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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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안녕하지죠  벙커원 교회에서  인문학적 성서 읽기 소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정목사님께서 쓰신 '기독교가 뭐꼬?"  지난 주로 끝이 났고 이제  서광선 박사님의

종교란 무엇인가?가 시작되면서  박사님을 초청하여  발제와 논찬  토론시간을 가질려고

합니다.    굳이 책을 안 읽고 오셔도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여하셔도

좋을 것 같아 남깁니다.


2013년  4월 14일(일)   오후 2시  ( 혜화역 4번 출구 앞  영삼성라이프 T 763-2030 2층 세미나실 )

인성모 리더 콰미님이 훌륭한 학자 서광선 박사님을 초대했습니다. 분위기 편승해 저도 오랜만에 영국 에딘버러대학교 유학시절로 되돌아가 보렵니다.  제대로된 대학원 세미나처럼 발제,논찬 그리고 토론 방식의 열띤 세미나가 진행될 것 같은 기대감이 솔솔하네요~ 난상토론의 빗장을 한 번 열어봅니다~

 

 


 

 


 

7장 종교적 상징과 신화

종교와 인간 7장 부분은 폴 틸리히의 두 책, ‘믿음의 역동성’3장 믿음의 상징성과 ‘문화의 신학’ 5장 종교적 언어의 본성이란 두 파트의 내용을 소개하고 서광선 목사님이 논평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일반적인 개관

“인간의 궁극적 관심은 상징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상징적 언어만이 궁극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폴 틸리히의 유명한 언술로 7장은 시작된다. 7장은 6장과 연계해서 이야기 될 부분이기도 하다. 이미 앞장에서 현대 경험주의적 실증론자들의 생각을 언급하며 종교적 언어는 사실을 말하는 경험론 혹은 과학적인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 감정을 표현하며 사람들에게 어떤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정의적(감정과 의지) 표현의 특징을 갖는다고 말했다. 또한 종교적 언어는 독특한 신화, 이야기, 그리고 상징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윤리적 언어와 다른 특수성을 갖는다는 점도 언급되고 있다.

틸리히는 종교적 언어가 상징적이지만 동시에 사실을 말하고 있다며 현대 실증주의자들을 비판했다. 실증주의자들이 규정해 놓은 ‘사실’이란 영역은 풍요로운 인생의 삶의 대부분을 제외하고 단지 논리적인 계산의 영역에만 국한된다는 지적이다. 의미론은 논리적 계산을 넘어 실재를 논해야 된다는 것이 틸리히의 주장이다. ‘문화의 신학' 5장 '종교적인 언어의 본성’에서 틸리히는 ‘사실과 실재’는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차원에서 접근이 가능하고, 종교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차원은 신비와 초월의 차원이며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를 표현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랜달 교수는 종교적인 언어가 갖는 기능은 일상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간 경험의 깊은 차원을 묘사하고 표현하는 것이고 그 언어는 타인에게 이런 경험을 알리고 이해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틸리히 또한 이런 일을 수행하는 종교적인 언어는 상징적인 특징을 갖게 된다고 이해했다. 종교적 차원이 신비의 초월, 궁극적인 인간 차원일 때 이것을 신이라는 상징적언 언어로 표현할 수 있고 그 때의 종교적 차원은 ‘존재 그 자체’이고 ‘신’이란 상징이라고 주장했다.

2 상징과 상징적 언어

2.1 틸리히의 상징적 언어 특징
틸리히의 주장에 의하면 상징 언어는 5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다른 것을 지적하거나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둘째, 상징은 가리키는 그것에 참여한다. 셋째, 개인과 집단의 저의식 혹은 심층의식에서 발생한다. 넷째는 상징은 실재의 좀 더 깊은 차원을 개방한다. 다섯째는 상징은 우리 영혼의 깊은 차원과 국면을 열어 놓는다.

2.2 인간의 궁극적 관심을 표현하는 길은 상징적일 수밖에 없다.
종교적 상징은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으로 대변되는 사실 혹은 실재를 지적하고 대표하며 참여하게 된다. “궁극적인 것에 대해 신 혹은 신이 아닌 그 무엇을 말하든지, 그 말은 상징적이며 어떤 차원의 일부이다”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신은 존재 그 자체이다”는 말 뿐이고, 그 밖의 모든 것, 예를 들어 신의 선하심, 사랑, 거룩, 우주와 인간의 창조와 같은 신학적인 발언은 모두 상징이라고 틸리히는 생각했다. 종교적 상징 또한 일반 상징의 특징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집단적 역사 속에서 형성되고 성장된 심벌이고 인간에게 닫힌 인생과 우주의 차원을 개방시켜 드러내준다고 이해했다.

