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여애반다라

조회 수 5524 추천 수 0 2013.05.07 21:46:30

來如哀反多羅* 1

 

                                    이성복

 

추억의 생매장이 있었겠구나

저 나무가 저리도 푸르른 것은,

지금 저 나무의 푸른 잎이

게거품처럼 흘러내리는 것은

추억의 아가리도 울컬울컥

게워 올릴 때가 있다는 것!

아, 푸르게 살아 돌아왔구나,

허옇게 삭은 새끼줄 목에 감고

버팀대에 기대 선 저 나무는

제 뱃속이 온통 콘크리트 굳은

반죽 덩어리라는 것도 모르고

 

 
 

來如哀反多羅 2

 

바람의 어떤 딸들은

밤의 숯불 위에서 춤추고

오늘 밤 나의 숙제는

바람이 온 길을 돌아가는 것

돌아가면 볼 수 있을까,

바람의 어떤 딸들이

신음하는 어미의 자궁을 열고

피 묻은 나를 번쩍 들어 올릴 때

또 다른 딸들이 깔깔거리며

빛바랜 수의를 마름질하는 것

보다가, 보다가 어미의 삭은

탯줄 끌고 돌아올 수 있을까,

언젠가 내가 죽고 없는 세상으로

 

 
 

來如哀反多羅 3

 

이 순간은 남의 순간이었던가

봄바람은 낡은 베니어판

덜 빠진 못에 걸려 있기도 하고

깊은 숨 들여 마시고 불어도

고운 먼지는 날아가지 않는다

깨우지 마라, 고운 잠

눈 감으면 벌건 살코기와

오돌토돌한 간처녑을 먹고 싶은 날들

깨우지 마라, 고운 잠, 아무래도

나는 남의 순간을 사는 것만 같다

 

 

   * 來如哀反多羅(래여애반다라)는 이성복 시인의 최근 시집 제목이다. 이 시집에는 이 제목으로 된 시가 아홉 편 실려 있다. 세 편 씩 나눠 싣는다. 이성복 시인의 시는 말 그대로 ‘백척간두 진일보 시방세계'의 문학적 형상화다. 보기에 아슬 하다못해 아찔하다. 기독교 신앙과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그 아찔한 경험은 비슷한 것 같다. 그의 시를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 현묘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쁨일까 슬픔일까, 환희일까 공포일까? 이 세상에서 이미 그것을 보는 사람은 볼 것이다. 마치 부활 경험이 은폐의 방식으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듯이. 이 제목의 뜻이 무엇인지는 이 시집의 발문을 쓴 홍경님 선생의 설명을 조금 빌려오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향가 <풍요(風謠)>(<공덕가(功德歌)>)의 한 구절인 ‘래여애반다라’는 ‘오다, 서럽더라’라고 풀이됩니다. 신라 백성들이 불상을 빚기 위한 흙을 나르면서, 그 공덕으로 세상살이의 서러움을 위안하는 내용이라 알려진 저 오래된 노래. 선생님은 ‘공덕’이 아닌, ‘서러움’에 방점을 두고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라는 여섯 글자의 의미를 각각 따로 해석하였습니다.”


  


[레벨:5]블루군

2013.05.08 03:24:08

무당.jpg : 래여애반다라

아버지와아들.jpg : 래여애반다라

장례행렬중인아낙네들.jpg : 래여애반다라

풍어제.jpg : 래여애반다라

해탈을꿈꾸며2.jpg : 래여애반다라

 시에서 풍기는 느낌이 이갑철 선생님의 사진집 충돌과 반동과 비슷하네요.
 
 사진집에는 더욱 좋은(?) 사진이 많지만 인터넷상에서 저작권에 그나마 자유로운(배포한 것처럼 보이는)

 공개된 사진 몇개 올립니다.

첨부
profile

[레벨:12]잠자는회색늑대

2013.05.08 06:35:41

글을보면 약간 섬뜩하다....라고 말하려 내려오다 정말 오싹해졌습니다.

