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할게 많았고 손님들도 많이 오셔서 저는 개인적으로 분주했답니다.
하지만 예배시간만큼 아파트와 분위기가 달랐답니다.
클라라님 꼭 한 번 내려오시고 그 전에 서울창립예배때 뵐께요
그리고 주일 설교외엔 이제 제가 하는건 링크만 걸면 되니 별 애써는거 없답니다.
열심히 시청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웃겨님도 먼 곳에서 보시네요 동영상이 끊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될텐데
항상 건강하시길
제가 목사님 말씀을 쫓아온지 햇수로는 만 4년이 흘렀어요.
이 4년동안 제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아시면, 목사님 기절하실 거예요.^^
그렇지만, 아직도 목사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자신이 없는걸 보면,
앞으로 가야할 길이 얼마나 멀까 싶어요. 아득하지만,
목사님 말씀처럼 천천히 걸어 가 볼려구요.
목사님,
오늘은, 제게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드리려고요.
목사님께서는 시시할지도 모르겠어요^^
요새 제가 배철현 교수 강의를 듣잖아요?
(다바르에 대한 강의를 듣다가, 목사님께 질문하려고 꼼꼼히 메모해 두었지요)
다바르의 뜻이 원래는 말씀과 행함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헬라어로는 그말에 대체할 말이 없다고요.
로고스라는 의미로는 그 함의를 품어낼수 없다고 하면서,
로고스와 에르곤을 합쳐야 겨우 비슷무레하게 된데요.
그러니 히브리적사고와 헬라적 사고에서 빚어지는 충돌이
초대교회에서 당연히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구요.
저는 들으면서 언른 지난달 말씀하신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련해서 생각해 보았지요.
(제가 ‘교회 창립 변’에 댓글을 달았지만)
사도바울이 말한 믿음이 혹시 이 말-다바르-에 대체할 수 있는
믿음을 말한 것은 아닌가 해서요.
목사님께서 해석해 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에 완전히 의존하는 삶'이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 믿음은
행함을 배제한 믿음을 말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믿음과 행함을
말하고자 한게 아닐까 해서요.
그가 히브리인들의 사유체계를 모를리도 없고요.
참 이상하게도, 제게는 이 ‘믿음’으로 히브리적사고와
헬라적사고가 상충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조화를 이루는 걸로 보여요, 목사님,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여태껏 공부해온
‘교리화된 믿음’에 대해서 재고할 필요가 있는거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목사님이 말씀하신 ‘생명지향적인 삶’과 ‘은총지향적인 삶’이
이 믿음과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서 생각되네요.
왜냐면, 이런 믿음을 구축하려면,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에서
동떨어진 삶을 살수가 없으니까요.
저는 여기서, 믿음이 예수님을 통해서 발현되지만,
사도신경에서 말씀해 주셨듯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명세계를 떠나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에요.
이 믿음과 생명이 이렇듯 끈끈히 붙어 있다면,
우리의 삶이 당연히 ‘생명지향적인 삶’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요.
또 이런 삶을 살아 낼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가능하다고 보여 지는것도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에서는 차등이 없다는 생각에서 이지요.
우리가 장애인이나, 소외계층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 질 수밖에 없는 거고요.
그들이 우리 눈에 형편없이 보일지라도,
우리의 동정을 받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에서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라는 생각때문이지요.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앞서서요.
목사님, 제가 너무 비약한 건가요?
그런데, 저는 요새 이 주제로 몇 주째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어요.^^
사실, 이 말씀은 제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생명지향적인 삶’과
‘은총지향적인 삶’으로 모든 세상사의 의문이 다 풀릴 것 같다니까요.
강의에서도 하나님 미래에 대한 확신의 근거도 생명의 완성이라고 하셨네요.
여기서의 확신도 이‘믿음’이지요?
전에는 상상도 못했는데..
생명, 은총, 믿음,사랑, 떠남,자유,구원..들이 이제는 숭어같이 파다파닥 뛰어 오르네요^^
배교수의 말을 빌리면, 그들이 태고적 부터 말을 해 왔데요.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아마 역사를 말하고자 한 것 같아요)우리에게 전수되어온 거래요.
-그 분은 언어학자여서 그런지 참 많은 소스를 주시네요. 언어의 기원에 대해 듣고 있으면,
제가 기원전 몇만년전, 몇천년전의 사람으로 착각한다니까요.-
이른 새벽인데..
일찍 잠 깨서 횡설수설한건 아닌지..
그렇다면, 애고고.. 부끄러워라~~^^
이건 뭐 신학자의 글이네요.
