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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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조심스럽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권유해야 할지?
참... 요즘은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은 듯 합니다.

시드니

2009.01.07 11:49:24
*.167.253.2

아주 흥미있는 이슈네요~

그분에게 매주 복음이 선포되고 있고, 그가 어떻게든 복음의 통로가 되고 있는데,
우리가 더 할일이 있을까요?

만약에 중풍병자를 지붕에서 달아내린 친구들 중의 한사람이 스님이었다면... 강도 만난 이웃을
도운 사마리아인이 스님이었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궁금해집니다.

차성훈

2009.01.07 12:24:36
*.227.18.46

오히려 저 스님을 통해서 많은 청각장애인들에게 메시지가 전달된다는 측면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머리를비우고

2009.01.07 12:27:17
*.117.199.100

상상력의 달인으로 인정합니다. ㅎㅎ
profile

정성훈

2009.01.07 12:40:18
*.55.137.106

예수님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셨을까?? 궁금해지네요

첫날처럼

2009.01.07 13:01:22
*.54.79.126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고전물리" 와 "현대물리" 라고 말을 시작해볼까요? 아니면 텍스트와 리얼리티라고 말해볼까요?

고전물리는 물질계의 물리적 이치를 밝히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공기의 저항이 없는 것을 가정한 상태에서의 포물선 운동" 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물질적 현실과는 괴리되어 있거나, 또는 수많은 예외에 대해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대물리는 물론 거슬러 올라가면 고전물리학적 바탕을 가지고 있는 것이겠지만, 물리학의 실제성과 현실성 확보라는 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고전물리학과는 차별화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물리학을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제 말에 틀린 점이 있으면 가차없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텍스트와 리얼리티의 관점에서 다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한국 교회는 텍스트가 텍스트로만 남은 나머지, 텍스트가 리얼리티를 살려내지 못하고 오히려 질식시키는 상황에 직면해있는 것 같습니다...

신영복 교수님 아시지 싶습니다... 그 분은 크리스찬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크리스찬 인가요???) 그렇지만 그 분의 말씀, 그 분의 삶은 어느 누구보다도 복음적이며 그리스도적으로 보입니다... (물론 동의하지 않으시는 분도 있겠죠...) 스스로 크리스찬임을 자임하는 우리 나라의 정치인들의 비복음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행태도 지금 눈 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조금 위험하게 보실지는 모르지만, 저는 "하나님은 사람의 겉이 아닌 중심을 보신다" 는 말씀을 적극적으로 해석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겉이란 것은 우리를 감싸고 있는 모든 외피적인 것들로 "종교" 또한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텍스트적 차원의 신앙이 아닌 리얼리티 차원의 신앙... 또한 텍스트는 리얼리티를 생생하게 살려내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그런 방향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텍스트가 씌여진 그 생생한 상황이 사실은 바로 리얼리티였겠죠...

런너

2009.01.07 13:11:33
*.200.163.216

저 스님의 마음과 봉사에 응원을 보냅니다..

시드니

2009.01.07 13:30:41
*.167.253.2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에 아멘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말씀 때문에, 저는 이제 누가 진정한 크리스챤이고 복음적인지에 대해서
섣불리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고전 13:3)
저는 이 스님이 베푸시는 희생,봉사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생명의 본체에서
흘러나온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알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분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밖에는 없으시니까요.

가라지의 비유에서 보듯이, MB를 천국에서 볼 지 누가 알겠습니까?
profile

paul

2009.01.07 13:35:08
*.32.241.17

제 생각에는 이것 역시 하나님의 역사가 아닌가 합니다. 그 분 스님을 통해서 하나님으 말씀을 전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겠지요. 또한 스님께서 이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받아들이시던지 아니면 그냥 스님으로 사시던지도 하나님의 뜻이시겠지요.
제가 보기에는 스님이시나 그 교회 분들이시나 다 하나님 안에서 참 예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profile

