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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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성서 주석 II. 신약성서
데린 게스트, 로버트 고스, 모나 웨스트, 토마스 보해치 엮음,
퀴어 성서 주석 번역출판위원회 옮김,
신국판(152 ․ 224) 양장본, 528쪽, 무지개신학연구소,
2022년 2월 21일, 값 35000원.
ISBN 979-11-974052-9-7 94230 979-11-963374-0-7 94230 (세트)
원서 The Queer Bible Commentary II. The Christian Bible
1. 책 소개
이 책은 역사상 최초로 간행된 『퀴어 성서 주석』의 신약성서 부분 완역본이다. 열일곱 명의 퀴어 신학자들이 집필에 참여하여, 젠더, 섹슈얼리티와 성서에 기울였던 관심을 집대성한 이 주석은 모두의 존엄과 평등을 위한 주석이다. 이 주석에는 페미니즘의 통쾌한 도전과 발랄한 퀴어 관점들이 넘쳐난다. 가부장적 이성애주의 사회의 억압 속에서 여성들과 성소수자들의 고통과 저항과 해방에 초점을 맞춘 이 주석은 어떤 성서 본문이든지 “계속해서 수동적으로 살아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할 만큼 반인간적(anti-human)이며 심각하게 반신적(anti-divine)”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석은 성서 본문에 대한 엄밀한 역사비평적 연구뿐만 아니라 최근의 페미니즘 이론, 퀴어 이론, 탈식민주의 이론, 해체주의 이론, 유토피아 이론에 의존한다. 특히 예나 지금이나 약자들에 대한 억압과 차별과 폭력이 구조화된 세상에서, 예수와 바울은 어떤 혁명적 운동을 시작했는지, 더군다나 바울은 당시 가정교회들의 대다수 신자들이었던 노예들이 피할 수 없었던 성적인 의무에 대해 어떻게 가르침으로써 동성애에 대한 정죄를 해체했는지, 교회는 예수와 바울의 혁명적인 메시지를 왜 다시 세상 질서와 타협시켰는지, 또한 예수와 바울을 죽이는 데 앞장섰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문자 근본주의자들과 권력자들은 왜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왜 신약성서는 하나님을 퀴어 하나님으로 커밍아웃하신 분으로 묘사하는지, 왜 예수 그리스도는 퀴어 그리스도인지, 또한 성서 전체가 어떻게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커밍아웃한 구원의 복음에 대한 증언인지를 밝힌다. 따라서 이 주석은 새로운 질문들을 묻고, 전통적인 질문들을 보다 획기적인 방식으로 다시 묻고, 고대 본문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한다. 이처럼 퀴어 관점에서 성서를 읽는 것이 어떻게 성서 해석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 해방적인 주석에 포함된 방대한 참고문헌은 독자들로 하여금 성서에 대한 퀴어 해석과 연관된 문헌들 전체를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2.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할 질문들
예수를 처형하는 일에 왜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과 신학자들이 앞장섰는가?
왜 독일 교회 목사들과 대학의 교수들이 히틀러를 지지하는 데 앞장섰는가?
왜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들 대다수가 인종차별주의자 트럼프를 지지하는가?
섬김과 사회개혁에 앞장섰던 복음주의자들이 왜 오늘날 혐오에 앞장서는가?
컨텍스트를 고려하지 않은 텍스트는 왜 악마의 프리텍스트(빌미)가 되는가?
지구와 뭇 생명들은 지금 무엇을 출산하기 위해 마지막 몸부림치고 있는가?
성서의 하나님은 왜 퀴어하시며, 또한 예수는 어떻게 ‘퀴어 그리스도’이신가?
차별과 폭력이 구조화된 세상에서 예수와 바울은 어떻게 혁명을 시작했는가?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예수는 왜, 어떻게 완전히 수정했는가?
예수는 왜 하나님 나라를 불결의 상징 누룩과 성가신 겨자씨에 비유했는가?
