해체시키지 못한 통속적 기독교 교리 때문은 아닌 거 같아요.
아마도, 저도 모르겠지만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뭔가 본게 있는 듯 싶습니다.
틈나는데로 보는 책들 속의 합리적인 기독교 비판과 대안들을 접하면서
맘속으로 수긍은 가지만 뭔가 아직 부족한 느낌들이 남아있는데,
그 부족함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채워졌었던 무엇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뭘 봤는지, 뭘 느꼈는지 말로 설명 못하겠지만, 하여간 뭔가 찰나에 번뜩 했던 순간이 몇번 있었던 듯한데
그것 때문에 이렇게도 예수를 찾아 헤매는 듯 싶습니다.
참 .. 비논리적이고, 신비주의같기도 한데 ...
중요한건 제가 기존의 세속화된 기독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다름아닌 세속화된 기독교에서 열심히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새벽기도 금요철야 수요예배까지 다참석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데,
이 사람들 하는 말이 서로 엇갈리고, 생각이 모순되고, 언행 불일치까지 ..
'코미디는 이제 그만~ㅎㅎ' 하면서 뛰쳐 나왔습니다 ....
웃긴건 이 사람들의 모순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건,
다름아닌 혼자 걸어다니며 하는 말씀 묵상과 밤중에 혼자하는 기도에서 갈고 닦아진,
나름의 직관과 생각에 있었다는게 코미딥니다.
여튼, '예수는 '신'이다' 라는 직관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모인 곳이 교회이고, 기독교가 아닌가 싶습니다.
가끔, 생각합니다. 풀 한포기 생명의 신비도 풀지 못하면서 인간은 너무 잘난척 하는 거 아닌가 ...
갠적으로는, 인공지능 관련일을 하는데 어느 책에선가 본 말이 있습니다.
"인공지능 관련 일을 1년만 하게 되면, 신을 믿지 않을 수가 없다." ( 의역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 )
갠적으로 절절히 와닿는 말이거등요. 아직은 답이 없어요.
인간의 인지 프로세스는 그것이 프로세스인가?ㅎㅎ 라는 의문이 들때도 있거등요.
이 인간이라는 작품 앞에서, 확률과 통계 수학 및 공학은 참으로 하찮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거등요.
뭔가 또 두서 없이 리플 남기고 가네요. 즐거운 점심되세요 ^^
그러나 이거 하나만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즉 교회에 충성하는 것과 신앙적인 올바름이나
신앙적인 깊이와는 다분히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제가 이미 오래전에 읽었던 어떤 서양인이 쓴 책에도, 그래도 절망하지 말고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말을 그 책의 저자가 했습니다. 즉 그 말의 의미를 다른 방향으로 조명하면 지금의
불특정 다수의 대중들이 모이는 교회들이 (한국뿐만 아니라 서양사회에서도 역시) 뜻을 깊이
하면 깊이 할수록 매우 실망스러운(어떤 때는 절망적인) 상태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에 한번 내가 그런 얘기를 쓴 적도 있었지만, 신앙심이 좋기로 유명한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도
어떤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에서 "들을만한 게 없는 것은 요즘 교회에서 보통 듣는 설교나 마찬가지
이구만!"이라고 혼잣말처럼 말하는 것을 그 프로그램의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주님께서 이미 말세지말에 신앙을 지켜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도 있지요.
어찌보면 인류사적으로 지금은 '신앙의 시대'라기보다는 '웰빙의 시대'에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한가지 단편적인 예를 들면,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인데, 이제는 서양인들도
참선과 명상이 좋다고 말하면서 절간에 들어가 중이 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게 그 사람들
에게는 입맛에 맞는 또 다른 모습의 "웰빙"의 한 컨셉인 것이지요.
어떻든, 우리(남달리 사고하는 신앙인)는 몸부림을 치면서라도 주님(예수)와의 연결된 끈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가 신이라는,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은 요한복음 10장 32절-39절에서 비추어 잘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에게 신성모독의 혐의를 씌우려던 유다인들이 생각하는 신성과 예수가 생각하고 느끼던 신성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현실 기독교의 신성 이해도 전자의 패턴을 따르고 있지 않나 조심스럽게 문제제기 해봅니다...
오래 도를 닦으신 고승들에게 뭔가를 물어보면, "모른다" 혹은 죽방망이가 날라간다고 하더군요.
숭산 큰스님은 진리가 뭐냐는 물음에 책상을 '탁'하고 치시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이자 수학자인 루이스 캐롤도 말년에 '뭐가뭔지 모르겠다'고 했던 거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뭔가 한 우물 오래 파시고, 이름을 남긴 분들 가운데는 이런 뉘앙스에 말들을 많이 남긴것도 같습니다.
물론 저같은 피래미가 따라하다가는 주화입마에 염려가 있긴 하지만요 ...ㅎㅎ
아무튼, 제가 말하는 신은 이런 관점의 신입니다.
예수님에게 너무 지저분한 옷들이 많이 입혀져 있는 거 같습니다.
