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27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요한은 이어지는 합창 소리를 듣습니다.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라.’ 이런 말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즐거워하고 기뻐할 만한 일들이 흔하지 않으니까요. 소소한 즐거움과 기쁨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먹는 즐거움도 있고, 노래하는 기쁨도 있습니다. 걷는 즐거움과 말이 통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 저 깊은 곳에는 슬픔과 아쉬움과 분노가 가시지 않습니다. 일례로 우크라이나 지역과 팔레스타인 가자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전쟁 자체도 그렇지만 21세기 호모 사피엔스가 그런 전쟁을 막아낼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다는 사실이 더 비극적입니다. 전쟁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는 지도자들도 버젓이 큰소리칩니다.
요한이 말하는 즐거움과 기쁨의 근거는 ‘어린양의 혼인’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와 예수의 재림과 세상 완성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이 혼인에서 신부는 교회입니다. 신부는 혼인을 준비해야 합니다. 오로지 거기에만 자신의 영혼을 집중해야 합니다. 다른 것을 신경 쓸 틈이 없습니다.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교회는 흐트러짐 없이 혼인을 준비해야 합니다. 교회가 종말론적 공동체라는 말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교회는 어떻게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를 준비해야 하나요? 교회가 어린양 혼인 잔치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교회가 생명 완성을 주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준비는 종말론적 통치가 무엇인지를 세상에 알리는 일입니다. 거룩한 잔치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사방에 전하는 것입니다. 그 잔치가 무엇인지를 계 3:20절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도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와의 친교 식사를 가리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멀리 떠났다가 거지 신세로 고향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벌인 아버지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삶의 내용과 삶의 방향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사는 공동체와 개인은 그야말로 어린양 혼인 순간에 신부로서 부족할 게 없겠지요. 그 순간이 이미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 겁니다. 모르는 사람은 모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