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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교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어제 7월 독서모임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적지 않은 교인분들이 모여서 교회 공동체의 이상에 대해 폭넓은 토론을 나눴습니다. 교회는 무엇을 통해 "대조사회"가 되는가라는 질문이 논의의 초점을 이루었습니다. 가족과 같은 혈연공동체가 교회의 이상에 가깝지 않겠느냐는 주장을 놓고 갑론을박이 오간 끝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도의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1. 교회는 가족일 수 있으되 구성원 각자는 교회의 삶을 통해 세속의 삶을 경신한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억압적 가부장제와 같은 가족이데올로기는 교회에서 자리잡을 수 없다.
2. 형제애의 실현이란 결국 자기 의가 결부된 행위 중심의 신앙으로 귀결되지 않는가라는 의구심이 우리 모두를 괴롭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실천을 게을리할 수는 없다.
3.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긴장이 상존하지만 개인은 공동체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볼 수 있어야지 자신의 관점에서 공동체를 평가하려 해서는 안된다. (이같은 취지에서 원근법이 아닌 부감도로 교회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어느 선지자적 집사님의 발언이 있었습니다.)
8월 모임은 수련회 관계로 8월 22일에 가질 예정입니다. 그 때는 <피에트라 강가에 앉아 울었네>라는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작품을 읽고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디원 집사님, 요나단 집사님이 아우님이시면 저는 조카뻘,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민망하답니다.
생각해보니 부감이란 말이 영화촬영기법에서도 있는 것 같군요. 부감은 high angle 이고 반대말은 앙각 즉 low angle 입니다.
요나단 집사님은 제글이 맛사지라고 하셨지만 실은 제가 뼈대만 옮겨놓은 것 뿐입니다. 실제 토론은 훨씬 더 풍성했지요.
독서토론의 진짜 내용은 요나단 집사님의 검은 수첩 안에 있습니다.
6월모임에서는 중보기도 제목도 나눴었는데 이번은 빠뜨렸군요. 라라 집사님 조카분을 위해서도 우리 모두 중보기도 하기로 해요.
중국에서 좋아하는 것...음.... 섣불리 말했다가 다른 더 좋은 것이 생각나서 후회할 수도 있으니, 좀 더 생각해볼께요.
예, 집사님, 맞습니다. 우리는 아마 죽어서나 '나'를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를 모른다고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 부끄럽게도 요즘 제가 절실히 깨닫고 있네요. 집사님,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중 '애러비' 를 기억하시는지요. 친구 누나를 짝사랑하고 '애러비 장터'를 동경하다가 객적은 남녀 직원들의 잡담을 들으며, 번쩍 '눈뜸'을 경험하는 단편말이어요. 조이스는 일종의 '直覺'에 '에피파니'개념을 땡겨다 썼담서요?
(말씀 드린김에.. )제가 요즘 '애러비'의 소년처럼 성장통을 앓고 있는 지도 모르겠군요. 물론 처음은 아닙니다. 십 수년전의 일인데, 지금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나는 게, 저의 사촌오빠 막 문병을 끝내고 나온 형제들(사촌포함)이 병원문을 나서면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 근처에 뭐 먹을 만한 식당 없나?"였어요.(아, 이건 단순히 식사해결 문제가 아니라요. '근사한 식당'을 의미하는 거였어요.) 방금 오빠랑 눈물로 마직막 악수 하고 나와서 말이지요. 그렇지요. 우리는 이렇게 사는구나, 우리는 기차가 마을을 스쳐 지나가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되돌아 가는구나, 거기서 저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몰라요.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흘렀군요. 제가 병원 문앞에서 그 평범한 말 때문에 충격에 휩싸였을 때처럼, 저는 지금 제 자신을 보고 참으로 '낯섬'을 느끼네요. 아, 대체 이건 뭔가, '나'는 어디 있는가, 얼마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들 관 앞에서 처절하게 울부짖는 어떤 어머니의 그 울부짖음이, 그 밀착감이 없는 한 저는 여전히 기차가 마을을 지나가 버리듯, 그렇게 밖에 살아 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대체 언제쯤 나는 하나님의 맨 얼굴 앞에 설 수 있을까요? 대체, 언제쯤...