사실, 인간이 만든 예수니까 예수님하고는 상관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통속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예수는 문제가 많겠지만,
진짜 예수님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이건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가장 핵심이 아닌지요.
이것을 부인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게 되는 것 아닌지요.
예수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신인 것 아닌지요.
유일하게 사람이 숭배해야할 신이 바로 예수님 아닌지요.
부처님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인간과 신을 비교하는 것이기에 전 단호히 거부합니다.
부처님을 숭배하는 것과 예수님을 숭배하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첫날처럼님의 마지막 댓글은 제 아둔한 머리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 생각과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쓰신 것 같은데 풍기는 뉘앙스는 전혀 다르게 느껴지니 말입니다.
제가 요즘 좀 머리가 안따라가는 경향은 있습니다.^^
물론 님이나 진상광 님께서 말씀하시는 "숭배"는 제가 말하는 숭배랑은 다른 이야길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예수가 "숭배" 되면, 그 숭배하는 예수는 더 이상 예수가 아니라는 거... 숭배 속에는 나의 소망과 바램이 담겨있습니다... 예수가 이랬으면, 예수가 이래주십사 하는 그런 무의식이 담겨있단 말이죠...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렇게 믿죠... 우리는 우리가 가진 신관념을 예수에게 투사합니다...
그런 식이라면 예수나 부처나 똑같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이야기 하는 "예수는 신" 이라는 이야기는 반신반인간의 입장에서 그 절반인 인간을 싹둑 짤라내고 이야기하는 느낌이 강합니다, 반신반인간이라는 말 속에는 신과 인간의 대립이라는 느낌이 강할 뿐, 신과 인간의 유기적 연관성을 찾아보기가 너무나 힘들거든요...
"예수는 참인간이자 참하나님" 이라는 말은 신과 인간의 뗄레야 뗄 수 없는 그 유기성과 연대성을, 또한 그 유기성과 연대성을 역사 현실 속에서 너무도 뚜렷이 구현해낸 "예수" 를 통해서 고백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숭배의 의미라면 저도 그 숭배는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런의미의 숭배가 아니라 참 숭배를 합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제가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것.
하나님께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조르는 어린아이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을 변경시키고자 하는 불순한 기도를 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해주기 때문에 믿고 경배하는 것이 아닌
설령 이 세상에서 제가 가장 비참하게 될지라도[결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식을 비참하게 만들지는 않으니까요. 단지 그냥 세상 살다보면 비참해질 수도 있기에.. 너무나 많은 신앙인(종교인이라 해야 옳은 표현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이 조금만 비참하게 되어도 하나님께 무슨 죄를 지어서 그렇다느니, 하나님께서 버리셨다느니 등의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경배드릴 수 있는
그런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소망하며 노력하며 기도하며 살고 있습니다.
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가진 신관념을 예수님께 투사하지 않도록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로고스의 실체가 '예수'로 제시되고 있는 점을 종합해볼 때
예수의 실체는 인문학적 관점에서의 '무(無)'인 것 같습니다.
전도서를 쓴 솔로몬 같은 니힐리스트들은 예수를 모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저 허무하게 보이지만
예수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허무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은 계시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이 세계의 실체를 '무'로 깨달을 때 비로소 예수라는 계시가 등장하면서
세계의 참 의미가 새롭게 터져나온다는 뜻이지요. ('예수라는 게 있는지는 몰랐지롱' 이러면서요...)
그래서 인문학적인 지평에서 치열한 사유를 계속하면서도,
계시 앞에서의 어린아이 같은 겸손을 겸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철학의 관건이겠고요.
좀 감상적인 표현으로 진술하자면, "주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논지에 잘 맞지 않는 내용이라면 죄송합니다.
저는 예수를 선험적인 전제로 삼고 그를 인격적으로 대하고자 삶에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제가 정 목사님께 너무나 많은 것을 배우며 현대교회의 문제점을 심각히 여기지만
그렇다고 다비아에 푹 드러눕지도 못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고독한 고뇌의 길을 걸어가다보니 더욱 인격적으로 붙들지 않으면 못살게 되어버리고요.
(여기서 '고독한 고뇌'라는 표현은 상대적으로 제가 처한 교회환경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어쨌든 다비아에 온 후 인격적인 예수 이해를 상대화시키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기독교 신앙엔 종말론적 잠정성이 있으니까요. 그렇더라도 제 스타일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 말씀을 덧붙여 드리는 이유는,
예수께서 인문학적인 시각에 의해 단정지음 받으시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야 예수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꺼내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부족하고 주제넘은 글들이지만 관심갖고 읽어주심에 매번 감사드립니다.
첫날님은 밥그릇의 밑바닥을 뚫고 그 아래로 파내려 가는 걸로 보여요.
제가 아는 기독교는 '궁극의 원인자'가 있다는 전제가 필수이며, 본질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부정하거나 인식치 못하는 것이 선악과에 나타난 '타락'의 본질 아니던가요 ?
저는 저의 지적인 게으름을, 선악과의 경고를 핑계로 위로를 받으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