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 42강, 제11장 성령(1)

 

안녕하세요? 오늘 공부 42강입니다. 오늘부터 새로운 주제로 넘어갑니다. 성령론이예요. 성령. 판넨베르크의 이 책에는 이런 제목이 붙었어요. 11장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성령론은 사도신경에서 세번째 항목이라고 할 수 있어요. 첫번째는 창조자 하나님이예요. 두번째는 예수 그리스도 이시죠. 세번째 성령입니다. 사도신경이 결국은 이 삼위일체의 구도에서 형성된 초기기독교의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죠. 첫번째 항목은 창조자 아버지 하나님 두번째는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세 번째는 성령입니다.


여기서 성령은 특별히 한국교회에서 명문적으로는 중요하게 다뤄지면서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상황에 있는 것같습니다. 무슨 말이 나올때마다 성령,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과연 그 성령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지 물으면 대답이 좀 궁색한 거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 일단 전체 신앙의 틀에서 본다면 신앙이 신학의 바탕이 없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우리의 인식, 이해, 이성적 판단, 의지적 동의를 거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이 바로 신앙의 모든 것인 것처럼 그렇게 되고 있는 거죠. 이러한 신앙의 경향에서 성령이 오도되고 오용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면 우리가 그것을 믿을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인거죠. 열광주의, 광신주의 이러한 신앙의 특성을 성령에 대한 오해가 더 강화시켰다고 볼 수 있어요. 홍수중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처럼 성령에 대한 온갖 이야기들과 경험들이 인플레이션처럼 되고 있는데 결국 성령에 대한 이해는 아주 부족한 그러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 성령을 뭔가 초자연적 능력으로 생각을 할거예요. 그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죠. 초자연적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적이라는 것하고 어떻게 다르냐하는 그러한 생각들도 많이 해야 되는데요. 오늘 우리가 그러한 것까지 하게되면 자꾸만 말이 옆으로 돌게 되는거니까 접어두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을테니까요.


어쨌든 성령이라고 하는 것을 성서적 바탕, 그리고 신학적인 바탕이 전혀 없이 경험론적으로만 알고 있다는 그러한 한계가 우리들에게 있는거죠. 어떻게 설명을 하면 좋을까요? 이런게 좋겠군요. 젊은 남녀가 만나서 첫눈에 반했다고 합시다. 그들은 서로에게 빠져들잖아요. 그 빠져드는 경험이야말로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랑을 성령이라고 한번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을 젊은 남녀들에게 대입해서 본다면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거에요. 우리는 서로 사랑에 빠졌습니다. 사랑을 믿습니다. 나는 그 여자를 보고 그 남자를 정말 사랑합니다. 정말 사랑합니다.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확신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그런 경험이 잘못된거는 아니죠.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죠.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여러가지 경험들이 사랑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죠. 어떻게 보면 젊은 시절의 불장난일 수도 있습니다.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거죠. 물론 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러한 순수무구한 로미오와 줄리엣같은 사랑이라고 할까요. 무조건적으로 남녀가 서로 끌리는 사랑을 제가 폄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을 절대화하는 오류를 지적하는 거죠. 그런 것들이 기독교 신앙생활에서도 성령과 연관해서도 자주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령이 누구일가? 혹은 무엇일까를 일단 좀 생각해 보시죠. 이 성령에 대해서는 성서에서도 많이 이야기를 했구요. 그것을 또 신학의 역사에서도 많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전제해야 할 것은 그렇게 많이 언급했지만 그것을 우리가 지금 결정적으로 딱 집어서 무엇이다 이렇게 말하기가 어렵다고 하는겁니다. 성령은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바로 하나님이시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하게 해명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바로 성령도 그와 같은 거거든요. 이거를 인제 전제하면서 그래도 성서와 기독교 역사가 어떻게 성령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는지를 찬찬이 따라가면 가깝게 접근할수 있는 거죠. 요게 신학하는 사람들, 혹은 기독교 신앙을 좀더 진리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해명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겪게 되는 긴장, 혹은 딜레마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많이하고 또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 모든 실체를 샅샅이 말할 수 없다는 사실과 그리고 우리가 꾸준히 진리의 차원에서 인식의 길을 가야된다고 하는 이 사실이 긴장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기껏 해봐야 그렇게 해봐야 알지 못하는데 그거를 좀 아는거 하고 모르는거 하고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이런 말이 가능한거죠. 그런 신학적인 사유 이런 것들이 별로 쓸모가 없다는 반론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하느냐 하는 거죠.


