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필(遺筆)

                                   김사인 

 

 

남겨진 글씨들이 고아처럼 쓸쓸하다

 

못 박인 중지마디로 또박또박 이름을 적어놓고

 

어느 우주로 스스로를 흩었단 말인가

 

겨울밤

 

우물 깊이 떨어지는 두레박소리

 

 

* 감상- 유필은 유서다. 글을 쓴 이는 이미 우주로 흩어져 없으니, 유필이 고아란다. 죽은 시체는 지구에 머물지 우주로 흩어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지구 안에 머문다고 하더라도 지구 자체가 우주의 일부이고, 지구도 결국 언젠가 죽어 없어질 테니 모든 죽음은 우주로 흩어지는 거와 다를 게 없다. 그런데 그게 바로 우물 깊이 떨어지는 두레박소리와 같단다. 그것도 겨울밤에 듣는 거란다. 나도 어릴 때 우물 깊이 떨어지는 두레박소리를 듣기는 했다. 직접 두레박을 우물 깊이 던져보기도 했다. 깊은 우물 속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다. 두레박을 던지고 한참 시간이 지나 철썩 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 소리의 낯섦이 바로 유필과 같다는 말인가? 우물 깊이 떨어지는 게 죽음이라는 말인가? 노무현의 유서가 되살아나는 것 같다.


profile

모래알

2014.02.04 08:49:14

제가 좋아하는 시인이라서.. 시 하나 옮겨봅니다.

오늘 이 곳에는 눈이 아주 많이 왔어요.


20140203-IMG_3018.jpg


네거리에서/ 김사인

 

그럴까

그래 그럴지도 몰라

손 뻗쳐도 뻗쳐도

와닿는 것은 허전한 바람, 한 줌 바람

그래도 팔 벌리고 애끓어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살 닳는 안타까움인지도 몰라

 

몰라 아무것도 아닌지도

돌아가 어둠 속

혼자 더듬어 마시는 찬물 한 모금인지도 몰라

깨지 못하는, 그러나 깰 수밖에 없는 한 자리 허망한 꿈인지도 몰라

무심히 떨어지는 갈잎 하나인지도 몰라

 

그러나 또 무엇일까

고개 돌려도 솟구쳐오르는 울음 같은 이것

끝내 몸부림으로 나를 달려가게 하는 이것

약속도 무엇도 아닌 허망한 기약에 기대어

칼바람 속에 나를 서게 하는 이것

무엇일까

Attachment
profile

정용섭

2014.02.04 11:13:57

김사인 시인의 시를 좋아하시는군요.

나는 이번에 그분의 시집을 처음으로 읽었는데,

삶에 대한 같은 시선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분은 기독교인일까요?

명시적인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칼 라너가 말하듯이 '익명의 기독교인'은 분명해보입니다.

올려주신 시, 잘 읽었습니다.

'칼바람 속에 나를 서게 하는 이것'

profile

새하늘

2014.05.13 22:25:31

밤하늘의 별을 보다가 갑자기 제 자신이 작아지고 초라해 보일때가 있습니다.

그냥 그때는 한 없이 별만 바라보다 잠이 들고 싶어 집니다.

List of Articles
No. Subject Date Views
3286 김사인 시(5)- 탈상 [5] Feb 05, 2014 3701
3285 김사인 시(4)- 아무도 모른다 [5] Feb 04, 2014 4391
» 김사인 시(3)- 유필(遺筆) [3] Feb 03, 2014 3172
3283 김사인 시(2) -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3] Feb 02, 2014 2964
3282 김사인 시(1), 풍경의 깊이 [5] Feb 01, 2014 3653
3281 예배의 기술(10) [1] Jan 31, 2014 2193
3280 예배의 기술(9) [1] Jan 30, 2014 2054
3279 예배의 기술(8) [1] Jan 29, 2014 2220
3278 예배의 기술(7) [1] Jan 28, 2014 2372
3277 예배의 기술(6) [1] Jan 27, 2014 2069
3276 예배의 기술(5) [1] Jan 25, 2014 5124
3275 예배의 기술(4) [3] Jan 24, 2014 2706
3274 예배의 기술(3) [6] Jan 23, 2014 2911
3273 예배의 기술(2) [1] Jan 22, 2014 3166
3272 예배의 기술(1) [1] Jan 21, 2014 2790
3271 즐거운 예배 [7] Jan 20, 2014 3178
3270 행복한 신앙생활 [4] Jan 19, 2014 4292
3269 예수 부활의 증언자들 Jan 18, 2014 3412
3268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 경험 Jan 17, 2014 3129
3267 달이 밝다 Jan 16, 2014 2971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