라라 집사님, 제가 댓글 같은 걸 잘 못쓰는데, 집사님의 언술에는 말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아침 시간에 집사님의 글을 읽고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비루한 일상이라는 말도 생각나고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맨 얼굴"을 생각해 보게 되기도 하는군요. 학생시절 시국사건으로 감방에 들어가 있는 친구를 그 친구의 애인과 함께 면회 간 적이 있었는데요. 그냥 시시껄렁한 말들로 면회시간 5분인가를 채우고 나와서는 허허로운 마음에 당시 막 유행하기 시작한 비디오 방에 가서 부르스 윌리스 나오는 액션영화를 봤던 기억이 나는군요. 감옥의 엄숙함과 비디오 방의 나른함이 서로 창끝을 겨누고 지탱해나가는 게 일상이더군요. 홍상수는 여기에서 희극을 보고 이창동은 여기에서 비극을 본 걸까요? 우리는 그 너머에서 구원을 봐야겠죠?
내가 해 아래서 되어지는 모든 일들을 살펴보니, 그 모두가 마치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허무하였다 - 전도서 1:14
흠...에피파니.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을 않읽어봐서 제가 그 작품에 대해 뭐라 드릴 수 있는 말은 없군요. 대신 에피파니는 대학원 시절에 들어본 기억은 있는 것 같아요.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을 끼운 직후 드러나는 그림 전체의 모양새. 그걸 확인하는 순간 느끼게 되는 깨달음의 환희, 이걸 에피파니라고 명명할 수 있겠네요. 퍼즐 조각들은 일상의 파편들이고요, 조각들 사이를 배회할 때는 그 파편들이 삶의 어느 장소에 놓여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겠죠. 에피파니는 또 한 편으로 그런 일상의 생경함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집사님께서는 어느 순간 삶의 부조리함을 목도하셨죠. 그 순간 퍼즐의 틀 바깥으로 퉁겨나가는 경험을 하셨겠죠. 그 이후로 다시는 예전의 삶에 안주하실 수 없었겠죠. 그래서 에피파니는 고독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제임스 조이스의 비서로 문학경력을 시작해서 그 자신 세계적 문호로 성장한 사뮤엘 베케트라는 극작가 있지요. 베케트의 노벨상 수상작품 <고도를 기다리며>가 삶에 대한 생경함, 부조리함을 희비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고도를 기다리며>와 유사한 베케트의 또 다른 작품 <Act without Words, Part I>을 첨부하오니 감상해보세요) 삶의 부조리함은 당연히 실존주의를 철학적 기반으로 합니다. 여기까지 생각해보면 예전에 정병선 목사님께서 칼럼에서 쓰신 "지경을 넓혀가는 삶"과 에피파니가 어떤 관련이 있을지 궁금해지는군요. 정목사님께서는 <갈매기 조나단>(리차드 바크) 등을 예로 들어 모험을 감행하는 삶을 긍정하셨거든요. 삶의 모험 속에서 에피파니는 어느 지점에 놓여 있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정병선 목사님께서 이 대화를 읽으신다면 조언을 좀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Act without Words Part I http://www.youtube.com/watch?v=VmC8KMEz-xs
하이고.. 이거야 원.. 되로 주고 말로 받는군요. (아, 이런 뜻이 아니던가요?^^) 이번엔 제가 단단히 말려들었네요.^^
에피파니를 이렇게도 설명할수 있군요. 그렇군요. 일상속에서 삶의 생경함, 또는 부조리를 발견하는 것, 그것을 에피파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사실 저도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잠시 떠올려봤습니다. 거기서도 등장인물들이 객적은 대화들을 하잖아요? 그럼서 무작정 고도씨만 기다리고.. ^^한참 젊을때 산울림 소극장 지하계단을 오르면서 제 친구 어리버리 Q씨가 한 말이 기억네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결국 '고독'이라는 거야.." 고도와 고독의 묘한 조화가 재미있었는데, 오랜만에 집사님한테 또 듣네요. ^^
집사님, 엊그제 잠깐 언급했지만, 저는 에피파니를 기독인의 입장에서 접근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구요. 그것은 말씀드린대로 어떤 사건앞에서 '기차가 마을을 지나가 버리듯' 할거냐, 멈춰설거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저도 이쯤에서 성서의 한 구절이 번쩍 떠오릅니다. 엊그제 설교텍스트였던 '선한 사마리안'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현장'을 지나쳐 가지요. 저는 ("강도만난 사람"이라는 말을 부러 피해봤습니다. 윤리도덕적 행함이라는 관점을 될수 있음 배제하고 싶어서요.)