이렇게 비유적으로 말할 수 있겠군요. 여기 코끼리 한마리가 있는데 그 안에 세균이 산다고 합시다. 어떤 세균은 조금 더 노력해서 코끼리 털을 열개정도 알고 있구요. 어떤 세균은 그런게 없어서 털 한쪼가리만 알고 있고 어떤 세균은 아예 그것을 알지 못하고 코끼리 살갗에 붙어서 그 진액만 빨아먹고 있다고 할때 이 각양의 세균들에게 코끼리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을까 없을까하는 겁니다. 절대적인 사건, 그 존재앞에서는 우리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차이가 너무 미미하기 때문에 도대체 이런 신학적인 노력이 필요한가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한계, 회의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혹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모든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식론적 노력을 포기할 수 없잖아요. 이거는 우리가 그렇게 노력해서 어디 도달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 주시는 그 계시 사건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하는 최소한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거는 보기에 따라서 아주 작은 것 같지만 절대적으로 중요할 수도 있는 거예요. 역사 과정이기도 하구요. 제가 든 예들, 코끼리에 붙어 세균들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그러니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피부에 붙어서 진액만 빨아먹는 세균에 머문다면 코끼리 전체가 계시하는 사건에 결국은 도달하지 못하게 될겁니다. 그러나 코끼리 털을 하나 하나 천천히 옆세계로 향해서 알려고 노력하는 세균이 있다면 결국은 언젠가는 코끼리의 실체가 드러날때 그것을 알게되는거죠.


그 궁극적인 실체를 알게되는 과정까지가 역사죠. 그 역사를 무시하느냐 아니면 그것을 인정하느냐 따라서 우리 신학적인 신앙적인 인식 사유 이런 것의 유무도 결정이 된다고 볼 수 있어요. 역사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러면 이제 신학이고 뭐고 할 것없습니다. 그냥 감나무 밑에서 입을 열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모든 것을 결국은 다 하나님이 알아서 초역사적으로 해결하실 테니까 우리끼리 역사를 통해서 진리에 도달하느냐 그런 입장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인정한다면 역사를 하나님의 계시로 이해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헤겔과 판넨베르크의 역사로서의 계시의 개념에 관계된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신학적 논증과 인식, 이러한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뭐 헤겔과 판넨베르크만 아니라 2천년 기독교 역사가 꾸준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투쟁한 역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연관된 문제입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지나갔죠? 이 성령이 누구냐? 무어냐 하는 이러한 질문을 우리는 아주 부단하게 해야되구요. 그러한 질문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기 노출인 이 계시앞에서 우리가 바르게 영적인 감수성을 갖고 대할 수 있는 겁니다.


