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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첫 번째 복음}
- 급진적인 바울이 어떻게 보수 신앙의 우상으로 둔갑했는가 -

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김준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10, 312쪽.


신학은 예나 지금이나 생명을 파괴하는 거짓 신학과의 싸움이다. 오늘날 지배계층이 법치라는 미명 아래 자행하는 패거리주의(just us)와 폭력은 생명의 존엄성과 정의(justice)를 짓밟는다는 점에서, 2천 년 전 로마제국의 폭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민중들은 항상 생존권 자체가 유린당하지만, 과거의 제국들과 달리 오늘날 시장전체주의가 동원하는 지배이데올로기와 매스컴, 오락산업은 너무 교묘하기 때문에, 체제에 저항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에는 영혼이 마비되기 십상이다.
이런 불의한 현실 속에서 한국교회는 하늘의 질서(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해 헌신하기보다는 대부분 지배자들의 행복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권력과 시장의 시녀들로 전락해버렸다. 생명의 신비와 공동체의 평화를 구가하기보다는 개인주의적 영혼구원과 현세적인 축복 논리에 입각한 교회성장주의에 매몰된 채, 체제에 순응하게 만드는 민중의 아편으로 작용하거나, 아니면 뉴라이트 집단이나 한기총처럼 역사적인 보수 세력의 중심으로 기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타종교인들에 대한 배타주의, 물질주의, 교회성장주의와 교권주의, 그리고 친미-반공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한국교회는 예수의 정신과 하나님나라 운동을 배반한 집단이 되어버린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을 넘어 이제는 일반 사람들의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렸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교회가 아니라 예수에 대한 관심, 곧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무차별적인 사랑을 통한 삶의 변화와, 지배와 착취가 아니라 섬김과 나눔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한 전략에 대한 새로운 관심도 조금씩 높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왜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이처럼 예수를 배반하고 개인주의적이며 보수적인 집단이 되어버렸는가? 왜 한국교회는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교회 자체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몰두함으로써 일반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집단이 되었는가?
한국교회가 거짓 복음을 믿기 때문이다. 권력과 자본의 노예가 되어, 예수와 바울의 복음을 왜곡한 탓이다. 즉 예수와 바울 모두 당시에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되었을 만큼 반체제적인 하늘의 질서, "하나님의 지혜"에 기초한 가치관과 대안적 질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구체화시켰던 위험인물들이었지만, 그 이후 교회는 예수와 바울의 급진적인 가르침을 "이 세상의 지혜"로 길들이고, 제국의 불평등한 계급질서에 순응하도록 보수화시키고 반동적인 것으로 둔갑시킨 탓이다.
특히 한국교회가 무비판적으로 가르치는 십자가 대속론과 아울러 하나님의 은총과 믿음을 통한 칭의론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예수(하나님의 독생자)를 따를 수도 없고 (대속 때문에) 따를 필요도 없고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따라서도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책은 교회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는 제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예수의 팬클럽으로 전락하게 된 근본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준다. 한국교회는 흔히 바울을 유대교의 율법주의, 가톨릭의 공적주의와 대결한 인물로 간주하지만, 역사적 예수와 초기 기독교 역사 연구에 평생을 바친 저자들은 이 책에서 로마제국의 막강한 제국신학과의 대결구도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평화를 발전시킨 바울의 생애와 복음을 새롭게 정리했다. 급진적인 바울이 어떻게 보수반동 기독교의 원흉으로 둔갑했는지를 밝힘으로써, 기독교의 복음이 본래 어떤 것이었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안셀무스의 대속론과 루터의 칭의론 대신에, 첫 번째 바울의 참여적인 속죄와 실제적인 정의의 복음을 밝혀준다. 바울을 처음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준다.

김용남형제

2010.02.09 22:52:14
*.146.244.46

사랑채에서 무거운 댓글이 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속론과 칭의론이 제자적 삶으로의 가능성을 차단한다는 말은, 제가 보기에 복음을 지나치게 당위론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나오는 일종의 신(新, 현대)율법주의적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 경우엔 교회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는 제자들의 모임"이라기보다 "예수의 팬클럽"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측의 예수님 해석보다는 예수님의 고유한 존재론적 능력이 이끌어가는 공동체가 곧 교회라는 의미지요. 그런 점에서 복음과 설교는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매력 발산'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세계를 향한 예수님의 고유한 영향력(influence)이며, 세계 속에서의 예수님의 위치가 될 것입니다.

