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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편도 전형적인 탄원시입니다.
우리는 이런 탄원을 드릴만큼 영성이 없습니다.
여기에 이르려면
생명에 대한 큰 충격을 경험해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죽음에 이르는 경험을 통해서
이런 탄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달리 우리는 그저 무미건조한 일상에
파묻혀 있겠지요.
주여, 도우소서.
우리의 신앙고백이 허공에 메아리가 되지 않으려면 신앙의 뿌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뿌리가 우리의 환경을 뛰어 넘게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봤어요.
가난과 부, 건강과 병약함, 장애와 비장애..그리고 억울하거나 억압받는 상황에 처해있다 할지라도요.
요즘 큐티의 <고귀한 낭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삶의가치를 정할 수는 없다고 보는데요.
제 각각 가치기준이 있는데, 그걸 두고 논쟁 한다는 것이 소모전이고, 헛된 낭비라 여겨져요.
제 생각이지만, 소위 비주류신학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게 아닌가 생각 되어 질 때가 있어요.
저는 수도원영성을 부정적으로 보시는 분들은 수련자체를 헛된 낭비라고 보시는 거 아닌가 싶은데요.
그렇게 기도만 하고 개인의 영성에만 치우치는 것은 이기적인 신앙생활이라는 거지요.
기독교 신앙은 나눔의 신앙인데 이웃 사랑하라는 말씀과 위배된다고요.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은 당연히 신앙을 강화시킬 수 밖에 없겠지요
목사님의 말씀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고 보시는 분들은 이 부분을 강조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이웃사랑’이라는 개념이 재해석되어야 된다는 생각을 해 봤어요.
신학적으로 깊이 해석되지 않은 이웃사랑은 휴머니티에만 머물게 되지 않을까 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