마음의 눈과 육신에 눈이 연약하여 기도가 절로 나오네요..^^;;;

정말 살아 있음을 찐하게 느끼고 돌아갑니다!
profile

[레벨:38]클라라

2013.05.08 21:53:05

시가 참 어렵네요.
통 모르겠어요.
목사님 해설 없었으면
저는 '살풀이 춤'만 연상하다 말 뻔 했어요.^^

저도 너무 궁금합니다. 
현묘세계, 시방세계, 죽음세계 너머
그 너머의 세계는 우리가 짐작하듯이,
낮의 해 같이 빛나는 세계일까, 아니면
칠흑같이 어둔 밤일까,
환희의 세계일까, 고통의 세계일까,

그러나, 설령, 그 세계가 고통의 세계일지라도
'그 분 안에서, 그 분과 함께' 라면
그 자체를 '환희'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백척간두 진일보 시방세계라 하시니,
이런 한시가 생각나네요.

저 백은의 세계 눈부시어
이 누리가 온통 한 진리네
밝음과 어둠마저 이를 수 없는 곳
오후의 햇살에 전신이 드러나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3.05.08 23:18:31

삶이란,
그리고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왜 성을 탐닉할까요?
아무리 많은 걸 소유해도 만족이 없을까요?
인간은 왜 이렇게 잔인할까요?
우리의 물음은 끝이 없습니다.
아직도 이 세상이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사도신경의 끝마디는 이렇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몸의 부활이 지금의 이런 삶으로 회귀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유일회적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똑같은 삶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신의 저주이겠지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내야 합니다.
모순과 딜레마가 가득해도
그것이 바로 삶의 현실이기에 버텨내야 합니다.
비록 어둠이 가득한 무덤 같은 삶일지 몰라도
저쪽에서 비쳐오는 빛을 힐긋이라도 본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삶을 크게 긍정하게 될 겁니다.
그 큰 긍정은 자신에게 나타나는 모순도 감싸 안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고유한 생명으로 인정하는 겁니다.

'래여애반다라'- 오다, 서럽더라.
인간실존의 깊이를 보면 서럽지요.
그 서러운 실존을 받아들일줄 알면
새로운 차원의 기쁨에 사로잡히겠지요.

이 극치의 오묘한 삶을
우리가 같은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네요.
이게 기억날까요?
마지막 심판을 통과한 새하늘과 새땅에서.
profile

[레벨:38]클라라

2013.05.09 07:33:20

목사님, 엊저녁에는 죽음너머만 생각했는데,
오늘 아침, 목사님 말씀에서
문득, 삶과 죽음이 不可分離 의 관계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좀 더 긴 시간을 두고 묵상해 보겠습니다.

profile

[레벨:12]잠자는회색늑대

2013.05.09 16:58:08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미야자키 하야오'감독의

한달 전에 봤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제목의 만화영화가 떠오르는군요.

 

profile

[레벨:33]달팽이

2013.05.09 13:19:44

우리 시대의 철학자 강신주 교수가
제일로 꼽는 시인이 있는데..
이성복과 김수영 한용운을 들더군요..
그래서 이 시인의 책을 사놓고  많이 읽지는 못했군요..
다시 한 번 책을 보면서 시를 감상해야 할 것 같네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4월6 한 분 하나님(7) [2]

  • 2009-04-06
  • 조회 수 5966

2009년 4월6 한 분 하나님(7)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12:32) 어제 말씀드린 심판에 대해서 보충할 게 있습니다. 보충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요소이지요. 하나님의 심판은 종말에 완료되지만 이미 역사 안에서 선취(先取)의 방식으로 일어났습니다. 그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사실이 바로 기독교가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지지 않은 중심입니다. 특히 부활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예수의 부활이 왜 심판의 선취일...