 바울의 원시적 기독교 사상에 담긴 콘텍스트와 더불어 그 본질을 인간학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러한 작업이 "하나님의 꿈"을 지나치게 프락시스적 차원에서만 해명한다는 데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우려됩니다. 이 점은 제가 개인적으로 본회퍼 신학의 한계로 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의 '기독교의 비종교화' 개념이 열려 있는 하나님의 역동적 구원을 노래하는 예언적 신학으로 승화되었으면 좋았으련만, 그저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론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책도 읽어보지 않고 서문만 가지고 반론을 편다는 건 제가 봐도 우스운 일입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막강한 대결구도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평화를 발전시킨 바울의 생애와 복음"이라는 지향성에 관하여 평소 생각해온 부분을 정리하고 나누고 싶어 조심스레 짧은 댓글을 올립니다. 제가 보기에 바울을 포함한 모든 성서 기자들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부분은 그들이 처했던 역사적 정황이라기보다는, 그들에게 은밀하게 있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새로운 사색의 지평을 크게 열어줄만한 책 소개해주심에 감사드리며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부디 용서를 구하며….

라크리매

2010.02.10 02:02:20
*.41.16.153

개인적인 본회퍼의 메세지는 히틀러의 폭력적 권력에 순응했던 목사들의 이율배반적인 믿음에 대한 메세지였다고 생각합니다 고난앞에서도 믿음을 지켜내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지요
그의 메세지는 고난의 당위성이 아닌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현실적상황 아래서 던진 것이라 판단됩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도 늘 유효한 메세지구요.

 

김용남형제

2010.02.10 03:10:24
*.146.244.46

예, 바로 그 점이 제가 보는 본회퍼의 한계입니다. 믿음의 실체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놓였다기보다 '그리스도'의 책임에 놓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책임이 무엇인지 알고 선포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다함으로 족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정 목사님께서도 이번 서울샘터교회 기독교 공부시간에 언급하신 것으로 기억하는데, "미친 버스기사가 버스를 자기 멋대로 운전하고 있다면 승객들이 죽기를 기다렸다가 장례를 잘 해주는 것이 목사의 책임인가, 아니면 승객들과 함께 미친 버스기사를 끌어내리는 것이 목사의 책임인가?"의 질문에서 후자를 답으로 택한 사람이 본회퍼였죠. 물론 이 문제 자체의 영역에서만 보면 그가 옳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목사가 승객들과 함께 미친 버스기사를 끌어내려다가 다같이 죽을 확률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즉 목사에겐 책임이 '없다'는 것이지요. 119나 경찰관을 부르는 것이 현명하게 구원을 얻는 길이 아닐까요? 이것이 바로 전통적 신학 개념이기도 한 '밖으로부터의(extra nos) 의(義)'가 아닌지요. 이런 점에서 의의 실천에 선행하는 의의 존재론적 성격을 놓쳤다는 것이 그의 핵심적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신약성서>가 은혜를 '값싼' 은혜도, '값비싼' 은혜도 아닌 '값없는' 은혜로 증언하고 있다는 사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을 향한 은혜의 '값없음'은 오직 하나님에 의한 의의 존재론적 '값있음' 사건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지요.

 같은 맥락에서 고난 또한 존재론적이며, 엄밀히 덧붙이자면 종말론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스스로가 고유한 능력으로 자기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것이지요. 그 고유성은 '주 예수님'의 주체성에 달려 있고요. 이 사실을 안다면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관념을 다 떠나서 교회가 예수님께만 온전히 관심을 쏟을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원시 기독교가 외친 복음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통한 구원'이며 종교개혁의 첫번째 슬로건도 '오직 예수'이니까 말입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도 김응국 목사 같은 설교자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피토하듯 강조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서 정작 예수님의 고난의 본질이 계시되는 것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전형적인 어설픈 제자-당위론의 비극이라 할 수 있겠지요. 물론 그런 사람들과 본회퍼를 무조건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인 기독교 영성에서 빗나간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상통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래에 댓글을 남기신 진 예수만님께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리하는 차원에서 정 목사님의 글 중 한 대목을 인용하겠습니다. <제자훈련은 가능한가?(옥한흠 목사 설교비평)>의 결론부입니다.

