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변화된 몸을 향하여



3:17-21



17 형제 여러분, 나를 본받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과 같이 우리를 모범으로 삼고 따르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벌써 여러 번  여러분에게 일러 준 것을 지금 또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바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최후는 멸망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뱃속을 하느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입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오실 구세주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앞 구절(12-16)에서 완전주의자들과 격한 논쟁을 예상외로 급히 종결지은 다음에 "나를 본 받으시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듣기에 따라서 너무 앞서 나가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이 말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문제가 되는 표현은 아닙니다. 이 문장은 고린도전서 11장1절의 내용과 연관해서 이렇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방식대로 따라 사시오.(그닐카). 바울은 아울러 이렇게 본 받고 사는 이들을 유의해서 살펴주라고 부탁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과 삶이 방향을 잡지 못하는 이유는 본 받을 어른이나 선생님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나를 본 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또는 사람들이 본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바울처럼 자기 자신을 비워두고 어떤 절대적인 대상을 철저하게 따라서 살아갑니다. 위대한 정치인이나 예술가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사상가나 종교인들 중에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이루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에 자기 자신을 성취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떤 공감을 얻지 못합니다. 부러움은 사지만 존경을 받지는 못합니다. 교회의 크고 작은 행사에 참석해보신 분들은 잘 알겠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는 명분으로만 거론되고, 모든 명예는 그런 교회 행사와 직간접으로 해당되는 사람들이 독차지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가 신앙의 근본을 찾아보려고 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바울처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것 같이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는 명령은 아무나 내릴 수 없습니다.



1) 땅의 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방식대로 따라 사시오라고 과감하게 진술하는 바울은 이런 삶과 반대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가 여기서 눈물을 흘리며 경계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이들입니다(18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이들은 빌립보서 3장에서 계속 거론되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특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십자가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이들이 교회 밖의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이상하게 보입니다. 이게 참으로 아이러니입니다. 어떤 진리가 이해되지 않고 왜곡되는 것은 그 공동체 밖에서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말입니다. 아마 안에서 훨씬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무식했던 사람들이, 죄인, 세리, 죄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서 예민하게 살아간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도 이런 현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선입관입니다. 고정관념이지요. 사실을 알아보기도 전에 자기 내부에 고정되어 있는 생각으로 미리 판단해버리는 것입니다. 초등하교 4년인 막내 딸 지은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그 애의 머리 속에 벌서 굳어진 생각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북한 사람은 무조건 나쁘다, 일본 사람은 나쁘다, 하는 식입니다. 역사적으로 나쁜 일을 했지만 그 대상 전체를 나쁘다고 예단해 버린다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이런 점에서 작년(2001년) 일본 교과서 왜곡 사건이 발발했을 때 이에 항의한답시고 어느 초등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을 이런 시위에 동원한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비교육적인 행태입니다.



