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긍정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모든 존재,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긍정이 낳은 열매다. 존재와 긍정은 한 몸이다. 공존 공생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 않는가. 어디 고래뿐인가? 칭찬은 꽃도 춤추게 한다. 꽃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사랑과 격려의 말을 많이 해주면 싱싱하고 예쁜 꽃을 피우는데 비해 험담과 욕설을 퍼부으면 시들해진다는 건 많은 검증을 거친 객관적 사실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칭찬은 물도 춤추게 한다고 한단다. 오랫동안 물과 파동을 연구해온 일본의 에모토 마사루는 물의 결정이 중요함을 발견하고, 5년간의 연구 끝에 물 결정 사진을 얻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물 결정 사진을 통해 확인한 결과는 정말 놀라웠다. 그의 책 [물은 해답을 알고 있다]에 의하면, 물에게 ‘사랑한다’, ‘감사하다’, ‘멋지다’고 말하거나 긍정적인 메시지를 건네면 물의 결정이 아름다운 육각형인데 비해 ‘멍청한 놈’, ‘바보’, ‘짜증나’, ‘죽여버릴 거야’ 등과 같은 부정적인 말에는 마치 어린애가 학대를 당하는 듯한 흉측한 형상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가 찍었다고 제시하는 물 결정 사진들이 있으니 안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말 신기하기 이를 데 없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칭찬을 듣고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다. 남녀노소 누구든 칭찬을 들으면 몸이 날아갈듯 활력이 솟는다. 축 처진 어깨와 음울했던 얼굴이 활짝 펴진다. 마음에 생기가 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긍정적인 말 한 마디가 소통의 물꼬를 트고, 썰렁했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아내 임현미는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다. 오랜 세월을 교단에 섰다. 그런데 매년 아내가 맡는 반 아이들은 다른 반 아이들에 비해 발표를 잘하고 행복해한다. 학급 분위기도 매우 밝다. 잘난 아이나 못난 아이나 다 사기가 충천하고 학교생활을 즐거워한다. 아이들과 교실이 살아난다.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던 아이들, 문제아로 낙인찍혔던 아이들, 기가 죽어있던 아이들도 몇 개월이 지나면 이상하게 밝아지고 자기표현을 적극적으로 한다. 문제 행동도 많은 부분이 교정된다. 무슨 비결이 있어서일까? 아니다. 아내는 그저 아이들의 강점을 보고 칭찬할 뿐이다. 문제투성이 아이에게서도 언제나 그 아이의 가능성과 장점을 찾아내는 것이 아내의 특기다. 아내의 눈에 미운 아이란 없다. 아이들뿐 아니다. 아내는 누구를 보든 그 사람의 장점을 본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그 장점을 칭찬해준다. 이건 아내의 천성이다. 하여, 누구든지 아내와 함께 있으면 반드시 격려를 받는다.
최근에 미국에서는 긍정심리학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긍정심리학의 창시자로 인정을 받는 마틴 셀리그만은 긍정심리학을 주창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난 50년 동안 심리학은 정신질환이라는 오직 한 가지 주제에만 매진해왔으며 상당한 성과도 거두었다. 결과로 심리학자들은 이제 우울증, 정신분열증, 알코올 중독과 같은 애매모호했던 증상들을 상당 수준으로 정확히 진단하게 되었다. 아울러 정신질환의 발병과정, 유전적 특징, 생화학적 작용, 심리적 원인들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축적하게 되었다. …… 그러나 이러한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기까지는 막대한 희생이 뒤따랐다. 삶을 불행하게 하는 여러 심리 상태를 완화하는데 치중하다 보니, 삶의 긍정적 가치를 부각시키는 노력은 자연히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 이제는 과학 분야에서 삶을 불행하게 하는 부정적 심리상태가 아니라 긍정적인 정서에 대해 연구하고, 개인의 강점과 미덕을 추구하여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줄 학문이 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긍정 심리학. 12쪽). 일리가 있다. 그가 매우 강하게 “자신의 강점을 완벽하게 계발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약점이나 세상살이의 험난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59쪽)라고 주장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사람에게는 분명히 그런 면이 있다. 부정적인 정서보다는 긍정적인 정서가 충만할 때 뇌의 활동이 활발하고, 삶의 활기가 넘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우호적이고, 난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추진력이 생기는 게 사실이다. 조엘 오스틴이 말하는 대로 목적한 바를 성취하고 성공을 쟁취하는 데는 긍정의 힘보다 더 큰 자산이 없는 게 사실이다. 긍정의 미덕은 정말 많다.