그러나 사마리안은 멈춰섰지요. 기차가 마을을 지나치듯, 쉽게 '현장'(아, 하나님의 리얼리티가 나타나는 장소라고 해도 될까요?^^)을 마주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일상, 그와 대조되는 사마리안의 삶, 뭔가 극과 극이 대립되는 느낌 안 드세요? 이건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에서처럼 그 사이에 '커다란 구렁'이 있어 보입니다. 다만 우리 눈에 안 보일뿐이죠. 저는 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커다란 구렁'을 가끔 소스라치게 보게 되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그걸 제 식의 표현으로 "하나님이 커텐을 살짝 열어 주신다" 라고 합니다.^^) 집사님, 제가 말씀 드리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 그것은 우리 일상에 너무 많이 널려 있다는 겁니다. 아니 전부 다라는 생각이지요. 그런데 저는 그걸 맨날 놓치고 산다.. 그게 저를 못견디게 힘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왜 다 놓치고 사냔 말이지요. 그렇게 환히 보여주시는데..그것은 정목사님의 말씀처럼 나한테만 몽땅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오직 나에게만, 나만 제외하고 모든 게 다 부버가 말한 것처럼 '그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이 참을 수 없는 경박함, 말이지요. 이건 또한 그의 지적대로 하나님까지 '그것'으로 바라봄이 아닌가해서 소스라치게 놀랄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나의 모습에 정말 처절하게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고독속에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연민을 깨닫는 것이 '에피파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집사님, 베케트의 <무언극> 잘 봤습니다. 누가,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다.. 라고 했다지요. 실감나더군요. 베케트가 조이스 비서였군요.
라라 집사님, 집사님 덕분에 요즘 며칠 간은 샘터의 댓글로 시작하는군요^^. 유익한 말씀들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득 하나님의 얼굴을 본 순간(구약에서 "브니엘"이라 했던가요)을 에피파니로 개념화시키신 것은 탁월한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중심의 신앙이 일상에 산재한 에피파니의 순간들을 놓치게 만든다는 말씀에도 적극 공감합니다. 저는 가끔 어쩌면 정용섭 목사님의 메시지들이 담고 있는 근본원리는 무척 간단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에피파니" 너머로 진입하면 고구마 줄기를 캐내듯 그 말씀들의 유기적 상관관계가 한눈에 들어올 거라는 생각 같은 것입니다. 정 목사님께서 그러셨죠, "'믿습니다'를 연발하는 것은 불신앙이다. 하나님은 믿을 만한 것을 믿으라 하신다." 이미 본 자에게는 믿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불필요할 것 입니다. 에피파니는 현현(revelation), 즉 보게됨을 의미합니다. 오늘 하루도 평화 가운데 지내시길 바랍니다.
목사님, 잘 지내시죠?.
매일 다비아 순찰 도니까, 근황은 꿰고 있슴다.ㅎㅎㅎ
대구 더위 끔직한데 이곳도 만만치 않네요. 그 와중에 한바탕 삶의 축제가
(July~ August Festival) 저의 후원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아주 아주 재미있습니다.
딸One이 학교 언니랑 삼성 경제 연구소에서 8월까지 인턴이고,딸Two가 휴가중이고
저녁에는 거실에서 여자 4 명의 춤판이 벌어 지기도 하고, 주말엔 맛난 것 순례하고.........다이나믹!!
**타이는 무예 타이-- 태국 무술. 마호타이--등소평, 강택민의 아주 고가 애용주
영적 분별만큼은 아니지만 마호타이 진품 분별?????( 짝퉁이 뚜어 뚜어)
그리고 이건 귀속말로 드리는 건데요
"동갑의 좋은 점 처음 실감합니다. 목사님이 친구처럼 느껴집니다. "
제가 20중반에 70세 미국 할아버지가 항상 절 부를때" 하이 친구!!"