십자가의 원수처럼 살아가는 이들의 특징이 네 가지로 설명되어 있습니다(19절). 첫째,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종교적 경건과 윤리적 교양을 절대적인 가치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은 그것이 통용되지 않는 세계에서는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더구나 죽는 순간에 그들의 모든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갑니다. 둘째, 그들의 하나님은 배부름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만이 아니라 이미 로마서에서도 이런 이들을 경계했습니다.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16:18). 이들 율법주의자들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마음을 쓰지 실제로 하나님을 위한 희생에는 관심이 없습니다(골2:20-23참조). 예수님의 비판처럼 그들은 하루살이는 골라내지만 낙타는 그대로 삼켜버립니다. 종교의 근본을 이런 윤리나 습관에서만 찾는 사람들의 하나님은 실제로 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그들의 영광은 부끄러움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는 벌거벗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뮬러). 그러니까 그들이 자랑하는 할례는 벌거벗어야만 확인할 수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갈6:13). 넷째, 율법주의자들은 땅의 일을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의 일은 인간의 구체적인 삶 자체를 말하기보다는 세상으로 기울어진 마음을 가리킵니다. 율법의 체계를 세워나간다거나 할례예식을 강화하는 것들은 그런 노력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보려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일입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로 예수님에게서 아무리 하나님의 일이 증거된다고 하더라도 바리새인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율법적인 원칙에서 약간만이라도 벗어나면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그분에게서 일어난 일을 보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율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가 아닌가 라는 기준에서만 판단했다는 것은 바로 그들이 세상적인 기준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이런 율법주의적인 적대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한 복음을 수호하는 일에 온 정열을 쏟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강고한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바로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라는 바울의 경고를 우리가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흔히 빠지는 위험이지만, 이러한 가르침을 2천년 전 그 당시에만 해당되거나 아니면 요즘의 이단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땅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자기 성취와 자기 집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는 결국 피조물을 절대화한다는 데에 있다는 성서의 경고는 바로 이 사실을 뜻합니다. 인간의 자기 성취가 왜 죄일까요? 이런 성취감은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기쁘게 하는 요소가 아니던가요? 인간의 모든 위대한 행위는 바로 이런 성취감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을 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감동 받고 있는 바하의 음악작품, 보티첼리의 미술품,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품과 건축물은 바로 인간의 성취감이 이룩한 위대한 결과가 아닌가요? 물론 이러한 문화 유산을 무가치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의 절대화가 문제입니다. 스스로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 완전한 것을 생산해 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여기서의 핵심입니다. 오늘의 기술, 정보 문화가 스스로 절대화되면서 인간성이 파괴되는 것처럼 피조물의 절대화는 그것 자체가 이미 멸망이며 심판입니다. 빌립보서가 말하는 대로 땅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정관해 봅시다. 인간의 행위는 결국 땅에서 이루어지다가 땅으로 사라집니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품이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흙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인간도 흙이 되고 그 인간의 성취도 역시 흙이 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토대인 이 지구도 역시 언젠가는  태양과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생산한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이르신 것처럼 세상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죽음에 관계된 일은 죽음에 관심을 갖는 이들에게) 맡겨 두는 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르고 지혜로운 삶이 아닐까요?



종교는 이 엄숙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각성시키는 데서 자기의 과업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을 통해서 성취감을 맛보려고 했던 것처럼 종교 자체가 종종 자기 만족에 빠져버린다는 사실을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에서 둘째 이반의 입을 통해서 그 당시의 러시아 정교회의 실상이 고발됩니다. 재림하신 예수님은 초림 때처럼 민중들과 함께 하시다가 결국 옥에 들어가셨습니다. 어느 날 밤 은밀히 감옥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대주교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당신의 나라는 하늘이니까 빨리 돌아가시오. 이 땅은 우리가 알아서 잘 해결하고 있소." 현란한 종교의식과 빈틈없는 관리체제를 자랑하던 정교회는 예수님이 없어도 얼마든지 자신들의 일을 수행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자신들의 성취감이 바로 그들 종교의  바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땅의 일로 생각하는 이들이었습니다.



2) 하늘

이에 반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시민권(고향)은 하늘에 있습니다(20절). 아마 바울은 고향 팔레스틴을 떠나서 로마의 식민지인 빌립보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생각하며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우리의 고향은 팔레스틴이 아니라 하늘이라고 시적인 운율로 20,21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향은 하늘에 있다네.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를 기다리는 그곳이라네.

그는 우리의 약한 몸을 변케 하시리라.

그의 영광의 몸처럼 변케 하시리라.

만물을 복종케 하실 능력으로

우리를 변케 하시리라.



