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성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의 전부는 아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계시가 오직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밖에도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 개신교 성도들은 성경이 모두 27권의 신약과 39권의 구약이 합쳐져서 총 66권으로 되어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성서가 모두 27권의 신약과 46권의 구약이 합해져서 모두 73권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카톨릭의 라틴어 성경이 개신교 성경보다 일곱 권의 책들을 더 가지고 있다.
이 일곱 권의 책들을 개신교에서는 '외경'이라 하고 있지만 카톨릭에서는 이것을 결코 외경으로 보지 않고 다른 책들과 동등한 '정경'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일곱 권의 책들 속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분명히 들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일곱 권의 책을 여기서 열거해 보면 토비트(BC 200년, 종교 소설), 유딧(BC 150년, 로망스 소설), 에스델(BC 130년, 전설), 지혜서(BC 30년, 교훈), 집회서(BC 132년, 교훈), 바룩(AD 또는 주전 100년, 예언), 마카베오 상하(BC 110년, 역사)이다.
이것이 개신교 성경에서 제외된 이유는 종교개혁자들이 이 책들 속에 종교개혁 사상에 맞지 않는 것들이 들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개신교 성경에서 빼어 버렸던 까닭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전 초대교회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카톨릭에서는 73권의 성서를 그대로 믿고 그것을 정경으로 받아들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서는 오히려 이 외경을 아주 자유롭게 인용했으며 신약 기자들과 예수님까지도 이 외경에서 인용한 말씀이 많았다.
예를들어 마태복음 11:28-30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외경 집회서 51:23의 말과 같다.
그리고 누가복음 12:16-20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는 외경 집회서 11:18-19의 이야기를 상기시켜 준다.
이런 현상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히브리서 1:1-3의 말씀은 외경 지혜서 7:25-27에 "영원한 빛의 찬란한 광채이며 하나님의 활동력을 비쳐 주는 티없는 거울이라."고 말한 것을 직접 인용한 것이며 히브리서 11:35-37은 외경 마카베오 하권 6-7장에 묘사된 일곱 형제들의 참혹한 순교에 대한 언급이다.
이와 같이 외경은 기독교 초기부터 정경과 동등하게 존중되어 온 책이었으나 개혁자들에 의해서 외경으로 제외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것은 구약의 외경들이지만 신약의 외경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있다.
그것은 대체로 복음서가 18권이고 행전이 24권이 되며, 서신이 7권, 묵시록이 6권이다.
여기서 신약의 외경들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외경 복음서에는 유년 예수의 아라비아 복음서, 유년 예수의 아르메니아 복음서, 동정녀 마리아 승천기, 사도 바들로메 복음서, 사도 바들로메의 그리스도 부활서, 바실리데스 복음서, 에비온 복음서, 이집트인 복음서, 히브리인 복음서, 야고보 원 복음서, 목수 요셉 전기, 마르키온 복음서, 마리아 탄생 복음서, 맛디아(마태)의 복음서, 나사렛인 복음서, 베드로 복음서, 위 마태 복음서, 도마 복음서 등이 있다.
둘째, 외경 행전에는 압디아스의 사도행적사, 안드레 행전, 안드레 단편설화, 안드레와 마태의 행전, 안드레와 바울의 행전, 바나바 행전, 야고보의 승천기, 야고보 행전, 요한 행전, 브로고로의 요한 행전, 마태의 순교사, 바울 행전, 바울 수난서, 베드로 행전, 베드로 수난서, 베드로의 전도 설교집, 슬라브어 베드로 행전, 베드로와 안드레 행전, 베드로와 바울 행전, 베드로와 바울의 수난서, 빌립 행전, 빌라도 행전, 다대오 행전, 도마 행전이 있다.
셋째, 외경 서신에는 아브가루스와 그리스도의 서한집, 사도들의 서한, 고린도3서, 라오디게아서, 렌틀루스의 서한, 바울과 세네카의 서한집, 디도서(외경)가 있다.
넷째, 외경 묵시서를 보면 야고보의 묵시서, 바울의 묵시서, 베드로의 묵시서, 스데반의 계시록, 도마의 묵시서, 동정녀의 묵시서 등이 있다.
위에서 열거한 많은 외경들이 현재 신약성서 정경 속에 들지 못한 책들이다.
정경 속의 사도행전은 한 권뿐인데 성경 밖의 외경에 나타난 사도들의 행전은 24권이나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속에서 베드로와 야고보가 순교 활동을 하고 또 바울이 그렇게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동안에 다른 제자들은 그 때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질문 같은 것은 더 이상 하지 않게 해준다.
왜냐하면 외경을 보면 그때 다른 사도들도 얼마나 많이 그리고 또 더 크게 활동을 하고 있었는지 넉넉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많은 복음서와 행전, 서신들, 묵시 문서들이 왜 그때 정경에 포함되지 못 했던 것인가? 그 이유를 여기서 다 밝히기는 어렵지만 그 중에 하나 정도만 말해 본다면 이렇다.
외경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가 주로 예수 부활 사건 이전 역사적 예수에 대해 편중된 기록들이다.
그래서 이것은 당시 유대 기독교적 입장을 나타내며 또 열두 제자들의 역사적 입장을 나타낸다.
그러나 반면에 위의 외경들과는 달리 정경들의 공통적 특징은 주로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즉 신앙적 반성의 시대 이후의 기록들이며 사건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로 헬라 교회적 바울 신앙, 즉 모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생각하며 믿음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개의 차이는 역사적 예수인가 신앙적 예수인가, 즉 십자가와 수난의 신학인가 부활과 승리의 신학이인가에 대한 차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의 사건들을 주로 취급했던 외경들이 그동안 신앙적 사건들을 강조한 서구적 기독교의 경전 속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점이 바로 그 모든 이유들 중의 핵심이라 볼 수 있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6-07 19:20)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계시가 오직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밖에도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 개신교 성도들은 성경이 모두 27권의 신약과 39권의 구약이 합쳐져서 총 66권으로 되어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성서가 모두 27권의 신약과 46권의 구약이 합해져서 모두 73권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카톨릭의 라틴어 성경이 개신교 성경보다 일곱 권의 책들을 더 가지고 있다.
이 일곱 권의 책들을 개신교에서는 '외경'이라 하고 있지만 카톨릭에서는 이것을 결코 외경으로 보지 않고 다른 책들과 동등한 '정경'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일곱 권의 책들 속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분명히 들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일곱 권의 책을 여기서 열거해 보면 토비트(BC 200년, 종교 소설), 유딧(BC 150년, 로망스 소설), 에스델(BC 130년, 전설), 지혜서(BC 30년, 교훈), 집회서(BC 132년, 교훈), 바룩(AD 또는 주전 100년, 예언), 마카베오 상하(BC 110년, 역사)이다.
이것이 개신교 성경에서 제외된 이유는 종교개혁자들이 이 책들 속에 종교개혁 사상에 맞지 않는 것들이 들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개신교 성경에서 빼어 버렸던 까닭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전 초대교회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카톨릭에서는 73권의 성서를 그대로 믿고 그것을 정경으로 받아들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서는 오히려 이 외경을 아주 자유롭게 인용했으며 신약 기자들과 예수님까지도 이 외경에서 인용한 말씀이 많았다.
예를들어 마태복음 11:28-30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외경 집회서 51:23의 말과 같다.
그리고 누가복음 12:16-20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는 외경 집회서 11:18-19의 이야기를 상기시켜 준다.
이런 현상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히브리서 1:1-3의 말씀은 외경 지혜서 7:25-27에 "영원한 빛의 찬란한 광채이며 하나님의 활동력을 비쳐 주는 티없는 거울이라."고 말한 것을 직접 인용한 것이며 히브리서 11:35-37은 외경 마카베오 하권 6-7장에 묘사된 일곱 형제들의 참혹한 순교에 대한 언급이다.