전체적인 얼개를 정리하고 판넨베르크 이야기를 다루어야 되겠군요. 성령이라는 이 단어는 신구약 성서에서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구약성서는 히브리어인데요. 루아흐 영입니다. 신약성서의 언어인 헬라어는 그거를 프뉴마라고 합니다. 둘 다 똑같은 뜻이에요. 재미있는 것은 그 영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 영이라고 하는 뜻만 아니라 바람이라고 하는 뜻으로도 썼습니다. 그들에게는 루아흐라고 하던지 프뉴마라고 불렀던지 히브리, 헬라사람사이에 공히 영과 바람이 일치된거죠. 그게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는 좀 그들의 그러한 생각이 가소롭다고 여겨질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바람이 영이냐? 바람은 공기의 이동, 대류인데 그거를 영이라고 생각했다니 참 고대인들은 어리석다 이렇게 생각이 들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물리학적으로 생각하는 그방식이 우리들에게 못미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근본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한 점에서는 우리보다 못한 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람을 잘 생각해 보세요. 그것을 실질적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봄에 따뜻한 바람이 불잖아요. 고대인들이 그거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이 바람의 실체를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따뜻한 바람이 불면 땅에서 생명이 솟아난단 말입니다. 또 가을이 되어서 찬 바람이 불면 땅에 있는 생명들이 움츠려 든단 말이예요. 그리고 어미니 배속에서 아기가 탄생되어 나올때 숨을 쉬잖아요. 그게 바람이거든요. 숨쉬는게 바람. 그리고 죽게 되면 그 숨이 그치잖아요. 바람이 그치는 거죠. 결국은 바람이 생명이다.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영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바람이라고 하는 물리적인 현상에 대한 이해가 없었지만 그들이 루아흐나 프뉴마라고 하는 단어를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핵심은 생명을 일으키는 힘이 바로 그거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이 누구냐 무엇이냐고 할때 그런 대답이 가능한거죠. 생명의 능력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기독교인들이 그런 정도로 이 영을 폭넓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죠. 좁혀 놓았죠. 마음을 끌어 주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라고만 생각합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성령을 받으면 방언하고 확신이 생기고 또 그러한 은사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처럼, 또 치병, 치유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좁혀 놓은 거죠. 성서는 그렇게 좁은 의미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구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명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 이해하는 거죠. 전쟁을 승리하게 하는 힘으로도 이해하는거죠.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생명의 놀라운 사건들을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오늘 우리들은 생명현상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현대 생물학이 말하고 있는 그러한 생각인 문제들이요. 또 물리학이 말하는 현상들이 말입니다. 양자의 문제라든지 장이론이나 초끈이론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다 생명과 연관되는 문제들이 아니겠어요. 그러면 성서가 말하는 성령과 물리학이 말하는 장의 현상, 장이론과 어떻게 연관이 될까요? 생물학에서 유전공학, 배아복제라든지 그런 말들이 있잖습니까? 그러한 생물학적인 생명기능들과 성서가 이야기하는 성령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말이죠. 성서시대와 그리고 중세기때,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이러한 새로운 물리학과 생물학의 생명현상의 작용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 못했을때는 이런 문제들이 별로 성령을 이해하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렇지 않는 상황에 살고 있는 겁니다. 성령에 대한 질문은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나오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네. 고런 정도로만 가닥을 잡고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본문으로 천천히 들어가겠습니다. 165쪽 11장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텍스트를 좀 읽겠습니다.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은 오늘날 기독교 전승을 언급할 때 특별히 자주 논의되는 진술은 아니다. 그렇죠. 성령이 많이 언급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대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많이 언급된거죠. 그것에 비해서 성령은 그 중심주제로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거는 기독교 역사의 사실이죠. 그 다음 보겠어요.

그 이유는 물론 기독교 신앙이 성령에 대해서 무언가 일반적인 동의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다 완전히 드러나서 모두가 다 인정할 만한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여 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성령에 대한 현대적인 언급이 어떤 기준에서 볼 때 난해하며,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것에 대해 동의 얻는 일을 방치해 두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신학적 해명이 일단 좀 어렵고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도록 해명하는 작업에서 열심을 내지 못했다. 그대로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에 대한 논의가 잘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죠.

이 성령이라는 말을 영적인 현실성으로 생각하는 경우에 곧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성령과 영적인 현실성을 연결시킬때 우리가 질문해야 될 문제들이 나와 있는거죠. 연결이 잘 되어 있는거예요. 성령과 영적 현실성, Spiritual Reality. 영적인 현실성, 성령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 신앙의 많은 용어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생각하는 그러한 훈련들이 필요해요. 한국의 기독교인들 중에서 성령을 영적인 현실성과 연관하여 생각할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네 이렇습니다.

모든 영적인 것이 기존의 본질적 생명을 진술하고 있는지 아닌지, 또한 영적인 것이 이런 진술만을 위해서 존재하는지 아닌지, 그리고 각기의 물질적인 생명조건과 다른 독립적인 리얼리티가 없이도 본질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현존의 기능으로 판단되어야만 하는지 아닌지. 좀 까다로운 표현인데요. 몇가지 질문들을 해야된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현실성을 성령으로 생각할때 제기될 질문이라고 하는거죠. 몇가지 질문중에서 한가지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아까 제가 물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생명현상을 이야기했느데요. 그런 것들이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만 갖고 그것과는 다른 리얼리티 없이도 해명이 가능하냐 하는 거죠. 그러니까 영적인 그런 현실성없이 순전하게 생물학적인 메카니즘으로 그런 생명현상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냐 하는 거죠. 무신론적인 그러한, 또는 기계적인 진화론에 묶여 있는 분들이라고 한다면 가능하다고 보겠죠. 결국은 뇌라든지 인간의 출생, 성장, 죽음에 대한 어떤 생물학적인 그 메카니즘이 결국은 다 해명된다. 과학적으로 해명된다. 그렇다면 그것과 독립적인 영적인 현실성은 없어도 되는 거죠.