고(故) 천상병 시인은 귀천(歸天)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하늘이 무엇입니까? 이미 앞서 서론 부분에서 이 문제를 개괄적으로 다룬 적이 있습니다만, 우주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이 있다면 아무도 하늘을 우주의 어느 한 공간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주에는 태양과 같은 별들이 있고, 대폭발 시에 발생한 흑암 물질이 널리 산재해 있을 뿐입니다. 언젠가 인간의 우주 탐험이 우주의 구석구석을 밝혀줄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거의 대부분을 모르고 있는 그 하늘을 오늘 성서가 말하는 하늘과 일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또한 현대인들에게 우주의 동쪽 끝 어딘가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하늘 나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루돌프 불트만이라는 성서신학자는 이런 생각을 고대인들의 신화적 표상이라고 지적하면서 그것을 현대인의 합리적 사유에 맞도록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불트만의 실존적 성서 해석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긴 하지만 성서 시대의 우주관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단 옳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향은 하늘에 있다는 바울의 이 말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다만 상징과 비유입니까? 불확실한 것에 대한 허황한 레토릭입니까? 땅의 허무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할 일종의 도피처입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인간도 결국에는 우주가 형성될 때 만들어진 소립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주이기 때문에, 인간이 다시 우주 속으로 해체되는 의미인 죽음은 곧 우리 인간이 하늘로 돌아간다는 말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참된 생명에 대한 인식의 기초로 여기고 있는 바울이 이런 뜻으로 하늘의 고향을 말했을 리는 없습니다.



우주의 어느 공간이 하늘 나라가 아니라면 도대체 하늘 나라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우선 우리의 마음일까요? 그럴 수도 있지요.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니까요. 요한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이나 사랑이 하늘 나라라고 한다면 인간의 몸을 포함한 물리적인 세계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몸이 없는 하늘 나라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먹고 마시거나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모든 존재의 궁극적 근원에 해당되는 사건으로 여긴다면 하늘 나라를 단순히 생각과 마음만이 작용하는 세계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안식교에서 주장하는 대로 소위 "지상천국"일까요? 이런 생각은 상당히 매력적이고 현실적이고 지성적으로 들립니다. 물리학적 시각으로 볼 때, 말도 되지 않는 어떤 공간적 하늘을 찾아볼 게 아니라 차라리 이 지상에 완벽한 세계를 이루는 것이 오히려 훨씬 바람직하고 타당한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기술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현대에 이르러 이런 인간의 꿈이 현실화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언젠가 인간의 기술이 발전되어 마모된 기계의 부속품을 갈아 끼우듯이 인간의 장기를 갈아 끼울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의 영생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유전 공학적 기술을 통해서 무병장수 할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이 지구에서 영원히, 물론 50억년 정도이겠지만, 죽지 않고 병들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게 살게 된다면 그것이 곧 하늘 나라일까요? 오늘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삶의 모습들이 아무리 영원하게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간이 참된 생명을 얻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영원성을 얻는 순간에 이미 공허감 속에 빠져버릴 것입니다. 지상 천국은 여전히 지상적인 한계를 지닐 뿐이지 참된 생명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늘 나라는 어디에, 어떻게 존재할까요?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인 하늘 나라는 어떤 존재 양식을 갖고 있을까요? 인간들의 기대가 만들어낸 막연한 세계에 불과할까요? 아니면 실제로 있는 걸까요? 이런 절대적인 질문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기 때문에 아주 확실한 답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인식하기 위해서라도 믿으라."는 말처럼 인식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에 속하는 질문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을만하다는 사실만이라도 인식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늘 나라를 믿을만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참된 고향이기도 하고, 이미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하늘은 물리학적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늘은 지상에서 이루어져야할 완벽한 세계이거나 우리가 죽은 다음에 가야할 우주의 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라 할 생명의 세계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하늘은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이며 사건입니다. 생명 사건입니다. 따라서 하늘 나라는 곧 생명에 대한 질문에서 논의되어야 합니다. 생명을 아는 것이 바로 하늘 나라를 아는 것입니다. 이런 생명 문제는 생물학적인 차원에서부터 시작해서 영적인 차원에 이르는 전체 생명 현상을 염두에 두고 고려되어야 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이런 궁극적인 생명이 선취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오신다고, 그곳으로부터 우리에게 오시는 구원자를 우리가 기다린다고 노래합니다. 이 문장은 바울이 바로 여기에서만 유일하게 구원자에 대해서 설명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해당되는 구원자로서의 기능이 완전히 종말론적으로 한정되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그닐카, 불트만). 이 사실을 바울은 소테리아라는 말로 바꾸어 썼습니다. 소테르(구원자)는 소테리아(구원)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늘로부터 오는 구원을 희망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시 있으며 지나가 버리고 말, 무상한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아직은 숨겨져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에게 밝히 드러날 그 궁극적 생명의 하늘에 우리의 삶을 걸어두고 살아갑니다. 본문이 말하고 있는 대로 하늘이 바로 우리의 고향입니다.