이와 같이 외경은 기독교 초기부터 정경과 동등하게 존중되어 온 책이었으나 개혁자들에 의해서 외경으로 제외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것은 구약의 외경들이지만 신약의 외경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있다.
그것은 대체로 복음서가 18권이고 행전이 24권이 되며, 서신이 7권, 묵시록이 6권이다.
여기서 신약의 외경들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외경 복음서에는 유년 예수의 아라비아 복음서, 유년 예수의 아르메니아 복음서, 동정녀 마리아 승천기, 사도 바들로메 복음서, 사도 바들로메의 그리스도 부활서, 바실리데스 복음서, 에비온 복음서, 이집트인 복음서, 히브리인 복음서, 야고보 원 복음서, 목수 요셉 전기, 마르키온 복음서, 마리아 탄생 복음서, 맛디아(마태)의 복음서, 나사렛인 복음서, 베드로 복음서, 위 마태 복음서, 도마 복음서 등이 있다.
둘째, 외경 행전에는 압디아스의 사도행적사, 안드레 행전, 안드레 단편설화, 안드레와 마태의 행전, 안드레와 바울의 행전, 바나바 행전, 야고보의 승천기, 야고보 행전, 요한 행전, 브로고로의 요한 행전, 마태의 순교사, 바울 행전, 바울 수난서, 베드로 행전, 베드로 수난서, 베드로의 전도 설교집, 슬라브어 베드로 행전, 베드로와 안드레 행전, 베드로와 바울 행전, 베드로와 바울의 수난서, 빌립 행전, 빌라도 행전, 다대오 행전, 도마 행전이 있다.
셋째, 외경 서신에는 아브가루스와 그리스도의 서한집, 사도들의 서한, 고린도3서, 라오디게아서, 렌틀루스의 서한, 바울과 세네카의 서한집, 디도서(외경)가 있다.
넷째, 외경 묵시서를 보면 야고보의 묵시서, 바울의 묵시서, 베드로의 묵시서, 스데반의 계시록, 도마의 묵시서, 동정녀의 묵시서 등이 있다.
위에서 열거한 많은 외경들이 현재 신약성서 정경 속에 들지 못한 책들이다.
정경 속의 사도행전은 한 권뿐인데 성경 밖의 외경에 나타난 사도들의 행전은 24권이나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속에서 베드로와 야고보가 순교 활동을 하고 또 바울이 그렇게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동안에 다른 제자들은 그 때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질문 같은 것은 더 이상 하지 않게 해준다.
왜냐하면 외경을 보면 그때 다른 사도들도 얼마나 많이 그리고 또 더 크게 활동을 하고 있었는지 넉넉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많은 복음서와 행전, 서신들, 묵시 문서들이 왜 그때 정경에 포함되지 못 했던 것인가? 그 이유를 여기서 다 밝히기는 어렵지만 그 중에 하나 정도만 말해 본다면 이렇다.
외경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가 주로 예수 부활 사건 이전 역사적 예수에 대해 편중된 기록들이다.
그래서 이것은 당시 유대 기독교적 입장을 나타내며 또 열두 제자들의 역사적 입장을 나타낸다.
그러나 반면에 위의 외경들과는 달리 정경들의 공통적 특징은 주로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즉 신앙적 반성의 시대 이후의 기록들이며 사건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로 헬라 교회적 바울 신앙, 즉 모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생각하며 믿음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개의 차이는 역사적 예수인가 신앙적 예수인가, 즉 십자가와 수난의 신학인가 부활과 승리의 신학이인가에 대한 차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의 사건들을 주로 취급했던 외경들이 그동안 신앙적 사건들을 강조한 서구적 기독교의 경전 속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점이 바로 그 모든 이유들 중의 핵심이라 볼 수 있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6-07 19:20)
2007.06.05 20:00:48
저희의 경우는 외경을 준정경으로 봅니다. 교리적인 근거는 아니지만, 도덕적인 책으로 읽지요...미국성공회의 경우는 기도서에도 외경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비록 정경은 아니지만 성서이기 때문입니다.
2007.06.06 05:53:10
"이것이 개신교 성경에서 제외된 이유는 종교개혁자들이 이 책들 속에 종교개혁 사상에 맞지 않는 것들이 들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개신교 성경에서 빼어 버렸던 까닭이다. "
- 올리브 나무 님의 의견인지 아님 가톨릭 쪽의 의견을 그대로 인용하신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이 부분을 전부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너무 단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 외경이 정경의 목록에서 빠진 이유는
님께서 질문하신 사랑채 1591번 " 카톨릭에 대해서 질문입니다" 의 무명재님의 답변 대글을 참고해 주십시오.
명분 없이 어찌 정경의 목록에서 뺄 수 있었겠습니까? 이 이유대로라면 야고보서도 빠졌겠지요.
- 올리브 나무 님의 의견인지 아님 가톨릭 쪽의 의견을 그대로 인용하신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이 부분을 전부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너무 단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 외경이 정경의 목록에서 빠진 이유는
님께서 질문하신 사랑채 1591번 " 카톨릭에 대해서 질문입니다" 의 무명재님의 답변 대글을 참고해 주십시오.
명분 없이 어찌 정경의 목록에서 뺄 수 있었겠습니까? 이 이유대로라면 야고보서도 빠졌겠지요.
2007.06.07 02:42:06
올리브나무님께서 쓰신 본문 가운데,
"외경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가 주로 예수 부활 사건 이전 역사적 예수에 대해 편중된 기록들이다.
그래서 이것은 당시 유대 기독교적 입장을 나타내며 또 열두 제자들의 역사적 입장을 나타낸다.
그러나 반면에 위의 외경들과는 달리 정경들의 공통적 특징은 주로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즉 신앙적 반성의 시대 이후의 기록들이며 사건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로 헬라 교회적 바울 신앙, 즉 모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생각하며 믿음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개의 차이는 역사적 예수인가 신앙적 예수인가, 즉 십자가와 수난의 신학인가 부활과 승리의 신학이인가에 대한 차이인 것이다."
- 이 입장은, 정설이 아닙니다. 성서신학적 근거가 과연 있나 미심쩍습니다.
더군다나,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서로 갈라 보기 시작한,
근대 이후의 비평적 성서신학의 잣대를 소급 적용하여 재단한 인상이 대단히 짙습니다.
복음서의 형성 과정 가운데, 외경 복음서에 닿을 만한 전승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신약 외경들은, 초대 교회 당시 고대인들의 호기심, 궁금증의 발로에서 집필된, 전거가 의심스러운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복음서류, 행전류의 외경들 말입니다.
단지, 디다케, 헤르마스의 목자 등, 사도서간 류는 가치있는 것들이 있지요.
말씀하신 바와 같은 설은, 어떤 성서학자에게서도, 심지어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예수 세미나 측에서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약 외경, 위경들이, 신약 연구에 큰 가치와 의의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때문에, 신약 정경들을 연구하면서도, 신약 외경과 위경들을 자주 참조하고, 신약 외경, 위경들을 연구합니다.
신약 외경은, 70인역 속에 포함된, 애초 정경이었으나,
개신교와 후대 유대교가 제외한 구약 외경(또는 제2정경)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말씀하셨다시피, 개신교는 유대교의 구약 정경 확정 목록을 따르기에, 구약 정경이 37권이 되었지만,
천주교와 정교회는, 애초 그리스도교가 사용하던 성서인 70인역을 따르고,
그 중에서도, 동방과 서방, 동방의 여러 교회 간에 약간의 차이가 발생함은, 제가 일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정경들을 그대로 상속받았고,
(당시 유대교가 70인역을 사용했으므로 그대로 승계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자신들의 정경으로서 신약을 추가했을 따름인데,
사도 및 사도들의 직제자들에 의해 집필된 사도성이, 정경 채택의 기준이 됩니다.