더군다나 이런 방향에서 성령에 대한 진술을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의 영을 인간의 영과 문화적 조형물로 바꿔치기하는 것이라고 매도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영을 경험하는가? 참 이런 질문들 중요하죠. 우리는 막연하게 생각하는데 익숙합니다. 교회 열심히 나가서 기도하고 성령충만받고 또 열심히 살고 도덕적으로 변화되고 늘 즐겁게 살고. 바로 그것이 하나님 영을 경험한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죠. 이런 것들은 쉽게 허물어집니다. 예수 믿지 않아도 그렇게 살수 있는 사람들은 많이 있으니까요. 교회나오지 않아도 그러한 즐겁게 사는 방식은 얼마든지 있고 또 가능합니다.

세계 속 있는 교회와 그 선포는, 세계라고 하는 것은 교회밖을 포함한 전체 세계죠. 그 안에 교회가 있잖아요. 우리가 그 안에서 성령과 관계를 맺는 현실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물리학적이고 자연과학적이고 생물학적인, 기계적인 과학세계속에서 교회가 과연 성령과의 관계속에서 현실성을 해명해 낼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교회의 현실성이 인간에 의해 조직된 직제와 그 관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종종 너무 지나치게 인간적인 역사를 수반하고 있는 인간적 기구라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뜻인가요? 앞에 여러가지 질문을 했는데요. 필요한 질문인데요.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거는 교회가 인간적인 조직체고 그러한 역사적 관점을 거쳐왔다는 것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요 문장자체야 우리가 이해하는거죠. 그러나 앞에 연관해서 어떤 뜻이냐 하는 거죠. 생각해볼까요? 그냥 지나갈까요?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라서 여기서 머물필요는 없는것 같아요. 결국 이런 방향을 잡고 넘어가죠. 교회가 영적인 현실성이라고 하는 그 사실을 이 세계안에서 해명하지 않으면 우리의 설자리가 없다. 그 이야기죠.

다른 한편으로 복음이 인간적으로만 선포되는 게 아니며, 성찬식이 인간적으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의 신앙 경험도 역시 인간적으로만 실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성을 더 많이 드러낼 수 있는 그 무엇이 어딘가에 놓여있는 것이 아닐까? 교회안에 인간적인 모습이 많이 있지만 그런 것으로만 신앙이 축소되어 있는 것은 아닌데요. 여기서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교회의 한계들, 이건 뭐 역사에서 실수를 했다 아니다는 그런 차원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구요. 세계에 나타나는 생명현상들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의 한계들, 그런 것들이 있어도 결국은 기독교신앙안에는 생물학이나 물리학이나 이 세계의 생명현상에 대한 여러가지 해명 방식들보다 더 근원적으고 그 생명의 영적인 현실성을 드러낼 수 있는 그 무엇이 교회안에 있지 않느냐는 거죠. 교회 전통안에 교회 가르침안에 있지 않느냐는 거죠. 그게 뭐냐 하는 것을 우리가 해명할 수 있어야 하는거죠.

그것은 성령의 신적 현실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네. 그 문장에 밑줄을 그으셔야 하겠네요. 성령의 신적인 현실성, 이것이야말로 이 세계의 생명, 물리, 과학적 생명 현상의 해명보다 훨씬 더 기독교 신앙이 그 생명의 현실성을 바르게 해명할 수 있는 근거다. 이겁니다. 성령의 신적 현실성.