틸리히에 따르면 종교적 상징이 하나의 상징역할을 벗어나 상징이 지적하는 바로 그것이 될 때 이것은 우상화라고 지적한다. 종교적인 상징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실체인 신은 모든 상징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상징 그 자체가 신성화 혹은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종교적인 상징의 모호성

3.1 일상 용어 사용의 불가피성과 한계
저자는 틸리히의 종교적인 상징이란 개념이 인간의 일상적 언어와 생활에서 만날 수 있는 사물들로 구성되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신의 사랑, 신의 자비와 전지전능, 무소부재에 대한 상징 언어조차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며 경험하는 익숙한 언어이며 이 경험을 신에게 적용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틸리히의 입장이다. 상징 언어를 일상 언어로 불가피하게 사용하지만 이런 상징을 문자적으로 신에게 직접 적용시킬 수 없다는 한계점을 언급한다. 저자는 이런 불가피성과 한계를 틸리히의 종교적 상징 언어가 갖는 긍정과 부정의 양극적인 특징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틸리히의 주장처럼 종교적인 상징 언어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미신이고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3.2 종교적 상징이 모호하다는?종교적 상징의 숙명적 특징
‘신이 나를 벌했다’는 표현에 대한 숙고를 해 보면, ‘아버지가 나를 벌했다’는 인간 경험에서 나온 모델이다. 그러나 신의 벌은 인간이 주는 벌과 전혀 같다고 할 수 없고 신의 벌에 대한 경험에 입각해 인간의 벌을 말할 수도 없고 단지 인간의 벌 경험과 영역을 확대, 초월시킨 것이다. 이런 예가 바로 종교적 상징적 표현이 갖는 숙명적인 특징인 양면성이다. 신의 벌을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만 동시에 적절하지 않는 것이다.

틸리히는 종교적 상징이 모호하다는 이런 숙명적인 특징 때문에 상징은 어떤 경험론적인 비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경험론적인 비판을 받는다고 해도 그 상징의 의미가 상실되지 않기 때문이다. 상징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기 때문에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을 더 이상 자극시키지 못하게 되면 운명을 다하게 된다.

종교적인 상징의 숙명은 땅에서 인간이 사용하는 말로써 하늘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숙명을 극복하려는 이유로 종교적 상징이 하늘의 모든 것을 말한다고 주장하면 그 주장은 독선이며 미신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틸리히의 통찰이라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다.

3.3 상징들과 신화들
저자는 틸리히의 표현을 빌어 신화는 인간과 신들의 만남에 대해 종교적인 상징 언어를 갖고 이야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모든 신화들의 공통점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우주의 역사, 그리고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서 표현한 상징적인 이야기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인간들의 궁극적인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상징화한 것이고 여기에는 인간 실존의 의미와 인간 역사의 뜻에 대해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설명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담겨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종교적인 상징과 신화는 인간의 가장 깊은 의식의 차원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제거할 수 없고 ‘비신화화’란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의 신화는 또 다른 신화로 대치할 수밖에 없다. 고대신화가 오늘 우리에게 무의미한 것은 우리에게 종교가 무의미하고 궁극적인 관심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사를 표현하는 새로운 상징과 신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과 우주에 있는 어떤 뜻을 찾는 동안 신화를 상실할 수 없다. 신화는 한층 구체적으로 묘사된 인간 자신의 실존적인 모습과 인간 사회의 역사이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4. 발제자의 Viewpoint

4.1 틸리히의 신은 인격적인가? 비인격적인가?

궁극적인 실재, 존재의 근거, 하나님 위의 하나님이란 폴 틸리히의 신 개념은 범재신론적인(panentheism) 신이해로 볼 때 실제 피부로 잘 와 닿지 않는 여전히 모호한 형이상학적 존재처럼 느껴지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관념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해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체험으로 경험한 신의 내재적인 특성과 인격성 부분이(상징적인 면일지라도) 잘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인식된다.

4.2 비신화화의 불가능성과 필요성에 대해
고대 신화 이야기에서 문자를 넘어 존재하는 참된 의미 부분을 오늘의 해석학으로 추출해내는 것이 비신화화의 긍정적인 결과물이라고 이해되는데, 비신화화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표현의 의미는 극단적인 비신화화 해석학의 부정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조차도 여전히 신화의 일부분으로 이해한 것인지 이해가 불명확하다.

신화는 실존적인 인간 이야기로 늘 존재해왔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란 것이 틸리히의 입장이고 저자도 이를 지지하고 있는 듯한데(?), 정말 비신화화가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인지, 고대의 신화를 구성한 세계관을 토대로 참된 신화의 의미를 포착해내는 것이 비신화화의 한 특징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필자는 신화란 것이 인간 실존의 이야기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바로 불트만이 주장한 비신화화와 동일한 개념이라고 이해한다. 불트만은 성서의 진정한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신화의 제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신화의 해석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며 비신화화를 주장했다. 불트만에게 비신화화의 최우선적 과제는 하나님의 실재와 실존을 마주하게 하는 것이며 신화적 요소들을 실존적 의미에 따라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폴 틸리히 또한 신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신화들이 신화적인 성격을 가진 것들이면서 동시에 비신화화의 대상들이란 일신주의자들의 신화 비판을 언급하면서 신화가 신화로서, 상징이 상징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의미라면 비신화화는 수용되고 지지돼야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믿음의 역동성 98~99p 참조) 이런 맥락에서 보면 비신화화가 불가능하다는 표현보다는 비신화화를 통해 신화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고 지켜가는 것이 신화와 비신화화의 연속성의 측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신화는 비신화화에 의해서 생명력이 유지된다는 역설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그렇다면 고대인의 신화를 마치 업그레이드하듯이 현대인이 그런 유형의 신화를 계속 지니고 살아야 이유가 있는 것인가? 고대 신화의 참된 의미를 오늘의 현대의 일상 언어와 오늘의 메시지로 추출해 내는 것이 꼭 신화란 방식을 취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신화를 인간의 실존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비신화화의 핵심적인 과제로 본 불트만의 입장으로 들여다본다면 상징과 신화가 인간의 의식 속에 항상 존재하는 형태들이기에 인간의 영적인 삶에서 신화를 소멸할 수 없다는 틸리히의 견해는 현대인들에게 상징의 역할에 대한 연속성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있겠지만 신화에 대한 다른 이해 또한 가능할 수 있을 것 같다.