왜 탕자나 세리처럼 “자격 없는” 아웃사이더가 하나님 나라에서 환영받는가?
예수는 왜 성전보다 사람을, 율법보다 자비를, 업적보다 은총을 강조했는가?
예수는 왜 보상과 처벌 중심의 종교를 용서와 잔치 중심의 종교로 바꿨는가?
예수는 왜 가부장적인 이성애주의의 근본인 혼인과 가족제도를 폐지했는가?
예수는 왜 백부장의 동성 애인을 치유했으며, 그의 믿음을 매우 칭찬했는가?
바울은 가정교회들의 많은 노예들을 위해 어떻게 동성애 정죄를 해체했는가?
교회는 예수와 바울의 혁명적 메시지를 왜 다시 세상 질서와 타협시켰는가?
제국의 질서와 가치를 전복시킨 예수운동은 왜 퀴어 공동체로 출발했는가?
제국의 종교가 된 기독교는 누구를 위해 여성과 성소수자들을 차별하는가?
젠더와 섹슈얼리티 문제가 왜 성서 해석과 교회갱신에서 대단히 중요한가?
오랜 박해와 절망은 왜 하나님의 정의를 메시아적 폭력으로 둔갑시키는가?
약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교회가 몰락해가는 이유가 성서 본문 때문인가?
투투 대주교는 왜 ‘안티게이 하나님을 예배하느니, 지옥에 가겠다!’ 했는가?
3. 목차
“무지개신학 시리즈”를 발간하면서 __ 9
저자소개 __ 14
서문 __ 21
감사의 말씀 __ 23
약어 __ 26
서론: 성서에 근거한 동성애자 공격을 무장해제시키기 (로날드 롱) / 29
마태복음 (토마스 보해치) __ 57
마가복음 (마르셀라 알타우스-레이드) __ 105
누가복음 (로버트 E. 고스) __ 119
요한복음 (로버트 E. 고스) __ 153
사도행전 (토마스 보해치, 로버트 E. 고스, 데린 게스트, 모나 웨스트) __ 181
로마서 (토마스 행스) __ 206
고린도전서 ‧ 후서 (할리 E. 히어론) __ 243
갈라디아서 (패트릭 S. 쳉) __ 272
에베소서 (로버트 E. 고스) __ 281
빌립보서 (저스틴 타니스) __ 294
골로새서 (토마스 보해치) __ 320
데살로니가전서 ‧ 후서 (테오도어 제닝스) __ 340
목회서신: 디모데전서 ‧ 후서, 디도서 (R. E. 고스, 데보라 크로스) __ 362
빌레몬서 (스티븐 J. 무어) __ 376
히브리서 (토마스 행스) __ 381
야고보서 (L. 윌리엄 컨트리맨) __ 412
베드로전서 ‧ 후서 (로빈 홀리 고슬린) __ 424
요한 서신 (L. 윌리엄 컨트리맨) __ 444
유다서 (L. 윌리엄 컨트리맨) __ 459
요한계시록 (티나 피핀, J. 마이클 클락) __ 469
용어 해설 / 497
참고문헌 / 503
편집후기 / 525
4. 본문 속으로
성소수자들의 권리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는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공개한 “국민인식조사”(2020) 결과처럼, 차별금지법은 국민의 88.5%가 찬성합니다. “오직 개신교회만 반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지상의 어머니’ 역할을 망각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소수자들(미국의 경우, 성인 2천만 명 이상, 전체 인구의 10%, LGBTQ Nation, Dec. 13, 2021)을 보내주신 것은 특별한 계획을 세우신 때문인데 우리가 그것을 헤아릴 생각조차 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발간사 중에서)
그리고 내가 확신하는 것은, 언젠가는 미래의 종교가, 도덕적 둔감성 때문에 쓸모없게 되지 않는다면, 동성애 성관계를 현재 대출에 이자를 받는 것(고리대금)에 화를 내는 정도로 여길 것이고, 종교에 근거해서 노예제도를 찬성하는 것이 효과가 없듯이 동성애에 반대하는 종교적 선전(religious propaganda)이 효과가 없을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을 모든 진리 속으로(into all truth)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분이 요한복음의 예수가 아니셨던가(16:13)? 여기에 덧붙이자면, 모든 남자들처럼 한계가 있는 남자인 예수께서 상상하거나 이해하실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너머로 성령께서 제자들을 데려가셨으니 말이다. (서론 중에서)