그런 이력으로 아무나 친구 합니다. 통하기만 하면 ,
나이불문, 성별 불문, 국적 불문, 출신 불문
Made in China 질 좋고 싼 것 많습니다.
더위에 건강하세요? 우리 다비안, 샘터교우들을 위해서도요!!1
감사, 감사 합니다.
샘터에서 두번인가 뵈었지요
요근래 이런저런일로 샘터 뒤풀이에 참여를 몬한 관계로
함께 식사도 한번 하질 몬했네요
예배 끝나고 친히 저희 부부에게 오셔서 말씀을 하여 주셔서 무척 송구스러웠답니다
교회에서는 왜 집사님 권사님 이런 호칭을 써야만 할까하고 고민하며
저는 지금도 샘터 식구들에게 다비아 닉이나 이름을 부르곤하는데
누님이 오셔서 저의 고민을 깨끗하게 해결해 주셨네요
동상, 누님, 누이, 오빠, 행님, 삼촌, 이모등 이런 호칭이 교회 공동체에서 더 적절한 것은 아닐른지요
하여튼 원 누님으로 인하여 우리 샘터가 더더욱 가족 공동체로 거듭 난 것같아 감사 또 감사합니다
제가 샘터를 사랑하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 첫번째를 꼽으라고한다면
흠 목사님과 예배후 저녁 식사하면서 반주(무신 말쌈인지 아시겠지요)를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시방 울나라에서 목사님과 주를 감히 할 수있는 곳이 샘터말고 또 있을까요
이번 샘터 방문하셔서 목사님과 한잔 하시었는지요
만약 몬하셨다면 저의 탓이랍니다
목사님도 예배 인도하시고 기독교가뭐꼬 강의하시고나면
목이 칼칼하셔서 시원한 탁주 한사발 마셨으면 하시는 데
목사님 속내를 우리 샘터 식구들이 아실랑가모르겠네요
하여튼 자알 지내시고 다음번 귀국하시면 목사님 모시고 한 잔 하시자고요
예, 어제 인원도 풍성하고 담론도 풍성했지요.^^ 특히 저도 젤루 기억에 남는 것은 정섭집사님의 '부감(俯瞰)법 '이였어요.
첨엔 부감법??이 부검법으로 들려서리.. 망측한 상상을 하다가,^^ 이내 조감법과 사촌지간임을 알게 되었지요.
거기다 저는 이상의 <오감도>가 자꾸 생각났는데.. 열변 토하시는 집사님 말 짜를수도 엄꼬해서..^^
건축학 공부한 그 냥반 '鳥瞰圖 ' 를 살짝 비틀어서 '烏瞰圖 ' 라캤다지요. (지는 요즘서야 지긋지긋했던 그넘의 시가 눈에 들어옵디다.)
어제 집에 와서 잠도 안 오고 해서.. '대조사회(contrast society) ' (엔간히 낯설어야 말이지요.) 검색하다가, 마침 이신건 교수님(다비아 필진)의 리뷰가 있어서, 흥미롭게 읽었네요. 인용해 드리면서 제 소견도 살짝 묻어가유..^^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그리스도 신앙의 사회적 차원)
(게르하르트 로핑크, 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이신건 박사(서울신대, 조직신학)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신학적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다. 왜냐하면 주님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공의를 구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임한다는 말인가? 사람들마다 견해가 다르겠지만, 나는 "교회를 통해서"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교회 밖에도, 아니 어쩌면 교회를 부정하는 곳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의 사고와 실천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주는 곳은 바로 교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현대신학의 거장 '칼 바르트의 교회론'을 연구하려고 독일 유학의 문을 두드렸다.
상당히 많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내세적, 초월적, 개인적 소망인 천당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교회에 관한 생각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대개 교회는 천당행 열차를 타기 위한 대합실로 오해되거나, 신앙은 열차표 정도로 축소되는 전통이 아직도 뚜렷하다. 그러므로 교인은 하나의 사회(공동체)라기보다는 교회당 안으로 우르르 몰려온 모래알과 같아서, 교회당 문을 나서자 말자 즉시 콩가루처럼 흩어져 버린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리고 교인이 사회 속에서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뿔뿔이 흩어진 교인은 이미 교인이 아니다. 더욱이 사회 속에서 교인이라는 이름은 대개 출세의 도구로 악용되기 십상이다.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는 교인, 사회와 전혀 대비되지 않는 교회를 만든 원인은 무엇이고, 이를 해결하는 방안은 무엇이겠는가?
