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6,606
유필(遺筆)
김사인
남겨진 글씨들이 고아처럼 쓸쓸하다
못 박인 중지마디로 또박또박 이름을 적어놓고
어느 우주로 스스로를 흩었단 말인가
겨울밤
우물 깊이 떨어지는 두레박소리
* 감상- 유필은 유서다. 글을 쓴 이는 이미 우주로 흩어져 없으니, 유필이 고아란다. 죽은 시체는 지구에 머물지 우주로 흩어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지구 안에 머문다고 하더라도 지구 자체가 우주의 일부이고, 지구도 결국 언젠가 죽어 없어질 테니 모든 죽음은 우주로 흩어지는 거와 다를 게 없다. 그런데 그게 바로 우물 깊이 떨어지는 두레박소리와 같단다. 그것도 겨울밤에 듣는 거란다. 나도 어릴 때 우물 깊이 떨어지는 두레박소리를 듣기는 했다. 직접 두레박을 우물 깊이 던져보기도 했다. 깊은 우물 속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다. 두레박을 던지고 한참 시간이 지나 철썩 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 소리의 낯섦이 바로 유필과 같다는 말인가? 우물 깊이 떨어지는 게 죽음이라는 말인가? 노무현의 유서가 되살아나는 것 같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이라서.. 시 하나 옮겨봅니다.
오늘 이 곳에는 눈이 아주 많이 왔어요.
네거리에서/ 김사인
그럴까
그래 그럴지도 몰라
손 뻗쳐도 뻗쳐도
와닿는 것은 허전한 바람, 한 줌 바람
그래도 팔 벌리고 애끓어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살 닳는 안타까움인지도 몰라
몰라 아무것도 아닌지도
돌아가 어둠 속
혼자 더듬어 마시는 찬물 한 모금인지도 몰라
깨지 못하는, 그러나 깰 수밖에 없는 한 자리 허망한 꿈인지도 몰라
무심히 떨어지는 갈잎 하나인지도 몰라
그러나 또 무엇일까
고개 돌려도 솟구쳐오르는 울음 같은 이것
끝내 몸부림으로 나를 달려가게 하는 이것
약속도 무엇도 아닌 허망한 기약에 기대어
칼바람 속에 나를 서게 하는 이것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