하지만 정말 긍정만이 미덕일까? 긍정적인 것은 신앙적이고 회의적인 것은 불신앙적인 것일까? 인간의 현실은 죄와 불의가 가득한데 긍정의 눈으로 충분할까? 회의와 부정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죄의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은데 정말 긍정의 눈으로 충분할까? 아니다. 긍정주의자들은 회의주의자들보다 정직하지도 신중하지도 못하다. 긍정의 힘을 신뢰하는 것은 매우 천박하고 인간중심적인, 인간의 한계와 연약함과 삶의 신비를 전혀 보지 못하는 가벼운 자기 최면에 불과하다. 나는 누구보다 세상을 긍정하지만 부정의 눈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성숙과 변화만 해도 그렇다.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는 강점을 계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내면의 성숙과 삶의 깊이를 읽기 위해서는 강점을 계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은 대부분 강점과 성공보다는 약점과 실패를 통해 단련된다. 강점보다는 약한 부분이 성숙의 밑거름인 경우가 많다. 강점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교만하게 하는 반면, 약점은 내면의 깊이와 겸허함을 배우게 하는 경우가 많다. 바울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 것도 약함이 강함의 자원이라는 놀라운 비밀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진실로 그렇다. 강점뿐 아니라 약점 또한 주님의 은총이요 선물이다. 무엇이든 극단은 좋지 않다. 긍정의 미덕이 아무리 많다 해도 긍정 일변도는 결코 좋지 않다. 그런데 조엘 오스틴은 지나칠 정도로 긍정 일변도다. 긍정만을 강요한다. 긍정적인 시선만이 진리에 부합하는 것인 양 호도하고 있다. 그러나 긍정만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정직한 태도가 아니다. 긍정만이 진실은 아니니까. 긍정만이 긍정을 낳는 것이 아니니까. 부정의 눈을 거부하는 긍정의 눈은 결국 애꾸눈일 수밖에 없으니까. 부정의 변증법이 없는 긍정은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까.
6. 진정한 긍정
조엘 오스틴이 말하는 긍정의 초점은 지나칠 정도로 인간 중심적이다. 그가 쉬지 않고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 우리의 생각이다. 우리가 믿는 대로 하나님이 행하시니 우리의 믿음이 중요하다고 강변한다. 나는 그가 하나님의 긍정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지 못했다. 비록 “긍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나님이 바로 긍정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긍정의 힘. 127쪽)라고 말하고 있고, 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계속 반복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긍정을 읽지 못했다. 부정과 긍정을 통해 세상과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긍정을, 우리의 약함을 통해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긍정을 읽지 못했다. 그가 수없이 ‘하나님’을 말하고는 있지만 그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내면의 힘, 생각의 힘, 비전의 힘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긍정을 수발하는 조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옳다. 인간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면 조엘 오스틴이 주장하는 [긍정의 힘]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성경을 통해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나 또한 [긍정의 힘]에 매료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내가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에 시비를 거는 것은 그가 강변하는 믿음과 하나님 때문이다. 그의 주장과 예수님의 주장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향해 더 큰 꿈을 꾸라고, 현재에 만족하지 말라고, 너의 재능을 더 발휘하여 세계 최고가 되라고 말하지 않았다. 집 없는 자들에게 그림 같은 집에서 살게 될 꿈을 꾸라고 말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을 얻어 성공의 발판으로 삼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와 평화하라고 했다. 꿈과 비전을 품으라고 도전하지 않고 삶을 전환하라고 도전했다. 복을 소유하는 자가 아니라 복의 통로가 되라고 했다.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인생의 주권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고 했다. 오스틴의 말은 이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따져보자.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조엘 오스틴은 긍정과 부정을 대립적으로 생각하면서 긍정은 선이고 부정은 악이라고 규정한다. 같은 값이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좋은 면을 바라보는 것을 긍정의 마음이라고 주장한다. 아마 우리들의 생각도 대부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긍정은 그런 게 아니다. 진정한 긍정은 내 앞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비록 심히 왜곡되고 부패하여 구원이 필요하지만, 그래서 구원의 은총이 아니면 소망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지켜보시는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긍정이다. 사태의 어둠은 외면한 채 밝음만 보는 것이 아니다. 사태의 밝음뿐 아니라 어둠도 보는 것이 진정한 긍정이다. 긍정 속에 있는 부정을 보고, 또 부정을 통해 긍정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진정한 긍정이다. 나는 부정 일변도로 만사를 보는 것도 매우 혐오한다. 비록 온 세상이 죄로 오염되어 있고, 불의가 판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에는 긍정의 요소가 많이 있다. 그런데 긍정과 부정의 요소를 함께 보지 못하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사시(斜視)에 불과하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지나치게 긍정하려 하지도 말고, 지나치게 부정하려 할 것도 없다. 긍정할 것은 긍정하고, 부정할 것은 부정하는 마음의 자세가 진정한 긍정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진정한 긍정은 오직 하나님의 긍정이어야 한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긍정만이 참 긍정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긍정적인 분이시다.