신학의 세계로 들어가서 무언가를 실제로 부딛치고, 느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서 점점 더 풍요로운 영성이 열리는 글이라는 게 전달되는군요.
내가 코멘트 하고 말고도 없어요.
기독교 용어들이 얼마나 심층적 차원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지금 몸으로 느끼고 있군요.
그게 신학적 사유(ein theologisches Danken)에요.
그런 틀이 탄탄해지면 본격적인 신학책을 읽어도 좋습니다.
위에서 다바르에서 시작해서 생명과 구원의 세계로 나가고 있군요.
그리고 역사, 전승도 거론되구요.
다시,
클라라 님은 이제 모세가 하나님의 등을 힐끗 보았듯이
신학의 그림자를 흘낏 본 거에요.
그 신학은 모세의 경험이 축적된 거거든요.
그 실체는 아무도 볼 수 없답니다.
그러니 신비랄 수밖에요.
그러니 전혀 차원이 다른 현실성(Wirklichkeit)이랄 수밖에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견인하고 규정하는,
헤겔의 표현으로 무한한 현실성이랄 수밖에요.
다바르!
하나님이 다바르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다바르는 당연히 행위를 포함하는 거지요.
하나님을 궁극적인 현실성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하나님에게 실제로 가까기 가려고 몸을 기울이지요.
바울의 믿음도 당연한 겁니다.
그가 율법과 대립적인 차원에서 믿음을 강조한 이유는,
그리도 루터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강조한 이유는
율법과 행위가 인간의 업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지
행위 없는 믿음을 말하려는 게 아니지요.
사랑에 휩싸인 사람은 행동하게 되어 있지요.
그 행위가 모두에게 동일한 방식은 아니지만요.
앞으로 나에게 검증받지 않아도
클라라 님은 자기 길을 잘 갈 수 있을 거 같군요.
그런데,
새벽에 잠을 자 두는 게 좋을 텐데요.
주의 은총이.
추신: 배 교수의 강의가 좋은 것 같군요.
열심히 들으십시오.
11강도 오늘 교회 가기 전에 낭독했는데 댓글은 이제 답니다.
꼭 댓글을 달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 달아놔야 좀 할 일을 한 것 같은 느낌?ㅎㅎㅎ
요즘 바르트의 <복음주의 신학입문>을 공부하고 있는 터라 강의 중간에 말씀하신 변증법 신학이 잘 이해되는군요.
판넨베르크와 바르트의 차이를 확실히 알게 되는 강의이기도 했습니다.
흐름과는 상관이 별로 없지만
"실제로 신적인 것에 대한 철학적 연구는 다신교적 민간신앙에 맞선 투쟁에서 신학의 동맹자가 되었다"라는
언급은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철학"을 읽어보고 싶게 만들었는데요.... 흠... 책은 진작에 쟁여뒀습니다만
제 수준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인지 궁금하군요. 서문인가?? 그거 읽고 책 덮어버린 기억이 있는데요...ㅠ.ㅠ
아무튼 참 재미있습니다. 가을에 녹취록 새 버전이 나온다니 기대가 됩니다.
사실 욕심을 내면 새 버전을 몇몇이서 모여 읽고 단순히 교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의 첨가나 삭제 여부를 의논해서 반영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그건 현실적으로 좀 어려울 것 같아서 그만뒀습니다. ㅎㅎㅎ
그럼 이만.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기억은 안나지만,
정목사님의 설교를 보고 예수와 하나님과의 연관성에 대해 질문한것이 생각납니다.
아마도 목사님은 상세히 설명을 해주셨지만 그때의저는 이해를 못했을 거예요..ㅎ
이제 다시 판선생님의 사도신경 해설을 정목사님의 강독으로 듣고 읽는데, 좀더 분명하게 이해가 됩니다.
오직 예수만 생각하고 믿었던 저로서는 참 새롭고 재밌게 이번 강의를 듣습니다.
하나님이 관계된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예수의 사신..
그리고 변증법적 신학에 대해서도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맞선 변증법적 신학을 설명할때마다..
자유주의 신학이 구체적으로 무얼까? 하고 생각했는데요..
인간중심적이고 윤리적인 것이라고 하셨네요.
변증법 신학은 하나님중심적이고 계시 중심적이다..라구 했구요.
그런데 왜 바르트를 자유주의 신학자로 알고들 있는지..? 참 이해가 안갑니다.
따라가기가 쉽지 않은 내용이네요.
판넨비르크란 사람은 뭐 이렇게 어렵게 얘기를 하는지..
목사님 설명이 있어 망정이지...
이 단무지가 철학과 신학 사이에서 낑겨 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