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은 말씀에 대한 수용이자 응답이기 때문에 신학은 겸손하며 자유로운 학문이다. 첫째로 신학은 겸손하다. 왜냐하면 신학의 모든 논리는 말씀에 대한 인간적인 유비(Analogie)에 불과하며 신학의 모든 빛은 인간적인 반사요, 신학의 모든 소산은 인간적인 재생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신학하는 것은 그 어떤 창조의 행동이 아니라 그것의 창조자와 그것의 창조에 대해서 가능한 성실하게 응답하는 찬송이다. 둘째로 신학은 자유하다. 왜냐하면 신학은 말씀에 의하여 그와 같은 유비, 반성적 숙고 및 재생산, 짧게 말하면 그것의 창조주를 찬송하고, 자유롭게 되고, 그와 같은 찬송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고 그렇게 하며 그렇게 하도록 작동되는 것이기 때문이다.(37)
바르트의 글을 알아듣기 힘들다는 사실을 위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소. 그의 글이 난해하거나 난삽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영적 경지를 요구하기 때문이오. 바르트는 신학의 성격을 겸손과 자유로 규정했소. 그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소? 신학은 인간의 이성적 논리를 필요로 하지만 그것 자체가 주체적인 능력을 소유한 게 아니오. 동양의 가르침이 말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와 비슷하오. 이걸 전제한다면 신학은 겸손할 수밖에 없소. 동시에 그 겸손은 오히려 자유를 가능하게 하오. 그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오. 성령의 사람이 자유하다는 말과 비슷하오. 이런 말을 아무나 하면 우스갯소리가 되오. ‘말씀’의 세계를 아는 사람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소. 그대도 그 세계로 들어가기를 바라오. (2011년 1월21일, 금)
조 위에 도도 님이 신학은 일상에 빠져사는 사람들에게
거리가 멀다고, 힘에 벅차다고 말씀하신 거지요?
그 말은 철학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연봉 협상에 들어간 사람에게
데리다, 지젝, 하버마스, 노장의 주장은 거리가 멀게 느껴지겠지요.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철학의 언어와 논리는 일상과 직결되듯이
신학의 언어와 논리도 똑같습니다.
위 바르트의 이야기도 도도 님이 평소에 고민하는 문제를 그대로 표현한 거에요.
보통 그렇게 말하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계시)를 얼마나 알 수 있는가, 하고 말이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예상을 근본적으로 넘어서지만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게 아니에요.
우리로 생각하게 만들지요.
다만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바르트가 강조하고 있답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어요.
신학은 기도다.
눈사람 님에게
바르트 신학 이야기가 들리시나요?
제가 언뜻 느끼는 것은, 신학,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하실 때, 어려운 개념과 단어가 앞서고, 설명 과정은 생략되거나 비약되고, 그런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언어와 논리의 특성이 있고, 신학과 철학이 쓰는 개념과 틀이 있는데, 신학은, 어쩔 수 없겠지만, 추상적 수준으로 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시장의 생생한 현장과 말 속에도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어려운 표현과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시장 사람들에겐 낯설겠지요.
성경이 전하는 예수님 말씀이 어느 정도로 정확하게 반영됐는가의 문제가 있겠지만, 예수님처럼 속된 사람들도 알아듣도록 전해주시는 게 더 다가온다는 것입니다(물론 때로는 예수님도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로 말씀하시기도 했지만, 그러면 나중에 풀어서 일러주셨죠).
신학이 싫다거나 필요없다는 게 아니라, 대중적이고 다가가기 쉬웠으면 좋겠습니다. 적절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이해하기 쉬운 신학', 이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일반인들이 철학이 중요하다는 건 동의하지만, 철학하면 딱딱하고 이해하기 어려워한다는 게 얼마 전 여론 조사에서 확인됐습니다. 신학도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sg-
교부신학을 공부한 로마 가톨릭 신학자도 정용섭 목사님과 비슷한 말씀을 하셨죠. 성령은 자유로운 분이신데 교회는 그분을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면서 교회에 가두어두려고 한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