 " …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것처럼 제자가 된다는 것은 훈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의 차원에 속한다. 훈련은 기독교 신앙에서 교육학이나 심리학처럼 보조적인 것이지 신-학(theos-logos)처럼 그 중심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행위 없는 믿음을 강조한 것이라기보다는 믿음이 무엇인지, 그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해석할 줄 모른다는 데에 있다. … "

라크리매

2010.02.10 06:50:19
*.41.16.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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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책임인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책임도 분명 실존적으로 존재하죠
그리스도의 책임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리스도인이 전해야하는 "예언자적 소명"은 믿음을 설교하는 형태의 메세지여만 할까요?
미친 버스운전기사의 비유에서 119를 부를 전화도 없고 경찰을 부를수 없는 시간적 촉박함의 상황이라면요?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라면 승객은 가만히 앉아있어야만 할까요? 목사의 재지나 어떤 대응행동을 기다리고만 있어야 할까요? 승객의 죽음은 비단 목사의 책임만 일까요?자신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요? 왜 용남형제는 죽음을 직면하는 상황에서 승객이나 목사가 경찰을 기다려야한다고 생각하나요?그건 자신의 생명을 타인에게 담보로 하는 노예적 삶의 자세 아닐까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노예적 삶이 아닌 자유를 설파한 분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그렇게 수동적인 자세를 먼저 요구하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값없는 믿음은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능동적인 수용의 측면을 요구하기에
"값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본회퍼는 고난의 고유한 능력을 보여주게한 매개자 역할을 한것이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으로 드러내신것 처럼요
비교하신 한국교회의 제자 훈련과의 비유가 적절치 않은 것은 그훈련의 방법이 가진 한계를 정목사님이 드러내신 것이기에 또 그고난의 행위가 훈련받는자에게도 제3자에게도 진정한 하나님을 알게하는 매개역할을 하지 못하는 한계점을 지적하는 것이기에 적절한 비교가 아닌것 같네요 그리고 그한계를 직시하게 되는 것은 훈련의 고난이 아닌 바로 실재적 고난의 현장이기에 이것은 그리스도의 책임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그 책임의 소명을 다하시고 떠난 분이지요 우리는 그분의 소명에 대한 가치와 존재를 믿는거구요

김용남형제

2010.02.10 08:33:42
*.146.243.213

먼저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책임에 철저하게 종속되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책임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믿음의 수용성'을 강조한 게 아니라 '은혜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승객은 가만히 앉아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승객이 '버스 안에서' 앉든, 일어서든, 날뛰든, 기든, 뭔 짓을 하든 승객들의 구원은 '버스 밖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저는 책임론이 아니라 구원론의 차원에서 진술하고 있는데 계속 책임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만 접근하고 계십니다.

 본회퍼는 인간의 책임을 하나님의 사역에 종속시키긴커녕 은혜의 값없음을 인간의 댓가지불에 거꾸로 종속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점이 제가 지적하는 핵심입니다. 다시 말해 "값없는 믿음이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능동적인 수용의 측면을 요구하기에 값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배타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로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하나님의 댓가지불'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본회퍼의 책임론을 동일한 선상에 놓는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 된다고 봅니다. 전자가 다이나믹한 존재론적 능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후자는 그런 신비성이 배제된 인간학적 당위론이라는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하늘로부터'와 '땅으로부터'의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리고 제가 인용한 정 목사님의 글은 "고난의 행위가" 하나님을 알게 하지 못하는 한계점을 지적한 것이 아닙니다.  내용을 충분히 숙고해보지 않으신 것으로 사료되어 다시 인용해보겠습니다.