그들이, 실제로(역사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 가르침을 직접 전수받고, 예수님을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횡행하던 영지주의 등 이단 사설에 물든 책들은 정경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외경, 위경 가운데에는 이러한 책들이 많지요.
그러나, 비록 그러할지라도, 이들 책 역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을 전하고 있기는 합니다.
다만, 영지주의 등 비정통의 입장에서 해석했을 따름이지요.
(* 정통 교리의 확립 과정이, 정치적이었고 세력 다툼의 측면이 컸다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있어 정당한 것, 부당한 것, 선한 것, 나쁜 것을
달걀 노른자 흰자 가르듯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도 바오로가 말한 바, 모든 것이 힘을 합하여 선(하느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봐야 되지 않을까요)
덧붙이자면, 루터는, 신약 정경 중에서 야고보서를 빼려 했으며,
동방의 일부 교회는 요한묵시록을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외경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가 주로 예수 부활 사건 이전 역사적 예수에 대해 편중된 기록들이다.
그래서 이것은 당시 유대 기독교적 입장을 나타내며 또 열두 제자들의 역사적 입장을 나타낸다.
그러나 반면에 위의 외경들과는 달리 정경들의 공통적 특징은 주로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즉 신앙적 반성의 시대 이후의 기록들이며 사건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로 헬라 교회적 바울 신앙, 즉 모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생각하며 믿음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개의 차이는 역사적 예수인가 신앙적 예수인가, 즉 십자가와 수난의 신학인가 부활과 승리의 신학이인가에 대한 차이인 것이다."
- 이 입장은, 정설이 아닙니다. 성서신학적 근거가 과연 있나 미심쩍습니다.
더군다나,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서로 갈라 보기 시작한,
근대 이후의 비평적 성서신학의 잣대를 소급 적용하여 재단한 인상이 대단히 짙습니다.
복음서의 형성 과정 가운데, 외경 복음서에 닿을 만한 전승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신약 외경들은, 초대 교회 당시 고대인들의 호기심, 궁금증의 발로에서 집필된, 전거가 의심스러운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복음서류, 행전류의 외경들 말입니다.
단지, 디다케, 헤르마스의 목자 등, 사도서간 류는 가치있는 것들이 있지요.
말씀하신 바와 같은 설은, 어떤 성서학자에게서도, 심지어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예수 세미나 측에서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약 외경, 위경들이, 신약 연구에 큰 가치와 의의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때문에, 신약 정경들을 연구하면서도, 신약 외경과 위경들을 자주 참조하고, 신약 외경, 위경들을 연구합니다.
신약 외경은, 70인역 속에 포함된, 애초 정경이었으나,
개신교와 후대 유대교가 제외한 구약 외경(또는 제2정경)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말씀하셨다시피, 개신교는 유대교의 구약 정경 확정 목록을 따르기에, 구약 정경이 37권이 되었지만,
천주교와 정교회는, 애초 그리스도교가 사용하던 성서인 70인역을 따르고,
그 중에서도, 동방과 서방, 동방의 여러 교회 간에 약간의 차이가 발생함은, 제가 일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정경들을 그대로 상속받았고,
(당시 유대교가 70인역을 사용했으므로 그대로 승계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자신들의 정경으로서 신약을 추가했을 따름인데,
사도 및 사도들의 직제자들에 의해 집필된 사도성이, 정경 채택의 기준이 됩니다.
그들이, 실제로(역사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 가르침을 직접 전수받고, 예수님을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횡행하던 영지주의 등 이단 사설에 물든 책들은 정경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외경, 위경 가운데에는 이러한 책들이 많지요.
그러나, 비록 그러할지라도, 이들 책 역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을 전하고 있기는 합니다.
다만, 영지주의 등 비정통의 입장에서 해석했을 따름이지요.
(* 정통 교리의 확립 과정이, 정치적이었고 세력 다툼의 측면이 컸다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있어 정당한 것, 부당한 것, 선한 것, 나쁜 것을
달걀 노른자 흰자 가르듯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도 바오로가 말한 바, 모든 것이 힘을 합하여 선(하느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봐야 되지 않을까요)
덧붙이자면, 루터는, 신약 정경 중에서 야고보서를 빼려 했으며,
동방의 일부 교회는 요한묵시록을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2007.06.07 12:17:09
윗 본문은 저의 전적인 견해는 아니지만, 완전히 그렇다고도 아니다고도 볼 수 없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저는 정경화과정을 어떻게 이해하느냐하면 우리나라의 민주화과정과 비교해 봅니다.
자유당으로 시작한 공화당, 민정당, 민자당... 이 들이 정권을 유지해가면서 가장 큰 기조가 무엇입니까?
반공과 멸공을 기치로 집권해나가면서 정적들을 해소해 나가는 방법이 국가보안법과 같은 틀이었습니다.
분명 국가의 존재를 위협하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겠지요.
그러나, 그 와중에 반독재, 민주투사, 평화운동가, 통일운동가는 반정부였는지는 몰라도 분명 반민족, 반국가는 아니었슴에도 반공이라는 틀 안에서 희생되었습니다.(고 장준하 선생님처럼, 인혁당 사건처럼, 어디 한 두명이라야지요...)
바로 정권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저는 물론 사도성과 또한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정경화과정을 거친 것 인정합니다.
그러나.
(* 정통 교리의 확립 과정이, 정치적이었고 세력 다툼의 측면이 컸다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있어 정당한 것, 부당한 것, 선한 것, 나쁜 것을
달걀 노른자 흰자 가르듯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도 바오로가 말한 바, 모든 것이 힘을 합하여 선(하느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봐야 되지 않을까요)
⇒
이 과정에서 꼭 나쁜 것(영지주의 등)만 제거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교권확보와 유지에 방해되는 것들도 함께 배제되었다고 보고, 배제된 내용에도 하나님의 계시는 포함되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저는 정경화과정을 어떻게 이해하느냐하면 우리나라의 민주화과정과 비교해 봅니다.
자유당으로 시작한 공화당, 민정당, 민자당... 이 들이 정권을 유지해가면서 가장 큰 기조가 무엇입니까?
반공과 멸공을 기치로 집권해나가면서 정적들을 해소해 나가는 방법이 국가보안법과 같은 틀이었습니다.
분명 국가의 존재를 위협하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겠지요.
그러나, 그 와중에 반독재, 민주투사, 평화운동가, 통일운동가는 반정부였는지는 몰라도 분명 반민족, 반국가는 아니었슴에도 반공이라는 틀 안에서 희생되었습니다.(고 장준하 선생님처럼, 인혁당 사건처럼, 어디 한 두명이라야지요...)
바로 정권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저는 물론 사도성과 또한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정경화과정을 거친 것 인정합니다.
그러나.
(* 정통 교리의 확립 과정이, 정치적이었고 세력 다툼의 측면이 컸다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있어 정당한 것, 부당한 것, 선한 것, 나쁜 것을
달걀 노른자 흰자 가르듯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도 바오로가 말한 바, 모든 것이 힘을 합하여 선(하느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봐야 되지 않을까요)
⇒
이 과정에서 꼭 나쁜 것(영지주의 등)만 제거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교권확보와 유지에 방해되는 것들도 함께 배제되었다고 보고, 배제된 내용에도 하나님의 계시는 포함되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2007.06.07 15:47:22
복음서 역시,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복음서 자체가 다 싣고 있지는 않다고 솔직히 고백합니다.
하늘땅을 다 채우고도 모자랄 거라 하죠.
