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5일 ‘어록’2(4)

조회 수 1700 추천 수 8 2008.06.04 23:32:08
2008년 6월5일 ‘어록’2(4)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자칫 기독교 신앙에서 금욕과 자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유럽의 중세기 기독교는 이런 금욕적인 정서가 팽배했습니다. 청교도, 각성신앙, 부흥운동도 크게 보면 이런 흐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삶을 가능한대로 부정하고 거룩한 삶에 매진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교회와 세속을, 성과 속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이유는 일단 이 세상이 부패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이 부패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에는 악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 세상을 부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외면하는 태도입니다.
더구나 세상의 삶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등지고 산다 해서 우리의 속이 거룩해지는 게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 세례 요한은 광야로 나갔지만 예수님은 죄인과 세리가 판을 치는 세속의 중심으로 돌아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는 진술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의 운명을 던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삶은 위태롭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은 이 세상과 불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것을 적나라하게 가리킵니다. 비록 위태롭지만 예수님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기는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오늘 본문이 말하는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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