된장 뜨기! file [2]

  • 2013-05-25
  • 조회 수 5876

오늘 된장을 떴다. 나, 집사람, 그리고 큰딸이 함께. 우선 항아리를 사왔다. 7만원 줬다. 옹기로 된 뚜껑 끼면 9만원이다. 그 뚜껑은 된장 항아리용으로는 안 된다. 옆에 구멍이 난 된장, 간장 전용 뚜껑은 일전에 슈퍼에서 7천여 원에 샀다. 항아리를 깨끗이 씻어 말린 다음 메주와 소금물을 같이 넣어두었던 항아리에서 메주를 꺼내 치댄 다음에 새 항아리에 담으면 된다. 그릇이 큰 게 없어서 작은 그릇에 몇번에 나누어 치댔다. 치댄 사람들은 부끄럽다고 사진기를 피했다. 치댄 메주를 새 항아리에 꼭꼭 눌러 담았다. 물론 이 위에 ...

옥중서간(16) [2]

  • 2010-06-02
  • 조회 수 5876

여기서 종교적 방법론이 문제는 아니다. 종교적 행위는 부분적인 것이다. 신앙은 전체적인 것, 즉 생명 행위(Lebensakt)이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종교로 사람을 부른 것이 아니라 삶(생명)으로 부른 것이다. 이런 삶은 어떤 것일까? 이런 삶은 이 세상에서 신의 무능력에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쓰기로 하고 오늘은 다음의 것만 추가하겠다. 신에 관해서 ‘비종교적으로’ 말한다고 할 때는 세상의 무신성(無神性)을 은폐시키는 게 아니라 차라리 폭로하고, 바로 그것 때문에 놀라운 빛이 세상을 비추도록 신에 대...

예수 어록(309)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 2020-04-17
  • 조회 수 5764

예수 어록(309)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3절에 나온 문장이 여기 14절에 다시 나온다. “무엇이든지” 예수가 행한다는 약속이다. 나는 이 약속을 진리도 믿는다. 예수는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말이다. 이는 곧 예수의 제자라면 예수가 행할 것만 구한다는 뜻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의 제자 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일절 예수가 행하는 일이다. 나는 예수 제자이기에 내 운명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내가 구한 것에 대한 예수의 응답이라고 믿는다. 예수는 내가 ...

원당일기(94)- 마늘과 고추 file

  • 2020-10-23
  • 조회 수 5744

우리 집 바로 아래는 이장이 어머니와 둘이 사는 빨강 기와집입니다. 그 집 왼편으로는 500평 가까운 밭이 있습니다. 이장 집과 밭 사이의 길이 있습니다. 좁은 길이기는 하나 택배 트럭이 다닐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수년 전까지 그 밭에는 단풍나무 묘목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묘목을 심을 때부터 다 자라서 옮겨갈 때까지 제가 다 봤습니다. 거기서 두 그루를 우리 집 창문 앞에 심었습니다. 요즘은 그 밭에 겨울에는 양파나 마늘, 여름에는 고추를 심습니다. (양파와 마늘 이파리를 구분할 줄 아시는 분이 많지 않겠지요.) 다른 마을...

예수님의 시험 (2), 4월26일

  • 2006-04-26
  • 조회 수 5717

2006년 4월26일 예수님의 시험 (2)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 1:13) 제가 신학대학교 학부에 다닐 때인지, 아니면 전도사 생활을 하고 있을 때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 오래 전 니코스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이하 ‘최후’)을 흥미진진하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같은 저자의 <희랍인 조르바>는 별로 기억에 남지 않지만 <최후>의 내용은 큰 틀에서 그대로 남아있는 걸 보면 그 책이 젊은 시절의 내 감수성을 크게 흔들었던 것 같습니다. <최후>...

성령세례, 4월12일 [1]

  • 2006-04-12
  • 조회 수 5683

2006년 4월12일, 성령세례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1:8) 요한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은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여러 사도들과 대표 집사들이 세례를 준 것으로 되어 있지만 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바울도 세례를 거의 베풀지 않았습니다. 아주 특이한 경우는 제외하구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어떻게 중요한 교회 예전으로 자리 잡았는지 우...

