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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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초신자로서 교회안의 비합리와 비진리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전해야하나 라는 고민도 해오고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많은 시사점을 주는군요. 이 책은 제 주변의 유물론자들조차 신의 사랑을 다시 생각하게 하니까 좋은 전도서적같다는 생각까지 들게하는 것입니다. 본문 발췌입니다.
T.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강주헌 역, 모멘토 2011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 이성이 곧 광기이다. 전 세계를 자신 아래 굴복시키려는 욕망 아래 이성은 자신의 광기 어린 기획에 반대하는 실재의 저항을 무시한다. 세계라는 신체의 본질에 대한 이런 거부야말로 진정한 광기이며, 실재가 자신의 욕망에 무한히 유순하게 몸을 맡긴다고 상상하며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자는 단지 몽상에 빠져 있을 뿐이다(성스러운 테러, 서정은 역, 생각의 나무 2007, 28~29쪽).”
이글턴은 과학의 이름으로 종교를 몰아내고,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증명할 수 있는 것과 맹목적인 믿음을 칼로 자르듯이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신17)한 도킨스와 히친스의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에서도 그러한 몽상을 확인한다. “현실을 외면한 신화, 그저 믿어버리는 미신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들의 신념, 즉 가끔 겪곤 하는 일시적인 문제들을 제외하면 우리는 꾸준히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이다.”(신97~98) 그것은 단순한 몽상과 광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 ‘위태로운 승리주의’ 혹은 ‘합리적이고 계몽된 이기심’의 귀결은 우리가 매일 겪고 있는 자본주의 현실, 즉 “낭비와 실업, 추잡한 불평등과 대중조작적인 광고, 축적 그 자체를 위한 자본의 축적 따위 온갖 비합리”(신99), “철저하게 합리적인 동시에 엄청난 불합리성의 덩어리”(신121)이다. “계몽주의의 가치와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도 궁극적으로는 바로 이 합리적이고 계몽된 이기심에서 나왔다.”(신99) “지구를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고 그렇게 다루어온 인류에게 끝내 남은 것은 죽어버린 무기물 덩어리 하나에 불과하다.”(신99) 이 광기의 행진에는 제동이 필요한데, 이글턴은 종교를 그 제동장치로 내세운다.
이글턴이 기존 종교의 수치스러운 행태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는 기독교가 “거짓말쟁이 정치인과 부패한 은행가들, 광적인 네오콘들의 혐오스러운 위선의 도구가 되었으며, 교회 자체도 엄청나게 돈을 버는 산업이 되었다”(신80)는 점, “오래전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서 부유하고 공격적인 사람들의 편으로 돌아섰다”(신79)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를 대하면서, 디치킨스(도킨스+히친스)의 야박한 배제방식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야만성과 동시에 그 해방적 힘을 파악해내는 맑스의 본보기를 택한다. 즉 “종교는 오만하게 거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독해야 할 대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독교가 ‘그 혁명적 기원을 누추하게’ 저버리기는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것들을 가르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우선 그는 모든 것을 맹목적 부와 권력의 축적과정에 몰아넣는 지금의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대안적 삶의 모습에 주목한다. “사회주의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이 되는 최상의 이유 중 하나는 의무화된 노동을 싫어하고 미국 같은 나라들에 팽배한 노동의 맹신을 거부한다는 것일 터이다. 진정으로 문명화된 사회라면 해도 뜨기 전에 잘난 사람들이 조찬 모임을 갖는 따위의 일이 벌어지겠는가.”(신22~23) 이글턴은 집도 직업도 재산도 없는 버림받은 자들의 친구였던 예수가 ‘히피와 게릴라 전사를 뒤섞어 놓은 듯한 인물’(신22)이었다고 상상한다.
좀 더 신학적인 측면에서 이글턴은 창조와 하느님의 의미를 인간 이성의 한계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하느님을 ‘초월적 제작자’ 혹은 ‘최고 경영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만물을 지탱해 주는 존재’,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지 않고 뭔가가 존재하는 이유 자체’, ‘모든 실체의 가능성의 조건’이라고 본다.(신18) “창조자 하느님은 연구지원금을 주는 기관을 깊이 감명시키기 위해 지극히 합리적인 설계에 따라 일하는 하늘의 공학자가 아니다. 어떤 의도가 담긴 기능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창조하는 일 자체를 좋아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세상을 만들어낸 예술가이자 탐미주의자다.”(신19) 창조는 “세상이 어떤 앞선 과정의 필연적 결과, 피할 수 없는 인과 사슬의 결말이 아니라는 사실의 증거다.”(신20)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엄격한 인과관계에 대한 비판’이며 ‘자유의 증거’다.(신20~21) 하느님은 ‘도구적 이성에 대한 끝없는 비판자’이다.(신21) “우리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존재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기(또는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신22) 도덕성 또한 우주 자체만큼이나 목적도 이유도 없다.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힘과 역량을 순전히 그 자체로 음미하면서 값지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느냐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외의 어떠한 목적도 기능도 없는 자족적 기쁨의 에너지는 역사라든가 의무, 세계정신, 생산, 효용성, 혹은 목적론 따위의 엄혹한 법정에 서서 스스로를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신26)
합리와 효율의 이름으로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맹목적 성장과 축적 혹은 패권의 논리에 예속시키고 재단하려는 자본의 신에 맞서 사랑의 신을 찾자는 것이 이글턴의 논지이다. 또한 과학을 통해 ‘아직’ 논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논증할 필요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가치의 영역을 인정하자는 취지에도 이의를 달기 어렵다. 자유와 평등, 우애와 인권, 아름다움과 행복 등을 합리적 이성이나 과학으로 논증할 수 있어야 존재가치가 있다고 우기는 것이야말로 비합리적일 것이다. 즉 합리주의가 제대로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자체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셈이다. “증거의 요구는 어느 선에서 끝나야 하며, 대체로 어떤 믿음에 기대면서 끝나게 마련이다.”(신163) ‘합리적인 믿음’과 ‘비합리적인 믿음’을 구분하고(신164) 후자를 비판하는 점에서 이글턴은 여전히 합리주의자이다. 단지 도치킨스 같은 부류의 무자비한 합리주의자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겸손한 합리주의자인 것이다.
“결국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믿음도 사랑의 한 형태다) 낭만이라는 불안정한 매력과 욕망이라는 어수선한 환상을 떨쳐내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거의 불가능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 (… ) 사랑은 미몽에서 깨어난 냉철한 현실주의의 궁극적인 형태이며, 그렇기에 사랑과 진실은 쌍둥이다.”(신160)
“진정한 평등은 모두를 똑같이 대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두의 서로 다른 필요를 고르게 돌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맑스가 기대한 사회도 이런 것이었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 전부가 서로 통약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것들을 모두 같은 잣대로 측정할 수는 없다. 맑스에게 모든 사람은 자기실현의 평등한 권리가 있고 사회적 삶을 형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평등한 권리가 있다. 따라서 불평등의 장벽은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 모든 사람이 가능한 한 각자 독특한 개인으로서 번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결국 맑스에게 평등은 차이를 위해 존재한다(왜 맑스가 옳았는가, 황정아 역, 길 2012, 103쪽).”
나도 이 책을 재미있게 봤는데,
마침 소개해주셨네요.
고맙습니다.