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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무안 공항에서 벌어진 참극으로 인해서 우리 마음이 무겁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유가족들과 이런 슬픔을 자기의 슬픔으로 받아들이는 이들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25년 예배를 준배해야 할 순간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52번의 주일 공동예배가 진행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1월은 아래와 같이 예배가 진행됩니다.
예배를 조금이라도 깊이 있게 드리고 싶은 분들은 성서일과의 나오는 성경구절을 미리 읽어보십시오.
설교 제목은 바뀔 수 있습니다.
2025년 1월 | 성서일과 | 설교제목 | 찬송가 |
5일 성탄후 2주 「다」해 06 | 렘 31:7-14 시 147:12-20 엡 1:3-14 요 1:10-18 | 성육신의 신비 | 131 다 나와 찬송부르세 132 주의 영광 빛나니 110 고요하고 거룩한 밤 |
12일 주현 후 1주 「더」해 07 | 사 43:1-7 시 29:1-11 행 8:14-17 눅 3:15-17, 21-22 | 세례와 성령 | 68 오 하나님 우리의 창조주시니 베델 178 누군가 기도하네 186 영화로신 주 성령(1,2,4) |
19일 주현 후 2주 「다」해 08 | 사 62:1-5 시 36:5-10 고전 12:1-11 요 2:1-11 | 혼례와 포도주 이야기 | 23 만입이 내게 있으며 국악 39 내가 산을 향하여(1) 289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1-3) |
26일 주현 후 3주 「다」해 09 | 느 8:1-3, 5-6, 8-10 시 19:1-14 고전 12:12-31(전) 눅 4:14-21 | 기쁨의 근원 | 32 만유의 주재 베델 99 오 사랑의 예수 182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1-3) |
오늘로 2024년은 끝나고 내일부터 2025년이 시작됩니다.
해 바뀜이 저에게는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제가 하나님께 얼마나 가까이 가는가, 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는 게 중요하지 않고 영적 성숙도가 중요한 거지요.
이걸 신학 용어로 바꾸면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저는 영적으로 조금씩이라도 성숙된다는 걸 느낍니다.
이게 자랑거리는 물론 아닙니다. 감사과 찬양의 이유입니다.
영적인 성숙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예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 전체를 압축해놓은 의식이니까요.
2025년에도 저는 다샘교회 주일 공동예배를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다샘교회가 대표하는 대구성서아카데미 회원들의 예배입니다.
2026년데도 이런 책임이 어질 수 있을까요? 아무도 모르죠. 일단 2025년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1월에 네 번의 예배가 있습니다. 여기서 설교 제목만 약간씩, 맛보기로 설명해볼까 합니다.
5일- 성육신의 비밀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그리스도교의 모든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게 말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의 스토아가 어떻게 예수인가요?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말씀(다바르)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다바르가 로고스이고 세상의 원리이자 근본입니다.
우리의 가장 초보적인 교리로 바꾸면 하나님이 인간이 된 겁니다.
초월이 내재로 변한 겁니다. 영원이 지금 순간이 된 겁니다.
창조와 종말이 역사의 한 시점에서 하나가 된 겁니다.
그 한 시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존재 근거는 이 한 가지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삼위일체가 성립되고요. 그 비밀을 붙들고 2025년 한해를 살아내야겠습니다.
12일- 세례와 성령
세례는 예수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사는 종교 의식입니다.
사실은 인간의 삶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삶과 죽음, 또는 죽음과 삶입니다.
모두가 살다가 죽습니다. 겉모양은 달라서 그 중심은 똑같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우리는 충만하게 살아낼 수 있을지요.
죽은 것처럼 사는 게 최선입니다.
죽은 자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됩니다. 아무도 건들지 못합니다.
부러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완전히 다르게 삽니다.
예수와 함께 산다는 것은 하늘나라에 완전히 의존해서 산다는 뜻입니다.
이런 세례가 자칫 종교 형식이나 윤리 규범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세례를 세례답게 만드는 힘이 성령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주어졌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는 세례의 능력을 어떻게 느끼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19일- 물과 포도주 이야기
예수께서 잔치집에 가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게 역사적 사실일까요? 왜 요한복음에만 나오고 공관복음에는 나오지 않을까요?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명시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빈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하시고, 그것을 떠서 잔치 손님에게 주라고 하자
그걸 마신 사람들이 이전보다 더 좋은 포도주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예수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 행위자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인가요?
그런 기적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핵심이 아닙니다.
홍해 사건이나 요단강 사건이나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도 그것 자체가 핵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메타포입니다. 아주 강력한 메타포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들의 변화를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물과 포도는 완전히 다릅니다. 똑같은 액체지만 성질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지만 삶의 질은 완전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26일- 기쁨의 근원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나오는 본문입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그들이 모세 오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았다는 이야기인데, 후반부에 '여호와로 인한 기쁨'이 언급됩니다.
구약의 그들도 하나님 여호와를 믿었고,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니까
기쁨의 근원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통합니다.
이 기쁨은 존재론적 기쁨입니다. 우리가 생산해내는 기쁨이 아니라 받을 뿐인 기쁨입니다.
기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떨어지는 게 아니라 삶 자체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답은 우리가 다 압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입니다. 문제는 그 답이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에서 어떻게 경험되는가,입니다.
더구나 온갖 엔터테인먼트로 돌아가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믿음의 기쁨이 어떻게 가능할는지요.
작년에 다비안 회원들의 펀드로 제작한 판넨베르크의 설교집 제목이 '믿음의 기쁨'이었습니다.
만약 믿음의 기쁨을 알고 느낀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겠지요.
한달 설교 제목만 잠시 돌아봤습니다. 앞으로 성경 본문을 더 자세하게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써야합니다.
2025년부터 설교할 때 원고를 가능한 한 덜 보면서 설교할 생각입니다. 청중들과 눈맞춤의 순간이 늘어나겠지요.
원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생생한 설교 현장의 느낌을 살려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한해 저의 설교에 귀를 기울여주신 분들에게 다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예배 현장이나 온라인 예배로 함께해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주보에 관심을 보여주신 분들도 계시고요. 모두 감사드립니다.
2025년에 예배와 말씀 안에서 복된 길을 함께 걸어갑시다.
12월31일 밤 10시18분에
원장 정용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