그러나 완전히 유별난 종류의 것들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현실성을 어디서 경험할 수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럴듯하게 보이는 이러한 유별난 종류의 것들이 교회에서 인간적 조직이나 인간적 태도와만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성령의 신적인 현실성과도 관계를 맺는다는 이 주장은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에 그 기초가 교회의 권위와 그 선포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성령의 신적 현실성 이런 것들을 어디서 경험하느냐 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가 이해가 되시겠죠.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면 그것이 주어지냐 쉽게 말하자면 그런 질문인거죠. 우리가 보통 들은 방식대로 한다면 그렇죠. 성경을 많이 읽으면 그런 성령의 신적 현실성이 주어지냐 하는 거죠. 큐티를 많이하면 그런 것이 주어질까요? 교회, 어디에, 어떻게 어디에서 우리는 성령의 신적 현실성을 경험할까요? 오늘 굉장히 중요한 단어를 우리가 전해들은 겁니다. 성령의 신적현실성, 요거를 잘 이해한다면 성령의 문제, 세계의 생명현상의 문제, 그리고 기독교 신앙과 세계 과학과의 관계 이런 것들도 다 해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방향을 잡는데 핵심을 잡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그냥 관념적으로만 교리적으로만 하나의 언어로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되잖아요. 어디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서 어떤 사람들은 아 그것이 바로 교회가 베풀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주로 로마가톨릭교회죠. 거기는 교회의 권위가 성서의 권위와 맞먹습니다. 교회만이 성서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 교회는 결국 사제들이구요. 사제들의 수장인 교황입니다. 교회의 권위 말이죠. 그들의 말이 무조건 틀린거는 아니죠. 기독교의 모든 중요한 교리들이 다 종교회의를 통해서 결정되었지 않습니까? 종교회의란 것이 결국은 성직자들의 모임이었거든요. 그러니까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어떤 교회 권위는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지금도 중요하죠. 중구난방식으로 각자가 다 기도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어디로 나가겠어요.

마틴루터가 이야기한 만인사제직이 옳은 이야기입니다만 개신교에서는 오남용되었답니다. 그러한 신학자들이 그러한 용어들을 말할때는 맥락이 있는거예요. 그것을 놓치고 그러한 용어나 그러한 개념만을 딱 떼어서, 어떤 전후 맥락없이 딱 떼어서 자기가 편리한대로 이용하는 이러한 신학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만인 제사장직은 기본적으로 이런 맥락이 있는거죠. 그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지금도 비슷하지만 사제가 없이는 미사가 불가능한거예요. 사제를 통해서만 미사가 집전될 수 있습니다. 사제를 통해서만 죄의 용서에 대한 확인을 바을 수 있는겁니다. 여기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양쪽의 주장들을 다 설명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니까 그걸 다 생략하겠어요. 루터는 미사가 사제를 통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신자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죄의 용서를 받는것도 사제가 그것을 선포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신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렇게 주장하는거죠. 그런데 이 말을 갖다가 아 무조건 이제는 성직제도는 잘못된거, 평신도들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어. 이렇게 적용시키면 참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성직주의, 성직자 정치, 성직자와 평신도의 이원론적 구분을 지지한다는 것이 아니예요. 각각의 기능들이 있거든요. 일반신자들이, 소위 말해서 평신도들이 해야될 일이 있고. 일반 평신도들은 세속 직업을 갖는 사람들 아니겠어요. 그 방식으로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구요. 성직자들은 세속 직업없이 전념한다는 겁니다. 이 양자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예요. 기능적인 차이가 있는 거죠. 질적인 면에서는 마틴 루터가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각자가 다 하나님께 직접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사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점에서 만인제사장직이 옳은 것이죠. 그러나 모든 일들을 똑같이 할 수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마틴 루터의 주장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 중에서는 평신도들도 설교할 수 있다. 설교권이 왜 목사에게만 독점되어 지느냐 그런 이야기들을 하거든요. 네. 일반 평신도들보다도 형편없이 하는 그러한 목사들도 있지요. 그리고 뛰어난 평신도 설교자들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은사, 각각 맡은 직분 그런 점에서는 질서가 필요한 것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이 목사는 설교와 성례식이라는 은사,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확보하는 것으로 인정해야 되겠죠. 이거는 그 사람이 지적으로 특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거룩한 질서를 위한 것입니다.