마태복음 8:5-13에는, 거의 모든 성서가 ‘종’이라 번역하는 어떤 사람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러 온 로마 백부장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이 백부장이 고쳐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그리스어로 백부장의 ‘소년’(‘파이스,’ pais)이다. 제닝스는, 신약성서 속 동성성애(homoerotic) 본문에 대해 뛰어난 주석을 쓰며, “그리스어를 쓰던 세계에서 ‘파이스’라는 낱말은 동성 관계에서 사랑받던 남자를 부를 때 으레 쓰던 말이다”고 한다(Jennings 2003: 133, Dover 1978: 16을 재인용). 오늘날에도 어떤 퀴어 공동체에서는, ‘한 남자와 그의 소년’이라는 말을 아직도 쓰고 있다. 게다가, 고대에는 종 또는 노예와 주인이 소년애(pederatic) 관계를 갖는 것이 드문 일도 아니었다(Lawrence 1989: 701; Nissinen 1998: 71). 이런 역사적 관례에 비추어 보면, 전통적인 주석처럼 이 백부장 이야기를 그저 아끼는 종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러 온 이야기로 보기는 어렵다(Harrington 1991: 114-15). … 오히려 여기서 예수가 동성 관계를 별말 없이 사실상 인정해 준다고 볼 수 있다. 퀴어 해석자들은 글의 깊은 뜻을 읽으며, 서로에게 동성 간 헌신하는 예로서만이 아니라, 예수가 동성애 행위를 꾸짖을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예를 본다. 마태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일부러 주인과 ‘소년’의 이런 상황을 부각시켰다는 것은, 공통 자료에서 나온 누가복음 7:1-10이 백부장의 ‘소년’이라 하지 않고 그의 ‘종’(그리스어로 ‘둘로스,’ doulos)이라고 하는 것만 봐도 확실하다. 게다가, 예수는 백부장의 ‘소년’을 치유해준 것만이 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한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칭찬까지 한다(마 8:10). (마태복음 주석에서)
하나님은 성적이며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좁은 한계를 넘어서, 소외된 사람들 가운데 온전히 현존한다고 여전히 담대하게 믿는 모든 그룹과 개인과 함께 하신다. 성적인 반체제 인사들이 교회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신학 속에 있는 성적인 이데올로기를 담대하게 걷어내고, 사랑 역시 상품이 된 세상에서 온전함을 가지고 담대하게 사랑할 때, 하나님은 이성애 신학(heterosexual theology)으로부터 커밍아웃하시기 때문이다. 사실, 배제된 사람들의 모든 공동체 속에서, 그리고 성적, 경제적 정의를 위한 모든 투쟁 속에서 퀴어 하나님은 충만한 영광과 권능과 은혜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마가복음 주석에서)
예수는 구원의 희망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린다. 그는 용서라는 희망을 죄인들과 나눈다(7:50; 11:4; 15:7, 10; 18:9-14; 19:1-10). 그의 식사는 성결과 정결의 엄격한 의제들을 가진 유대인들에게는 경우에 맞지 않는 잔치였는데, 성결과 정결 예법을 어겼고 무언가 새로운 것, 벗어난 관계를 암시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죄 용서는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 희생 제물을 바치는 성전 체제를 전복시켰다. (누가복음 주석에서)
그 시각장애인의 부모는 적대자들이 심문할 때 매우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는데, 예수는 이상하게도 그들을 결코 만나지 않는다. 그들은 두려워서 이제 치유받은 아들과 종교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모호한 언사를 쓴다. 그들은 대답하면 아들 편에 서는 것이고, 그 때문에 종교적 축출을 당할 것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들은 아들이 날 때부터 볼 수 없었고 지금은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 증언한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커밍아웃하는 자녀들과, 교회의 편협한 윤리적 제한과 배제와 강압 의례들(rituals of exclusion and coercion)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강요받는가! 부당한 압력과 교회의 윤리적 독단주의 때문에 부모들은 동성애 자녀를 강제수용소 같은 전환치료(ex-gay) 프로그램에 보냈다. (요한복음 주석에서)