반면, 정경으로서의 복음서에 실린 예수의 말씀과 행적 가운데 상당수가,
역사적 예수의 실제 말씀과 행적이 아니라, 초대 교회 공동체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잃어버린 예수의 말씀('로기온')을 추적, 수집, 복원하는 시도는 신약성서 연구에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러나, 정경으로서의 신약성서 안에 있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만으로도, 신앙의 충분한 계시가 아닐까요?
이것으로는 부족하거나, 오류가 있어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는,
정경화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바로 우리 앞의 이 책입니다.
설령, 로기온을 비롯한, 역사적 예수의 전모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치더라도,
그 모든 것이, 계시, 즉, Canon의 의의를 지닐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정경 확정 과정 속에 인간의 암투와 권모술수가 뒤섞여 있었을지라도,
그러한 불순하고 악한 요소들만 따로 분리해 걷어낼 수 없다니까요?
미우나 고우나, 우리 그리스도교가 걸어온 길이고,
역사란 그런 것이고,
그러한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 아닐까요?
이 성서가, 정경 확정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었다는 것 때문에,
(저는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이고, 성서의 영감론이 여기까지 확장된다고 믿습니다)
비록 역사적 예수의 실제 말씀과 행적은 아니고, 초대 교회의 고백적 기록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말씀과 언행이라고 저는 받아들입니다.
반면, 로기온과 역사적 예수의 실제 행적을 과연 밝힐 수 있어서,
그 확실한 역사성을 지닌 언행록을 정경, 즉 준거로 받아들야 하겠느냐는 저는 거부합니다.
예수가 우리의 스승이고, 우리는 그분을 믿기만 하기보다는, 실천적으로 따라야겠지요.
그러나, 예수에 대한 실천적 추종과,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실증주의적 집착은 다르다고 봅니다.
하늘땅을 다 채우고도 모자랄 거라 하죠.
반면, 정경으로서의 복음서에 실린 예수의 말씀과 행적 가운데 상당수가,
역사적 예수의 실제 말씀과 행적이 아니라, 초대 교회 공동체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잃어버린 예수의 말씀('로기온')을 추적, 수집, 복원하는 시도는 신약성서 연구에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러나, 정경으로서의 신약성서 안에 있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만으로도, 신앙의 충분한 계시가 아닐까요?
이것으로는 부족하거나, 오류가 있어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는,
정경화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바로 우리 앞의 이 책입니다.
설령, 로기온을 비롯한, 역사적 예수의 전모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치더라도,
그 모든 것이, 계시, 즉, Canon의 의의를 지닐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정경 확정 과정 속에 인간의 암투와 권모술수가 뒤섞여 있었을지라도,
그러한 불순하고 악한 요소들만 따로 분리해 걷어낼 수 없다니까요?
미우나 고우나, 우리 그리스도교가 걸어온 길이고,
역사란 그런 것이고,
그러한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 아닐까요?
이 성서가, 정경 확정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었다는 것 때문에,
(저는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이고, 성서의 영감론이 여기까지 확장된다고 믿습니다)
비록 역사적 예수의 실제 말씀과 행적은 아니고, 초대 교회의 고백적 기록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말씀과 언행이라고 저는 받아들입니다.
반면, 로기온과 역사적 예수의 실제 행적을 과연 밝힐 수 있어서,
그 확실한 역사성을 지닌 언행록을 정경, 즉 준거로 받아들야 하겠느냐는 저는 거부합니다.
예수가 우리의 스승이고, 우리는 그분을 믿기만 하기보다는, 실천적으로 따라야겠지요.
그러나, 예수에 대한 실천적 추종과,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실증주의적 집착은 다르다고 봅니다.
2007.06.07 17:13:23
주류기독교에 대해서만 그리스도교를 인정한다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비주류기독교...
안디옥교회를 시발점으로 한 서방기독교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기독교인 에뎃사(시리아)교회. 아프리카의 기독교인 콥트교회.
예루살렘 교회를 모태로 한 세 대륙의 교회(안디옥교회, 에뎃사-시리아-교회, 콥트교회)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인정하는냐 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무명재님의 말씀에 따르면(전통 기독교의 입장) 서방교회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이단논쟁으로 소멸된 교회이기에 그 사도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고, 또 정경화과정에서 제외된 외경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주류기독교의 주장만 되풀이한다면 저역시 그렇지 않다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학문적인 입장을 떠나서 외경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할 수 있으며, 서방교회를 제외한 비주류의 기독교도 분명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믿으니까요.
특히 헬라어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아르마닉어(아람어-엘리엘리라마사박타니로 신약성서에 표현된 당시의 시대어)로 번역된 성경을 포함한 시리아교회의 성서(페쉬타로 불림)는 헬라사상이 들어있지 않으므로 오히려 히브리적인 사상이 더 잘 드러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헬라어성경에서 '구원'으로 표현되는 단어는 시리아성경에서는 '생명'으로 번역되어 있으며,'구주'라는 말도 '생명을 주는 이'로 번역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말도 '산다'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이런 것들을 보면 그 때 시리아인들의 사고 개념이 헬라인들의 사고 개념과 얼마나 크게 달랐는지 한 눈으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페쉬타 원본의 독자성은 바로 이런 점에서 그 확실성을 더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서 역시,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복음서 자체가 다 싣고 있지는 않다고 솔직히 고백합니다. 하늘땅을 다 채우고도 모자랄 거라 하죠. 반면, 정경으로서의 복음서에 실린 예수의 말씀과 행적 가운데 상당수가, 역사적 예수의 실제 말씀과 행적이 아니라, 초대 교회 공동체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고백한 인간의 언어로 씌여졌단 사실이 바로 오류를 포함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바로 나의 신앙의 체험을 아무리 잘 고백해도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잃어버린 예수의 말씀('로기온')을 추적, 수집, 복원하는 시도는 신약성서 연구에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러나, 정경으로서의 신약성서 안에 있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만으로도, 신앙의 충분한 계시가 아닐까요?
이것으로는 부족하거나, 오류가 있어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예"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서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도, 타 종교를 통해서도, 온 우주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고 믿으니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는,
정경화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바로 우리 앞의 이 책입니다. "
⇒바로 정경화과정을 어떠한 시각으로 보느냐가 그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적인 하나님의 개입으로 취사선택된 것으로 보느냐, 아님 성서기록에도 오류가 있듯이 정경화과정에도 충분히 오류가 포함되었다고 보느냐가 그 차이라는 것입니다.
"설령, 로기온을 비롯한, 역사적 예수의 전모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치더라도,
그 모든 것이, 계시, 즉, Canon의 의의를 지닐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정경 확정 과정 속에 인간의 암투와 권모술수가 뒤섞여 있었을지라도,
그러한 불순하고 악한 요소들만 따로 분리해 걷어낼 수 없다니까요? "
⇒바로 그렇습니다. 정경화과정에 오류가 포함되었지만 그 안에서도 계시를 읽어낼 수 있듯이 외경으로 분리되었지만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신앙의 고백과 계시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 그리스도교가 걸어온 길이고, 역사란 그런 것이고, 그러한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 아닐까요? 이 성서가, 정경 확정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었다는 것 때문에,
(저는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이고, 성서의 영감론이 여기까지 확장된다고 믿습니다) 비록 역사적 예수의 실제 말씀과 행적은 아니고, 초대 교회의 고백적 기록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말씀과 언행이라고 저는 받아들입니다. "
⇒정경화과정에서 배제되었고, 삼위일체논쟁과 여러 이단 논쟁으로 인해 배제되었지만, 엄연히 역사적으로 생존하여있고, 비록 비주류임에도 그 안에는 초대교회의 신앙적고백이 그대로 살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로기온과 역사적 예수의 실제 행적을 과연 밝힐 수 있어서,
그 확실한 역사성을 지닌 언행록을 정경, 즉 준거로 받아들야 하겠느냐는 저는 거부합니다. "
⇒주류기독교의 입장이 그러하든 님의 입장이 그러하든 그것 자체는 그들의 입장이지 꼭 맞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분명 인정치 않는 분도 계시니까요.