11월11일 바리새인과 헤롯당

  • 2006-11-11
  • 조회 수 5679

2006년 11월11일 바리새인과 헤롯당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막 3:6) 회당 안에서의 일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보내는 무언의 압력을 무시하고 손 마른 사람을 고쳤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은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이제 걸려들었구나, 하고 쾌재를 불렀을까요, 아니면 뭐 저런 친구가 있어, 우리를 물로 보는 거야 뭐야, 하고 속상해했을까요. 그들의 속이야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회당에서 나가 헤롯당과 공모하기 시작했다고 사실이 중요합니다. 원래 ...

원당일기(98)- 벽화(1) file

  • 2020-10-30
  • 조회 수 5672

마을에서 우리 집으로 들어가려면 집의 북쪽 벽이 가장 먼저 보입니다. 북쪽이 입구인 이상한 구조입니다. 북쪽은 밋밋해서 집을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느낌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더구나 벽돌로 된 벽을 쌓는 분이 깨끗하게 마감하지 않아서 지저분해 보입니다. 보세요. 북쪽 벽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벽화이지 그냥 붓 가는 대로 벽돌에 색칠하는 겁니다. 세 가지 색깔을 칠할 계획입니다. 첫 번째는 노란색입니다. 보세요. 다음은 하늘색입니다. 흰색 페인트에다가 염료를 섞어서 색깔을 냅니다. 하늘색이 ...

5월25일- 버림과 따름 (3) [4]

  • 2006-05-25
  • 조회 수 5652

2006년 5월25일 버림과 따름 (3)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막 1:18) 우리의 현실적인 신앙에서 “버림”이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니까, 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유와 같은 복음찬송에서 볼 수 있듯이 무언가를 크게 버린 것처럼 생각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버렸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딱히 내세울게 없을 겁니다. 물론 여기에도 개인 차이가 큽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했을 것...

어거스틴의 기도문

  • 2010-04-28
  • 조회 수 5585

4월 하순의 날씨로는 오늘의 기온이 100년 이래 처음이라는 소식을 그대도 들으셨을 거요. 감기 걸리기에 맞춤한 날씨요. 농부들의 시름도 깊소. 수정을 도와줄 벌이 날아다닐 수 없을 정도라오. 이렇게 과학기술이 발달했는데도, 시베리아 한냉전선이 내려오는 걸 막지 못하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오. 오늘 수요성경공부 모임에서 함께 읽은 어거스틴의 기도문을 그대에게 전하오. 하루 마침 기도를 이것으로 드리고 꿈의 나라로 가보시구려. (2010년 4월28일, 수요일, 차가운 비) 오 주님, 나를 판단하시는 이는 주님뿐이...

하나님의 기쁨, 4월19일 [2]

  • 2006-04-19
  • 조회 수 5580

2006년 4월19일 하나님의 기쁨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11) 하늘로부터 울린 소리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입니다. 첫 번째 소리는 우리가 어제 묵상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번째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한다는 말을 통해서 마가복음 기자는 무엇을 전하려는 것일까요? 어느 정도 신앙의 연조가 깊은 그리스도인들의 성서읽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성서 텍스트를 어떤 고...

하나님은 영이시다, 요한복음 묵상(37) [2]

  • 2013-06-11
  • 조회 수 5555

24절 말씀은 이렇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을 가리키는 헬라어 프뉴마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 말씀에 의해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프뉴마를 모르면 하나님을 모른다. 프뉴마에 대한 이해의 깊이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깊이도 달라진다. 하나님이 영이라는 말은 옳지만 영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영은 성령도 있고, 악령도 있고, 또 인간의 영적 작용도 있다. 성령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 자체는 아니다. 성령은 곧 하나님의 존재...

천안함 사태의 실상은? [4]

  • 2010-05-04
  • 조회 수 5551

지난 한달 여 동안 대한민국은 온통 천안함 이야기뿐이었소. 46명의 해군 부사관과 병사가 죽었으니 그럴 만도 하오. 그대는 천안함의 사고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오? 소설가 복거일 씨가 오늘 날짜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을 보았소. 이렇게 시작하오.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에겐 천안함의 침몰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분명했다.” 시인 정호승 씨가 지난 달 28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고 하오. “북한이 기습 공격한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북한의 소행일지도 모른다고 짐작만 하기에는 오늘 조국...