바우로

2009.01.07 13:50:01
*.62.26.5

한국 천주교 순교자중에 강완숙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충청도 내포(지금의 충남 아산)출신인 이 분은 신유박해때인 1801년 5월 23일 순교한 순교자입니다. 당시 순조실록에서 "강완숙은 여류의 괴수인데, 주문모란 자를 숨기고는 성명과 거주지를 어지럽게 변경하여 속인 간사한 형상이 수없이 많다.'라고 쓸 정도로 한국 여성 천주교 신자들의 지도자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선교사 주문모 신부의 보호자로 활동한 분입니다. 덕분에 주문모 신부는 자신감을 갖고 전도하여 한국 천주교 신자가 사천 명에서 만 명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강완숙이 천주교를 소개받았을때 한 말이 있습니다.
"천주라면 하늘과 땅의 주인일 것이다. 이 종교의 이름은 옳다. 그렇다면 그 교리는 진리일 것이다."
천주교를 받아들인 게 아니라 소개받았을 뿐인데도, 이미 천주교에 대해 깨닫고 있었던 것이죠. 마찬가지로 기사에 나온 스님도 출석하시는 개신교회에 교적이 등록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이미 하느님에 대해서 깨닫고 있지는 않을까요?

첫날처럼

2009.01.07 14:00:00
*.54.79.126

제 말씀도 똑같습니다... 판단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으로 크리스찬들은 스님의 행동을 보고느 그냥 고린도전서 13:3 절의 행동이라고 너무도 섣불리 규정짓는단 말이죠...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정말 많습니다... 예전에 자신이 돌보던 유태인 고아들이 나치에 의해서 가스실에서 죽어야 하는 운명에 처했을 때, 그 어린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자신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그 아이들을 품에 안고 같이 죽음의 길로 갔던 야누슈 코르착 박사의 행동을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누가 쉽게 단정지을 수 있을까요? (그 분은 크리스찬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크리스찬들은 자신들에게 사랑이 없음을 보지 못하고, 크리스찬이 아닌 사람들 속에서 나오는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는 우를 너무나 쉽게 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도 그런 이야기를 종종 하시구요...

남을 판단하지 않고 묵묵히 은총의 빛을 따라 묵묵히 예수의 사랑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시드니 님의 말씀도 깊이 공감합니다... 시드니 님은 제가 가지지 못한 반쪽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시드니

2009.01.07 16:42:02
*.167.253.2

아~ 첫날님이 제가 그토록 찾던 저의 그 반쪽이신가요 ? ㅋㅋ

안희철

2009.01.07 19:26:35
*.206.196.62

첫날처럼님 안녕하세요.

제가 관심있는 분야들에 대해 말씀하셔서 조금 첨언하려고 합니다. 고전물리와 현대물리의 차이는 "실제성"이나 "현실성"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를 드신 줄은 잘 알겠는데, 아마 이 둘의 중요한 차이는 -거시물리 차원에서만 거론하자면- "상대성"에 있다고 해야 할겁니다. 갈릴레이, 데카르트나 뉴턴 또한 오늘의 시대에서 고전물리를 했다면 그들이 변수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정밀, 엄밀하게 수식에 첨가하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복잡성"의 물리가 말하듯이, 그들은 더 높은 차원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제시할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두 물리의 차이는 물리적 정밀성의 차이라기 보다는 "관점"의 차이라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물론 고전물리는 틀렸고 현대물리가 옳은 것이지만요.

그리고 텍스트와 리얼리티. 오늘날은 프랑스의 철학자 보드리야드가 말하듯이 "하이퍼리얼리티"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이퍼 리얼리티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볼 수 있듯이 리얼리티를 잠식해버립니다. 리얼리티보다 더 리얼리티한 상황연출로 무엇이 리얼리티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시대를 읽어내는 고도의 철학적 사변이라고 봅니다. 교회 또한 이것에 노출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고요.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기 보다는 이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고, 저 위의 스님 이야기도 그 노선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다 잘 알고 계신데 엄한 댓글이 아닐까 걱정도 되지만, 일단 여기서 짧게 줄입니다. 정보 공유 차원에서 올립니다. 신영복 교수님, 저도 참 좋아하는 분입니다. "처음처럼"(소주말고^^)