"예수가 우리의 스승이고, 우리는 그분을 믿기만 하기보다는, 실천적으로 따라야겠지요.
그러나, 예수에 대한 실천적 추종과,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실증주의적 집착은 다르다고 봅니다."
⇒ 도대체 누가 실증주의적 집착을 한다고 하십니까?
적어도 제 생각에는 제가 역사적예수에 집착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잘 실천하기 위해서 애매모호한 강단의 설교가 아니라 이 시대 이 상황에 해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더 잘 알고, 똑바로 실천할 길을 알기위해서 노력할 뿐이지, 내가 무슨 수로 예수님의 실제모습을 따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글에서 말했듯이 저는 지극히 부족한 인간이라 예수님처럼 산다는 건 꿈에서도 힘들겁니다.
다만 예수님의 언행을 통해 나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을 알고 조금이라도 그렇게 살고 싶을 뿐입니다.
비주류기독교...
안디옥교회를 시발점으로 한 서방기독교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기독교인 에뎃사(시리아)교회. 아프리카의 기독교인 콥트교회.
예루살렘 교회를 모태로 한 세 대륙의 교회(안디옥교회, 에뎃사-시리아-교회, 콥트교회)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인정하는냐 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무명재님의 말씀에 따르면(전통 기독교의 입장) 서방교회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이단논쟁으로 소멸된 교회이기에 그 사도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고, 또 정경화과정에서 제외된 외경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주류기독교의 주장만 되풀이한다면 저역시 그렇지 않다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학문적인 입장을 떠나서 외경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할 수 있으며, 서방교회를 제외한 비주류의 기독교도 분명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믿으니까요.
특히 헬라어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아르마닉어(아람어-엘리엘리라마사박타니로 신약성서에 표현된 당시의 시대어)로 번역된 성경을 포함한 시리아교회의 성서(페쉬타로 불림)는 헬라사상이 들어있지 않으므로 오히려 히브리적인 사상이 더 잘 드러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헬라어성경에서 '구원'으로 표현되는 단어는 시리아성경에서는 '생명'으로 번역되어 있으며,'구주'라는 말도 '생명을 주는 이'로 번역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말도 '산다'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이런 것들을 보면 그 때 시리아인들의 사고 개념이 헬라인들의 사고 개념과 얼마나 크게 달랐는지 한 눈으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페쉬타 원본의 독자성은 바로 이런 점에서 그 확실성을 더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서 역시,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복음서 자체가 다 싣고 있지는 않다고 솔직히 고백합니다. 하늘땅을 다 채우고도 모자랄 거라 하죠. 반면, 정경으로서의 복음서에 실린 예수의 말씀과 행적 가운데 상당수가, 역사적 예수의 실제 말씀과 행적이 아니라, 초대 교회 공동체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고백한 인간의 언어로 씌여졌단 사실이 바로 오류를 포함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바로 나의 신앙의 체험을 아무리 잘 고백해도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잃어버린 예수의 말씀('로기온')을 추적, 수집, 복원하는 시도는 신약성서 연구에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러나, 정경으로서의 신약성서 안에 있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만으로도, 신앙의 충분한 계시가 아닐까요?
이것으로는 부족하거나, 오류가 있어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예"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서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도, 타 종교를 통해서도, 온 우주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고 믿으니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는,
정경화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바로 우리 앞의 이 책입니다. "
⇒바로 정경화과정을 어떠한 시각으로 보느냐가 그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적인 하나님의 개입으로 취사선택된 것으로 보느냐, 아님 성서기록에도 오류가 있듯이 정경화과정에도 충분히 오류가 포함되었다고 보느냐가 그 차이라는 것입니다.
"설령, 로기온을 비롯한, 역사적 예수의 전모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치더라도,
그 모든 것이, 계시, 즉, Canon의 의의를 지닐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정경 확정 과정 속에 인간의 암투와 권모술수가 뒤섞여 있었을지라도,
그러한 불순하고 악한 요소들만 따로 분리해 걷어낼 수 없다니까요? "
⇒바로 그렇습니다. 정경화과정에 오류가 포함되었지만 그 안에서도 계시를 읽어낼 수 있듯이 외경으로 분리되었지만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신앙의 고백과 계시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 그리스도교가 걸어온 길이고, 역사란 그런 것이고, 그러한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 아닐까요? 이 성서가, 정경 확정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었다는 것 때문에,
(저는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이고, 성서의 영감론이 여기까지 확장된다고 믿습니다) 비록 역사적 예수의 실제 말씀과 행적은 아니고, 초대 교회의 고백적 기록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말씀과 언행이라고 저는 받아들입니다. "
⇒정경화과정에서 배제되었고, 삼위일체논쟁과 여러 이단 논쟁으로 인해 배제되었지만, 엄연히 역사적으로 생존하여있고, 비록 비주류임에도 그 안에는 초대교회의 신앙적고백이 그대로 살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로기온과 역사적 예수의 실제 행적을 과연 밝힐 수 있어서,
그 확실한 역사성을 지닌 언행록을 정경, 즉 준거로 받아들야 하겠느냐는 저는 거부합니다. "
⇒주류기독교의 입장이 그러하든 님의 입장이 그러하든 그것 자체는 그들의 입장이지 꼭 맞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분명 인정치 않는 분도 계시니까요.
"예수가 우리의 스승이고, 우리는 그분을 믿기만 하기보다는, 실천적으로 따라야겠지요.
그러나, 예수에 대한 실천적 추종과,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실증주의적 집착은 다르다고 봅니다."
⇒ 도대체 누가 실증주의적 집착을 한다고 하십니까?
적어도 제 생각에는 제가 역사적예수에 집착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잘 실천하기 위해서 애매모호한 강단의 설교가 아니라 이 시대 이 상황에 해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더 잘 알고, 똑바로 실천할 길을 알기위해서 노력할 뿐이지, 내가 무슨 수로 예수님의 실제모습을 따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글에서 말했듯이 저는 지극히 부족한 인간이라 예수님처럼 산다는 건 꿈에서도 힘들겁니다.
다만 예수님의 언행을 통해 나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을 알고 조금이라도 그렇게 살고 싶을 뿐입니다.
2007.06.07 18:07:22
페쉬타가 원본이라 한 것이 아니라 '페쉬타원본'이라함은 성서의 원본을 말하는게 아니라 시리아어로 씌어진 원본이란 뜻임.
복음서가 헬라어로 씌어졌다는 것은 저도 위에서 언급했구요.
(페쉬타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한 번 언급할게요.)
페쉬타(Peshitta)는 헬라어본(구약)을 재번역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성경을 아람어로 번역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약은 헬라어를 번역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용한 조화복음서는 4대복음을 조화시킨 것으로 헬라성경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고, 다른 성경들로 헬라어성경을 시리아어로 번역된 것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티탄이 조화복음을 만들기 전에는 무슨 복음서를 보았겠는가 하는 연구에서 이미 그들은 시리아어로 기록된 독자적인 복음서를 가지고 있었을것으로 보여지는데 그것이 페쉬타진본이라 언급한 것입니다.(남아있지 않음.)
시리아의 성서 페쉬타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면
초대 기독교가 에뎃사로 전파되었을 때에 그 고장의 언어는 아람어였습니다.
아람어란 곧 시리아어를 말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부르짖었던 말씀(마 27:46), 즉 ꡒ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ꡓ(Eli Eli Lama Sabactani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가 바로 그 아람어입니다.
성서에는 예수님의 말씀 중 유일하게 이 말 한 마디만 원어인 아람어로 남아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외에 전부는 당시 예수님이 사용하시지도 않았던 헬라어로 기록된 것입니다.