하나님은 일정한 육체, 곧 이성애자 육체, 일부일처주의자 육체, 독신자 육체, ‘점잖고’ 용납되는 육체만이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모든 육체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육체란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 이성애자, 트랜스젠더, 범성애자, 무성애자, 다른 성애자(differently sexual),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 일부일처주의자, 독신자, 다형도착자(polymorphously perverse)의 육체를 포함한다. 이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통해 포용적인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성령을 각자의 언어로 경험한다. 하나님은, 성령이 권력층에 있는 부유한 백인들에게만 나타날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성령이 남자와 여자, 아들과 딸, 남종과 여종, 젊은이와 늙은이 모두에게 부어질 것이고, 그들이 꿈을 꾸고 환상을 보고,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예언할 것이라고 자세히 말씀하신다. (사도행전 주석에서)
로마서 1:27에 대한 일반적 해석처럼, 바울이 모든 종류의 ‘동성애적인 행위’에 연관된 모든 남자를 정죄한다는 해석은, 하나님이 억압자들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억눌린 이들과 폭력과 강간의 피해자들에게 분노하신다고 바울이 선포하게 만드는 꼴이다. … 페미니스트 연구에 뒤이어 곧 사회경제적 양식에 대한 연구들이 나와서 그 인사말에 나오는 사람 가운데 노예의 이름이 아주 많다고 밝혀주었다. 인사말에 보이는 28명의 이름 중 적어도 12명, 많다면 26명이나 노예의 이름으로 흔히 쓰인 이름을 가졌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바울이 편지를 쓸 무렵에는 자유인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이 여전히 더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로마법에 따르면 노예는 법적으로 혼인할 수 없었다. (로마서 주석에서)
편집자주: 세계대전들과 홀로코스트가 유럽, 특히 인구의 97%가 기독교인이었던 독일에서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희생양이신 예수님을 예배한다. 그러면서 우리 스스로가 역사 속에서 수없이 희생양을 만들어온 주된 사람들이 되었다. 유대인, 이단, 죄인, 마녀, 동성애자, 가난한 사람, 다른 교단, 다른 종교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우리의 악을 다른 곳으로 떠넘기고 거기에서 자신은 의롭다고 여기며 그 악을 미워하는 패턴은 모든 사람들의 본성 속에 있다. 결국, 우리의 과제는 악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지 않은가? 아니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누군가를 배제하는 사고 과정, 즉 배타적인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항상 어떤 차원에서는 폭력적인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법이다.” 리처드 로어, 정준화 역, <성경의 숨겨진 지혜들>, 212.
편집자주: 예수는 하나님 나라 비유들에서, 사람들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불결의 상징인 ‘누룩,’ 작고 성가신 ‘겨자씨’에 비유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믿는 내부인들(큰 아들, 제사장과 레위인, 자신이 죄인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는 바리새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 포도원에서 새벽부터 일한 일꾼들)이 아니라 오히려 자격이 없다고 간주된 외부인들(탕자, 사마리아인, 자비를 간구하는 세리,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 오후 늦게 일하기 시작한 일꾼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환영받고 있다고 역설적으로 가르쳤다. 버나드 브랜든 스캇,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2006); 로버트 펑크, <예수에게 솔직히>(1999), 292-300; Stephen J. Patterson, The God of Jesus (1998), 135ff.