안희철

2009.01.07 19:46:36
*.206.196.62

이러한 사건들은 궁극적으로 "종교간의 대화"에 대한 촉발이 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종교간의 대화를 왜 해야되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제 경험적으로는 이런 대화의 결실은 종교의 "일치"나 진리의 "확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진리에 대한 "인식", 그래서 내 종교와 이웃종교의 "차이" 인식, 결과적으로 이웃 종교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그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 첫날처럼님이 말씀하셨듯이 텍스트적으로 이런 결과를 인식하는 것과 리얼리티로 경험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한국 개신교에서는 이웃종교의 신자, 특히 스님과 같은 성직자들을 "마귀"와 동급으로 "느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종교간의 대화의 주도자는 거의 대부분 개신교입니다. 아이러니이지만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밑에 인용된 판넨베르크의 글에서와 같이, 제 주장은 기독교의 진리는 여전히 보편진리이자 동시에 "배타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화"는 결코 진리를 폐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체성"을 발견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줍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이만 줄이고 판선생님의 글을 따오겠습니다. 예전 한국에서 "기독교와 타종교"란 제목으로 강연했던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부만 올립니다.

-------
세계종교들의 진리 주장은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신에 관한 진리를 주장하고 각자에게 복종을 요
구함으로써 불가피하게 갈등을 야기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보편적 진리주장은 한 종교의 정체성
을 상실하지 않고서는 포기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신자
들만의 구세주로 말하고 더 이상 다른 모든 사람들 각자의 구원이 달린 구세주로 말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그 정체성을 상실할 것이며, 끝내는 존속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존 힉이나 다른 사람
들에 의해서 주창되어 유행하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주된 과오는 많은 종교들을 동일한 신적 실
재에 대한 다양한 접근들이며 마치 이 접근들이 필연적으로 상호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생
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들은 바로 이 한 분 하나님의 성격과 인간을 향한 그의 요구에 대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 분 하나님의 참 정체가 무엇인가를 두고 나오는 이러한 불가피한
갈등을 도외시하는 것은 종교들의 현실을 왜곡하는 일이다. 진리에 대한 갈등, 신적 실재의 본성과
그 현현에 대한 갈등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다루어야만 하는 지는 그와는 전
혀 다른 문제이며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신적 실재의 참된 본성에 관한 불일치의 문제가 상호
관용과 존중의 분위기 속에서 폭력적 방법이 아니라 개명된 방식으로 다루어져야만 한다는 데에
모든 종교가 합의하는 것은 가능하고 필요하다. 불행하게도 세계 종교사와 기독교의 역사는 종교적
불관용과 사람들을 참된 신앙이라 간주된 것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종교 전쟁 혹
은 종교적 반대자들을 억압하는 잔혹한 예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현재 모든 인간의 창조주이신
참된 하나님은 각자의 자유로운 동의를 원하지 강요된 복종을 원하지 않는다는 합의가 점증하고
있다. 기독교의 경우, 기독교의 진리 이해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획득하는 인간의 상황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관용을 명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13장12절에서 바울이<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 엔 완전히 알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물론 우리들의 신학적 지
식,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가 그의 피조물들에 관계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을 염두에 두
었다. 이 사도의 말씀을 항시 올바로 염두에 두었더라면 기독교의 독단주의와 불관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지식이 지닌 예비적 상태를 의식했다면 불관용은 배제되었을 것이기 때
문이다. 우리는 기독교인들로서 오직 하나님나라의 미래의 완성과 하늘로부터 오시는 그리스도의
재림 만이 기독교 메시지의 진리를 부정할 수 없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그때까
지는 우리가 그 미래를 향한 도상에 있는 한, 사안에 따라서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의심할 많은 이
유들이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관용은 필수적이다.

평민

2009.01.07 20:07:34
*.90.49.136

내용은 잘 모르지만 나타난 현상만 보아도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어떤 교단에서는 소위" 종교 다원주의" 의 "다" 자만 말해도 쫒겨나는 판인데 ...
세상 오래 살고 볼일이내요 ....
profile

유니스

2009.01.07 21:55:07
*.238.225.78

사실 다비아에 들어와서 '독단주의와 관용'에 대하여
저의 성향이 도전을 받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기독교 독단주의 극치의 역사와
제가 속한 기독교내에서 엄연히 일어나는 일들을 추하다고 생각하지만
제 안에도 이미 이것이 자리잡고 있슴을 보고 혼자서 부끄럽습니다.