헬라어로 씌여졌다는 것은 바로 히브리언어체계나 철학적 관점이 아닌 헬라적 언어체계와 헬라적 철학의 관점으로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당시에 사용되던 언어는 분명 아람어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시리아어 성서란 바로 당시예수님께서 직접 쓰시던 말 즉 아람어로 쓰여진 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여졌으나 헬라 문화권에 사는 디아스포라들을 위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으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그 성경을 헬라어 역본(LXX)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은 처음부터 헬라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번역본을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후에 로마 시대에 와서야 라틴어 역이 나오게 되었고 로마 통치 시대에 시리아인들을 서구 기독교화하기 위해서 로마 기독교가 시리아 역본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후에 로마 교회가 주도한 이 시리아 번역본이 나오기 전에는 원 시리아 말로 쓰여진 성경이 있었는데 이것은 소위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 즉 오리게네스가 만든 헥사플라(Hexapla 六重譯舊約聖書)를 보고 번역한 것이 결코 아니라 완전히 독자적으로 구약 히브리 원본, 즉 마소라 텍스트를 대본으로 했기 때문에 헬라적 로마의 요소가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성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가리켜서 페쉬타(Peshitta)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성경 언어가 바로 예수님이 친히 쓰시던 아라마익 언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페쉬타가 당시 헬라적 로마의 전통을 벗어난 유일한 동양적 기독교의 성서였던 것으로 봅니다.
여기에서 바로 토마 행전(Acts of Thomas)을 많이 인용하고 있으며 아프라테스 (Afraates) 등 시리아어로 된 여러 기독교 문서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이 바로 시리아 교회의 야고부스파와 네스토리우스파에 의해서 채택되었던 것이다.
또 이와는 별도로 시리아에서는 더 일찍부터 타티안(Tatian)이 172년 경에 만든 조화 복음서(Diatesssaron) 라는 것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복음서는 4복음서를 하나로 묶어 만든 단권 복음서인데 타티안은 이 조화 복음서를 그가 로마로부터 돌아온 후에 만들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 조화 복음서가 헬라어 4복음서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이전에는 그들이 무슨 복음서를 읽었을까라는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자연히 그전에는 시리아인들의 독자적인 복음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것이 바로 페쉬타의 진본이라 하는 것입니다.
후에 나온 시리아어 번역경(위에서 님이 언급한 번역본)에서도 보면 그것이 헬라어 성경과 다른 점을 많이 드러닙니다.
예를 들면 헬라어 성경의 '구원'이라는 말이 시리아 성경에서는 '생명'으로 번역되었고 '구주'라는 말도 '생명을 주는 이'로 번역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말도 '산다'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그 때 시리아인들의 사고 개념이 헬라인들의 사고 개념과 얼마나 크게 달랐는지 한 눈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페쉬타 원본의 독자성은 바로 이런 점에서 그 확실성을 더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요약하는 힘이 딸리다보니 다 설명하자면 너무 길고
요약을 해 놓으면 오해의 소지가 많거나 오류가 많고...
에궁, 나의 이 부족함을 어찌할꼬...
복음서가 헬라어로 씌어졌다는 것은 저도 위에서 언급했구요.
(페쉬타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한 번 언급할게요.)
페쉬타(Peshitta)는 헬라어본(구약)을 재번역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성경을 아람어로 번역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약은 헬라어를 번역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용한 조화복음서는 4대복음을 조화시킨 것으로 헬라성경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고, 다른 성경들로 헬라어성경을 시리아어로 번역된 것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티탄이 조화복음을 만들기 전에는 무슨 복음서를 보았겠는가 하는 연구에서 이미 그들은 시리아어로 기록된 독자적인 복음서를 가지고 있었을것으로 보여지는데 그것이 페쉬타진본이라 언급한 것입니다.(남아있지 않음.)
시리아의 성서 페쉬타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면
초대 기독교가 에뎃사로 전파되었을 때에 그 고장의 언어는 아람어였습니다.
아람어란 곧 시리아어를 말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부르짖었던 말씀(마 27:46), 즉 ꡒ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ꡓ(Eli Eli Lama Sabactani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가 바로 그 아람어입니다.
성서에는 예수님의 말씀 중 유일하게 이 말 한 마디만 원어인 아람어로 남아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외에 전부는 당시 예수님이 사용하시지도 않았던 헬라어로 기록된 것입니다.
헬라어로 씌여졌다는 것은 바로 히브리언어체계나 철학적 관점이 아닌 헬라적 언어체계와 헬라적 철학의 관점으로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당시에 사용되던 언어는 분명 아람어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시리아어 성서란 바로 당시예수님께서 직접 쓰시던 말 즉 아람어로 쓰여진 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여졌으나 헬라 문화권에 사는 디아스포라들을 위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으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그 성경을 헬라어 역본(LXX)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은 처음부터 헬라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번역본을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후에 로마 시대에 와서야 라틴어 역이 나오게 되었고 로마 통치 시대에 시리아인들을 서구 기독교화하기 위해서 로마 기독교가 시리아 역본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후에 로마 교회가 주도한 이 시리아 번역본이 나오기 전에는 원 시리아 말로 쓰여진 성경이 있었는데 이것은 소위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 즉 오리게네스가 만든 헥사플라(Hexapla 六重譯舊約聖書)를 보고 번역한 것이 결코 아니라 완전히 독자적으로 구약 히브리 원본, 즉 마소라 텍스트를 대본으로 했기 때문에 헬라적 로마의 요소가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성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가리켜서 페쉬타(Peshitta)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성경 언어가 바로 예수님이 친히 쓰시던 아라마익 언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페쉬타가 당시 헬라적 로마의 전통을 벗어난 유일한 동양적 기독교의 성서였던 것으로 봅니다.
여기에서 바로 토마 행전(Acts of Thomas)을 많이 인용하고 있으며 아프라테스 (Afraates) 등 시리아어로 된 여러 기독교 문서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이 바로 시리아 교회의 야고부스파와 네스토리우스파에 의해서 채택되었던 것이다.
또 이와는 별도로 시리아에서는 더 일찍부터 타티안(Tatian)이 172년 경에 만든 조화 복음서(Diatesssaron) 라는 것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복음서는 4복음서를 하나로 묶어 만든 단권 복음서인데 타티안은 이 조화 복음서를 그가 로마로부터 돌아온 후에 만들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 조화 복음서가 헬라어 4복음서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이전에는 그들이 무슨 복음서를 읽었을까라는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자연히 그전에는 시리아인들의 독자적인 복음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것이 바로 페쉬타의 진본이라 하는 것입니다.
후에 나온 시리아어 번역경(위에서 님이 언급한 번역본)에서도 보면 그것이 헬라어 성경과 다른 점을 많이 드러닙니다.
예를 들면 헬라어 성경의 '구원'이라는 말이 시리아 성경에서는 '생명'으로 번역되었고 '구주'라는 말도 '생명을 주는 이'로 번역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말도 '산다'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그 때 시리아인들의 사고 개념이 헬라인들의 사고 개념과 얼마나 크게 달랐는지 한 눈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페쉬타 원본의 독자성은 바로 이런 점에서 그 확실성을 더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요약하는 힘이 딸리다보니 다 설명하자면 너무 길고
요약을 해 놓으면 오해의 소지가 많거나 오류가 많고...
에궁, 나의 이 부족함을 어찌할꼬...
2007.06.07 18:11:20
제가 웬만큼 구체적으로 질의를 드렸으니, 의견 차이는 여기서 그만 확인해도 될 것 같구요,
(예수를 실천적으로 추종하는 걸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저와 의견이 같으시리라 생각됩니다만,
가는 길은 확연히 다름을 느낍니다)
또 다시 보여주신 지식적 오해 한 가지만 지적하고 넘어가지요.