 " …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것처럼 제자가 된다는 것은 훈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의 차원에 속한다. 훈련은 기독교 신앙에서 교육학이나 심리학처럼 보조적인 것이지 신-학(theos-logos)처럼 그 중심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행위 없는 믿음을 강조한 것이라기보다는 믿음이 무엇인지, 그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해석할 줄 모른다는 데에 있다. … "

 결국 신앙의 길은 "훈련의 고난"도 "실제적 고난"도 아니며, 정 목사님께서 뚜렷하게 언급하신 바와 같이 "믿음"이며, 더 본질적으로는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책임론을 강조하면 할수록 신학의 본질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해석학은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가 누구이며, 그가 무엇을 하였는지에 대해 무지해짐으로서 결국 그리스도의 책임에 종속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외면하는 자기모순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양립 가능한 부분이라고 주장하실 수도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관심 쏟음의 문제이기에 그리스도의 책임과 그리스도인의 책임 중 어느 것이 먼저 오느냐는 큰 차이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그 책임의 소명을 다하시고 떠난 분"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히 처리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제한적이고 피상적인 기독론에서는 교회의 몸으로서의 그리스도, 세상을 다스리시는 통치자로서의 그리스도, 하나님 나라의 실세적인 왕으로서의 그리스도 개념이 완전히 해체됩니다. 그것은 기독교 영성의 기초의 형해화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은혜를 떠난 인간의 처량한 힘씀밖에 남을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제가 첫 댓글에서 "신율법주의"를 언급한 것이고요. 정리하자면 '하나님을 위해(for God)'와 '하나님의(of God)'의 차이입니다.

김용남형제

2010.02.10 08:40:55
*.146.243.213

댓글을 쓰고보니 내용을 추가하셔서 추가 답변합니다.

"왜 용남형제는 죽음을 직면하는 상황에서 승객이나 목사가 경찰을 기다려야한다고 생각하나요? 그건 자신의 생명을 타인에게 담보로 하는 노예적 삶의 자세 아닐까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노예적 삶이 아닌 자유를 설파한 분입니다"

 여기에서 '경찰'이라는 비유가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것을 적용해볼 때, 라크리매님께서는 지금 "왜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에게 담보로 하는 노예적 삶이 아닌가?"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이건 기독교 영성의 기초에 관해서 왈가왈부하는 문제이기에 다소 피곤함을 느낍니다. 대림절 영성이 말하는 것처럼 신앙은 기본적으로 기다림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는 '우리 스스로 구원을 얻을 자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얻은 후의 자유'입니다.

 기독교 구원론이 온전히 기독론에 정초한다는 사실을 외면하시는듯한 이런 말씀으로 자꾸 반론을 제기하시면 더 이상 별로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명료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승객이나 목사가 경찰을 "기다려야 하는"(책임론/당위론) 게 아니라, '버스 밖에 있는' 경찰만이 승객이나 목사를 "구원할 수 있"(구원론/존재론)습니다. 그리고 그 '경찰(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한 전능자이며 버스의 창조와 종말을 움켜쥐고 있는 권위자입니다. 이제 제가 다시 여쭙겠습니다. 그런데도 버스 안에서 버스기사를 끌어내리려고 애쓰는 것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경찰의 믿을만한 손길을 구하는 게 낫겠습니까?

라크리매

2010.02.10 15:40:25
*.41.16.153

질문의 태도가 너무 권위적으로 느껴지네요 교회처음 갔을때 예수님을 믿냐 안믿냐 천당과 지옥을 믿냐 안믿냐 물었던 집사님이 떠오릅니다ㅎㅎ 내가 믿는 하나님은 경찰만을 기다리라고 말하지 않으십니다 설사 경찰이 하나님을 지칭한다 하더라도요
그리고 만약 회퍼가 고난을 강조하였다 치더라도 고난의 동참이 구원을 스스로 얻을 자유를 뜻하거나 선은혜가 전제된 것이 아니라고 형제가 판단하는 이유를 모르겟군요
구원을 스스로 얻을수 있다 말한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구요
내가 말하는 고난의 시점은 구원후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버스의 상황이 구원의 시점의 상황을 말하는건가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저의 생명을 담보로 기다리라고만 말하는 신이라면 믿음이 전혀  안가네요
저의 댓글은 믿음이 먼저야 구원이 먼저냐의 얘기는 전혀 아니지요 그리고 버스의 비유는 믿음에 적용하기엔 부적절한 비유에서 오는 잘못된 해답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본회퍼의 고난을 두둔하는 것은 훈련만을 강조하려거나 믿음보다 고난이 먼저라는 의견이 아닌 본회퍼의 고난은 부족한 믿음의 상징,혹은 잘못된 믿음의 상징인 것처럼 학생이 비판한 것에 대한 반론이 였습니다
설사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학생의 비판이 옳다 하더라도 본회퍼의 실천적인 고난을 이론의 잣대로 재단하는 자세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본회퍼의 그런 믿음의 고난은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히틀러와 잘못된 현실을 묵인하고 동조하는 기독교인을 겨냥한 것이기에 더욱 고난이 강조된 것은 아닐까요?이런  반론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강조하고 무거운 멍에를 씌우려는 의도가 아닌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과연 무엇인가"란 질문입니다 나는 고난과 믿음의 이분화가 과연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군요 예수님은 말만하고 떠난 것이 아닌 실천적 모범을 보이셨기에 2000년동안 이땅에서 역사하고 계신것이지요 이미 그분이 현재적 삶의 소명을 완수했기에 더이상 기억되거나 역사하시지 않는 존재란 말이 아닙니다 본회퍼의 고난이 있었기에 이자리에서 고난과 믿음에 대한 대화를 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형제의 논리는 이땅에 생명을 담보로 선교하러 왔던 많은 선교사들의 죽음도 믿음없는 오만한 행동으로 판단될수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리옹~