보통은 고전 13:12 의 적용을 위와 다르게
기독교 내부의 협의적인 의미로 축소시키는데,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진리로 신앙하는 기독교의
이러한 협의적 의미 해석은 참으로 모순적인 걸 알게 됩니다.
그러나 제 안에 이미 길러진 성향들을
하나님 나라의 미래의 완성의 사실 앞에서,
관용이 어려우면
차라리 보류, 무답, 관망의 자세로도 당분간 있겠습니다.
온전한 이성으로 계속 회복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머리를비우고

2009.01.07 22:17:44
*.146.226.215

어째...분위기가...ㅎㅎ

머리를비우고

2009.01.07 22:29:01
*.146.226.215

글쎄요? 스님 마음이야 우린 모르지만 몇 년간이나 교회에서 예배에 참석해서 통역(?)을 했다고 해서 '깨닫는 것'과 '신앙'이 좀 다른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사실 이 스님 말고 유영모 같은 분들도 있었지요... 전혀 교인 같지도 않으면서 기독교에 대한 지성적 철학적 접근을 하고 후학에 영향을 주었으니 뭐라할까요? 아마 보수적인 교회에서 오랜 시간 신앙 생활 하신 분들이 봤을 때는 받아들이기 힘든 '도깨비 짓거리 한다'고 할 수 도 있겠지요. 소개해 주신 강완숙님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내공(?)이 축적된 실력자들이 많은 거 같습니다. 참 특이하신 분이긴 하네요...

머리를비우고

2009.01.07 22:37:28
*.146.226.215

그렇지요. 신기한게 말씀을 잘 안다고 하는 교회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모순이 느껴집니다. 잘 모르면 수용이라도 해 보고 다르다는 점을 인식해야 하는데..판단부터 해 버리니... 책 한권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의심과 관용에 대해 교회가 너무 혐오스럽게 가르쳐 온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머리를비우고

2009.01.07 22:43:21
*.146.226.215

감리교 신경하 감독의 글 중에
늙은이는 '늘 거기 머물러 있는 자'라 하고
젊은이는 '저기를 묻는 자'라는 내용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장로님은 '늘 머물러 계시지 않으려고 저기를 묻는 젊은이 입니다.'

첫날처럼

2009.01.08 01:11:04
*.237.224.155

답글 감사합니다.

사실 고전물리 현대물리라고 하면서 예를 들었지만 많이 자신은 없었습니다... ㅋㅋㅋ... 관점의 차이란 말씀이 많이 와닿습니다...

그 둘의 차이가 정밀성이 아니라 상대성이라는 말씀도 많이 인상깊습니다... 그게 어쩌면 제가 말한 현실성과 실제성과 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살짝 빌려서 이야기 해보면, 일반적인 성경읽기 방식을 고전물리학적 성경읽기라고 이름붙여 본다면 기존의 이런 읽기 방식은 굉장히 기계론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 태도들이 리얼리티는 사라진 텍스트적 신앙만을 양산하는 것 같구요...

이거 뭐 횡설수설이네요... 제가...

그리고 목사님, "하이퍼리얼리티" 란 말에 대해서 좀 더 듣고 싶네요... 목사님 두 번째 단락을 제대로 이해를 못하겠어요... 하이퍼리얼리티는 리얼리티를 넘어선 진짜 리얼리티란 말씀이신지...

안희철

2009.01.08 02:35:37
*.142.8.188

잘 아시겠지만 "상대성"이란 아인슈타인 이래로 변경된 "시공간"에 대한 이해와 관계합니다. 예를들어 뉴턴은 공간을 "절대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관성의 법칙에 대한 이해 때문인데요, 이 법칙 자체가 신의 세계에 대한 개입을 불가한 것으로 여기게 만듭니다(데카르트의 관성의 법칙). 뉴턴은 자신의 신앙적 신념에 따라 신의 개입여지를 두게 되지요. 그 중 하나가 절대적 공간 개념입니다. 공간을 보존하는 신적 존재를 기대할 수 있었던 거지요(참조, 판넨베르크, 조직신학2, p. 66ff). 어쨌든 이것은 아인슈타인에게서 잘못된 이해로 밝혀졌고요. 하지만 뉴턴은 매우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대충 내 신앙이 이러니까 이렇게 믿는다고 물리법칙을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는 분명히 오늘날 일반적인, 그러니까 자의적인 성경읽기와는 분명히 대비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만연하는 잘못된 성경읽기는 고전물리학의 수준도 가지 못한 것입니다. 오히려, 역사비평연구가 그것에 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게 맞고요.

