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믿음의 형제 에바브로디도



2:25-30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나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자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빨리 보낸 후에 자신도 곧 가보려고 했었지만 그 일이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려고 결정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이곳 25절과 4장18절에만 나오는 이름입니다. 골로새서 1:7, 4:12, 그리고 빌레몬서 23절에 등장하는 에바브라와는 같은 인물이 아닙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출신이지만 에바브라는 골로새 출신입니다. 원래 빌립보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을 때 그를 돕기 위해서 파송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을 돕다가 큰 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떨어진 일로 인해서 빌립보 교회가 크게 걱정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염려를 덜게 해주려는 목적으로, 그리고 이 편지를 전달케 할 목적으로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빌립보로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바울은 25절에서 에바브로디도를 세 가지 표현 방식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 나의 동역자, 나와 함께 싸우는 자.

첫째, 바울의 감옥 생활을 도와주기 위해서 빌립보 교회로부터 파송받은 에바브로디도는 한낱 심부름꾼이 아니라 바울의 형제와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인간 관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이 있습니다. 그것이 참된 형제애에 기초한 관계라고 한다면 그 어떤 경쟁심이 끼어 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가장 바람직한 관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둘째,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동역자입니다. 실제로는 바울의 감옥 생활에서 그 뒷바라지를 하던 에바브로디도였지만, 바울은 그를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동역자(Mitarbeiter)는 말 그대로 함께 일하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일을 맡은 사람이나 사소한 일을 맡은 사람이나 근본적으로는 동역자일 뿐이지 상하관계로 규정될 수는 없다는 이 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에서는 어떤 인간도 자신을 높은 자리에 둘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요즘처럼 교회 안에서 목회자들 사이의 관계가 세속적으로 수직적인 위계질서로 구성되는 때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은 모든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청지기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한 교권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자기의 특권으로 여기게 되는 경우에 불편한 관계가 되고 맙니다. 가장 예민한 문제인 담임 목사와 부목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이런 현상은 아주 명확합니다. 부목사를 자신의 동역자로 생각하는 담임 목사들이 얼마나 될까요? 제가 젊었을 때 실제로 겪은 일이기도 하고, 많은 경우에 당연하게 여겨지던 다음과 같은 일이 있습니다. 부목을 청빙할 때 담임 목사가 던지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할 거요? 아니면 담임 목사의 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거요?"라는 말로 부목사를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고 싶어합니다. 물론 담임 목사와 부목사들 간에 알력 관계가 형성됨으로써 벌어지는 문제가 적지 않습니다만, 그런 능률 만능주의적인 생각에 젖어서 동역자로서의 관계가 파괴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셋째,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자기와 함께 싸우는 자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어두운 세력과 싸우는 전우라고 말입니다. 2천년 전 로마(혹은 에베소)의 감옥이 어느 정도로 고통스러웠는지는 새삼 되돌아볼 필요도 없습니다. 수감자의 인권을 생각한 게 인류 역사상 아주 최근의 일이니까 말입니다. 더구나 방대한 식민지를 통치하고 있던 로마 제국은 범법자들을 일벌백계 하겠다는 기준으로 교도행정을 펼쳤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바울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을는지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생존 투쟁하듯이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본인 스스로 약한 체질이었기 때문에 그 생활을 버텨내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팎으로부터 밀려드는 무시와 냉소를 견뎌내기도 힘들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이런 바울의 삶에서 전우 같은 관계였습니다. 서로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않을 때만 이런 전우관계가 성립되듯이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중병에 걸려 죽을 지경이 될 때까지 바울의 곁을 지켰습니다.



에바브로디도의 병세가 어느 정도로 나빴는지, 그리고 이제 어느 정도나 좋아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일단 위험한 고비는 넘긴 것 같습니다(27절). 아직 바울의 감옥 생활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에바브로디도가 결국 빌립보로 돌아가게 된 이유는 중병을 앓았던 그가 더 이상 감옥 생활을 감당할 수 없다고 바울이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에바브로디도의 문제는 향수병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비록 그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냥 타향살이를 계속하도록 붙잡아둘 수는 없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독일에서 유학할 때 향수병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지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독일 학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주말이나 성탄절, 부활절 휴가 때 기숙사에 혼자 남아 지낸다는 것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압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이러한 심리적인 형편을 아주 세심하게 살펴주고 있습니다.  



어쨌든지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모교회인 빌립보 교회로 돌려보내면서 세심하게 그를 배려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빌립보 교회의 오해와 비난을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서 에바브로디도가 돌아가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에바브로디도를 돌려보내는 이유는 빌립보 교회가 그의 건강을 확인하고 기뻐하라는 것과, 또한 자기의 근심을 덜어보려는 것이라고 합니다(28절). 말하자면 에바브로디도의 책임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와 바울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설명입니다.

둘째,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에바브로디도 같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라고 당부합니다.(29절).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애를 쓰는 자들을 알아주라고 권면했습니다(고전16:16,18). 모두가 자기 일만 생각했지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는 상황에서(빌2:21)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수고한 에바브로디도를 귀하게 여기라는 당부에는 바울의 절실한 심정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위에서 영어(囹圄)의 몸이 된 바울을 도운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잠깐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은 믿음의 아들이고, 다른 한 사람은 믿음의 형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떤 위대한 한 인물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기보다는 이렇게 여러 사람의 진실한 노력과 협동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