현대인에게 신화가 아닌 해석학으로 이해한 신학 혹은 신앙의 영역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은가? 예수님조차도 유대교의 구약성서 속의 신화들을 비신화화시켜 재해석한 부분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구약성서에 나타난 신화적인 요소들과 폭력과 살인을 부추기는 듯한 하나님 개념, 유대 율법이 정한 거룩과 사회적인 죄인, 차별, 제사법, 성전 이해... 등에 대한 개념들을 재해석하고 가르쳤다고 이해되는데, 이런 부분들이 비신화화의 특징으로 이해될 수 있지 않은가? 질투하며 폭력적인 인간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신에게 투사시켜 폭력적이고 질투하는 신이란 신화를 만들어낸 부분을 비신화화시킨 측면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들을 해본다.

4.3 전기와 후기의 틸리히의 신학 변천은?

후기 폴 틸리히는 이웃종교의 경험과 종교학자 엘리아데와의 교류와 영향을 받고, 종교학에 대해 이웃종교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를 했다. 물론 서론적인 연구방향만 제시하는 수준으로 일종의 미완의 신학이 되고 말았지만. 인류의 종교사를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과제를 갖고 자연종교와 계시종교를 대조시킨 예전의 구분법을 없애고 보편적인 계시과정의 구성 요소들인 거룩한 것, 궁극적인 것, 경전으로써의 말씀 등을 갖고 작업을 시도했었는데, 만일 그 작업이 어떤 결과물을 도출했다면 종교적인 상징 언어 부분도 다른 차원으로 전개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하게 된다.

4.4 윤철호 교수의 비평

장신대 윤철호 교수는 틸리히는 역사적 회의주의자로 비춰진다고 이해했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란 성서의 상들 사이에 본질적인 연속성이 있으며 신앙의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에 근거하고 있고 전자는 후자의 빛 안에서만 접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틸리히는 불트만처럼 역사적 예수 자체를 거의 포기한 상황에 이르렀고 성서의 모든 상들을 ‘새존재’를 가리키는 상징으로만 해석했기에 윤교수는 틸리히의 새존재 자체는 구체적인 실재라기보다는 관념적인 개념처럼 느껴진다고 비판했다. 틸리히의 믿음(신앙) 개념은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들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고 일반화되고 추상화된 신앙에 근거한 심리적 확신이 투사된 존재론적 철학에서 나온 사변적인 개념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점에 일부분 동의한다.

5 몇 가지 질문

5.1 틸리히 신학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인 입장은 ?

종교와 인간이란 책에서 저자가 인용한 틸리히 두 책에 보면, 종교적인 상징의 모호성 때문에 경험론의 비판을 받을 수 없고, 받는다고 해도 그 의미가 상실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그 예들로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성육신, 성모마리아의 신성 부분을 틸리히가 언급하고 있는데 이런 견해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무엇인지? 종교적인 언어의 상징 이해에 있어 틸리히 신학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인가? 예를 들어 종교적인 언어의 상징성에 대해 비판할 부분이 있다면 어떤 측면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5.2 폴 틸리히 신학에 대한 오늘 현대신학의 평가
종교적인 언어의 상징성과 모호성, 존재의 근거인 궁극적 실체로서의 신 이해에 대한 폴 틸리히의 신학에 관한 오늘 현대신학의 평가는 무엇인가? 저자의 개인적인 입장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profile

클라라

2013.04.12 18:27:49
*.34.116.82

콰미 님,
사진이 배꼽이어요.
<기독교가 뭐꼬?>가 끝났군요.
축하드려요.
이어지는 공부는 <종교란 무엇인가?>이군요.
주제가 흥미롭네요.
가까우면 저도 꼭 참석하고 싶네요.
요즘 잘 지내시지요?
결혼은 하셨는지..^^
민영진목사님께서도 여전히 건강하시고요?
가끔 소식 주시어요. ^^

콰미

2013.04.12 21:22:18
*.77.228.106

네 감사합니다.   잘지내고 있구  민영진 목사님도 가끔 뵙는데 왕성하게 활동중이시랍니다.

네 앞으로  자주 소식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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