래여애반다라 [7]

  • 2013-05-07
  • 조회 수 5524

來如哀反多羅* 1 이성복 추억의 생매장이 있었겠구나 저 나무가 저리도 푸르른 것은, 지금 저 나무의 푸른 잎이 게거품처럼 흘러내리는 것은 추억의 아가리도 울컬울컥 게워 올릴 때가 있다는 것! 아, 푸르게 살아 돌아왔구나, 허옇게 삭은 새끼줄 목에 감고 버팀대에 기대 선 저 나무는 제 뱃속이 온통 콘크리트 굳은 반죽 덩어리라는 것도 모르고 來如哀反多羅 2 바람의 어떤 딸들은 밤의 숯불 위에서 춤추고 오늘 밤 나의 숙제는 바람이 온 길을 돌아가는 것 돌아가면 볼 수 있을까, 바람의 어떤 딸들이 신음하는 어미의 자궁을 열고 피...

원당일기(14) file

  • 2011-06-18
  • 조회 수 5494

원당 농가의 흙이 나무나 채소를 키우기에는 형편없다는 것은 내가 누누이 말해서 그대도 알고 있을 거요. 그 흙만으로는 잡초 외에는 자랄 식물이 별로 없소. 그래서 내 체력이 닿는 대로 바로 옆의 숲에서 흙을 퍼 나르고 있소. 그 숲의 흙은 영양가 만점이오. 양쪽 언덕에서 떨어지는 낙엽이 모두 그 숲으로 모이오. 몇 년 씩 쌓인 낙엽이 썩으면서 자연적으로 부식토가 된 거요. 그런 흙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거요. 낙엽도 낙엽이지만 양쪽 언덕에서 질 좋은 흙이 낮은 그 숲으로 내려와서 쌓이고 있소. 나무나 채소에 좋은 ...

요단강 (2) 4월5일 [3]

  • 2006-04-05
  • 조회 수 5474

2006년 4월5일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막 1:5) 요단강 (2) 오늘 본문은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다고 설명하지만, 원래 유대인들에게는 세례가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아이가 태어날 때 남자 아이의 경우에 할례와 정결의식만 행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부분적으로 이런 세례를 행했습니다. 요한은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행하던 세례를 유대인 전체를 대상으로 시행한 최초의 인물인 것 같습니다. 세례의 의미를 ...

목사공부(5) [4]

  • 2014-04-16
  • 조회 수 5375

물론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을 직접 받은 이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온다. 그냥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자주 나온다. 모든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대선지자 중의 하나인 이사야는 성전에서 신비한 현상을 경험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대답한다. 사 6:8절은 그걸 이렇게 전한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8). 이 뒤로 여호와 ...

빨래 말리기 file [3]

  • 2013-06-29
  • 조회 수 5334

우리집에서 빨래 널기는 내 차지다. 별 거 아닌데도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나는 빨래 널기를 여러번 강조했다. 아파트에서는 좁은 베란다에 있는 빨래 걸대에 너느라 이러저리 몸을 비틀면서 좀 힘들었다. 아마 빨래들도 답답했을 것이다. 이제 빨래 걸대가 데커 위에 있어서 아무런 방해 없이 빨래를 널 수 있다. 아마 빨래들도 기분이 좋으리라. 햇살을 직접 받을 뿐만 아니라 바람을 받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거기에 나비나 벌들도 옆에서 지나간다. 특히 이불빨래를 널기가 좋다. 데커 난간대가 안성맞춤이다. 이불 빨래를 ...

옥중서간(14) [6]

  • 2010-05-29
  • 조회 수 5331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는 우리는 성실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것을 신 앞에서 인식한다. 신 자신이 우리를 강요하여 이런 인식을 하게 한다. 이렇게 성인이 된 세상은 우리로 신 앞에 있는 우리의 상태를 바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신은 우리들이 신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신은 우리를 버리는 신이다.(막 15:34) 신이라는 작업가설 없이 우리를 이 세계에 살게 하는 신은 우리가 항상 그 앞...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