편집자주: 세례자 요한이 선포했던 하나님의 나라 메시지를 예수가 왜, 어떻게 철저하게 수정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최근의 가장 탁월한 연구를 위해서는 존 도미닉 크로산, 김준우 역, <비유의 위력>(한국기독교연구소, 2012), 제6장(하나님의 나라)을 보라. 또한 예수가 성전과 제사, 율법, 의무, 도덕 중심의 종교를 사람 중심,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과 축복, 잔치, 사랑과 용서 중심의 종교로 만든 것에 대해서는 리처드 로어, 정준화 역, <성경의 숨겨진 지혜들>(한국기독교연구소, 2018)을 보라.
편집자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화육/성육신(incarnation)하셨다는 믿음으로 시작된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예수보다 플라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 물질, 몸, 여성, 자연을 경멸하는 탈육신(excarnation)의 종교로 둔갑한 것에 대한 비판, 그리고 변화(회개)와 은총을 거부하는 에고(특히 남성들)의 자기중심적 특성에 대한 분석, 그리고 토머스 머튼의 유산을 이어받아 가짜 자기(에고) 중심의 경쟁적이며 이분법적이며 폭력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서 진짜 자기(참나)를 찾는 관상 전통의 불이적 사고(non-dual thinking)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리처드 로어, <불멸의 다이아몬드>, 특히 26, 149, 175; <야생에서 아름다운 어른으로>, 19-21을 보라. 또한 원죄와 대속론 중심의 전통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대안은 리처드 로어, <오직 사랑으로>, 228 이하; <보편적 그리스도>, 193를 보라. 성서와 인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는 폭력”(redemptive violence)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 “구원하는 용서/고난”(redemptive forgiveness/suffering)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통찰에 대해서는 리처드 로어, <성경의 숨겨진 지혜들>, 221를 보라.
편집자주: 당시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상당히 과장된 기록에 의하면, 로마제국에 맞선 제1차 반란에서 유대인 110만 명이 살해되었다(Jewish War. 6.420).
편집자주: 로마제국의 목표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 즉 “평화로운 세계 건설”이었다. 그 방법이 “승리를 통한 평화”였기에 로마인들은 정복 전쟁과 노예제도, 검투사 경기 등 잔인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평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성서의 “정의를 통한 평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제국신학자들 역시 “은총으로 구원받는다”고 믿은 것은 승리의 여신, 전쟁의 신, 군대의 신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인들 역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에 동의했을 것은 그런 신들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구세주,’ ‘신의 아들,’ ‘주님,’ ‘죄를 속량해주시는 분’이신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믿음과 로마제국의 질서와 가치들에 대한 믿음이 정의를 가져다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의 은총’과 ‘믿음’이 소수의 특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사회-종교적으로 짓밟히는 약한 생명들을 포함하여 모두를 위한 것인가 하는 것이 신학적 판단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종교는 “제국의 종교”와 “모든 피조물의 종교”라는 두 종류로 구분된다. Wes Howard Brook, “Come Out My People!” God’s Call out of Empire in the Bible and Beyond (Orbis, 2010), 6. 한편 <그리스도와 제국: 바울에서 탈식민주의 시대까지> (Fortress, 2007)라는 역작을 쓴 외르크 리거는 “모두에게 생명을 주는 종교/기독교”와 불의와 억압을 초래하는 “현상유지의 사악한 종교/기독교”로 구분한다. Joerg Rieger, Jesus vs. Caesar: For People Tired of Serving the Wrong God (Abingdon, 2018). 이런 선상에서 최근의 바울 해석자들은 바울이 말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롬 5:1)는 것은 “우리”(대안적 공동체)가 “예수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예수의 믿음/신실함”(갈 2:16)으로 의롭게 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참조: 리처드 호슬리, 정연복 역, <제국의 그림자 속에서>(한국기독교연구소, 2014); John Cobb, Jr. and David Lull, Romans (Chalice, 2005), 17; Helmut Koester, Paul and His World (Fortress, 2007), 4; John Dominic Crossan, The Challenge of Paul (2017-19). 최근의 바울 해석을 탁월하게 설명한 크로산의 이 강좌(역사적 바울의 도전)는 정원진 목사가 16회분 동영상으로 만들었다. http://historicaljesus.co.kr/ xe/article/485845. 그는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의 도전” 역시 18회분 동영상으로 만들었다. http://historicaljesus.co.kr/xe/article/485536