2010.02.10 18:17:23
*.201.17.104

대화중에 살짝 이야기 하자면
달리는 차 비유가 용남형제의 말과는 전혀 맞지 않아요.
이미 미쳐버린 기사가 경찰이 온다고 해결이 될까요?
외부의 힘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이 되나요?
오히려 내부의 힘이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을까요?
달리 차의 논리로 전개한 것은 애초부터 적용이 잘못된 것입니다.
논리의 타당성을 얻을려면 상식적인 수준에서 그것이 옳아야 합니다.
외부는 성공하는데 내부는 실패한다는 논리가 어디에서 생겨 났을까요?

진 예수만

2010.02.09 23:56:09
*.203.204.34

저는 단순(그리고 무식)하게 표현합니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예수든, 그분의 직계 사도들이든, 바울이든지 간에 세상적으로 보면 모두 다 쫄딱
망한 사람들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워치만 니가 말한 "예수를 믿으면 복을 얻기는
커녕 밥그릇이 깨질 것입니다" 라는 표현이 절대로 극단적인 자의적 표현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 그리고 우리의 뛰어난 신앙 선대들치고(일부 선지자들까지도) 
처절하게 망하는 길을 자초하지 않은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게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교회들은 이제는 그걸 그럴듯한 포장지로 슬쩍 감추려하고 있어요. 그런 말
대신에 귓구멍에 달콤하여 듣기 좋은 다른 말들만 연신 하고 있어요.

기독교 신앙의 처절한 태동과는 정반대로 지금의 (지구촌)신앙계는 예수님을 위시한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주역 그들을 단지 신앙적 이벤트에 (얼굴마담처럼)이용해 먹고
있을 뿐이에요. 지금의 교인들은 희생이나 순교는 그만두고 기름기만 좌르르 흐르고
있어요.

칭의니 뭐니 하는 이론들이 사실은 그걸 말한 사람은 썩은 교회권력 행태에 대한 반사
적이고도 대의적 시각으로 해석한 것인데, 그걸 가지고 만능 '도깨비 방망이' 처럼
이용해 먹고 있어요. 4자성어로 소위 '我田引水격' 으로 이용해 먹는 것이지요.  예
를 들어, 부모가 자식에게 '그래 놀고 싶을 때는 실컷 놀아라' 라고 한마디 해줬더니 그
다음부터는 아예 얼씨구 좋거니 하고 허구헌날 놀기만 하는 그런 꼴이지요. 분명히 쓰여
있지 않습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정말 지금 이시대의 기독교가 '예수의 말씀을 믿고 그를 따르는 종교'가 맞긴 맞습니까?
profile

눈사람

2010.02.10 18:35:36
*.136.37.76

아이고 다 읽느라 머리가 뽀개지는 줄 알았습니다.^^
단어도 어렵고 내용도 어렵고..

진예수만님의 말씀처럼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적으로는 다 망했지요.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들은 많이 늘어났고.. 지금 이 순간까지 오게 되었겠지요.
세상적으로 망한 사람들이 세상적인 것을 갈구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전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그들의 삶의 모습에서
커다란 매력을 느꼈겠지요.