하이퍼리얼리티는 "실제보다 더한 실제"라고 일단 이해하시면 됩니다. 진중권 교수가 쓴 미학오디세이의 인용들에서 본 것 같은데, 예를들어 격투 씬을 영화로 촬영한다고 할 때 우리는 "리얼하게" 찍는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리얼함"은 "하이퍼리얼리티"를 말합니다. 즉 온갖 효과음과 영상예술을 동원하여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즉 실제보다 더한 실제가 원래의 실제를 잠식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를 조정하거나 기만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쉬운 예로 현재 일어나는 이-팔 전쟁이 영상세대들에게는 (어쩌면 저를 포함하여) "전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가 피로 안보인다는 거지요. 무감각해졌다는 표현도 여기에 어울리겠네요. 그래서 기자들은 더욱 자극적인 기사를 올립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어떤 기자가 수정된 -뽀샵질된- 사진을 올립니다. 오늘 올라온 이스라엘 지프 위에 묶인 팔레스타인 소년사진이 가짜라고 가정해봅시다(이 또한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모릅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러나 미디어의 힘은 놀랍지요. 진짜로 여긴 반이스라엘 군대가 대거 반격을 가할지도 모르지요. 여기서 하이퍼리얼리티가 리얼리티로 둔갑해버립니다. 보통 사람들은 하이퍼리얼리티가 "사실인 것은 아니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사실에 더 가까운 것이 하이퍼리얼리티입니다. 덮어쓰기overwrite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쨌든 미디어는 하이퍼리얼리티 시대를 종용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인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 몇 가지 중요한 실존적 질문이 존재합니다. 하이퍼리얼리티와 리얼리티가 분리 가능한가?, 하이퍼리얼리티는 어쨌든 거짓인가? 등등 말이지요. 너무 길어져서 이만...

대략적인 설명이고요, 사실 좋은 책들 많이 나와 있습니다. 아주 기본적인 책을 소개해드리면 앞서 말씀드린 프랑스 철학자 보드리야드의 "시뮬라시옹"이나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정도면 좋지 않을까 싶네요.

시드니

2009.01.08 09:12:59
*.167.253.2

목사님 덕분에 또 새로운 것을 배우네요. 하이퍼 리얼리티라....
TV의 여행 다큐멘타리 프로그램을 보고 막상 그곳에 실제로 가보면 대부분 실망하게 되는 경험이
있지요. 그런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그런데, 그런 일종의 왜곡 현상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시청자, 관람자...)의 의도나 선입견, 욕구에
맞추어서 ㅎㅐㅎ해지는 것 같습니다. 즉 속는자가 속이는 자를 사주하여 자신을 속이도록 하는거죠.
MB는 단지 국민들이 원하는 거짓말을(경제 발전) 하고 있는거구요, 기복주의 목사님들은
교인들이 듣고 싶어하는 설교를 행하시는 것 뿐이구요.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을 듣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 다는 것을 요즈음 뼈져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profile

정용섭

2009.01.08 10:24:21
*.139.165.50

안희철 목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이퍼리얼리티가 무언지 머리 속에 쏙 들어오는군요.
가르치는 은사가 큰 것 같습니다.
잘 배웠습니다.
주의 은총이!

첫날처럼

2009.01.08 10:54:15
*.54.79.126

안 목사님과의 대화가 참 좋습니다... 절대적 공간 이해...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의 결국은 같다는 건가요?

하이퍼리얼리티란 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이 번 스님 건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요... 목사님의 고견 부탁드립니다... 꾸벅...

profile

유니스

2009.01.08 12:01:57
*.104.195.112

안목사님께서 하이퍼리얼리티를 말씀하셨을 때
저는 마르께스와같은 환상적인 리얼리티와 비슷한 거로구나 하고 지나갔습니다.
사실 그런 리얼리티가 더 사실적으로 느껴져서 하이퍼라고 생각했습죠.
그런데 다시 설명을 하신 것을 읽으니 다른 것이로군요.
유익한 설명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안희철