편집자주: 전 지구적 기후위기가 초래하는 여섯 번째 대멸종 사태로 인해, 인류의 미래는 멸종, 야만의 시대 등 섬뜩한 일곱 가지 시나리오로 예상되고 있다(캐서린 켈러, 한성수 역, <묵시적 종말에 맞서서>, 2021, 285ff). 인류의 1%에 해당하는 억만장자들이 99%와 자원을 약탈하는 오늘날의 금융자본주의 체제(반다나 시바)에서 거의 모든 인류의 삶의 조건들이 악화될수록, 세계 곳곳에서 정치-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은 더욱 혐오와 차별을 조장한다. 미국에서는 성소수자들 가운데 가장 취약한 트랜스젠더들의 권리를 제한시키는 법안들이 2020년부터 280개나 추진되고 있을 만큼 인권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USA Today, Jan. 20, 2022).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벌이는 이런 반복음적 혐오와 차별 속에서 성경 본문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성격을 논할 때, 요한계시록이 잔인한 박해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악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위기의 시대에는 예수와 성경의 계시를 문자주의로부터 구출하는 과제가 매우 중요하다(로빈 마이어스, <예수를 교회로부터 구출하라>, 2012). 역사적 예수 연구의 대표적 학자인 크로산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폭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김준우 역, 2015)에서,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의 잔인한 심판과 폭력(특히 14, 19장)이 성경의 마지막 결론인 것처럼 오해하지 않도록 매우 경계한다. 성경 전체에 나오는 폭력적 하나님과 예수의 산상수훈에 나타난 비폭력적 (원수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두 가지 비전을 설명하면서 크로산은 “그리스도교의 성경의 규범과 기준은 성경의 그리스도이지만, 성경의 그리스도의 규범과 기준은 역사적 예수이다”라고 단언한다(58, 330). 즉 역사적 예수의 비폭력적 사랑을 기준으로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급진성”(안식일법, 희년법 등 급진적 분배정의와 원수 사랑)과 “문명의 정상성”(인간의 문명이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보복적 정의와 폭력)이 서로 충돌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그는 “하나님의 급진성을 계시한 것은 역사적 예수를 통해서 원수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말하며, “원수를 살해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문명의 정상성은 묵시적 예수를 통해서” 말한다고 지적한다(47). 다시 말해, 하나님의 급진성으로 추진되는 공동체의 평화가 성경 안에서 계속해서 같은 하나님의 이름으로(실제로는 보복적 정의의 이름으로) 부정되고 전복되는 이유는 제국들과 문명의 폭력성이 하나님의 급진성을 전복시킨 때문이라고 규명한다. 이런 점에서, 성경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참된 계시(하나님의 급진성을 통한 평화)와 거짓 계시(문명의 정상성인 폭력)를 분명히 구분함으로써, 크로산은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참 하나님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증언과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밝혀주며, 예수와 성경의 계시를 문자주의로부터 구출한다.
인종차별주의가 유색인종의 문제가 아니라 백인들의 문제인 것처럼,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결국 여성들의 주체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가부장제 지지자들이기 때문인 것처럼, 이 책은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성소수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적 이성애주의자들의 문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준다. 또한 노예제 철폐와 보편 교육, 병원과 감옥 개혁 등 사회 개혁과 섬김에 앞장섰던 복음주의자들이 오늘날 혐오와 차별에 앞장서는 가장 큰 이유는 성서가 기존질서에 대한 체제변혁의 문헌이라는 사실, 그리고 성서 본문에 대한 비판적 해석 방법론을 배우지 못해, 컨텍스트를 고려하지 않는 텍스트는 악마의 빌미(프리텍스트)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때문이라는 점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