사람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부와 성공을 추구한다. 부와 성공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언제고 식을 줄을 모른다. 하여, [긍정의 힘]이 부와 성공 신화를 추구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예찬되는 건 매우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부와 성공을 쟁취하는데 있어 긍정의 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테니까. 부와 성공의 간을 건너는 훌륭한 징검다리가 될 테니까. 하여, 나는 부와 성공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긍정의 힘]을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그러나 내면의 깊이와 삶의 중심에 이르기를 원하는 자, 하나님의 긍정에 이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긍정의 힘]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내면의 깊이와 삶의 중심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긍정의 힘]이 징검다리가 아니라 걸림돌일 테니까. 그렇다. 부와 성공을 얻는 데는 ‘긍정의 힘’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조엘 오스틴이 말하는 ‘긍정의 힘’으로는 내면의 깊이와 삶의 중심에 이를 수 없다. 행복한 삶을 호흡할 수 없다. 조엘 오스틴이 강조하는 ‘인간의 긍정’으로는 하나님의 긍정에 이를 수 없다. 조엘 오스틴이 말하는 [긍정의 힘]의 위태로움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부와 성공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긍정의 힘]을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그러나 내면의 깊이와 삶의 중심에 이르기를 원하는 자, 하나님의 긍정에 이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긍정의 힘]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목사님 글 읽으면서 공감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정병선 목사님!
"nurture shock" 이란 책을 읽어보니
너무 많은 칭찬은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다네요. ^^
첫 문장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긍정이 낳은 열매다."에 이미 !! ㅎㅎ
건강 괜찮으시죠? 감사합니다.
정 목사님!
목사님의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전에 옥성호가 쓴 '마케팅에 불든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이 공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인간인 청중이 중심이 되어 버린 기독교에는
예레미야의 애끓는 호소와 선포는
그야말로 죽어 마땅한 범죄이지요.
예레미야를 시드기야 앞세 세운 스바댜와 그다랴와 유갈과 바스훌은
시드기야 왕에게 그를 죽여 마땅하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지요.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렘6:4)
때로 강단에 서서 고통합니다.
성도들을 행복하게 해 줘야 하나?
아니면 제 영혼에 담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나?
이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영적 우월감은 어떻게 부분해야 하나? 등등...
여러가지 많은 걸들을 생각하게 해 주신 목사님의 글을 펐습니다.
그리고 제 자료실에 잘 담아 두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정목사님
안녕하세요.
한국이 매우 덥다는 소식을 인터넷으로 통해, 목사님 댓글을 통해서 실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저 MBC 뉴스에서 유럽도 폭염이라고 전한던데
제가 생활하는 이곳에는 가을 날씨로 아침 저녁이 쌀쌀합니다.
공부하기 좋은 날씨입니다.
한국에 빨리 돌아가 다비아 수련회도 참석하고 싶었는데
능력이 부족하여 논문의 완결도를 높히는데 앞으로 2-3개월 더 머물려야 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서평하신 긍정의 힘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저 자신을 되돌아 보면 긍정 보다 부정의 측면에 더 잘바라보는데 익숙합니다.
그래서 최근에 긍정을 먼저 이야기하고 난뒤 부정의 면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정을 제기하는 긍적인 측면 보다는
부정에 바라보는 제 배경을 먼저 언급하더군요. 직업과 학문 경력을 주위 사람들에게 소개를 하지요.
비판적인 평가를 하지 않고 긍정을 강조 하는 사람들은 목사님 주장 처럼 사회에서 성공하기 쉽습니다.
잘못된 점을 알고도 묵인 하고 현실을 긍정하다는 것은 사회나 교회에서 기득권 세력을 동조하는 것이나 다름 없지요.
그래서 그들은 기득권의 지위를 공공히 하기 위해서 긍정의 힘을 내세우고, 순종하고 요구합니다.
교회에서 순종하라고 요구하는 목사님 들을 설교를 들어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진정한 순종을 이야기 하기 보다는
그 이름을 이용하여 목사의 결정이나 장로들이 내린 결정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으니 아무 말하지 말고 그저 따라가기만 하라는 요구를 성도들에게 강조하지요.
거기다 부정의 측면을 이야기하라도 히면 말하는 사람의 역점을 먼저 되돌아 보라 요구하고,
상대가 바른 비판의 소리를 받아 들이는 조건으로 서로 신뢰가 구축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요 신뢰를 구축되면 훨씬 소통이 편하고 쓴소리를 귀를 귀울릴 수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뢰 때문에 부정의 소리 즉 쓴 소리를 하기 쉽지 않지요. 그런 소리를 사전에 막기 위하여
인간적 관계를 선호하는 경우가 있지 않을 까요.
이러니 우리 사회에서 끈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기득권에서 사탄이나 좌파로 색깔을 입히려고 하지요.
기득권 세력에 비판하는 집단들은 성공하기가 힘들고 사회에서 인정받기가 힘들 기 때문에서
주변인으로 머물기가 쉽지요. 하나님의 시각이 아닌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런 같습니다
목사님 말씀하신
긍정에서 부정을 보고 부정에서 긍정을 볼수있는 능력이야 말로 진정한 긍정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노자가 말했던가요 화광동진...
영면을 동시에 볼 수있는 능력을 겸비하기 위해야 눈을 감을 때 까지 노력해여 겠지요.
'교회됨의 조건'에 관한 글은 댓글이 달리지 않았는데 '긍정의 힘' 의 글에 댓글이 많은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 까요.
더위에 건강하세요.
고맙습니다.
다비아 가족 모두에도
행복한 여름이 되시길...
좋은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