여러분처럼 이런 고민을 안고 독일 튀빙엔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에 나는 카톨릭 신학부에서 우연히 게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교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분의 강의는 나의 고민을 일시에 풀어주려는 듯이 명쾌하였다. 귀국해 보니, 그분이 쓴 책 한 권이 이미 번역되어 있지 않은가! 바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인데, 그분의 강의 내용이 잘 반영된 책으로 보였다. 그래서 몰트만의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와 한스 큉의 '교회란 무엇인가?'와 함께 나는 이 책도 매우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신학생들에게 이 책을 필독서로 자주 추천한다.
이 책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와 뗄 수 없는 상관성을 지니며, 교회는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삶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을 아주 명쾌하고, 매우 설득력 있게 변증한다. 예수가 원한 것은 영혼의 위로와 구원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소집이며, 교회는 '산 위의 도시'로서 만인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사회적 차원이 인간들에 의해 표출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지상에 도래할 수 있겠는가! 예수의 제자 공동체, 새로운 가정,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의 이상 사회가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사회적 실재라는 것이다. 이 사회 안에서는 일체의 사회적 장벽들이 무너지고, 일체의 지배가 단념되며, 진정한 형제애가 실천된다.
이런 사회를 로핑크는 대조사회(對照社會: Contrastgesellschaft) 혹은 대척사회(對蹠社會:Gegengesellschaft)라고 부른다. 이로 인해 이 용어는 교회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용어로서 한국 교회에 널리 애용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종종 이를 대안사회(對岸社會 혹은 代案社會)로 고쳐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세상과 마주보는 다른 세상을 만든다"는 부정적인 의미와 함께 "세상 안에서 다른 세상을 만든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갖는다. 로핑크의 생각에도 이 두 가지 관점이 분명히 들어가 있다.
간디는 "나는 예수는 원하지만, 예수쟁이는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말과 행동이 다른 예수쟁이를 꼬집은 말이다. 기독교를 욕하는 사람들 중에는 "나는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본다.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한다. 교회가 위기에 빠진 진정한 원인은 교세의 감소와 대형 교회의 추태, 그로 인한 사회적 신뢰도의 추락 등과 같은 표면적인 현상보다는 이보다 더 근원적으로 교회가 자신의 본질 혹은 방향을 잃어버린 사실에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시점에서 이 책은 기독교인의 필독서가 될 만하다.
물론 교회는 대조사회로서 언제나 세상 사람의 존경만을 받을 순 없다. 왜냐하면 어둠은 빛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는 대안사회로서 세상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빛은 밝은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원하신 참 교회,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찾고 계신 분들은 이 책을 통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출처] [펌]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이신건)|작성자 livestone1
라라님!!!! 고맙습니다.
마치 스타디에 참석 한 마냥 실감납니다.
이런 장면들을 지난 세월 동안 오래 기다렸는데
샘터에서 이루어지네요.기쁨을 표할 길이 없네요.
묵상 댓글에서 님의 아픈 마음의 절절함을 보고
저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도 개인사로 2년 전에 큰 여동생을 암으로 먼저 보냈는데
그 심정은 겪은 이만 알지요. 그런 후엔 애착이 없어지고,
허무감이 안개처럼 나를 감쌉니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우리 내면에는 죽음이 내재되어 있다' 있음과 없음의 차이는?
기도 드릴께요.공간 적으론 어차피 어디있던 포갤 수 없어니까,
시공간을 초월하고 영적 교제를 나누는 우리 형제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지요.
12월에 위로의'주'로 한잔 사겠심다.
"이같은 취지에서 '원근법이 아닌 부감도로 교회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는 어느 선지자적 집사님의 발언이 있었습니다."
독서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위의 선지자적 발언을 하셨다는 그 집사님이 누군지 알아맞혀보겠습니다.
수리수리... 음.. 선지자라...
이사야, 예레미아, 호세아,....., 나단,아모스,...
나단?
아하! "요나단"님이시군요.
(요)나단 정섭 집사님이 그런 말씀하셨죠?
정답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