3) 영광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약속에 의해서 우리가 희망하는 부활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의 진정한 고향인 하늘에 대해서 조금 더 직접적으로 설명해야만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세 가지가 요점입니다. 낮은 몸, 영광의 몸, 변형.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여기서 핵심은 우리가 하늘로부터 기다리는 그 구원자의 구원행위인 소마(몸)의 변형입니다(그닐카). 소마는 그리스 철학이 말하는 영혼과 대비되는 몸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몸을 통해서 규정된 전체 지상 실존입니다. 즉 낮은 데 처한 몸입니다.

우리가 낮은 몸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깊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분명합니다. 우리 스스로 다스리기 힘든 온갖 욕망과 허무,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의 몸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드러내주고 있는 증거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상한 인격과 높은 이상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혹은 올바른 신앙 안에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의 모든 정치, 예술, 문화 활동은 이런 인간의 낮은 몸, 즉 그 한계를 벗어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파라오들의 영생에 대한 간절한 기대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정도로 자신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절감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실들을 보십시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얼마나 절절하게 전력투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모든 노력들이 가공할 힘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은 그 낮은 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늘로부터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에게 임했던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킨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임했던 영광의 몸은 바로 부활을 가리킵니다. 영광이라는 독일어(Verherrlichung)에는 주(Herr)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영광은 왕 같은 통치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 되셨다는 의미에서 부활은 그가 영광의 세계로 높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영광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에 의해서 우리도 결국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왕처럼 살아가는 때입니다. 그때를 가리켜 우리는 종말이라고 합니다. 언제 그런 날이 우리에게 임할까요? 우리의 기술이 모든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날이 바로 그때일까요? 이 지구상에 국제분쟁이 완전히 종식되어서 평화가 명실상부하게 이루어지는 때일까요? 인간이 노동과 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때일까요?

우리 기독교가 생각하는 종말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일어난다고 봅니다. 우리가 영광을 생산해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서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그런 부활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믿음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 생명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러한 영광의 몸으로 변화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세밀하게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소극적인 면에서 두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3장, 13. 부활, 하나님 안에 은폐된 미래의 생명, 참조). 첫째, 우리의 변화는 현재 우리의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이 몸과 깊은 연관을 갖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부활한 예수님은 죽기 이전의 인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대화를 했고,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즉 영광의 몸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현재의 몸과 아무 상관도 없는 혼령이나, 혹은 기로 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둘째, 영광의 몸은 현재의 몸과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생명을 덧입습니다. 비록 현재의 몸과 깊은 상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질적으로 다른 생명입니다. 예컨대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된다고 할 때 그 나비는 애벌레 상태의 그 몸으로부터 변화되었으나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몸이 되었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애벌레의 상태에서는 나비의 세계를 도저히 인식할 수 없습니다. 사물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나비와 밑에서 올려다보는 애벌레의 관계가 서로 연속적이면서도 동시에 불연속적인 것처럼 앞으로 우리가 덧입게 될 부활과 생명의 세계도 역시 현재 우리의 삶과 연속적이면서도 동시에 불연속적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영광의 몸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신약성서의 증언을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가 전혀 개연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조건 믿으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각도에서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과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을 부정하는 이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제반 이론이나 경험들이 별로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증언이 신실하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는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우리를 미몽에 사로잡혔다거나 광신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의 세상 경험과 인식이 얼마나 불확실한가를 생각한다면 성서의 증언이 훨씬 참되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바울처럼 우리 인생의 전 과정에서 추구되어야 할 마지막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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