진예수만님의 마지막 멘트처럼
정말 지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맞는지
저 스스로도 자문을 해봅니다.
" 난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가 "

퀄리아

2010.02.10 19:44:13
*.222.66.211

그리스도의  순결한  고난과  구원을  강조함과  동시에  자본주의  시대의  가치도 
똑같이  강조하는  이상한   보수   기독교에서  오랫동안  찌들었던  탓에  이런  책이  참  반갑네요 ㅎㅎ

리플들은 .....  너무  어려워서   눈사람님  처럼  머리가  뽀개질  듯 ..

그런데 ... 회퍼도  모르고,  신학도  모르지만 ... 용남형제님  리플에서는  보수  기독교   교회에서  많이  듣던  내용으로  느껴집니다.
믿음인가, 행동인가? 주체인가, 객체인가?  과정인가, 결과인가? 
다비아는  이런  이원론을  극복해  있지  않나요??  가끔  와서  보면,  그런 느낌이   많이  들었는데 ...
이게  아닌가? ㅡ.ㅡ? ㅎㅎ

암튼  잘 읽었슴돠  ^^

김용남형제

2010.02.10 20:44:58
*.11.167.102

너무 댓글이 옆칸으로 쏠리는듯하여 새로 달겠습니다.

소통불능의 선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차원의 차이를 말씀드렸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가 드린 말씀을 "경찰만을 기다리라"는 말로 알아들으신다는 게 정말 신기합니다. 죽어라고 강조를 해봤자 다른 곳만 바라보고 계시면 어떻게 소통이 되겠습니까? "고난의 동참이 구원을 스스로 얻을 자유를 뜻하"는 이유는 이미 앞에서 충분히 설명을 했으며, "선은혜가 전제된 것이 아니라고 형제가 판단"한 것이 아니라 은혜의 존재론적 주체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구원을 스스로 얻을 수 있다 말한 적이 없"다고요? 라크리매님께서 말씀하시는 "고난의 시점은 구원 후의 삶을 말하는 것"이라고요? 버스 안에서 미친 버스기사가 멋대로 운전하고 있는 상황이 "구원 후의 삶"입니까?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려 하는 행동이 "구원을 스스로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 아니라고요? 제가 분명히 여쭙건대, 제가 말씀드린 '은혜의 주체성'이나 '의의 존재론적 성격'이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히 이해하신 후에 반론을 펴고 계신 것입니까? 전혀 말도 안 되는 논리만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설사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학생의 비판이 옳다 하더라도 …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은 아예 토론을 초기화시키려 하는 김빠지는 발언입니다. 그 아래 이어지는 질문은 맨 위에 하셨던 질문과 똑같다는 것을 스스로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그만큼 라크리매님께서 제가 펼친 논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본인의 일방적인 주장만 되풀이하려고 한다는 의미입니다. 위에서 언급했습니다만(보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기독교 영성의 기초에 관해서 왈가왈부하는 문제입니다. 라크리매님께서는 맨 끝에 제 질문만 보셔놓고 하고 싶으신 말을 논리진행 여부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쏟아놓으신 게 분명합니다.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생산적인 토론은 불가능하기에 또 내용파악 전혀 없이 물고늘어지는 반론이 나온다면 입을 닫겠습니다.

 가장 웃긴 부분만 짚겠습니다. "이미 그분이 현재적 삶의 소명을 완수했기에 더이상 기억되거나 역사하시지 않는 존재란 말이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제가 그렇게 반론을 했습니까? 제가 남긴 글을 다시 인용해보겠습니다.

 [ … "그리스도는 이미 그 책임의 소명을 다하시고 떠난 분"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히 처리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제한적이고 피상적인 기독론에서는 교회의 몸으로서의 그리스도, 세상을 다스리시는 통치자로서의 그리스도, 하나님 나라의 실세적인 왕으로서의 그리스도 개념이 완전히 해체됩니다. … ]