예수와 사도들이 아람어를 썼으리라는 건 공통된 추측이긴 하죠.
그러나, 본래 복음서는 그리스어로 집필되었고, 페쉬타는 아람어도 아닌,
시리아어 고대 번역 아니던가요?
(아람어 번역은 타르굼이고, 그나마 의역입니다)
페쉬타가 원본이라 하심은, 거꾸로입니다.
어떤 본문비평학도, 복음서 전승사도, 그렇게 말하는 걸 듣도보도 못했습니다.
시리아 교회에서 5세기에 완성된 번역본이 페쉬타입니다.
신약 개론서들에 나오는 기본적인 내용이예요.
그리고, 비주류 고대 교회들(지금도 존속하고 있지요)을 언급하시는데,
거기서 신약 외경을 정경으로 봅니까?
제가 잘 몰라서 그럽니다. 좀 알려 주십시오.
제 논에 물 대기 식으로 그들의 권위에 기대시는 것 같아, 혹여나 제가 오해하는 게 아닐까 스스로 걱정이 되어서 그럽니다.
(예수를 실천적으로 추종하는 걸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저와 의견이 같으시리라 생각됩니다만,
가는 길은 확연히 다름을 느낍니다)
또 다시 보여주신 지식적 오해 한 가지만 지적하고 넘어가지요.
예수와 사도들이 아람어를 썼으리라는 건 공통된 추측이긴 하죠.
그러나, 본래 복음서는 그리스어로 집필되었고, 페쉬타는 아람어도 아닌,
시리아어 고대 번역 아니던가요?
(아람어 번역은 타르굼이고, 그나마 의역입니다)
페쉬타가 원본이라 하심은, 거꾸로입니다.
어떤 본문비평학도, 복음서 전승사도, 그렇게 말하는 걸 듣도보도 못했습니다.
시리아 교회에서 5세기에 완성된 번역본이 페쉬타입니다.
신약 개론서들에 나오는 기본적인 내용이예요.
그리고, 비주류 고대 교회들(지금도 존속하고 있지요)을 언급하시는데,
거기서 신약 외경을 정경으로 봅니까?
제가 잘 몰라서 그럽니다. 좀 알려 주십시오.
제 논에 물 대기 식으로 그들의 권위에 기대시는 것 같아, 혹여나 제가 오해하는 게 아닐까 스스로 걱정이 되어서 그럽니다.
2007.06.07 18:21:15
아니, 어떻게 아람어와 시리아어가 같습니까?
아람어 번역본은 타르굼입니다. 그나마 의역이구요.
그리고, 본격적인 학술 자료들을 보고 판단해야 될 문제겠습니다만,
페쉬타니, 타르굼이니 등, 고대 번역들의 저본에 대하여 아직 무엇이 밝혀졌는지요?
추측과 상상이 많아 보이네요.
그것도, 자기 입장의 취향에 의한.
(올리브나무님의 학설이 아니겠기에, 올리브나무님께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여쭈어 봅지요.
(앞서의 질문에도 답을 안 하셨습니다만서도)
디아테사론(4복음서의 종합본)이 지금 남아 있기나 합니까?
기존의 권위에 대한 의문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기 입맛에 맞는 길로만 취사선택해서 간다면,
기존의 체제보다 뭐가 나아질지 모르겠습니다.
아람어 번역본은 타르굼입니다. 그나마 의역이구요.
그리고, 본격적인 학술 자료들을 보고 판단해야 될 문제겠습니다만,
페쉬타니, 타르굼이니 등, 고대 번역들의 저본에 대하여 아직 무엇이 밝혀졌는지요?
추측과 상상이 많아 보이네요.
그것도, 자기 입장의 취향에 의한.
(올리브나무님의 학설이 아니겠기에, 올리브나무님께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여쭈어 봅지요.
(앞서의 질문에도 답을 안 하셨습니다만서도)
디아테사론(4복음서의 종합본)이 지금 남아 있기나 합니까?
기존의 권위에 대한 의문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기 입맛에 맞는 길로만 취사선택해서 간다면,
기존의 체제보다 뭐가 나아질지 모르겠습니다.
2007.06.07 18:55:06
확실하게 잘못을 인정해야겠군요. 탈굼과 페쉬타를 구분짓지를 않았습니다.
아람어 의역본은 탈굼이 맞습니다.
아람어와 시리아어 둘 사이엔 차이는 없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헬라어성경을 아람어로 번역한 것을 페쉬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탈굼입니다.
(별도로 언급하지 않았기에 오해의 소지가 충분하군요.)
아람어는 기원전600년경부터 기원후 700년경까지 고대근동의 국제통용어였습니다.
기원전 800년경부터 아람인들이 상업민족으로서 서아시아 각지에서 활약한 후부터 아람어는 국제통상어가 되었고, 오늘날에도 시리아의 일부나 아르메니아 등 메소포타미아 일부에서는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리아어라고 하는 이유는 지금의 세계언어인 영어가 영국어에서 나온 것처럼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별도의 언어가 아니라 같은 언어로 보고 있기에 위의 글과같이 아람어와 시리아어를 혼용해서 쓰게 되었습니다.
탈굼은 의역본이고, 페쉬타는 번역본입니다.
자꾸 지식적인 것으로 나가다보니 가방끈 짧은게 마구 드러나고 있군요.ㅋㅋㅋ
아람어 의역본은 탈굼이 맞습니다.
아람어와 시리아어 둘 사이엔 차이는 없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헬라어성경을 아람어로 번역한 것을 페쉬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탈굼입니다.
(별도로 언급하지 않았기에 오해의 소지가 충분하군요.)
아람어는 기원전600년경부터 기원후 700년경까지 고대근동의 국제통용어였습니다.
기원전 800년경부터 아람인들이 상업민족으로서 서아시아 각지에서 활약한 후부터 아람어는 국제통상어가 되었고, 오늘날에도 시리아의 일부나 아르메니아 등 메소포타미아 일부에서는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리아어라고 하는 이유는 지금의 세계언어인 영어가 영국어에서 나온 것처럼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별도의 언어가 아니라 같은 언어로 보고 있기에 위의 글과같이 아람어와 시리아어를 혼용해서 쓰게 되었습니다.
탈굼은 의역본이고, 페쉬타는 번역본입니다.
자꾸 지식적인 것으로 나가다보니 가방끈 짧은게 마구 드러나고 있군요.ㅋㅋㅋ
2007.06.07 19:06:33
질문 중에
"디아테사론(4복음서의 종합본)이 지금 남아 있기나 합니까? "
⇒안남아있습니다. 됐나요?
그리스어로 된 단편만이 발견되었고, 원본이 그리스어인지 시리아어인지도 모르기에 님이 비약이라고 한 말은 100% 동의합니다.
분서갱유나 임진왜란시에 우리의 사고가 불탄것이나, 일제시대에 우리의 역사기록들이 많이 소실된 것 등 처럼 이해하고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의 참화속에서, 이슬람의 공격속에서 분실되었을 것이라고...
그래서 겨우 사본중에서 단편 하나밖에 발견하지 못했다고...
역시 비약이 심하죠???
"디아테사론(4복음서의 종합본)이 지금 남아 있기나 합니까? "
⇒안남아있습니다. 됐나요?
그리스어로 된 단편만이 발견되었고, 원본이 그리스어인지 시리아어인지도 모르기에 님이 비약이라고 한 말은 100% 동의합니다.
분서갱유나 임진왜란시에 우리의 사고가 불탄것이나, 일제시대에 우리의 역사기록들이 많이 소실된 것 등 처럼 이해하고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의 참화속에서, 이슬람의 공격속에서 분실되었을 것이라고...