네. 이야기가 곁으로 많이 나갔죠. 무슨 이야기에서 이야기가 거기까지 나갔나요? 교회가 성령의 신적인 현실성을 경험하는 근거가 된다는 주장에 대한 것이었죠. 교회 권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필요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그런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지난 역사에서 잘못된 일도 많이 행했구요. 이런 질문이 제기 될 수 있다고 하는겁니다. 판넨베르크 이야기입니다.

어떤 근거에서 이런 주장의 권위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또한 교회의 자기 영광과 자기숭배 문제에 대한 의혹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는가? 재미있는 표현이죠. 교회의 자기영광과 자기 숭배 문제에 대한 의혹이라고 하는 거예요. 영적인 성령의 신적인 현실성이 교회의 권위에서 경험될 수 있다는 이 주장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한다면 교회가 자기영광에 사로잡힐 위험이 있다고 하는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잖아요. 실질적으로 우리가 다 경험하는 거죠.

교회의 삶을 규정하는 현실성으로서 성령에 대해서 언급하는 신약성서가 그것에 대한 근거라고 한다면, 요거는 바로 개신교를 향한 문제군요. 앞의 교회권위에 성령의 신적현실성을 경험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하는 주장은 로마가톨릭교회였고 여기서는 신약성서가 그 근거라고 할 때 요러한 질문은 개신교에 대한 질문입니다. 근거라고 할 때 도대체 바울이나 에베소서가 무엇을 서술하려고 했는지, 어떤 근거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이러한 근거들이 우리에게도 여전히 증거능력이 되는지 아닌지, 혹은 시대적 한계로서 다루어져야하는지, 아니면 시간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다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요? 해석해 주지 않는 상태에서는 신약성서에 나와 있다고 해서 그대로 성령의 신적인 현실성을 경험할 수 있는 근거로 말하기 힘들잖습니까? 초기 기독교에서 방언을 한다고 하는 그런 것에서 성령이 임한다고 하는 진술이 있잖아요. 그런 것이 다 뭐냐? 사도신경 같은 것에서는 더 복잡한 이야기가 나오구요. 각각 초기 기독교가 경험하는, 경험된 것에 대한 진술이 오늘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생명현상과는 차이가 있는데 이런 갭을 어떻게 메꾸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서가 바로 성령의 신적인 현실성을 경험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하는 말에도 단서가 있어야 되는거죠. 그래서 어떻게 해석해 낼 수 있냐 하는 겁니다. 그런 것이 없이 오늘 우리들의 삶에 적용시킬려고 되면 문제가 많이 발생하게 되는거죠. 이게 바로 개신교의 장점이라고 하면서도 단점입니다. 장점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그냥 직접적인 성서와의 공감속에서 그것을 공감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장점이기도 한거죠. 교회 권위주의로부터 벗어난다고 하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서를 그대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러한 경우에 거기는 성서가 2천년동안 해석되어져 왔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 권위이기도 한데 그런 것을 다 포기하게 될때 이건 중구 난방이 될 수 있는 거죠. 지금 한국교회에서 경험하고 있는 모든 성령운동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바입니다. 계속이요.

신약성서에서 볼 때 부활한 그리스도와,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계속 작용하는 그의 현존과 관계를 맺고 있는 영을 우리가 경험한다면, 이렇게 계속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어떤 근거에서 주장될 수 있는지, 또한 무슨 근거에서 이러한 현존이 영의 개념을 통해서, 그리고 신적인 영의 개념을 통해서 특징적으로 언급되어야 하는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장들이 신학적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금방 따라오기 힘들거예요. 여러분들이 훈련을 좀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될거예요. 문장의 세계속으로 들어오게 될겁니다. 그거는 시간이 좀 필요하게 되니까 읽혀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요 문장에서 한 대목이 이렇습니다. 계속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어떤 근거에서 주장될 수 있는지. 지금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또 만나고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거예요. 특별히 한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이란 말을 많이 이야기를 하는데. 그리고 그리스도가 오늘 우리들에게 함께 한다고 이야기를 하구요. 그리고 부활한 분이 우리 교회안에 함께 한다고 말을 하는데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하는겁니까? 만약에 그 부활의 주님이 교회에 현존한다고 한다면 분리될 수는 없잖아요. 왜 이렇게 싸웁니까? 어디엔가 문제가 있잖아요? 부활한 주님을 믿습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그 근거가 확보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네 그 다음에요.