2009.01.09 01:36:50
*.206.197.32

사실 리얼리티에 대한 문제는 제 평생의 화두일겁니다.
무엇이 리얼리티일까요? 텍스트와 리얼리티만 놓고 보았을 땐, 참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하이퍼리얼리티의 등장으로(더 정확하게는 "발견"으로)
무엇이 진짜인지 사실 분간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영화 매트릭스1편을 보셨는지요?
주인공 "네오"가 결국에 가서는 매트릭스를 "읽어내는 눈"을 갖게 되지요.
벽, 바닥, 사람을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리얼리티"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코드"를 보게 되고(영화 광고에서 많이 사용된 장면이죠)
그것이 "진짜 리얼리티"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네오 말고 다른 사람들은 단지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어쩌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은 그런 것과 비슷한 것일까요?(물론 아니지만 유비적으로)
그러나 "인간의 눈"은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눈의 생물학적 한계 때문이지요.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는데, 하여간 스님 문제는
그런 문제에 열광할 필요도 없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고
이런 사건들에 "자극"을 받는 우리들의 "현실"에 집중해야만 그 본질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야만 하이퍼리얼리티가 남기는 자취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첫날처럼님이 처음에 "의도했던" 리얼리티를 살려내고 거기서 의미로 도출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 물으신다면 저 아래 제가 다시 달아놓았던 답변으로
일단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것 말고도 하이퍼리얼리티를 통해 많은 논의 전개가 가능할 겁니다.
한편으로는... 리얼리티를 "역사"(Historie)로, 하이퍼리얼리티를 "역사(Geschichte)로
대입해본다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터져나올 것 같네요. 하이퍼리얼리티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제가 언급한 것 같아 첨언합니다.

시공간, 상대성이론에 대해서는... 풀어야 할 말이 너무 많습니다.
그냥... 정말 관심이 있으시다면 책 한권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르겠네요.
학부때인가...이 책을 발견하고 무척이나 기뻤는데
다들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더군요.
이미 베스트셀러고 여기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엘리건트 유니버스"를 한번 꼭 정독해보시기를 권합니다.
어린시절 읽었던 "수학없는 물리"를 연상케 하더라고요.
근데 그보다 훨씬 재미있습니다.
고등학교 이후로 수학을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수없이 물리학 개론서들을 들었다놨다 했었습니다만
신학 업무도 과중한데, 접근하기가 너무 힘들더군요.
그러다 발견한 빛줄기 하나였고요.
그 책 이후로 많은 물리학 관련 이야기들이 편안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이런 책도 지금에 와서는 조금 다르게 읽히기도 합니다.
그만큼 많이 파고들어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지요.
아무튼 시작을 위한 좋은 책입니다.

신학도 이런 방식의 쉬운 풀이이면서도 핵심을 짚어주는 책들이
많이 나와야 할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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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2009.01.09 01:48:08
*.155.134.136

'속는자가 속이는 자를 사주하여 자신을 속이도록 한다' 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숙주가 없으면 버섯은 자랄 수 없을텐데
결과적으로는 숙주는 말라죽고 버섯은 자라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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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2009.01.09 02:04:06
*.118.129.226

안목사님, 4.3 사건이나 5.18 등에 관한 논의에서 역사해석의 자의성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들었습니다. 역사 해석이라는 것은 해석이라는 점에서 볼 때 주관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고 이것이 어떻게 상호주관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하는 것은 양극화된 역사의식을 가진 한국적인 상황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문제입니다. 이번 교과서 개편 파동에서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히스토리에와 게쉬히이테의 구분이 이 질문에 시사할 내용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안희철

2009.01.09 03:19:46
*.206.197.32

판넨베르크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께요(조직신학2권, p. 84-86).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아닙니다.

히스토리적으로 이야기를 한다고 할 때, 그것은 추론화, 일반화된(abstrahiert) 그래서 선택적인(selektiv) 설명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다름아닌 "과학"이 하는 방법론입니다. 그야말로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역사 설명 방법이지요. 문제는 역사가 과학보다 접근하기가 훨씬 힘들다는 것입니다. "재료" 때문에 말이죠. 과학의 재료는 아무리 가변적이라 하여도 "추적가능성"을 대개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재료"는 어느 정도는 사실적이고 실제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대개의 재료는 자의적 해석에 무방비입니다. 이것들을 막을 방법은 제가 봤을 땐 단지 "역사 사료"에 대한 대폭적인 연구 뿐인 것 같습니다. 이것도 원천적인 해결방법은 못되겠지만요. 그래도 히스토리적 설명은 수학으로 표현하자면 "평균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역사 흐름의 대강에서는 벗어나는 일이 그다지 많진 않겠죠.

