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실행 중인지는 몰라도
티베트 불교 승려들에게는
조장(鳥葬)이 일반적이었다.
죽은 승래의 몸을 칼로 토막내어
새(주로 독수리)의 먹이로 주는 것이다.
그런 조장과는 다른 뜻으로
나는 오늘 새를 땅에 묻었다.
어제 이른 아침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창문에 큰 물건이 부딪치는 소리가 쾅 하고 났다.
직감적으로 새가 부딪치는 거는 알았지만
잠시 비틀거리다가 다시 날아갈 거로 생각하고
글쓰던 작업을 계속했다.
얼마 후에 창문 밖을 내다보니
새가 죽어 있었다.
오늘 이층 발코니를 통해서 지붕으로 올라가서
죽은 새를 들고 내려왔다.
현장 사진이다.
새들에게도 날아다니는 길이 있다고 하는데,
저 새는 우리집에 지어진지 모르고 왔다가 참변을 당했단 말인가?
새들이 아차 하면 창문을 허공으로 알만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창문을 사진으로 찍으니
거울 효과를 내서 하늘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숲에서는 삶과 죽음의 허망함을 일상으로 경험한다.
어떤 때는 고라니가 죽어 누워 있는 것도 본다.
동물들은 어느 누구나 할 거 없이
늘 생존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운이 나빠 저렇게 죽어버린 새는
우리집 지붕 너머 숲으로 들어가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나는 죽은 새를 들고 내려와 신문에 싸서
내가 매일 밥 먹을 때마다 쳐다보는 숲의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한 생명은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죽어 묻었으나
옆으로 눈을 돌리니 풀과 나무와 꽃은 여전히 화려했다.
그중에 눈에 뜨이는 꽃을 사진으로 담았는데,
이름은 물론 모른다.
무명초가 아니겠는가.
지구에서의 생명 메카니즘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존재하는 것들은 무엇이고,
무는 도대체 무엇인가?
지금은 존재하지만
조금 후에 없어질 모든 것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름 모를 새야,
잘 가그라.
자라공 입니다. 아주 번식력이 강한 외래종인데 뽑아서 태워버리십시오.
안 그러면 주변을 순식간에 저놈들이 점령해 버립니다.
창문에 독수리 그림 하나 붙여 놓으면 새들이 안 오지요.
목사님은 새를 묻으셨군요. 저는 어머님을 묻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