만약 우리가 이런 저런 권위에 의존하지 않으려 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권위가 무엇인지 아시겠죠? 두가지로 말한 거예요. 하나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이야기는 교회권위 일방적으로 빠지는 것, 또 하나는 신교에서 말하는 성서의 권위, 일방적으로 그쪽으로 문자적인 차원에서 떨어지는 것, 교회가 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듣기만 하면 돼라든지 성서가 이미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대로 따르면 돼 이게 일종의 권위주의 이거든요. 여기에 우리가 빠지지 않으려면, 빠지지 않아야만 성령의 영적인 현실성을 우리가 바르게 경험할 수 있는 거니까요.

또한 이해될 수 없는 문제들을 그러한 확증에 떠넘기지 않으려 한다면, 이해될 수없는 문제들이라고 그러잖아요. 난해한 문제들, 우리가 인간의 인식으로 넘을 수 그러한 문제들, 그건 뭐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성령의 신적인 현실과 연관된 그 관계 말이죠. 이런 것들을 잘 모르니까 이해가 안되니까 교회가 그렇게 이야기했어. 성서가 그렇게 이야기했어. 그렇게 넘겨 버리고 자기 스스로는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런 식, 그렇게 않으려고 한다면. 네 그렇게 하는 것이 권위주의 신앙이고 광신주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어쨌든지 '성령'*이라는 진술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것이 어떠한 토대에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오직 이럴 때만 이러한 진술이 말장난일지도 모른다는 우려 앞에서 매우 확실한 답변을 제시할 수 있다. 아주 중요한 문제를 여기서 판넨베르크가 짚었습니다. 성령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어떤 근거에서 성령이 언급되었는지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성서로 돌아가는 것이고 2천년 기독교 신학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다 그때 그때 마다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한 것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는 거니까요. 이렇게 해야만 권위주의에 빠지지 않고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말하는 신앙적, 신학적 진술이 말장난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로 부터 벗어나서 확실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는거죠. 말장난 참 정확한 표현이예요. 기독교 신앙이 자칫하면 말장난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현대 많은 지성인들이 그렇게 보고 있을 거예요. 대대적으로 광고가 실린 책이름이 모든 종교는 구라다 더군요. 그게 그 말이죠. 말장난이다는 이야기죠. 예수는 신화다. 그와 유사한 책들이 20세기에 많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생물학, 심리학, 물리학 이런 것들이 인간과 이 세대에 대한 해명을 깊이 하면 할수록 그것을 그냥 권위주의에 빠져서 대답하게 되던 기독교 신앙은 설자리를 잃게 되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21세기는 기독교에게 위기라고 하면 위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될 길은 어디있을까요? 이미 판넨베르크가 답을 하고 있는 거죠. 권위주의 신앙에 떨어지지 말자. 교회가 이렇게 이야기했다든지 성서가 이렇게 했다 라든지 그러한 것으로 모든 질문의 무게를 벗어던지지 말고 그 질문 자체로 들어가야 된다는 거죠. 사실은 그것이 신학의 본연의 의무이구요. 우리는 그러한 훈련을 통해서 물리학이나 생물학이 말할 수 없는 완전히 해명할 수 없는 더 확실한 신적 현실성, 영적인 현실성, 이런 것들을 책임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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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9.08.03 23:30:24
*.120.170.243

녹취록을 만드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시작하는 부분에 녹음 상태가 바빴지요?

빠진 문장이 있어서 빨간 색 글자로 보충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공부 42강입니다. 오늘부터 새로운 주제로 넘어갑니다. 성령론이예요. 성령. 판넨베르크의 이 책에는 이런 제목이 붙었어요. 11장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성령론은 사도신경에서 세번째 항목이라고 할 수 있어요. 첫번째는 창조자 하나님이예요. 두번째는 예수 그리스도 이시죠. 세번째 성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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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09.08.04 05:16:54
*.173.233.194

목사님. 수정하였습니다.


성령의 신적 현실성.

우리 신앙의 중심을 치고 들어오는 판넨베르크의 강의가 너무 좋습니다.

성령이 왜 우리 신앙고백속에 들어왔는지치열하게 질문하는 가운데

저의 지정의가 성령충만함속에 거할 수 있도록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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