그래서 겨우 사본중에서 단편 하나밖에 발견하지 못했다고...
역시 비약이 심하죠???
2007.06.08 02:30:48
아마도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봅니다.
즉, 영지주의자로 몰려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주교들)이 모두 영지주의자는 아니었다고 보여지고,
영지주의계열의 외경에 보이는 호의는 저에게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정경으로 채택된 성서에 가지는 것은 외경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제가 외경에 대하여 가지는 자세는
이단논쟁과 정경화과정에서도 오류가 있을 수 있고,
그러므로, 그러한 책들 속에서도 읽어낼 수 있는 계시의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지
마치 정경보다 외경을 더 신뢰하거나 호의를 보이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스사상에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오늘날의 관념적 기독교는 바로 그곳에서 출발하였고
현실과 이데아를 구분함으로써 이데아를 추구하되 결코 도달할 수는 없다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성화의 개념으로써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선은 주님에 까지 이르는 것인데(장성한 분량을 이루는 것)
인간의 죄성으로 결코 도달할 수 없기에 죄인임을 자복하고 회개하여 구원을 이루자로 끝난다로 보는 겁니다.
(여기서도 많은 부분을 생략합니다.)
분명 정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가 그리스철학적인 이원론으로 인해
현실세계에서의 그리스도인적인 삶을 약화시킨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 글이 아닌 다른 저의 글들을 보면 제가 영지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이 주제만 떼어놓고 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역사란 승리자의 기록이므로 야사가 존재하듯
성서의 역사도 결국 승자들의 기록이므로 패자들의 기록도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 주시면 될 듯...
즉, 영지주의자로 몰려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주교들)이 모두 영지주의자는 아니었다고 보여지고,
영지주의계열의 외경에 보이는 호의는 저에게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정경으로 채택된 성서에 가지는 것은 외경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제가 외경에 대하여 가지는 자세는
이단논쟁과 정경화과정에서도 오류가 있을 수 있고,
그러므로, 그러한 책들 속에서도 읽어낼 수 있는 계시의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지
마치 정경보다 외경을 더 신뢰하거나 호의를 보이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스사상에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오늘날의 관념적 기독교는 바로 그곳에서 출발하였고
현실과 이데아를 구분함으로써 이데아를 추구하되 결코 도달할 수는 없다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성화의 개념으로써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선은 주님에 까지 이르는 것인데(장성한 분량을 이루는 것)
인간의 죄성으로 결코 도달할 수 없기에 죄인임을 자복하고 회개하여 구원을 이루자로 끝난다로 보는 겁니다.
(여기서도 많은 부분을 생략합니다.)
분명 정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가 그리스철학적인 이원론으로 인해
현실세계에서의 그리스도인적인 삶을 약화시킨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 글이 아닌 다른 저의 글들을 보면 제가 영지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이 주제만 떼어놓고 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역사란 승리자의 기록이므로 야사가 존재하듯
성서의 역사도 결국 승자들의 기록이므로 패자들의 기록도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 주시면 될 듯...
2007.06.08 02:44:31
디아테사론이 남아 있어 본들,
그것을 쓴 사람인 타티아노스는 영지주의자 아닌가요?
그리스도교에 그리스 사상이 혼합된 역사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시면서,
신약 외경들, 디아테사론 등, 영지주의 계열 책들에 대해서는 호의를 보이시는 건 모순 아닙니까?
경전, 역사적 예수, 교리 투쟁의 과정 등은, 지극히 신중하게 다루어야 될 사안이라 보는데,
근거와 이론이 확실히 정립되었더라도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데,
너무 쉽게 취급하고 진도 나가시는 것 같은(그것도 올리브나무님의 취향에 따라) 인상을 받습니다.
제가 감히 짐작컨대, 정경과 정통 교리를 확정한 쪽은 교권파, 즉 기득권 세력이고,
그들과의 투쟁에서 패배한 쪽은 약자이니, 그렇게 묻힌 그들의 목소리에 오히려 더 타당성이 있지 않느냐는,
일종의 온정주의, 낭만주의 같으신데,
(제 짐작입니다)
대단히 감상적이랄까요, 관념적이랄까요, 추상적이랄까요, 이분법적 계급 구도의 대입이랄까요.
그런데, 영지주의 등, 패배한 쪽이 결코 약자가 아니었거든요?
뒷날 승리한 정통파들보다 세력이 더 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약 정경, 즉 공관복음서, 요한계 문헌, 바오로 서간 등이 그리스적 사유에 물들었다 하심은,
만약 시간이 허락되신다면, 따로 논증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컨대, "바오로 서간의 / (또는) 요한복음서의 영지주의적 영향과 반(反) 영지주의 경향을 논하시오"
- 이런 문제는, 신학대학원 시험 문제로 자주 출제되는, 기본적인 사안입니다.
영지주의 문헌, 신약 외경 등은, 계시로서의 신약 정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학적 필수 참고 자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패자들의 기록도 중요하다는 것은, 정경과 정통 신앙을 더 깊이 알기 위해서이지,
그것을 통해서, 예수 상이 수정된다는 건, 제가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넌센스입니다.
객관성을 전혀 담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역사적 예수에 대한 객관성과, 그리스도 신앙, 이 양자를 종합한 것이 사도성이고,
이것이 정경과 정통이 된 것인데,
이보다 더 불확실하고 희미한 단편들을 갖고 예수의 역사적 진면목에 더 다가선다?
과연 잘 되겠습니까???????
그것을 쓴 사람인 타티아노스는 영지주의자 아닌가요?
그리스도교에 그리스 사상이 혼합된 역사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시면서,
신약 외경들, 디아테사론 등, 영지주의 계열 책들에 대해서는 호의를 보이시는 건 모순 아닙니까?
경전, 역사적 예수, 교리 투쟁의 과정 등은, 지극히 신중하게 다루어야 될 사안이라 보는데,
근거와 이론이 확실히 정립되었더라도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데,
너무 쉽게 취급하고 진도 나가시는 것 같은(그것도 올리브나무님의 취향에 따라) 인상을 받습니다.
제가 감히 짐작컨대, 정경과 정통 교리를 확정한 쪽은 교권파, 즉 기득권 세력이고,
그들과의 투쟁에서 패배한 쪽은 약자이니, 그렇게 묻힌 그들의 목소리에 오히려 더 타당성이 있지 않느냐는,
일종의 온정주의, 낭만주의 같으신데,
(제 짐작입니다)
대단히 감상적이랄까요, 관념적이랄까요, 추상적이랄까요, 이분법적 계급 구도의 대입이랄까요.
그런데, 영지주의 등, 패배한 쪽이 결코 약자가 아니었거든요?
뒷날 승리한 정통파들보다 세력이 더 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약 정경, 즉 공관복음서, 요한계 문헌, 바오로 서간 등이 그리스적 사유에 물들었다 하심은,
만약 시간이 허락되신다면, 따로 논증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컨대, "바오로 서간의 / (또는) 요한복음서의 영지주의적 영향과 반(反) 영지주의 경향을 논하시오"
- 이런 문제는, 신학대학원 시험 문제로 자주 출제되는, 기본적인 사안입니다.
영지주의 문헌, 신약 외경 등은, 계시로서의 신약 정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학적 필수 참고 자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패자들의 기록도 중요하다는 것은, 정경과 정통 신앙을 더 깊이 알기 위해서이지,
그것을 통해서, 예수 상이 수정된다는 건, 제가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넌센스입니다.
객관성을 전혀 담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역사적 예수에 대한 객관성과, 그리스도 신앙, 이 양자를 종합한 것이 사도성이고,
이것이 정경과 정통이 된 것인데,
이보다 더 불확실하고 희미한 단편들을 갖고 예수의 역사적 진면목에 더 다가선다?
과연 잘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