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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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화두 세 가지
동양학 전공자인 나는 내 삶을 살아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세 마디의 말씀이 있다. 그것이 내 삶의 화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본분사(本分事)’, ‘평상심(平常心)’, ‘자재인생(自在人生)’이다. 이 간단한 말 세 마디는 기실 유불선(儒佛仙)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다. 동양학을 전공하고 성경을 공부한 나의 뇌리에는 줄곧 이 세 마디가 떠나지 않았다.
‘본분사(本分事)’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 “너는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라고 묻는 것과 같다. 하늘은 뭇 생명들에게 제각기 자기 자신의 고유한 본분(本分)을 내렸으니, 이것이 천분(天分)이다. 내가 본위로 살아가야 할 나의 몫이 즉 본분(本分)이다.
내가 예수 믿은 후에 내가 본위로 살아가야 할 본분(本分)이 뭘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가 받은 달란트는 무엇이냐?” 공자의 사상을 주자는 성리학으로 풀었듯이 예수의 사상을 바울은 신학으로 풀었다.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바울은 주님에게 두 가지를 물었다. 첫 번째 질문은 “주님, 누구십니까?”(행 22:8)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 질문은 “주님,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행 22:10)라는 것이었다. 그가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나니 그는 이제 무슨 본분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를 물은 것이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는 것이 그의 본분이었다(행 9:15). 바울과 같이 주님은 승천하실 때에 우리에게 각자의 재능에 따라 달란트, 즉 은사를 주고 가셨다(마 25:15, 엡 4:8).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 즉 은사로 우리에게 맡겨진 본분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
‘평상심(平常心)’은 선(禪)의 화두이다. 유명한 조주 종심선사와 그의 스승 남전 보원선사 사이에 이루어진 문답이다. “도(道)가 무엇입니까?” “평상심(平常心)이 도(道)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됩니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어떻게 안 하면 어떻게 그것이 도(道)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습니까?” “도(道)는 ‘아는 데’ 속한 것이 아니다. 안다는 것은 다 망각(妄覺)이요, 모른다는 것은 다 무기(無記)이다. 정말 참길을 깨달으면 마음은 확 뚫려 허공 같은데 거기 어디 시비(是非)가 있을 수 있겠느냐?” 그 말에 조주가 크게 깨달았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요 1:1). 여기서 말씀을 도(道)라고 번역할 수 있다. 말씀, 즉 도(道)이신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요 14:6). 여기서 길도 도(道)이고 진리도 도(道)이다. 길은 생명에 이르게 하고 진리도 생명에 이르게 한다. 도(道)라는 글자를 파자(破字)하여 보면 쉬엄쉬엄 가다는 책받침(辶=辵)과 머리 수(首)가 결합한 글자로서 본래의 의미는 ‘인도하다’, ‘이끌다’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도(道)는 생명으로 이끈다는 뜻이다. 진리의 헬라어 단어 알레테이아(aletheia)는 ‘아(a: negative, 즉 부정) + 레테(lethe: 망각)’이므로 탈은폐(脫隱蔽), 즉 숨겨진 것의 드러남, 곧 실재이다. 이 세상에서의 실재는 오직 생명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빌라도도 “진리가 무엇이오”(요 18:38)라고 물은 것이다.
도(道)와 진리는 생명이고 그 생명은 우리에게 평상심(平常心)을 가지라고 말한다. 평상심(平常心)을 가지면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있든지 그것을 염려하지 않고 만족하며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1-13). 그것을 장자는 “승물이유심 탁부득이 이양중(乘物以遊心 託不得已以養中)”이라고 하였다. 해석하면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있든지 그것을 부득이함(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그 안에서 노닐어라. 그러면 내면세계를 잘 양육할 수 있고 건축할 수 있으리라. 내면세계의 건축은 오직 생명으로 건축할 수 있다. 생명 아닌 것은 우리에게 불안과 불평과 근심과 걱정 등을 가져다주지만 생명은 우리에게 평상심(平常心)을 가지게 한다.
자재인생(自在人生)은 소요(逍遙), 즉 노니는(遊) 삶의 방법론이다. 본분사(本分事)를 붙들고 평상심(平常心), 평등심(平等心), 평정심(平靜心)을 가지고, 일과 사물을 대할 때 자재(自在)하게 된다. ‘스스로 있음’이 자재(自在)이다. 스스로 있는 자재(自在)는 ‘네 있는 그곳에서 머물러라’라는 것이다. 그것이 자유(自由)이고 초월이다. 그런 자유와 초월의 ‘스스로 있음’의 자재(自在)가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지혜이다. 밥 먹을 때 밥 먹고, 똥 눌 때 똥 누고, 잠잘 때 잠자는 것, 그것이 자재(自在)이다. 인생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니,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오롯이 존재하라. 그러면 진정 소요자재(逍遙自在)하는 삶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시다. 스스로 있는 자가 바로 자재(自在)이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하나님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 뭐라고 대답해야 하느냐(출 3:14)고 물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출 3:15)라고 하셨다. 스스로 있는 자는 ‘나는 ~이다’라는 뜻이다. ‘나는 ~이다’라는 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분으로서 긍정적인 모든 것의 실재이시며, 그분께서 부르시고 보내신 이에게 필요한 모든 것의 실재이시라는 뜻이다.
‘나는 ~이다’이신 스스로 있는 자, 즉 자재(自在)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있든지 모든 것의 실재이신 하나님의 넘치는 공급을 받음으로 자재인생(自在人生)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이다.
동양학과 그리스도교 신앙이 융해 소통된 브니엘남 님의 화두 풀이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옛날 선비 복장을 한 예수님 초상이 언듯 떠오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