 즉 제가 드린 말씀은 "그리스도의 기억되거나 역사하시지 않는 존재됨"에 관한 문제제기가 아니라 "존재론적 기독론(구원의 주체로서의 그리스도)" 개념이 해체된다는 사실을 짚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라크리매님께서는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엉뚱한 부분만 반박하려 하고 계십니다. 이는 다루고 있는 주제의 차원 차이에서 오고 있기 때문에, 라크리매님께서 제가 말씀드린 "존재론적 주체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해명하시기 전에는 저와 라크리매님 사이의 소통은 계속 막혀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편 리옹님의 댓글 또한 전혀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야기 한 토막에 물고늘어지는 방식의 반론으로 보입니다. 저는 버스 자체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외부-내부 구도를 떠올린다는 건 정말이지 사람 지치게 만드는 논리입니다. "외부는 성공하는데 내부는 실패한다는 논리"는 본인의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지, 정작 제가 드린 이야기와는 아예 거꾸로 파악한 내용입니다. 제가 '내부가 실패한다'고 직접적으로 주장한 적도 없거니와, 피곤할 정도로 다시 강조하지만 밖으로부터 오는 의(義)의 존재론적 주체성이 관건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영성의 심층으로 계속 파고들어가도 모자란데 이런 기본적인 주제에서 계속 변죽을 울린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이제 제 글을 전부 소화하지 못한 채 일부를 떼어다가 꼬투리 잡는 이런 식의 반론은 없는 것으로 여기도록 하겠습니다. 토론에 참여하면서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기 주장만 쏘아붙이는 행동은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 시장바닥 화법입니다. 최소한 퀄리아님만큼의 겸손이라도 지켜주시기 바라며, 저도 결례가 많았습니다. 용서를 구하며….

라크리매

2010.02.11 11:36:45
*.41.16.153

같은 질문을 두번 반복하는 건 의도가 있는거죠 형식적인 질문과 답을 요구하는 질문은 다르잖아요 왜 이런 소통부재가 생겨나는지 분명히 알고 있지만 다시한번 인내심을 내어보죠
일단 말해두고 싶은건 나도 정목사님의 설교비평3권을 읽었고 목사님이 책전체를 통해서 일관적으로 말씀하시는바에 동의한다는 것,그리고 구원이 배타적 주체성(내부가 아닌 외부에서)을 가지고 값없는 은혜라는 점에 이의가 없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군요
그리고 대화를 오늘 다시 한번 더 읽어보니 구원에 대한 생각에 서로 차이가 있어 보이네요

버스상황으로 돌아가보죠
형제가 말한데로 미친운전사를 제지하기 위해서 경철관에게 sos를 보냈고
외부의 돔으로 이문제를 해결했어요 즉,외부로부터 구원을 받은거에요

그런데 이승객들과 목사가 불행하게도 다시 술취한 운전사를 만나게 됬어요(이런 무식한 설정이 나도 싫지만) 자..이럴떈 어떻해야 할까요?

김용남형제

2010.02.11 12:18:01
*.152.12.30

이해가 됩니다. 라크리매님께서는 상황신학적 사회구원을 말하고 계신 반면 저는 조직신학적 칭의-성화 구원론의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애초부터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군요. 전자는 프락시스로서 역사적 콘텍스트가 부각되고 후자는 케리그마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각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문제제기가 필요합니다. 밖으로부터의 도움이라는 게 구원론이라는 이론이나 교리의 틀에만 갇히고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능력이라는 이야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 라크리매님께서 드신 비유의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구원을 두 번 받아야 할 필요성을 시사하는 듯 보이기 때문에 일단 '단번에 얻는 구원'으로서의 정통 기독교 구원론에 어긋나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둘째,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첫번째 상황에서는 경찰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했는데 왜 두번째 상황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인가요? 경찰이 첫번째 상황에서만 살아있고 두번째 상황에서는 다 멸종되었다는 설정입니까? 환언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본질적인 차원에서만 유효하고 실제적인 삶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되는지요? 제가 보기엔 바로 이런 신앙적인 부분이야말로 소통불능의 경계선이라고 봅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내용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늘 변함이 없으시고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제가 본회퍼였다면, 히틀러 제거운동에 나서기보다는 원시 기독교 케리그마에 입각한 '예수 정권' 운동을 펼쳤을 것입니다. 미친 버스기사를 건드리는 방식이 아니라 버스 너머의 상황을 주관하는 통치자에게로 승객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지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솔직히 왜 흔히들 본회퍼의 죽음을 순교로 보는지도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다시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내부-외부 구도에서 내부의 당위론적 방향을 제시한 게 아니라 은혜의 존재론적 주체성을 강조했습니다. 별다른 문제제기가 없는 한 본 꼭지글에서의 제 댓글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라크리매

2010.02.11 12:37:52
*.41.16.153

아니요 나는 상식의 차원에서 말하고 있는거에요
구원을 두번 받아야 할 필요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기 전이나 구원후가 현실의 차원에서 행동하는 것에 어떠한 차이가 있느냐하는 질문인거에요
구원으로 인한 영적인 인식의 변화가 바로 이런 긴박한 상황의 능동적인 행동으로 분명히 이어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다는거죠 상식적인 질문에 엉뚱하게 사랑과 능력을 부정하는 해석으로까지 나가니 나도 여기서 마치고싶네요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방식은 상식의 차원을 위배하는 방식이 아니였답니다.