게쉬히테로 묘사한다는 것은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이해한 역사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즉 역사를 단 한번 일어나는(einmalig) 뒤짚거나 반복할 수 없는(unumkehrbar und unwiederholbar) 사건들의 집합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히스토리적인 의미를 각 개별사건의 위치(Stelle)와 기능(Funktion)을 통해 게쉬히테를 관련지을 수 있게 됩니다. 5.18같은 사건은 그런 점에서 게쉬히테로 강하게 읽힐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모든 사건이 일회적이기는 하지만, 그 사건 같은 것들은 누가 뭐래도 한국사에서 일회적인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죠. 매우 특별한 사건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들은 언론의 주목을 받고... 그러다보면 하이퍼리얼리티적 기질을 보일 소지가 많아집니다. 이 하이퍼리얼리티...걷어내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아마도 여기서 히스토리적 해석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닌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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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2009.01.09 06:18:26
*.118.129.226

안목사님이 언급하신 부분을 읽어도 제가 가진 질문은 해소가 안되네요..오늘날 게쉬히이테적인 역사 이해가 가능할까 하는 질문으로 다시 이어집니다. 어떤 공동체 내에서 게쉬히이테적인 역사 인식의 공유가 가능하다면 제가 한 질문은 의미가 없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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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아니

2009.01.09 11:20:11
*.33.197.99

좀 다른 얘기인데, 십자가 상의 좌우편 강도를 가지고, 좌파 우파로 나누어 설교했던 목사님도 있더라구요.

머리를비우고

2009.01.09 12:40:10
*.117.199.100

좀 심한 이야기지만...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외출 하신 분이네요...

안희철

2009.01.09 18:32:41
*.1.101.250

이방인님, 순수 역사란 존재할 수 있을까요? 과연 해석된 역사에서 벗어날 지가 의문입니다. 그렇다고 볼 때, 히스토리든 게쉬히테든 해석이라는 지평에서 멀리 벗어날 수는 없게 됩니다. 교과서를 예로 들면, 그 아무리 공정한 교과서도 내용을 "자세히" 써내려가기 시작하면 저자의 역사관을 삽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문적 연구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말이죠, 완전한 객관적 연구로 객관적 연구결과를 얻었다고 칩시다. 그래도 그 역사를 읽는 이들은 그 객관적 연구를 토대로 새로이 해석적 관점을 얻게 됩니다. 성서 역사 연구에서도 아주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심지어, 성서의 정경 순서(창출레민신...)도 역사이해의 개입으로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상호 주관성의 확보는, 결과적으로 서로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가능하다는 서로에 대한 존중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좌나 우나 과연 누가 한테이블에서 말을 용감하게 섞으려 할지 모르겠네요. 특히 우나 친일파 쪽에서는 더더욱 꺼릴 겁니다. 실질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겠죠. 그래서 말씀하신 양극화의 해소는 쉽지 않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히스토리는 "일반적"인 사건을, 게쉬히테는 "특별한" 사건을 관심갖는다고 생각할 때에도 여전히 이 둘은 명확히 구별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이론적으로 구분이 가능한 것이지요. 저는 오히려, 오늘날의 시대에 어울리는 것은 서로의 역사이해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한 "다극화"가 좋지 않을까 합니다. 아마 이번 글도 완전한 답은 되지 않을겁니다.

제가 인용한 "히스토리,게쉬히테" 처음 글의 내용이 질문하셨을 때의 것과는 조금 달라서 그 역사란 단어를 가지고 설명하는 데 좀 어려움이 있네요. 예수님의 사건이 가장 극적인 예일 겁니다. 분명한 계쉬히테,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신적 사건은 히스토리 전체를 "overwrite"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죠. 일종의 하이퍼리얼리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러는 이러한 하이퍼리얼리티 사건이 인간의 "자의적" 손을 탄 것으로 이해합니다만, 제가 보았을 때는 하나님의 사건에 대한 인간의 "당연한" 리액션이고 신앙하는 자들에게는 어쩌면 의무이자 필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은 전능자이시기 때문이고 이들은 그를 신앙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일반역사 속에서 대입하고 이해할 때는, 히스토리, 게쉬히테가 더 혼잡하게 뒤섞이게 되고 설명이 점점 요원해져버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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