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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예수 그리스도를" 항목이 끝납니다.
다섯번 강의가 됐군요.
예수, 그리스도가 가리키는 신학적 의미가
얼마나 복잡하면서도 심층적인지를 배웠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이 항목을 끝내면서
두 가지 관점을 더 분명하게 제시했습니다.
1. 이 신앙고백은 우리 존재의 완전정은
우리 내부의 어떤 생명 실행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임박에 돌아서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요구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2. 이 신앙고백은 더 나아가서
기독교 신앙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희망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텍스트가 있는 분들은 여러번 읽어보십시오.
감사.
다섯번 강의가 됐군요.
예수, 그리스도가 가리키는 신학적 의미가
얼마나 복잡하면서도 심층적인지를 배웠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이 항목을 끝내면서
두 가지 관점을 더 분명하게 제시했습니다.
1. 이 신앙고백은 우리 존재의 완전정은
우리 내부의 어떤 생명 실행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임박에 돌아서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요구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2. 이 신앙고백은 더 나아가서
기독교 신앙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희망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텍스트가 있는 분들은 여러번 읽어보십시오.
감사.
곧바로 댓글을 달지 않고 좀 묵혔다가 달려니 생각이 정리되는 게 아니라 더 많아집니다.ㅎㅎㅎ
23강의 텍스트는 목사님의 권고가 아니라도 여러 번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 고백의 대상으로 할 때 명백히 해야할 2가지 문제.
좀 길긴한데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1.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특별히 예수의 구원자적 의미를 드러낸다.
이 이름은 이미 우리에게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이 보여준 결과를 더욱 명료하게 해준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사신에 직면해서 결단하도록 인간을 강요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이 실행되기를 요구했다고 하는 것,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의 미래 안에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확증되었다는 것,
그러나 또한 예수의 이름 가운데에서의 구원이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미래적 친교를 나누며
그의 부활에서 나타난 새로운 삶에 참여하는 것인데
그 구원이 예수를 믿는 모든 자와 근본적으로 예수를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개방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의미는 마치 어떤 다른 현상에도 똑같이 전가될 수 있는 것처럼 외부적으로 예수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 구원의 의미는 그에게 관계되는 것이며 그에게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예수에 대해서 언급한다고 해서 당연히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내재하는, 그리고 그에 의해서 출발하는 구원의 능력은 이런 방식으로 명시적 특색을 드러내야 하며
거론되어야만 한다. 이런 근거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그에게서만 의미를 획득하게 되며,
그에게서만 완전해지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비록 우리의 현존재가 완전해지는 것이 모든 인간의 갈망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는 완전해지거나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의 운명이 강요하는 매우 많은 것들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미 시작된 여러 종류의 것들이 분쇄되며 형태를 획득한 것들이 위기나 태만 혹은 오판으로 인해서 사라진다.
결국 모든 것은 그리고 가장 충실하게 실행된 생명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죽음 안에서 개방된 질문으로만 남아있게 될 조각들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내재해 있는 파멸의 극단적 상황을
그가 여전히 그 안에서 살았던 하나님의 임박과 중재시켰다.
하나님의 임박은 지상적 삶이 성취되었다 해서 실현되는 게 아니며
또한 그것이 분쇄되었다고 해서 무기력해지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지 우리의 현존은 피안적 성취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이 세상으로부터 저 세상으로 도피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 존재의 완전성에 대한 신뢰로부터 발생하는 이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옳다.
이 완전성은 우리 생명의 현재적 리얼리티 가운데서 명료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
단편적인 것을 통해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자에게 오직 단편적으로만 지시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대한 예수 사신을 통해서
그리고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되고 보증되어 있다.
이에 근거해서 우리의 현재 생명이 처한 상황, 경험, 기회는 이 완전함의 부분으로서 존재하고 경험될 수 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서는 그 토대를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2. 그리스도이신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은 우리의 삶이 예수에게서 구원받고
완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의 토대를
예수에게 둔다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이를 뛰어넘어
기독교 신앙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희망들과 결합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희망들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대로 예수를 통해서 변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예수가 이러한 희망(전통적인 정치적 메시아상)을 물리쳤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희망들이 예수현상과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메시아 표상의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해가
예수의 사신을 통해서 변화된 것보다 훨씬 심층적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일종의 연속성이 즉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 칭호의 위임을 의미심장한 것으로 드러내 보인
그리고 실제로도 가능하게한 한 연관이 잔존한다.
그리스도 칭호가 예수에게 부여되어 새로운 의미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시 기독교는 그리스도 칭호에서 유대의 메시아 희망이 예수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대의 메시아 희망이라는 불빛 가운데서만
예수 현상에 내재한 구원 의미가 완성된다고 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대 연관이 아니고서는 아마도 역사적인 예수 현상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요소들이 결코 알려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도 역시 기독교회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보여준 역사를 상속받아야 하며,
그리고 예수 현상과 예수 역사의 의미가 충만하게 유지되기를 확실히 원한다면
이러한 유산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많은 기독교인들과 이 부분을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판넨베르크는 참 훌륭한 신학자라고 생각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