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6일
혁명의 거룩한 에너지
지난 12월20일 설교 마지막 대목에서 나는 대림절 신앙이 혁명의 거룩한 에너지라고 말했다. 마르크스가 기독교를 비판한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은 기독교를 오해해도 크게 오해한 것이다. 중세기에 기독교가 역사 변혁에서 무기력한 조짐을 보인 건 분명하다.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속사정도 있다. 기독교 4세기에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로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영합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로 분리된 기독교는 자기들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도 힘이 부족해서 세상 변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에는 근본적으로 혁명적인 기운이 넘친다.
여기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세 가지만 들자. 첫째는 선지자들의 전통이다. 선지자들은 현실안주(status quo)에 치우치는 제사장들과는 반대의 입장에 섰던 고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행위를 통해서 국가와 국민들의 안녕을 추구했다면,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신탁을 통해서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추구했다. 제사장들은 종교 귀족이었다면 선지자들은 야인들이었다. 선지자들의 전통을 교회도 이어받았다. 마리아 찬송이 대표적이다.
둘째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다. 이에 대해서는 설교에서도 언급했기 때문에 긴 말 하지 않겠다. 기독교는 사도신경을 통해서 예수가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 선고를 받아 죽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확인했다. 이런 신앙고백은 로마 당국자들이 볼 때 불편한 것이었지만 기독교는 여기서 타협하지 않았다.
셋째는 재림신앙이다. 이게 핵심이다. 재림신앙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권력과 이데올로기는 상대화된다. 모든 것들이 예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재림 예수에 의해서 이 세상은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 이런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현실을 부단히 극복해나간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예수 재림 때까지 이 현실을 부정하고 다시 일으켜 세운다. 이를 혁명의 거룩한 에너지라고 부른다 해서 무슨 잘못이 있으랴.
제가 정목사님 설교와 글들에만 익숙하다가 그런 걸 봐서 그런가 아직도 속이 메슥거리고 참 어떻게 이런 수준인지 참담합니다 ...
설교 내용도 내용인데 어느 당대표가 앉아있는 모습을 여러번 비추면서 칭찬하는 모습도 가관이더군요 ... 그렇다고 기독교가 진보 이데올로기와 합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총선을 앞두고 그렇게 해야하는 지, 그 모습만 보고서 판단하기 그렇지만 우리나라 수구기독교의 단면을 본 것 같아서 좀 그렇더군요 ...
기독교적 혁명의 거룩한 에너지는 제가 아는 한 이곳 다비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더불어 목사님 설교와 글들의 클래스를 뼈저리게 느끼겠습니다. 역시 클래스은 영원하군요.
아무튼, 어떤 방식으로든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힘입고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