리옹~

2010.02.11 12:51:19
*.201.17.104

나는 정말 용남형제의 역사 의식이 궁금해요. 
비약적으로 용남형제 집에 강도가 들어와서 가족을 죽일려고 해요.
어떻게 하겠어요? 케리그마에 입각한 행동이 어떤 것인지 정말 궁금해요.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꺼에요.
설령 그것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용남 형제는 어떻게 할런지 이야기 해 주실 수 있나요?

달리는 차에 대해 비유가 적절치 못하다고 한 것을 꼬투리를 위한 딴지라고 폄하 했지요?
과연 그럴까요?

차성훈

2010.02.10 20:54:07
*.44.109.251

0. 논의를 읽다보니까 괜히 <스피드> 영화가 생각나네요. 재미있게 봤는데.
1. 제가 생각하기에 본회퍼(를 위시한 등등)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구원론을 위시한 문제가 아니라, 철저하게 '윤리'에 천착되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싶습니다. 당시의 정황을 고려할 때, 본회퍼의 주된 관심사도 그쪽이었고. 때문에 본회퍼의 예와 본문에서 제시하는 문제 제기와는 좀 핀트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2. "예수를 진짜로 따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해묵은 논의는 아직도 진행 중이긴 한데, 존 하워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이 좋은 답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시드니

2010.02.11 12:13:46
*.214.150.70

김용남 형제의 댓글 중에 "제 경우엔 교회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는 제자들의 모임"이라기보다 "예수의 팬클럽"이라고 생각합니다."에 100% 동의합니다.

이렇게 되면 '제자훈련'이란 고난의 길이 아니라, 신나는 '스타 따라잡기'가 되겠죠.
그의 웃는 것, 그가 춤추는 것을 따라하며, 나는 왜 저렇게 안될까? 그는 정말 끝내주지 않아 ?
이러는게 찬양이 아닐까요?

"그가 이렇게 했기에 나도 이렇게 해야해"라면 부담과 고난의(율법의) 길이 되겠죠.

기본적으로 저는 공 예배가 "팬 미팅"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타가 얼굴을 나타내면 팬들은 꺄오 소리 지르고,기뻐서 날뛰는....
게시와 찬양의 관계.

"목사님들 제발 예배 시간에 하나님 좀 가리지 말아 주세요. 가려서 하나님이 안보여요."

진 예수만

2010.02.11 12:54:49
*.203.204.68

아주 간결하고 현대적 버전으로 알기 쉽게 쓰셨지만,
시사하는 바가 많은 "심각한" 댓글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이렇게 문제점을 알고 있는 크리스찬들이, 도대체 이제부터라도 어떻게 해야만
하겠느냐는 그러한 화두를 꺼내고 논의하는 게 관건입니다. 그걸 등한시 한다면
또한 우리는 신앙적 직무유기죄에 해당될 것입니다.


 

시드니

2010.02.11 13:43:20
*.214.150.70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애초에 팬이 아닌 사람이 팬클럽에 들어와서 고민하고 고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일예배의 설교를 30분에서 2시간으로 늘리면 어떤 반응이 일어 날까요?

배용준의 팬미팅이 1시간 예정에서 3시간으로 갑자기 늘어난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 날까요?  항의가 빗발 칠까요?

팬들이 그 스타처럼 춤울 잘 출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고 싶고, 될려고 연습할겁니다.
얼굴도 그처럼 잘 생기지 못했고, 다리도 팔도 그처럼 길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따라합니다.

당신은 팬입니까? 우리는 팬인가요? 
당신은/우리는 크리스챤인가요 ? ("너의 믿음을 돌아보라")

무엇을/어떻게의 문제라기 보다는,
누군인가(존재)의 문제, 믿음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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